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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람의 깊이 원문보기 글쓴이: 박철영
조선의 시인 시집《꽃으로 오는 소리》해설
생명에 대한 천착으로 통어通語한 문장들
말과 글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글에 포함된 시도 넘쳐나는 시대다. 우리는 그런 현실을 과잉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과잉이라는 어원의 속성상 일부는 버려져야 한다. 그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통찰은 진면을 용케도 분별해낸다. 시의 유형 중에서 꽃을 소재로 한 시류들을 많이 보아왔다. 시와 꽃의 절묘한 조합을 이루면서 존엄한 생명체에 대한 여운 깊은 시들을 접해볼 기회는 많지 않다. 그런 이유는 인간의 욕망으로 꽃을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꽃이 갖는 생명성에 다가가 교감하려는 것이 아니다 보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꽃도 일회성으로 소모되어버렸고, 꽃의 말을 받아 전달해야 하는 시인의 직정直情도 감쇄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시인의 꽃을 통한 시 전반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인간과 같이 꽃의 근원도 흙으로부터 비롯되었고, 흙을 통해 이뤄진 생명에 대한 연대 의식을 부단하게 인식하고 있기에 그렇다. 조선의 시인은 꽃을 통해 자신의 시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꽃이 던지는 언어를 깊이 공감하고 상상력과 결부하여 현상화한다. 문학이 응당 갖추어야 할 덕목 중 하나는 당연한 자연이다. 그런 사실적 진실을 벗어나지 않은 진정성이 시적 상상력으로 진전한 것이다. 금번 일곱 번째 시집으로 엮어낸 시편들의 문학적 함의와 정처에 대한 호기심은 가독성을 사유토록 야기한다. 그 시편들 속에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과 진정하게 이뤄내야 할 삶의 방향에 대한 탐색과 모색까지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초에 인간을 신이 빚어냈듯이 꽃도 신의 속성을 담아 존재한다고 본다면 그 개체가 갖는 의미는 차별이나 차등으로 진술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까지 포함된다. 침적沈寂을 담아 피워낸 꽃의 향기뿐만이 아니라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의 내밀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까지 시의 영역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조선의 시인의 시론이 회광반조廻光返照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기 위해 실재하는 대상을 바라볼 때 인간의 시선으로 단정 없이 듣고 보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화들짝 꿈꾼 허구에/ 현기증만 덩그러니/ 신명 하나 얻지 못해/ 침묵 또한 깊은가/ 숨 고른 빈터마다/ 생의 벼랑 견디는 꽃/ 천기를 예감했을까/ 바람보다 가볍게 풀어내는/ 소리의 춤사위”라고 밝힌 시인의 말을 눈여겨봐야 한다. “소리의 춤사위”처럼 시 쓰는 작업을 놀이의 한 수단이 아닌 자아와 타자를 넘나드는 세계관으로 더불어 즐거움까지도 담보되어야 한다는 시론을 드러내고 있다. 꽃을 보면서 감각적인 감상에 그치지 않고 인생의 성찰과 시적 메타포로 나아가는 행위를 지극한 신명神明으로 감당하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생명에 기초한 꽃의 비의가 조선의 시인의 시적 세계 안에서 공동체의 일원임을 확신하는 한 인간과 자연과의 외연에서 경계가 따로 있을 수 없다.
