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명으로 풀어본 한국사
● 관악구 신림동의 유래
-관악산 기슭 숲이 무성한 가을
신림동新林洞은 관악산 기슭으로 일대에 숲이 무성하여 생긴 이름이며, 원래의 신림은 삼성동三聖洞(구 신림6동) 부근으로 나무가 많아서 인근의 주민들도 여기까지 와서 땔감을 해 갔다고 한다. 신림동이라고 하는 고유 동명은 이곳을 맨 처음부터 신림이라 칭한 곳이며, 파평 윤씨들의 집성촌으로 수백 년간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조 때 행정구역 명칭은 이곳을 가리켜 신림이라 불렀다. 원 신림의 남쪽에는 합실이라 하여 재실이 있었으며, 밤골(율곡) 골짜기는 삼성동(구 신림10동)의 산장아파트가 들어서 있으며, 신림 맞은편에는 약수암이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조선조 명종 때 김 처사라는 분이 지은 것이다. 바위틈에서 항상 샘물이 흘러 이곳 절을 약수암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신림 서편은 양산이라고 하여 5-6채의 있었는데, 하루 종일 햇볕이 들어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조 태종의 장남 양녕 대군이 세자 책봉 관계로 출가를 한 뒤 이곳에 들어와 초막을 짓고 3년간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 당시 작은 부인의 묘가 현재 주택은행 건너편에 있으며 양산 고갯마루에는 성황당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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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동 고시촌 전경
- 삼절로 이름 높은 신위가 살던 자하동
자하동紫霞洞은 대학동大學洞(구 신림9동)에 속해 있으며 서울대학교 캠퍼스 일대가 자리잡은 자연 마을이다. 조선 시대의 정조, 순조, 헌종 3대에 걸쳐 시詩, 서書, 화畵 삼절로 이름 높은 신위申緯가 어렸을 때부터 살았던 곳이므로 그의 아호를 따서 마을 이름으로 삼았다. 자하동은 평산 신씨와 더불어 의성 김씨의 집성촌으로 60여 가구 중 50가구가 의성 김씨였다.
일제 때는 시가도 풀장을 시설하여 일본인과 용산 병영의 일본군 야영장으로 풍치와 산수가 좋은 곳이기 하다. 시가도 풀장은 관리 소홀로 일부 붕괴된 것을 이곳이 시흥군 관할이라 풀장 시설물을 안양유원지 내 풀장으로 이전시켰으며 1968년에 지금의 제일 광장 옆에 신림 풀장이 개설 운영되었다. 그러나 서울대학교가 옮겨온 이후부터는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가 현재는 인공 호수가 조성되어 있다.
자하동은 예로부터 산수가 좋기로 이름난 곳으로 영등포, 노량진 등 원근 학교들의 봄, 가을 소풍지로 유명하였다. 자하동 뒷산 국수봉에는 민간 신앙인 미륵이 모셔져 있어 기복신앙의 발원지가 되었으며, 도당이 있어 매년 10월 상달에 당주를 선출하여 마을의 안녕과 한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미륵은 현재 대학동 성불암 앞마당에 있다.
자하동은 1950년 한국전쟁 때는 수만 명의 이남 사람들이 피난하여 무사히 지낸 곳이다. 그 당시 국군 제1연대 소속 헌병 상사 박희복은 패잔병으로서 이곳 관악산에 은둔하면서 자하동의 젊은이 40여 명으로 구성된 유격대 활동을 전개하여 적에 대한 많은 피해를 입혀 한국전쟁사에도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유격 활동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1963년에는 관악 컨트리클럽이 운영되어 오다가 1970년 1월에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재직시 서울대학교가 들어오면서 수백 년간 이어져 오던 옛 마을은 없어졌다. 당시 자하동의 주민은 약수암 근처와 대학동(구신림9동) 화랑 단지 일대로 이주하였다.
서울대학교 정문 옆에 소나무 세 그루가 있는데 이곳은 옛날 물방아가 있던 곳으로 일명 물방앗간으로 불렸다.
- 돈 많은 부자들이 살았던 복은말
보은의복은초福隱村)은 옛날에 돈이 많은 부자들이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마을 자체가 보그니 안처럼 분지형이기 때문에 복은 마을 또는 보그니 마을이라고 하였다. 20여 호가 살았던 이곳은 서림동瑞林洞(구신림2동) 118번지 일대로 이곳 뒷산 103번지 일대와 쑥고개 아래편에는 고려장터가 있었다.
화랑 단지 쪽에는 안동 김씨들의 묘 약 50기 이상이 있고, 또한 조선조 세종의 둘째 아들인 창원군 묘가 자리 잡았던 곳이다. 그 당시 세도가 당당하므로 다른 묘역의 묘비는 전부 쓰러뜨리고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시켰으며 일반인들이 자기 조상의 묘를 참배하고자 할 때도 이곳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서림동 청사 부근은 성돌이라 하였고, 그 밑을 울배라고하였다. 왕자의 무덤 때문에 출입을 하지 못한 일반 백성들은 성돌 밑에서 조상 묘를 향하여 절만 하고 울고 돌아갔다 하여 울배라는 명칭이 전해오고 있다.
