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 방
경윤선
거울은 사치코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날카로운 비명, 파열, 그 이후의 일들은 침묵 속에서 일어난 것처럼 모든 소리가 완전히 소거되어 있었다. 죽은 듯 누워 있는 사치코, 사방으로 흩어진 유리 파편들. 나는 그 속에서 뒹굴고 있는 작은 못 하나를 주웠다. 뾰족한 부분에 녹이 슬어 있었다. 사치코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붉었다. 귓속이 먹먹했다. 사치코의 이름을 불렀다. 어깨를 흔들었다, 아니.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형체가 없는, 아무것도. 침을 삼켰다, 침을, 삼켰던 것 같다, 그랬던 것 같았다. 벽에 난 못 자국을 올려다보았다. 어스름 속에서도 깊은 구멍이 보였다. 거울은 분명, 있었다. 아니, 있었던가. 거울의 형체가 그려지지 않았다. 테두리가 없는 직사각이었던 것 같은데, 확신할 수 없었다. 사치코가 사라졌다. 그녀가 몸을 뉘었던 흔적만이 있을 뿐, 거울도, 못도, 이제는 보이지 않았다. 거울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아닐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스름했던 창밖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꿈이었을까. 사치코가 덮고 있던 이불을 만졌다. 여전히 온기가 묻어 있었다. 꿈이었을까. 휴대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작은 방 안에 경쾌한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책상 위였다. 거기에 그녀의 휴대폰이 있었다. 귀가 먹먹했다. 현관에는 사치코의 빨간 운동화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다만 거울이 없을 뿐이었다, 그리고. 창문을 열었다. 신호음이 듣기 싫어 폴더를 닫았다. 인도 위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정수리를 쳐다보았다. 머리가 무거웠다.
사내들은 모두 부피가 큰 가방을 메고 있었다. 색 바랜 야구 모자, 헤진 셔츠와 반바지, 종아리까지 오는 긴 양말, 낡고 더러운 운동화. 봄 소풍 가는 어린 아이들의 옷차림처럼, 그러나 굽은 허리와 시꺼먼 피부, 깊게 팬 주름은 그들이 어른이라는 걸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나는 그들 대열의 끄트머리에 서서 느리게 걸었다. 어제와 똑같은 차림의 그들 모습은 언제나 생소했다. 단정하게 빗은 머리, 흰 셔츠와 청바지, 컨버스화, 보스턴백. 텅 빈 눈동자들에 나는 어떤 식으로 비칠까. 누군가 꼬나문 담배에서 연기 한 줄기가 길게 뿜어져 나왔다. 나는 잠시 숨을 참았다. 그저 반사적인 행동이었을까.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단내가 풍기도록 말을 삼켰다. 그들과 나는 늘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만나 같은 곳으로 향했지만 서로가 누구인지, 잘 알지는 못했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바지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만졌다. 이른 아침의 퍼런 공기가 종종 머리통을 쳤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지도, 그리하여 의도치 않게 휴대폰에 손이 닿았던 건지도. 이 모든 행동들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새벽 거리를 깨웠다. 그럼에도 그들의 뒷모습은 여전히 정적이었다. 새벽이 싫은 이유는 너무나 고요하기 때문이라고, 사치코는 말했었다. 소리가 없으면 떠올리기조차 싫은 것에 자연히 생각이 몰리게 된다면서. 떠올리기 싫은 게 무어냐고 물었더랬다. 사치코는 지체 없이 자기 자신을 가리켰었다. 그녀의 가슴을 향해 있는 손가락을 나는 마냥 보고만 있었던가. 소리가 없어도 너는 있어, 라고 터무니없는 말을 했었던가. 어쩌면 자연히 그쪽으로 생각이 몰리는 게 아니라 니가 의식적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어서겠지, 라고 말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소리들이 뭉그러진 채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녀가 사라졌다. 나는 애써 사치코를 떠올렸다.
아찔했다. 하마터면, 심장은 여전히 벌렁거렸다.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층계를 올랐다. 난간을 잡은 손이 떨렸다, 병신같이. 발밑으로 시멘트 가루가 날렸다. 지상의 인부들은 작았다. 사치코는 어디로 간 걸까. 걸음을 멈췄다. 스스로 그런 건지, 몸이 알아서 정지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온몸에서 시큰한 냄새가 났다. 이마의 땀방울이 눈꺼풀로 내려와 자꾸만 시야를 가렸다. 저 아래로 떨어진다면, 내 몸은 박살이 나겠지. 몸뚱이가 부서져도 생각이란 걸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생각의 주체는 누가 될까, 나, 일까, 그때의 나는, 누구일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지러웠다. 사치코는 지금쯤 집에 돌아와 있을지도 모른다. 어젯밤 설거지한 그릇들을 꺼내어 다시 닦고 있거나 혹은 가만히 앉아서 음악을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 방에 있었을지도, 아니, 없었는지도. 뒤에서 빨리 가라며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텁지근한 날씨, 숨이 막혔다.