한낮의 고요에 갇혀버린 시간
스르르 봉오리들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언제고 놓아야 할 때
잡히지 않는 것부터 놓아야 할 때
멀리 가 닿지 못한 것들은 편애를 앓습니다
바윗덩어리처럼 생각은 굳어져 있는데
떠도는 소문에도 향기는 존재했을까요
불러보면 가깝게, 고독이 붉어지기까지
꽃봉오리는 비밀번호에 잠겼습니다
흐르는 구름의 방향으로 슬쩍 고개를 돌리는 순간
꽃들에게 웃어주는 것이
웃음을 찾는 방법인 것을 알았습니다
사방은 분화구 속처럼 조용하고
차마 고백하지 못한 말이 나를 슬프게 하지만
지독하게 오월의 소리 없는 소란이 눈부십니다
스스로 꽃 속에 빠져든 하늘
어디쯤에서 서로 허물없이
마주보는 표정을 붙잡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끝내 제자리를 떠날 수 없어
새들의 허공까지 모두 품고
멀리 사람이 떠난 길로 모란꽃이 피었습니다
봄 멀미 가득하게 생의 격랑 흘려보내면
웃자란 욕망이 귓바퀴를 흘러내리고
비워도 남아있는 몽환의 혀끝이 아립니다
불후의 침묵을 깨뜨리며
그림자의 위치를 바꾸는 꽃
한때의 속삭임처럼 모란은 피었습니다
당신의 처음 눈짓이 그립도록,
-<모란꽃 속에 갇힌 하늘> 전문
시로써 분출할 수 있는 상상력은 논리적이지 않아도 시비의 대상이 아니다. 조선의 시인의 시적 바탕은 가슴으로 전해오는 처연한 슬픔이나 동정이 아니다. 진지한 고뇌와 고통스런 과거의 시간을 생산적 에너지로 현재화하면서 진지한 감동과 먹먹한 여운이 깊다. 그 시작詩作의 방법은 꽃에 대한 근본적인 감각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한낮의 고요에 갇혀버린 시간/ 스르르 봉오리들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언제고 놓아야 할 때/ 잡히지 않는 것부터 놓아야 할 때/ 멀리 가 닿지 못한 것들은 편애를 앓습니다”라며 인식의 깊이를 드러낸다. 그러면서 생명현상에 대한 원근법적 사고와 풍경에 대한 사유가 공감각적으로 전이되면서 이미지의 심상을 고조시켜준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하늘은 절대 모란의 꽃 속에 갇힐 수 없다. 그렇다는 시적 상상력은 시인의 착시이거나 의도적 발언으로 간주할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이 접속한 꽃과의 시간은 천박에 치우친 것이 아니어서 통속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꽃도 생명의 본질에서 인간과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은 단순히 꽃에 대한 예찬이나 감흥으로 발현된 시적 행위가 아니다. 부풀어 오른 모란 꽃봉오리의 개화 직전 모습을 상상해보자. “스스로 꽃 속에 빠져든 하늘/ 어디쯤에서 서로 허물없이/ 마주보는 표정을 붙잡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식물성 개화 작용인 “꽃봉오리는 비밀번호”를 풀어내는 찰나로 묘사하여 신비로운 형이상학적 이미지를 생명의 오묘함으로 환기해낸다. 이후 “불후의 침묵을 깨뜨리며/ 그림자의 위치를 바꾸는 꽃/ 한때의 속삭임처럼 모란은 피었”다지만 시인이 고대하는 모란꽃은 사람에 대한 열망이기에 완전하지 않은 미완으로 “당신의 처음 눈짓이 그립도록,” 아련함만 남아있다며 순수했던 시절을 복기하고 있다.
