*더위(暑)를 처(處)단한다는 처서(處暑)임에도 혹서(酷暑)가 지랄발광 하는 것을 보고 나도 지랄발광의 마음으로 에세이 한편 써 보내본다오. 더위 처치에 도움이 되시기를!
.....................................................................................................................................................................................................
*오디세우스(Odysseus)의 선택:
예전에 <율리시즈(Ulysses)>[‘Ulysses’는 그리스어 ‘오디세우스(Odysseus)’의 라틴어 버전]란 영화를 재미있게 본 적이 있다. 이 영화는 호머(Homer)의 <오디세이(Odyssey)>를 영화한 것이다. 트로이전쟁을 승리로 끝낸 후 영웅 오디세우스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10여 년의 여정을 그린 서사시이다. 부하들과 바다에서 갖가지 고통과 모험을 겪으며 결국 고향으로 돌아간다. 도중에 오기기아라는섬에 표착(漂着)하여 바다의 요정 칼립소(Calypso)와 꿈같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칼립소는 그를 잡아두려고 온갖 쾌락과 즐거움, 고통 없는 안락한 영생으로 유혹한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그녀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고향 이타카(Ithaca)로 돌아간다. 오디세우스는 영생토록 누리는 쾌락과 즐거움과 안락함보다는 괴롭고 고통스러운 바닷길이지만 사랑하는 아내 페넬로페(Penelope)가 있는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인생은 고통이 끝이 없는 세상--고해(苦海)라는 말은 누구나 입에 담는 처절한 경험담이다. 사람은 이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다한다. 삶의 목표는 고통의 반대인 행복의 추구에 둔다. 사람들은 고통이 없는 ‘행복의 거주지’, ‘가서 살고 싶은 나라’를 현재에서 현실적으로 만들 수는 없지만 상상 속에서 구축한다. 그런 곳을 과거의 한 시점에 상상하는 것이 ‘낙원(paradise)’이고, 미래 언젠가 생길 수 있는 곳으로 상상하는 것이 ‘유토피아(Utopia)’이다. 유토피아는 존재한 적이 없으므로 가능성의 형식으로만 존재한다. 유토피아는 미래에 ‘만들고’ 싶어 하는 이상향의 나라이다. 낙원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있었다고 여겨지는 곳, 그러나 지금은 사라져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서양은 에덴동산, 동양은 도연명의 이른바 무릉도원(武陵桃源)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낙원은 인간이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향’도 낙원의 범주에 든다 할 것이다. 어린 시절은 쾌락원칙에 의해 지배받는다. 어릴 적에 동무들과 마냥 즐겁게 뛰놀던 곳, 현실이 괴로울 때면 떠오르는 곳, 아무리 가난과 궁핍으로 특징 지어진다 하더라도 그 시절을 회상했을 때의 느낌은 기쁘고 반가움이 스며 나오는 곳, 자연과의 교섭을 알뜰히 추억해 내게 하는 곳, 상처나 슬픔조차도 아름다운 곳, 또래들과 공유했던 천진난만한 사무사(思無邪)의 세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게 하는 곳, 즐거움과 행복의 고장,--그런 곳이 바로 마음의 낙원이라 할 것이다.
‘Odysseus’란 이름에는 그리스어로 ‘고통을 생기게 하다(cause pain)’라는 뜻이 있다. 인간의 운명은 큰 바위를 민둥산에 올려놓으려고 끌고 올라가면 도로 굴러내려오는 끝없는 시지푸스(Sisyphus)적 노고이며, 물이 가득 찬 호수 속에 묶여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고개를 숙이면 물이 빠져버리고 하여 갈증과 허기를 영원히 채울 수 없는 탄탈루스(Tantalus)의 애타는 갈증 추구와 같은 것이다. 칼립소를 떠난다는 것은 이와 같은 간난(艱難)함과 고통을 벗어나 안락함과 만족의 자궁 속 같이 편안한 곳을 떠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디세우스에게 칼립소의 유혹은 얼마나 뿌리치기 힘든 달콤한 제안이었을까.
우리의 삶도 거대한 바다 위에서 펼치는 항해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오랜 노력에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상상도 못한 시련을 겪으면서 모든 것이 엉망이 되기도 한다. 시지푸스의 바위처럼 끝없는 헛고생과 탄탈루스의 끝없는 갈증처럼 우리 인간에게 지금-여기의 현실은 언제나 만족스럽지 못하고 벗어나야 할, 바꾸어야 할 불완전성의 장소이다.
인간은 괴로운 고통의 길을 피해가고 싶어 하지만, 모험과 고통의 길은 자신을 가장 뚜렷하게 표현하도록 해주는 길이다. 그것은 정체성(identity)의 형성-확립과 인생에 대한 진실에로의 여정이다. 진실은 인간존재를 충만하고 풍요하게 한다. 괴로움의 고통(troubles, pain)은 겪어내야 하는 것. 우리 안에 내재하는 고통 속의 희망은 맹목적인 낙관주의가 아니다. 희망은 모든 지침이 반대쪽을 가리킬지라도 고통과 싸울 용기를 낸다면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괴롭다고 현실 문제를 외면하면 현실 도피(escapism)적 성향에 끌려 무사안일과 안락함의 함정에 빠진다. 그것은 우리를 망각의 늪에 빠뜨린다. 칼립소가 바다 한가운데의 외딴섬에서 쾌락과 안락함을 누리고 있다는 것은 망각의 영생일 뿐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고통 없음’의 대가는 망각이다. 망각(忘却)이 무엇인가, 어떤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망각이다. 내가 누구였는지 모른다면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망각 때문에 기억(記憶)이 없다면 정체성 또한 없다.
방향 없는 인생의 괴로운 바다에서 길을 잃었을 때 오디세우스의 험난한 방랑길을 통찰해 볼만하다. 익숙함에 머무르는 것은 당장은 편안하다. 그러나 고통을 겪는 과정에서의 변화를 외면하고 거부하면 기회는 사라지고, 결국 생존까지 위협받는다. “그대가 마주칠 수 있는 최악의 적은 언제나 그대 자신이다.”[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생의 의지를 다지는 ‘오디세우스의 선택’은 우리 인생의 여정에 등불을 밝히는 길잡이가 될 수 있으리. 방향을 알 수 없는 인생의 바다에서 길을 잃었을 때 오디세우스의 험난한 방랑길의 선택은 생의 의지를 다지는 길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그러나 항구에 매어 두기 위하여 배를 만드는 사람은 없다.”는 말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이다.
2025. 8. 25.
송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