여기 눈썹 위의 상처는 네 살 때, 그네 타다가 앞으로 고꾸라져서 생긴 거래, 누가 뒤에서 밀었다더라, 밥 먹을 때마다 쩝쩝 소리 낸다고 할머니한테 엄청 구박 받았댔어, 그래서 툭하면 머리통을 쥐어 박혔다고. 여섯 살 땐가, 옥상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적도 있댔어. 참 극성맞은 여자애였지. 중국인들은 저희들끼리 대화했다, 낮은 목소리로. 나는 그들 곁을 지날 때마다 바짝 귀를 기울였지만 타국의 언어를 알아들을 리 없었다. 간혹 그들 입에서 한국말이 툭 튀어나올 때면 이질감을 느꼈다. 낯선 억양은 오히려 나를 이방인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내 기억은 거의 다 아버지로부터 들은 것들이야, 난 하나도 기억나는 게 없어, 자잘한 상처들은 많은데, 왜 다친 건지, 어째서 다친 건지, 할머니는 어떻게 생겼더라, 자니,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야?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니 손목이랑 손가락에 있는 상처의 기억은 또렷하잖아, 그렇지 않니? 지게에 벽돌들을 실었다. 어깨에 메려고 끈을 잡았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오늘따라 관자놀이의 지끈거림이 심했다. 기억에 없는 상처들처럼 두통도 그렇게 내 몸에 자리 잡은 모양이었다. 몸뚱이가 없다면, 감각 따위. 관리실 아저씨가 나더러 한국말을 잘한대. 두 뺨이 뜨거웠다. 나는 그늘을 찾아 걸었다. 본능일까. 내가 일본인으로 보이니, 한국인으로 보이니. 정신이 꺼져버린 몸뚱이도 아픔 따위는 모르겠지. 사방이 시멘트 가루로 도배된 듯 뿌옇게 흐려 있었다. 몸속에서 열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당장 자연발화 되어 사라진다 해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았다.
사치코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어디에도 거울에 부딪힌 흔적은 없었다. 나는 산산이 부서져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한데로 모았다. 내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서슬이 간혹 손끝을 찔렀다. 모인 조각들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통각이 마비된 걸까. 손을 들어 올렸을 때, 파편은 없었다. 그녀 또한 없었다. 환각. 내가 보았던 것, 내가 느끼지 못하는 것, 무엇이 진짜일까. 없는 사람 같아. 무슨 소리야. 사치코는 자기 자신이 의심스럽다고 했다. 아무 것도 없어.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사람들은 나를 보지 않아, 아니, 못하는 거겠지. 그녀는 멍하니 밥상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정말 없는 사람인 걸까.
세탁기 안에 구겨진 작업복을 밀어 넣었다. 동작 버튼을 누르자 수돗물이 쏟아져 내렸다. 이내 드럼통 돌아가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나는 빠르게 회전하는 옷가지를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흰색 티셔츠와 검은색 바지가 서로 뒤엉켜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두 색은 기어이 섞여버렸다. 원체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이것도 저것도 아닌. 소리는 점점 내 귀를 좀먹어갔다. 덜컹, 소리에 귀가 장악 당하자 온몸이 마비된 듯했다. 듣지 않으려 거부하면 할수록 더 또렷이 박혀올 뿐, 귀를 막아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듣고 있는 이 소리는 무엇일까. 난 지금, 뭘 하고 있나. 움직일 수 없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 생각과 동시에 소리가 멎었다. 내 손이 정지 버튼 앞에 있었다. 옷은 다시 분리되었다.
조그마한 화장실 바닥에 사치코가 웅크린 채 앉아 있다. 세탁기 있잖아. 열중한 탓인지 나를 보지 않는다. 어깨를 잡자 그제야 등을 돌린다. 양손에 내 작업복을 들고 있다. 사용법 잊어버렸어? 사치코가 웃는다. 이게 편해. 잿빛 거품, 하수구로 흘러가는 모래알들. 사치코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를 가만히 바라본다. 청승맞아 보여. 들고 있는 옷을 빼앗으려 하자 손아귀에 힘을 주고 버틴다. 연붉은 물줄기가 내 손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토록 힘이 셌던가. 나는 그녀의 하얀 팔뚝에 도드라진 푸른 핏줄을 본다. 힘껏 옷을 비틀어 물기를 짜낼 때 그것의 색은 더욱 선연해진다.
지금 안 해도 되잖아. 텔레비전 위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던 사치코가 손을 멈춘다. 그녀의 콧등이 반질반질하다. 난 이 시간에 늘 해오던 걸 하는 것뿐이야. 오전 열한 시 사십사 분. 사치코의 왼손에 들린 물티슈가 더럽다. 에어컨을 작동시킨다. 볕뉘에 흩날리는 먼지가 보인다. 그녀가 쓰레기통을 향해 물티슈를 던진다. 나는 다시 컴퓨터 쪽으로 몸을 튼다. 모니터 가득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가상공간이 펼쳐져 있다. 그 속에서 내가 만들어낸 캐릭터가 스스로 움직이고 있다. 걷고 뛰고 방어하고 공격하고. 누가 너를 조정하고 있는 것일까. 자동 공격으로 설정해둔 탓이라고, 그런데, 이 답답하고 공허한 느낌은 대체 뭘까. 모니터를 만져본다. 판판한, 저 안에 있는, 또 다른 세계, 가상의, 그러나 가상 같지 않은. 무엇이 가상이고 무엇이 아닐까. 영화 볼래? 저것이 현실이라면 현실일 테고, 이것이 가상이라면 가상일 테고. 안 볼 거야? 등으로 느껴지는 촉각에 뒤를 본다. 영화 보자고. 사치코가 아까부터 저 말을 했던 것도 같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게임을 종료시킨다. 2D의 바탕화면이 사라진 3D 공간을 채운다. 음악 듣고 싶어. 내 말에 사치코가 바닥에 몸을 누인다. 나는 인터넷 아이콘을 더블클릭한다. 즐겨찾기를 해둔 음원 사이트로 들어가 '나의 앨범'을 선택한 후, 전체 듣기 버튼을 누른다. 그녀의 옆에 눕는다.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오산역에 갔었어. 역시나 허허벌판이더라. 버스를 기다리면서 사방을 둘러봤지. 낯설었어. 어딘가 변해 있었지, 어디였을까. 내가 어려서부터 나고 자란 동넨데, 아니지. 내가 태어난 곳은 그곳이 아닐지도 몰라. 난 내가 태어난 곳을 몰라. 내 고향은 어딜까. 일본, 아니면 한국. 그것조차도 알 수가 없어. 버스를 타고 예전에 살던 동네에 내렸지. 그게 끝이었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더라구. 여기가 내가 살던 그곳이 맞나. 멍하니 서 있다가 같은 버스를 타고 다시 오산역으로 왔어. 햇볕은 몹시도 뜨거웠지. 자꾸만 땀이 났어.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걸까, 무엇 때문에. 역 안으로 들어가는 길에 분향소를 발견했어. 49제라고 했지. 향을 올리고 절을 했어. 영정 사진이 나를 보며 웃고 있었지. 그런데 그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 건지, 그게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지금 내 앞에 있는 저 분향소가 허상인 건지, 알 수가 없었어.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겠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아. 참, 내가 오산역에 갔다 왔었다고 말했니. 아니야, 어쩌면 그게 꿈일지도 몰라. 나는 서류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어디에도 없는 거잖아.