몸살 나게 피고 싶은 것이
꽃뿐이겠습니까
눈물의 한 세월이 어찌 사람뿐이겠습니까
피란길 떠나는 사람들처럼 심장이 옥죄일 때마다
광목천에 연분홍 물들이듯
진달래꽃이 피었습니다
더운 피를 식히기 위해
소리 나지 않는 울음으로 긴 세월 한자리에 머물러
발화하는 꽃의 무성음
밤이슬에 속적삼 젖듯 지치게 피다가
흩어지는 바람을 발끝으로 지그시 누르면
불길이 핥고 지나간 자리마다 통점으로 깊어집니다
한 생의 뒷모습으로 환생하듯
살아온 길 모두 끊어버리고
시린 땅 위에 가까스로 서 있는 몸을
어디로 누인단 말입니까
적막한 무덤에 피를 뿌리듯
몸살 나게 그리운 것이 어디 꽃뿐이겠습니까
사람뿐이겠습니까
달아날 출구도 없이
막다른 골짜기까지 밀리고 나면
부활을 꿈꾸는 봄이 붉게 출렁거립니다
범람하는 환상은 고독의 거처
소리 나지 않는 울음으로 삼천리를 다 건너다보면
가슴의 멍울진 자국 위로
푸른 싹이 돋아날 것입니다
-<환생하는 진달래꽃> 전문
사람 그리워한 인정도 오래 묵히면 불쑥불쑥 봄꽃 피듯 산어귀를 밟아 내려오는 진달래꽃 따라 붉은 가슴으로 물들여질 것이다. 누구나 시를 쓰는 시인이라면 진달래꽃에 대한 유혹을 떨칠 수 없다. 멀리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청춘 남녀의 가슴을 애증과 애환으로 물들인 꽃으로 상징되어왔다. 사실 진달래꽃은 산에 지천으로 봄이면 피는 꽃이다. 그렇게 흔하게 피고 지는 진달래꽃을 통해 이뤄온 민중적 정한의 정서는 조선의 시인의 <환생하는 진달래>를 통해 생애를 아우르는 서사로 극대화된다. “몸살 나게 피고 싶은 것이/ 꽃뿐이겠습니까/ 눈물의 한 세월이 어찌 사람뿐이겠습니까”라며 시인은 진달래꽃의 형상을 빌어 인생유전의 질곡 같은 이야기를 각색하여 절절한 심정을 설의법으로 동의를 구하고 있다. 한 번의 꽃을 피우기 위해 혼신을 다하듯이 사람답게 살아보려 몸부림치는 소시민의 삶을 절박함으로 상기시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은 매번 새로운 시간으로 다가오지만, 그 시간은 기억건대 고통으로 점철된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의 뇌리에 아직도 6·25 전쟁의 상흔으로 남아있는 “피란길 떠나는 사람들처럼” 조바심과 불안에 떨었던 시간과 그 고통을 감내하기 위한 “소리 나지 않는 울음”을 삼키며 살기 위해 몸부림쳤을 과거의 시간을 잊지 않고 있다. 되돌아보면 “불길이 핥고 지나간 자리”마저 혹독하게 자신을 성장으로 이끌던 “통점”으로 재소환한다. 그마저도 이제 고통보다는 “몸살 나게 그리운 것” 들로 가슴에 아련함으로 각인되고 말았다. 시인은 붉게 핀 진달래꽃의 자연스러운 계절적 개화를 완강하도록 먹먹한 시간으로 환기한다. 애환의 상징인 찔레꽃을 시인은 어머니의 가슴 아프도록 애처로운 마음으로 치환한다. <찔레꽃 어머니>의 “해뜨는 방향으로/ 물이 오르는 아침은 싱그럽기만 합니다”라는 단정적인 소회는 어머니의 마음을 오랫동안 보아왔기 때문에 친숙하게 다가온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묵묵히 인내하며 자리를 지켜온 어머니의 모습은 비단 시인의 어머니만이 아닌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조선의 시인은 꽃을 생명체로 긍정하고 꽃의 생장 과정을 인간의 생존을 위한 치열한 관계성으로 천착해가는 시적 발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발상을 낭만적인 상상력으로 남용하거나 유희로 헛되게 하지 않는다. 가슴 속에서 끌어낸 원형적인 질료들은 존재에 대한 질문을 끝없이 던져주곤 한다. “꿈속의 내가 꿈밖의 나를 부릅니다/ 살아온 날만큼 길게 혼잣말을 주고받으며/ 당신과의 필연을 증명하려는지 꽃이 피어납니다”라며 무의식적인 현상의 반복을 통해 생명 현상에 대한 순환과 영원성을 불교적 연기緣起로 치환하여 확인해간다. 찔레꽃으로 피어나는 시적 정서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당신의 눈빛은/ 인연의 이편에서 저편까지 다리를 놓고자 하였으나/ 어느 곳으로도 건널 수 없어/ 주춤거린 나는/ 돌아갈 길조차 잃고 말았”다며 시인과 어머니로 분리된 자아를 대상(찔레꽃)을 통해 본래의 동일성으로 회복한다.