고려장은 옛날 고려 시대에 살기 어려운 백성들이 늙은부모를 모시지 못하고 움집처럼 생긴 땅굴에 며칠 분의 먹을 것을 넣어두고, 그것이 떨어지면 굶어 죽게 했던 장례법으로 이 고려장은 광복 이후까지 보존되어 행해진 것을 본사람이 있다.
- 서원이 있던 서원말
서원말은 신림본동에 위치했던 자연 마을로 이곳에는 서원터가 있었으며 고려 시대에 서원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었는데 강감찬이 송도에 왕래할 때 자주 머물렀다고 한다. 신림 사거리 쪽에는 제당을 지내는 당집이 있었다. 서원말은 70여 호의 촌락을 형성한 곳으로, 주로 곡산 연씨들의 집성촌이었다. 조선조 말에는 이곳을 시흥군 동면 서원리라 불렀으며 한일 합방 이후에는 신림리에 속하다가 일제 때에는 신림리의 배급소가 있어 석유나 소금 등 각종 생필품을 배급해 주는 곳이었다. 이후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제일 번화가로 발전되었다.
일설에는 이곳에 강감찬을 배향한 서원이 있었다 하나 확인 결과 강감찬은 현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배향되었으니, 조선조의 선현봉사先賢奉祀와 교육 기관인 서원의 소재는 확인되지 않았다.
- 난곡 강서가 살았던 난곡 마을
강서의 아버지 우의정 강사상의 신도비각 관악구 남현동
난곡蘭谷마을은 진주 강씨의 집성촌으로 조선조 중종 때의 문신인 강서姜緒의 호인 난곡에서 유래되었으며 진주 강씨 이외에 전주 이씨들도 많이 살았다. 강서는 우의정 강사상姜士尙의 아들로 선조 때 남양 부사, 좌승지, 인천 부사를 지냈다.
난곡에서는 예부터 난초를 많이 길렀는데 윗쪽은 난곡(현 난향동蘭香洞), 가운데는 난곡(현 난곡동蘭谷洞), 아랫마을은 난곡(현 미성동美星洞) 등 셋으로 구분된다. 일제 시대에는 공동묘지와 납골당이 있어 낙골이라고도 하였다. 이곳은 조선 시대의 명장인 강홍립姜弘立장군이 유배되어 일생을 마친 곳이기도 하다.
난곡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목도 있는데 난곡동(구 신림 3동) 산112번지의 1호(건영아파트 내)에 있는 굴참나무 나이가 1천여 년 되고 키가 17미터이며, 둘레가 2.5미터 가량 되는 거목으로 천연기념물 제271호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의 오래된 큰 나무는 대개 어떤 인물이나 사건들의 내력이 담긴 전설이 많은데 난곡의 굴참나무는 낙성대에서 출생한 고려의 명장인 강감찬이 이곳을 지나다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꽃아 놓은 것이 자라난 나무라는 전설이 있다.
또한 앞서 밝혔듯 난곡은 비운의 장군이 강홍립이 유배되어 은거하면서 난초를 기르며 생활한 마을로 그의 묘터와 진주 강씨 일가 묘역이 뒷산에 있다. 강홍립은 1560년(명종 15)에 출생하여 1627년(인조 5)에 세상을 떠났으며, 자는 군신君信호는 내촌耐村이며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강홍립은 1589년(선조 22)에 진사가 되고 1597년에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605년(선조 38) 도원수 한주검의 종사관이 되었고,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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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수 강홍립 묘소. 관악구 남현동
명나라가 요동 반도를 침범한 후금後金을 토벌할 때 명나라의 지원 요청으로 강홍립은 5도 도원수가 되어 부원수 김경서金景瑞와 장병 1만3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였다. 1619년 명나라 제독 유정의 휘하에 들어가 싸우다가 패전한 후 휘하 전군을 이끌고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듬해에 조선 포로들은 석방되었으나 강홍립, 김경서 등 10명은 계속 억류당하였다. 그들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때 후금군의 선도로 입국하여 강화에서 화의를 주선한 뒤 국내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강홍립은 역신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하고 죽은 후에야 복관되었다. 강홍립의 묘소는 관악구 남현동에 있다.
난곡은 관악구의 서남쪽으로 구로구와 경계를 이루며 삼성산 말미에 위치한 주거 밀집 지역이다. 이외에도 신림동에는 합실合室마을이 삼성동에 있었는데, 이곳은 관악산 중턱이라 밤나무가 많아 율곡栗谷이라고도 하였다
첫댓글 잘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