눈꺼풀, 속눈썹, 깜박이는 사이로 보이는 건 어스름밤이다. 굿바이 굿바이 굿바이,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치코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온전히 눈을 뜬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뿐인데, 낮은 밤으로 바뀌어 있다. 보컬의 나른한 보이스가 여전히 방 안을 떠돈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보이스다. 몸이, 무겁다. 목구멍에 무언가가 걸린 듯 묵직하다. 에어컨 때문일 거라 짐작해본다. 일부러 기침을 밭는다. 일어났어? 렌지후드의 전등을 켠 채 요리를 하는 사치코의 등을 바라본다. 옅은 주황색 불빛이 그녀와 그녀의 주변으로 조용히 내려앉아 있다. 여섯 시 이십일 분. 휴대폰 액정 빛이 너무 밝다. 뭐 만들어? 사치코는 끼니를 거르는 법이 없다. 다 됐어, 조금만 기다려.
모니터 불빛이 사치코의 얼굴을 비추고 있다. 낯빛이 더 창백해 보인다. 천천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 스피커에서 나직이 흘러나오는 음악. 블로그에 일기를 쓰는 중이겠지. 자꾸만 눈이 감기려 한다. 눈꺼풀이 내려올 때마다 까만 장막 속으로 붉은 잔영이 나타난다. 사치코의 옆얼굴에 집중해본다. 간간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녀의 입술을 본다. 졸음을 쫓으려 기지개를 켠다. 발끝에 닿는 건, 바닥에 고인 물, 미지근하다. 건조대에 널린 작업복은 아직도 마르지 않았다. 내일은 다른 걸로 가지고 가. 일어나 앉아 덜 마른 옷소매를 쥐어본다. 어깨 부분에 쇳물이 들어 있다. 버릴 옷이 있나. 노래는 이미 끝났다. 사치코가 옷장 서랍을 연다. 그녀가 있는 방에는 침묵이 존재하지 않는다. 귀퉁이마다 배어 있던 음식 냄새가 서서히 옅어져 간다.
삭제, 당한 거야, 내 기억을, 시간을, 내 의지 없이. 그렇지 않아, 사치코는 똑같은 말만 되풀이 중이다. 그 반복으로 인해 내가 또 읊조리듯 혼잣말을 했다는 걸 알았다. 나는 다시 앨범을 들여다본다. 낯선 시간들의 순간들 속에서 갓난아기가 잠들어 있는 사진, 그것을 짚는다. 오른쪽 하단에 찍혀 있는 주황빛 숫자들, 주민등록번호 상의 내 생년월일은 86년 4월 30일. 입속으로 삭제라는 말을 중얼거려 본다. 단어의 둔탁한 울림이 생소하다. 카메라가 고장 났거나, 날짜를 잘못 설정해놨을지도 모르잖아. 사치코의 위로는 나에게 위안이 된다. 육아수첩에도 84년이라고 적혀 있다구. 나는 어떤 치기를 부리고 싶은 걸까. 간호사가 실수한 거겠지. 나는 2년이란 시간을 도둑맞았어, 누구에게서, 왜. 내 삶의 어느 시점에서 나는 그대로 멈춰 있어야 했을까, 성장하지 못한 시간. 굿바이 굿바이 굿바이, 사치코가 노래를 부른다. 어쩌면 2년 동안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었는지도 몰라. 혹은 갓난아기인 채로 2년을 더 살아냈는지도 모르지. 몸이 몹시도 아팠던 건 아닐까,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처럼, 그래서 출생신고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2년을. 내 출생 자체가 어째서 기형이었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횡설수설 떠드는 건, 글쎄. 넌 고작 2년일 뿐이잖아. 사치코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헝클어진 머리를 풀어헤치고 빗질을 한다. 나는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응시한다. 빛을 등지고 있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 너에 비하면 난
사치코가 검지로 가리킨 곳에 달이 떠 있다. 채 차지 못해 불완전한 달이다. 뿌옇다. 내일 비가 오려나봐. 그럼, 일 안 나가도 되겠다. 달빛이 은은하다. 그 빛을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 창밖의 모텔 건물 네온사인은 사방으로 퍼졌다 수그러들기를 반복한다. 나도 일을 하고 싶어. 사치코는 이력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그마한 식당에서 주방 일을 해본 게 전부라고 했다. 돈은 나 혼자 벌어도 충분해. 저 네온사인처럼 달도 차고 기울기를 지겹도록 반복해댈 테지.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야. 그게 이치라고 말하려다, 그만 두었다. 어렸을 때 말이야,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 그때는, 내가 존재하는 줄만 알았으니까. 달을 바라보는 사치코의 눈이 젖어 있다. 네온등이 꺼질 때마다 눈가에 음영이 진다. 음영은 곧 기괴한 그림자가 되고, 얼굴을 파리하도록 창백하게 만든다. 나는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아니, 떠올린 건지, 떠오른 건지, 그건 알 수 없다.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린다. 어쩌면 비는 안 올지도 몰라. 그래. 달무리를 보지 않으려 눈을 감는다.