<벌개미취와 끓는 밥물>은 전형적인 어머니들의 무모하도록 희생적인 모습을 묘사한 시임을 알 수 있다. “어머니 품안에서 피운 꽃”의 의미는 자연스럽게 발현하는 보호 본능에 대한 모성으로 상상하였을 것이다. 품 안의 자식 같은 꽃에 대한 위협적인 환경에 대응하는 어머니는 아무 잘못도 없지만, “죄 없이도 길게 용서를 빌었다”며 자신을 먼저 내려놓은 일부터 했다. 그런 세월로 견뎌낸 시간은 이제 지극하게 핀 벌개미취꽃으로 환생한다. “땅의 시간을 살면서 소리 없이 눈 뜬 흉터// 맑은 슬픔 한 방울조차 아끼려고/ 마른 웃음으로 가난을 견디던 시절에도/ 눈부신 절망만이 어머니를 살게 했다/ 아득하게 밥물이 끓어오르면/ 어머니는 누구의 상처를 감싸는지/ 부엌 귀퉁이에서 소리 없이 출렁거렸다”며 누구에게나 있었을 어머니에 대한 회상을 시적 공감으로 꽃의 세계를 빌어 형상화한다. “땅의 시간을 살면서 소리 없이 눈 뜬 흉터”는 조선의 시인만의 개성 있는 시적 수사로 그치지 않고 어머니라는 언어에 함의된 기의적 인식으로 긍정하면서 공감까지 나아간다. 조선의 시인은 때로는 직정적이거나 격정적으로 다가온 시적 상상력을 한국적인 은근한 시적 정서로 전환하여 상징화하고 있다. “메아리 없는 독백처럼/ 처음 들어간 문으로 어머니가 걸어 나오고 있다”며 조선의 시인의 마음속 어머니를 희생적인 삶을 살다 가신 모성상으로 현재화하고 있다. 그 모습은 다양한 모습으로 반복하고 변주된다. 꽃도 사회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들릴 수 있다. 인간만이 갖는다는 사회성으로 우월감을 과시하고 있지만, 조선의 시인은 꽃들의 모습을 통해 비밀스럽게 품고 있는 자연 속 사회성을 읽어내고 있다. 그 꽃들의 말을 받아적는 시인의 시는 꽃으로 빙의된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데카르트적 인간의 사고는 당연하게 자연의 부분을 공유하고 있는 꽃과는 아주 다르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꽃과 인간의 삶은 동일한 자연 공간에서 약간의 생존 방식에 대한 인식의 차이일 뿐이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보편성에 기반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자연스럽게 꽃을 통해 재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에 대한 현존을 실존의 문제로 바라볼 때 꽃과 인간 즉 ‘나’와 ‘너’의 구분이 없는 지점, 즉 생명체라는 최초의 지점에서 분별력으로 다시 출발해야 한다.
그 지점은 욕망이나 충동과는 관계없는 온전한 존재만 있는 <속정 깊은 꽃마리>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아마 시인은 꽃마리의 속성을 잘 관찰하고 그 생래적 습성까지 천착했을 것이다. 그런 연후에야 가능한 ‘속정’이란 의미가 인간의 마음으로 오버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무나 작은 꽃마리꽃은 평소에는 잎사귀 안에 말려있다 어느 순간 아이가 고사리손을 펼치듯 내보이는 습성을 가진 꽃이다. 이 시 1연에서 “앙증맞습니다”로 비유되는 시어 어디에서도 인간의 욕망은 개입되지 않는다. 보는 그대로의 사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앙증맞은 꽃 위로 때마침 날아드는 2연에서의 “나비”도 자연 속 한 존재일 뿐이다. 그 관계를 끈끈하게 유지해주는 매개체는 3연의 “별빛”일 뿐이다. 망망하게 밀려오는 고독한 시간을 메워주는 것은 기다림의 시간으로 “그리움” 뿐이다. 형상 없는 그리움을 다 채우지 못한 채 시인은 “나비가 날던 자리도 빛나고/ 노랗게 물드는 꽃그늘이/ 고요 속에 들어앉습니다”라며 생명체가 존재했던 자리로 되돌려놓으면서 욕망과는 무관한 “고요” 안으로 침잠하는 무욕에 들어선다. 시인은 자연 속에서 핀 꽃을 통해 생명에 대한 존엄과 현대 사회인들이 망각하기 쉬운 나와 너의 존재론적 관계까지를 질문하며 응시하고 있다. <배롱나무, 꽃빛 깊다>에서 조선의 시인의 사유는 역사적 사실을 시적 바탕으로 포석하고 있기 때문에 의도된 시심도 만만치 않다.