사이렌 소리가 멀어져 갔다. 환청으로 남았을 땐,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 건지 짐작해볼 여유조차 없었다. 울퉁불퉁한 바닥의 핏자국을 망연히 바라보는 것 외에 나는. 누군가 그것을 발끝으로 문댔다. 십장은 인부들에게 오늘은 그만 해산하라고 말했다. 목소리가 웅웅, 귓가를 맴돌았다. 옷을 갈아입는데 손이 떨렸다. 비명 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맴돌았다. 팔뚝 털이 쭈뼛 서버렸다. 뼈를 에는 서늘함이 싫었다. 그러나 나는 내 몸의 감각들을 저지할 수 없었다. 소매 끝에서 섬유유연제의 향이 옅게 풍겨왔다. 거기에 오래도록 코를 박았다. 인부들은 침울해 보였다. 아니, 저건 슬픔도 무엇도 아니다, 아무것도. 없었다, 표정 따위. 그들이 우울해 보이는 건 나의 착각일 테지, 누군가의 추락, 어쩌면 죽음, 때문에 응당 그러하리라 여겨지는. 어쩌면 저것은 내가 직접 바라다볼 수 없는, 지금의 내 얼굴일지도 혹은, 지금의 내가 슬픈 표정을 짓고 있길 바라는 내 바람의 대체물일지도. 떨리는 두 손을 맞잡았다. 밖으로 나왔다. 햇볕이 뜨거웠다.
낯선 거리, 걸음을 멈췄다. 어디로 가려했던 걸까. 어디까지 가려했던 걸까. 두 발을 내려다보기만 할 뿐, 내 것이 맞는데, 왜 걷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구의 의지로 걷고 있는 건지, 그 역시도 알 수 없었다. 목적지가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여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지. 거리는 한산했다. 내 그림자는 짧았다. 길 건너편에 연분홍빛 양산을 쓰고 걸어가는 여인이 보였다. 여름날, 아니 애잔한 봄날 같았다. 하지만 나는 뜨거웠다. 그리고 추웠다. 목덜미의 땀을 닦아낸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도로 위의 차들은 천천히 굴러갔다. 집으로 갈 계획이었다.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왜 나는 여기에 서 있는 걸까. 희한하게도 간판들이 낯익었다. 낯섦과 낯익음이 공존하는 이 거리에서 내가 어떤 기분에 휩싸여 있는지, 너는, 알까.
신호음이 길었다. 결국, 소리샘으로 연결됐다. 어디 있니. 뱉어내지 못한 말들은 여백으로 남았다. 침묵 끝에 별표 버튼을 눌렀다. 전화번호부의 목록을 아무리 뒤져봐도 연락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기계 속에서 늘 흘러나오던 노래는 제목을 알 수 없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젠 너뿐이야, 너무 썰렁한데. 휴대폰에서 그의 이름을 삭제하며 사치코는 말했었다. 내 아버지가 아니었나봐, 역시. 사치코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었다.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도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무슨 일로 왔느냐고 그가 재차 물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복, 제복, 제복. 그제야 내가 경찰서 안에 있다는 걸 알았다.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게 다였다. 나의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내 생각과는 달리, 나는 돌아서고 싶었다. 그가 혀 차는 소리를 해댔다. 등허리가 서늘했다. 용건이 없으면 나가달라는 말을 누군가가 던졌다. 그 이후로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무성영화처럼, 그들의 움직임만이 있을 뿐. 제복이 다가왔다. 배지가 눈앞 가까이에 있었다. 사치코가 사라졌노라고, 목구멍까지 차오르던 말은 참았다. 무엇으로 그녀의 존재를 증명해보일 수 있을까. 생김새, 성격, 취향, 취미, 이런 것들이 그녀를 설명할 수 있을까. 아무리 열심히 말해본댔자 그들은, 단 한 번의 신원 조회로 사치코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할 테지. 그런데 내가 사치코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긴, 한가. 나를 꺼내 보일수록 오히려 난, 사라져 갈 뿐이야. 사치코의 얼굴을 만졌다. 그럼 내 앞에 서 있는 너는, 누구니. 그녀가 쓰게 웃었다. 제복들이 흐려졌다. 나는 그만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발을 뗄 수 없었다. 한낮, 눈을 뜬 채로 가위에 눌려버렸다.
열려 있는 창문을 올려다보면서 내리 두 개비의 담배를 피웠다.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가로수 둥치에 방치된 쓰레기봉투에서 역겨운 냄새가 풍겼다. 길 건너편의 모텔 네온등을 바라봤다. 분명 켜져 있는데, 흐렸다. 발 앞에 떨어진 꽁초를 비볐다. 담배를 사기 위해 편의점에 들어간 건 아니었을 거라고,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물을 마시고 싶었던 거고, 그래서 편의점 문을 열었던 거고,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와 카운터 앞에 섰을 때, 점원 뒤로 보이는 담배 진열대에 잠시 눈을 두었을 뿐, 그게 화근이 된 것뿐이라고. 그게 아니라면 무엇이. 어찌됐든 금연을 하겠다던 계획은 무산됐다. 고작 일주일도 못 버티고 담배를 문 나를 그 사람이 본다면 필시, 한심하다 했겠지. 일곱 시 이십삼 분, 밝은 하늘에 떠 있는 달이라니. 밤이라는 단어가 생경스러웠다.
부재중 전화 네 통, 음성 메시지 한 통. 사치코의 운동화마저 사라졌다. 허허로운 현관 바닥이 낯설었다. 이렇게 하나씩, 지워져 가는 건가. 어둑한 방에 누웠다. 창밖은 밝았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극명한 명암 차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노래를 불렀다. 제목은 떠오르지 않았다. 어째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건지, 그 까닭도 몰랐다. 손가락으로 바닥을 두드리며 리듬을 탔다. 흐릿한 소리가 방 안을 메워 갔다, 텅텅. 소리가 커질수록 손가락에 닿는 바닥의 감촉이 사라져갔다. 내가 움직여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인지 타의에 의해 만들어져 들려오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어둠이 더 가까이 내려앉았다. 소리의 출처는 더 불분명해졌다. 두통이 몰려왔다. 지금쯤 나는 통증 때문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으려나. 아프다는 것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 집중했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디선가 사이렌이 울렸다. 귓속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경박함, 소름이 돋았다. 누가 저 차에 실려 가고 있는 것일까. 바닥을 더듬어 휴대폰을 찾았다. 이대로 눈을 떴을 때, 내 앞에 니가 있어 준다면, 니가 노래를 불러준다면. 산소 호흡기를 한 사치코의 얼굴을 상상했다. 아니, 내 스스로 떠올린 건지, 나도 모르게 떠오른 건지, 그건,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들것에 누워 있다. 교통사고일까. 슬라이드를 올리자 눈두덩을 훑고 가는 짧은 빛이 느껴졌다. 단축키를 눌렀다. 그래, 너에 비하면 난, 행복한 편이지. 벨소리는 이제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눈을 뜨지 못했다. 눈을 떴음에도 뜨지 않았다고 느끼는 건 아닐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오래도록 맞았다. 손끝으로 비누거품을 건드렸다. 자신의 긴 머리카락으로 거품을 묶던, 그러나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떤 영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수도를 잠갔다. 추웠다. 사치코는 어디로 간 걸까. 여자는 보이는 것마다 끈으로 묶어버렸다. 남자에게 자신을 묶어달라고도 했다. 그렇게 해서 묶일 수 있는 게, 있긴 할까. 나는 앞머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바라봤다. 팔뚝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봤다. 투명한 물이 내 몸을 그리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나를 붙잡고 있는 듯했다. 수건은 없었다. 선반에도 없었다. 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입을 열었다. 사치코, 수건 좀. 우스웠다.
그녀가 고개를 젓는다. 잘못 읽은 건가, 행자(幸子), 그녀가 휘갈겨 썼던 한자를 다시 쳐다보지만, 모르겠다. 행자, 맞는 것 같은데. 나지막이 무어라 내뱉는다. 뭐라구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본다. 사치코. 제대로 알아들은 게, 맞다. 일본인이에요? 그녀가 나를 본다. 대답이 없다. 모르겠어요. 애매모호한 대답에 내가 인상을 찡그렸던가.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다. 그녀가 돌아선다. 나간다. 자동문이 닫힌다. 기분이 찜찜하다.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온다. 작은 키, 어깨를 움츠리고 있다. 여느 때처럼 직원들이 쑤군댄다. 여느 때처럼 그녀가 서성인다. 저러다 그냥 갈 거면서 왜 또 왔담. 몇 살일까. 이상한 여자야. 이십대 중반, 후반. 까무잡잡한 얼굴과 빨간색 티셔츠가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처음엔 벙어린 줄 알았다니까. 어쩌면 나보다 어릴는지도 모른다. 일본인이래. 사람들이 구청에 오는 이유 중의 대다수는 주민등록등초본 따위의 서류를 떼기 위해서다. 그녀는 무슨 일로 구청에 오는 걸까, 매일같이. 누군가 내게 주민등록증을 내민다. 67년 생, 고개를 든다. 그 사람은 아니다. 낯선 중년의 남자다. 그에게 등본을 발급해준다. 일은 어렵지 않다. 가끔, 지겹다, 지루하다. 무엇 때문에 구청에선 아르바이트생을 쓰는 걸까. 그녀가 나를 본다.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난사이데쓰까. 그녀가 웃는다. 비소다. 발음이 이상했던 걸까. 병신, 병신 같다. 배운 지 몇 해도 더 된 일본어를 더듬더듬 떠올리며 말하는, 저 일본어 못 해요. 더, 병신 같다, 자조. 뭐라고 한진 모르겠지만. 무턱대고 따라 나오는 게 아니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를 왜. 대답할 수가 없어요. 나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두 뺨이 뜨겁다. 더워서겠지, 초여름. 소매를 걷어야겠다. 나도 모르는 것투성이니까. 저 여자의 눈에는 내가 보이겠지. 그러나 나는 나를 볼 수 없다. 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가 없는 걸까. 저 눈 속을 들여다보면 내가 보이려나.
라이크 어 섹스 머신이 입에 배어버렸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치코는 결국 슬라이드를 내려버린다. 툭, 끊긴 음악. 그녀의 아버지, 어쩌면 아닐지도 모를 그는 오늘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가 평소에 즐겨 불렀다는 노래를 계속해서 흥얼거리자 그녀가 내 무릎을 친다. 나도 부르고 싶어서 부르는 게 아니라구. 언젠가 제임스 브라운이 <섹스 머신>을 부르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던 그, 그 모습이 몹시도 자연스러워서 마치 그의 몸속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음악이 그를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그것은 그의 의지였을까, 음악의 의지였을까. 후자라 해도 춤을 추는 건 그, 그런 그를 주체라 부를 수 있을까, 없을까. 마이클 잭슨은 춤을 출 때 생각하는 것은 가장 큰 실수라고 했다. 생각을 묶고 춤을 춘다는 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거지. 그저 음악에만 빠져 있는, 완전히 몰입하는 것을 말하는 건가. 그때의 인간은 정말 생각이라는 자체를 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입속으로 계속해서 노랫말을 중얼거리고 있다. 노래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니다.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면 나의 뇌는 거기에 반응한다. 그런 것 같다. 그리고 곧 순응한다. 그런 것 같다. 그때의 나는, 나일까.
내 집을 쓰도록 해. 그녀가 나를 본다. 보증금도 다 까먹었다면서. 넌 내가 의심스럽지도 않니. 왜 그래야 하지? 모든 사람들이 날 그런 눈으로 쳐다봐. 니 마음이 불안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야. 그렇지 않아. 길거리에서 잘 참이야? 신세지고 싶지 않아. 나중에 갚으면 되잖아. 난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사람이야. 아니, 사람이라고도 할 수 없어, 대체 난, 뭐지. 그럼 지금 난, 누굴 보고 있다는 말이니.
영화는 끝났다. 그녀와 나는 나란히 바닥에 누웠고, 나는 가만히 천장을 쳐다보았으며 형광등 불빛에 눈이 부셔했고, 그 때문에 눈을 깜빡거렸고 그 사이로 흘러드는 잔영을 떨치려 애쓰는 중이었다. 그러한 일련의 행동들 사이로 나는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었을지. 영화 속에서 봤던 나비를 떠올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여주인공이 회상하던 어린 시절의 그 나비를. 잔영은 어쩌면 나비였을 것이다. 그녀는 나지막이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다, 눈을 감은 채로. 무슨 생각해. 저 감은 눈 속의 상념들,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스치듯이 떠올리는 소소한 것들, 그것을 조종하는 그 무엇. 이어지지 않는 나의 문과 그녀의 답 사이가 몹시도 길다. 여전히 눈앞에서는 잔영이 거치적거리고 있다. 손으로 눈을 가린다. 나도 가슴에다 문신을 새기고 싶어.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도 잠잠하여 환청인 것만 같다. 마치 혼자 있는 듯한 느낌에 옆을 돌아본다. 그녀가, 있다. 다시 눈을 가린다. 어떤 문양이 좋을까. 나비는 어때. 아편소굴, 허름한 병원, 늙은 시술가의 섬세한 손놀림, 소녀의 여린 가슴, 그 위로 새겨지던 호랑나비, 반복해서 영화의 한 장면이 짤막짤막 떠오른다, 떠올린다. 내 이름은 아게하가 아니잖아. 그러네, 그럼.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몇 시간 전에 보았던 영화의 장면들, 그리고 몇 개의 대사들, 내 이름은 왜 사치코일까. 그녀의 가슴에 새길 문신의 모양, 또 아니면. 행복은 가슴에 새기기엔 너무 추상적이라구. 그러네.
나를 쳐다보는 것으로 사치코는 물음을 대신한다. 촌스러워. 그녀가 형광체 같은 주황색 시장바구니를 들어올린다. 왜, 눈에 띄고 좋잖아. 사치코가 마트에서 나온다. 오른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있다. 부피가 크다. 형광체 같은 주황색이다. 나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사치코는 장바구니를 옆구리에 끼우며 운동화를 신는다. 확실히 튀긴 해. 방바닥에 엎드려 뭉그적대는 나를 일별한다. 일부러 그걸 고른 거지? 운동화 끝을 바닥에 툭툭, 갔다 올게, 문이 닫힌다. 현관 바닥에는 오롯이 내 신발만이 남는다.
사치코가 내 어깨를 주무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우리는, 마주보고 식사를 한다. 왜 그러냐, 정말. 나도 모르게 짜증을 내버렸다. 이게 더 편하단 말이야. 사치코의 손에 들린 작업복을 거칠게 빼냈다.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그녀의 얼굴에도. 무심히 나를 응시하는 시선을 피했다. 나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는 말은 거짓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손가락은 단단하다. 뭉쳤던 어깨가 조금씩 풀리는 것 같다. 내가 욕을 했다고? 그녀의 추궁에 아니라고, 단호히 말했다. 그녀가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방금 전의 일을, 내 입으로 한 말을, 설마 내가, 모를 리가 없잖, 사치코의 입술에서 배나오는 핏방울 때문에 어지러웠다. 내 기억이 잘못된 걸까, 머릿속이 복잡한 회로로 엉켜버린 것 같았다. 니가 침묵하는 게 싫어. 그녀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집에 들어가. 싫어. 아직도 어리다며, 사치코가 핀잔을 놓는다. 다시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니. 영화 찍고 싶다고 했잖아. 대답하지 않는다. 사치코가 쓰게 웃는다. 공원은 조용하다. 내가 아기를 낳으면, 그 아기의 엄마는 누가 될까. 어디선가 굴러온 축구공을 그녀가 들어올린다. 나는 우리를 향해 뛰어오는 사내아이를 본다. 누가 되든, 타인일 뿐, 그들에게서 강제로, 아기의 기억은 삭제 당하겠지. 아이의 얼굴이 상기돼 있다. 나도 저런 표정을 한 적이 있었을까. 그녀가 공을 내민다. 아이가 꾸벅, 인사한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름이 써진 공을 받아들고 달려간다. 고개 숙이고 들어가면 못 이기는 척 받아줄 거야. 아이의 아버지인 듯한 사내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남의 집에 내가 왜. 내 기억을 지워버린 사람들. 후회할 걸. 나를 완전히 잊어버린 사람들. 실은 돌아가고 싶은 거지? 뭐가 아쉬워서. 사치코가 앞서 걸어간다. 그 집에서 난 언제나 없는 사람이었어. 그녀의 걸음이 느리다. 이력서를 쓸 때마다 가짜 주민번호를 적고 거짓 이름을 써. 어제는 김미선, 오늘은 이연희, 내일은, 내일은 또 누구의 이름을 빌리지. 나는 멀어져가는 사내와 아이를 본다. 내 이름은 어째서 사치코일까. 음울한 목소리가 넌지시 다가온다.
음악도 없이 춤을 춘다. 이마에는 벌써 땀이 맺혀 있다. 아래층에서는 무언가로 천장을 쳐대는지 바닥이 울리고 있다. 그녀는 멈출 생각이 없는 듯하다. 쿵쿵 소리가 거치적거린다. 뭐가 좋아서 웃니. 여전히 웃을 뿐이다. 아랫집 여자가 올라올지도 몰라. 올라오라고 해. 지금 너를 바라보고 있는 내 표정은 어떨까. 얼른 와서 내 얼굴을 보고 내 이름을 좀 물어봐줬으면 좋겠어. 그럼 당당히 사치코예요, 하고 한국말로 말해줄 텐데. 호흡이 가쁜 듯, 불규칙적이다. 나한테 단 한 번도 말을 걸어오지 않더라. 내가 일본말을 할까봐 두려운가봐. 왈츠를 추는지 이제는 4분의 3박자에 맞춰 스텝을 밟는다. 누군가의 허리와 어깨를 잡은 듯 두 팔은 곡선을 그리고 있다. 쿵쿵 소리가 잦아든 침묵의 공간에서 너는 어떤 왈츠 곡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걸까. 그녀가 나에게 손을 내민다. 같이, 추지 않을래?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는다. 그런 너를 보면서 나는 어쩌면 고개를 저었는지도 모르겠다. 망설이느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는지도 모르지. 두 눈을 감은 채 원을 그린다. 여긴 원래 그런 사람들뿐이야. 내가 입속으로 말했던가, 입 밖으로 말했던가.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하얀 수건이 빨갛게 물들어간다. 사치코의 입에서는 신음 하나 새나오지 않는다.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는 내 두 손 사이로 핏물이 보인다. 아프다는 건 존재한다는 걸 텐데, 어째서 난. 생기 없이 웃는다.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한데,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샴푸를 채 행구지 못한 내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진다. 수돗물 흐르는 소리가 열린 문 사이로 흘러나온다. 입 벌린 가위의 서슬이 여전히 서늘하다. 아프다는 말, 진짜 아파, 그래서 싫어. 목이 잠겨 있다. 그 말을 대신 할 수 있는 말은 없을까. 이제 그만하라고 말했었다. 사치코는 울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내가 없는 것 같단 말이야. 곧 없어질 것만 같다구. 이프다는 말 어때. 내 몸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그녀의 피와 섞인다. 뭐, 이쁘다고. 그녀가 웃는다. 아니, 웃지 않는다.
일터에 나가지 않았다. 비가 오는 건 아니었다. 휴대폰은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창가 앞에 턱을 괴고 앉았다. 맨눈으로 개기일식을 봤더니 짙은 잔영이 자꾸만 눈앞에서 알짱거렸다. 인도 위에는 사람이 없었다. 차도 위로도 지나다니는 자동차 하나 없었다. 한낮은 전혀 역동적이지 않았다. 담배를 빼 물었다. 불은 붙이지 않았다. 실눈을 뜨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도 눈이지만, 목이 아파 금세 고개를 떨어뜨렸다. 빈 상자를 질질 끌고 가는 노인이 보였다. 제 몸보다 큰 상자였다. 비둘기 두서너 마리가 차도 위를 걸었다. 창틀에 머리를 댔다. 내 몸이 의자에 앉아 있다고 생각했는데, 바닥에 무릎을 대고 있었다. 창문이 이렇게나 낮았던가. 잠깐 졸았던가 보다고, 그리 여기기로 했다. 트럭 한 대가 지나갔다. 비둘기들이 푸드덕 날았다.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천장이 몹시 좁았다. 내 몸을 누인 방은 넓었다. 방금 전까지 보았던 전경들이 오늘의 일인지 어제의 일이었는지 가물가물했다. 사물들의 색깔도 잊었다.
빈 방, 그것이 그녀의 블로그 이름이었다. 게시물은 모두 비공개였다. 빈 방은 아니었지만, 빈 방이었다. 로그인 창에 아이디를 쳐 넣었다. 그게 다였다. 비밀번호를 알아내기 위해서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내 이름으로 가입되어 있는데도, 없었다. 뭘 그렇게 매일 써. 내가 존재한다는 기록. 왜 하필이면 거기야. 여기에선 내 이름이 하나뿐이니까. 그 집을 나오기 전, 그 사람으로 돼 있는 내 휴대폰의 명의를 바꾸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로 가입된 블로그는 그녀가 사용했었고 다른 이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빌려 가입한 휴대폰은 내가 사용하고 있다. 무엇으로 내가 나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지.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닌 것만 같았다. 깜빡이는 커서를 오랫동안 쳐다봤다. 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로 가입된 그녀의 휴대폰은 더 이상 빛을 뿜어대지 않았다. 몇 번인가 사치코의 일기를 훔쳐본 적이 있었지만 머릿속에 넣어 두지는 않았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를 기억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라면 좋겠다는, 그런 글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그렇다면 정말, 좋을 텐데. 검은색의 커서가 점점 흰색 속에 묻혀갔다. 내가 죽는다 해도 사람들은 모를 거야. 그치? 나라는 사람을 나라고 인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게 재밌으면서도 씁쓸했다. 손이 가는 대로 아무 숫자와 알파벳들을 조합하여 비밀번호 창에 쳐 넣었다. 내 장례식에는 너만 오겠다. 아니, 안 오려나. 역시, 오류였다.
이래서 낯선 번호는 받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이고 머리를 쳤다. 그 사람의 생일이란 말에 달력을 봤다. 7월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여자는 짧게 말하는 법을 몰랐다. 달력 한 장을 뒤로 넘겼다. 빨간 매직으로 표시돼 있어야 할 날짜를 보았다. 물론, 사치코의 진짜 생일은 아니었다. 슬라이드를 내렸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잠시 생각했다. 휴대폰이 또다시 울렸다. 아까와 다른 번호였지만 받지 않았다. 그녀의 물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예고 없이 찾아왔던 것처럼, 예고 없이 사라지는 게 마치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을지, 답은 언제나 물음표였다. 벨소리가 끊어졌다 울리기를 여러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배터리를 뺐다. 어쩌면 환청일지도 몰랐다.
모든 게 다 거짓말 같았다. 단 한 번이라도 내 옆에 있기는 했었는지, 그녀의 이름마저 환각처럼 느껴졌다. 최근의 일들까지도 무의식중에 조작해낸 것인 양 기억이 선명하지 못했다. 그녀가 있으면 내가 없고, 내가 있으면 그녀가 없었다. 둘 다 없기도 했다. 우리가 나눴던 이야기들이 실제로 했었던 것들인지, 길거리를 지나다 우연히 들은 누군가들의 대화는 아니었을지, 불분명했다. 그녀의 자해도 어느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내 눈 속에 박혀 있는 붉은 피는 망상일 수도 있었다. 우리는 분명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내 머릿속 흐릿하게 남아 있는 사람이 그녀라면 분명. 하지만 그 사람이 그녀라는 확신이 없었다. 그 기억 자체가 존재했었다는 확신도 없었다. 그녀는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았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 순간에도 있었으나, 있지 않았다. 나의 2년도 그렇게 증발돼버린 건 아닐까. 그녀도 나도,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사치코가 없었다는 건, 내가 없었다는 말이 되는 걸까. 순간 내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워졌다.
매일 밤 추루하게 빛나던 네온등이 꺼졌다. 천장도, 전등도, 벽도, 보이지 않았다. 달도 보이지 않았다. 온통 캄캄한 공간 안에서 끊긴 음악이 다시 들려오기만을 기다렸다. 몸을 곧게 폈다. 손과 발끝에 닿는 것은 없었다. 어둠은 방을 넓게 만들었다, 경계가 없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눈을 껌뻑거리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손가락으로 방바닥을 두드렸다. 리듬이 엉망이었다. 창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실은, 창문이 어느 쪽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습관처럼 바라볼 뿐이었다. 손끝의 감각이 무뎌졌다. 눈을 떠도, 감아도 보이지 않는 건,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내가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팔을 들어 올렸다, 들어 올렸을지도 몰랐다. 어디쯤에 있을지, 짐작해 보았다. 손목을 돌렸다, 돌렸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를 터였다. 보이는 것만이 믿을 수 있는 것들인가. 본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은, 생각, 생각, 생각, 끊임없이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 자문하고 자답하는 너는 누구일까, 자문과 자답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내 머릿속에 흐르는 이 잡다한 상념들, 존재란 것은 무엇일까,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내 몸이, 내 생각이, 내 무엇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라고 지칭하는 이 나는, 나일까. 가끔 내 몸속에서 빠져나와 나를 관찰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의 나는 관찰을 하는 쪽일까, 당하는 쪽일까. 눈을 떴다면 떴고, 감았다면 감았다, 몸을 웅크렸다면 웅크렸고, 폈다면 폈다. 노래를 흥얼거렸다. 입속으로였는지, 입 밖으로였는지, 애초부터 부르지 않았는지. 모든 행동들은 이다, 아니다가 짝짓고 연달아서 일어나야 설명이 되는 것은 아닐지. 사치코, 이름을 불러봤다. 귀로 스며드는 목소리의 울림이 한때의 나였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묻고 싶었다.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실재했었는가를.
음악은 끝내 이어지지 않았다. 너무도 어두워서 경계가 사라진 공간, 거기에 누운 나는 이것이 우주인가 하는, 우스운 착각에 빠졌다. 눈을 뜨면 렌지후드를 켠 채 사치코가 요리를 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내가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불을 켜고 싶었다. 굿바이 굿바이 굿바이, 내 목소리가, 아닐 수도 있는 누군가의 것이 몹시도 떨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났을 것이었다. 허공에서 손을 휘저었다, 그랬을 터였다. 사방이 모두 똑같았다. 어디에 전등 스위치가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손이 벽에 닿았다. 어느 쪽의 벽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저 무언가가 닿았다는 현실감에 가슴이 다소 벅찰 뿐이었다. 벽을 더듬었다. 벽지가 부드럽지만은 않았다. 등이 켜졌을 때, 내 앞에 니가 있어준다면. 스위치를 찾았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저 차에 실려 가는 이는 누구일까, 나일까. 쉬이 누를 수가 없었다. 매끈한 플라스틱에 가만히 손을 올려둘 뿐, 이따금 더듬더듬, 매만지기만 할 뿐. 그때 니가 내민 손을 잡았더라면 너는 지금, 이곳에 있었겠지, 그랬더라면 나는 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을까. 사이렌 소리가 멀어져간다. 내게는 환청만을 남기고. 딸깍, 스위치를 눌렀다. 불이 들어왔을까. 눈앞은 여전히 캄캄했다.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겠지. 창밖의 네온등은 아직도 켜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디가 창밖이고 어디가 창의 안쪽인지, 선을 긋는 것조차도 애매했다. 그저 저쪽에는 내가 없을 뿐이고 이쪽에는 내가 있을 뿐이다. 다시 한 번 눌렀다. 딸깍, 또다시 눌렀다. 딸깍, 딸깍…… 환청, 사실 내게는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이곳은 여전히 어둠이었으니, 나는 내 몸뚱이를 볼 수 없었다. 두통이 또다시 시작됐다,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롯이 그것뿐. 이 공간 어디쯤에 내가 있을까, 과연 있기는 할까. 만약에 없다면 생각을 하려하는 이 나는, 누구일까. 눈을 떠도, 감아도 보이는 건, 보이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쪽에 스위치가 있다면 반대편에 창문이 있을 터였다. 머릿속에서 기하학무늬들이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발바닥에 무언가 밟혔다, 그런 것 같다. 유리 조각일 것이라고 짐작하기로 했다. 사치코는 이미, 사라졌다. 창문은 열려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었다.
경윤선
서울 출생. 2009년 『시에』로 등단.
―『시에티카』2010. 상반기 제2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