눈 뿌리 타들어가도록 흐드러진
연못 속의 궁궐
가볍게 건너 뛴 세상의 길이 명옥헌으로 향하고
은하의 비린 꽃물이 담양을 덮으면
꽃의 속삭임마저 한 권의 어록이 된다
물과 바람과 돌담과 햇빛
그 환한 속 향기까지
삼켜내는 마음
이 모든 것들의 안간힘이
눈물 한바가지 끓여내듯 붉고 또 붉다
열리고 닫히는 꽃봉오리의 고요한 시간
꽃 피는 소리에 귀를 세우고
핏방울 맺히도록 수피를 긁어대면
천년 묵은 묵언을 쏟아낸다
다가갈수록 아늑하고 향기로운 원림
매혹도 저렇듯 울컥하여
자꾸 나를 되돌려 세우고 있다
*명옥헌 윗못과 아랫못
-<배롱나무, 꽃빛 깊다> 부분
꽃에 빠져들어 사색하기 전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자그마한 정자로 놓인 담양의 명옥헌에서 배롱나무꽃은 주변 자연과 어우러져 절경을 먼저 이룬다. 그곳에서 시인은 시적인 감흥에 젖어 든 듯하다. 계곡에 물이 넘쳐 흘러내리면 옥구슬이 구르는 듯하다 하여 명옥헌이라 정자 이름을 지었다는 풍경적 이미지가 어우러져 낭만을 더해주고 있다. 그런 풍경의 연못가에 심어진 배롱나무 “아린 속 문드러지게 불씨 품고/ 물기슭 철옹성을 축조하듯/ 꽃그늘이 상하지*를 수결한다” 는 시심은 시인의 내면을 엄숙하도록 써늘하게 한다. 명옥헌의 배롱나무만이 갖는 ‘수결’만 보더라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신분적 존재감의 수단이기에 의도는 더 분명해진다.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배롱나무의 자태를 그려내면서 명옥헌의 오희도라는 사람을 기린 그의 아들 오희정까지 연상했을 것이다. 배롱나무가 불타듯 꽃그늘로 물든 명옥헌의 상하 연못으로 관통하는 풍경은 엄숙하기 그지없다. 그도 그럴 것이 부자지간의 부자유친父子有親과 군신유의君臣有義를 국가통치로 내세운 조선조 시대적인 덕목으로 강조된 삼강오륜까지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조가 왕이 되기 전 오희도를 찾아왔다는 것만 보더라도 치열했던 왕위 탈취를 위한 막 전 긴장감 도는 비행秘行을 상상케 하고도 남을 “꽃의 역사”를 통과한 배롱나무꽃은 깊고도 써늘한 비의秘意를 숨기지 않았지만 오싹한 전율은 어쩔 수 없다. 시간은 이미 과거로 흘러가 버렸지만, “기억의 잠복기를 거쳐/ 당신을 향한 불같은 그리움이거나/ 눈이 부신 하늘이거나/ 온몸으로 던지는 꽃의 역사/ 혹은 밀어”는 매우 은밀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저렇게 작은 정자 주변을 두른 배롱나무꽃에 불과하지만, ‘꽃의 역사’ 속에서 일순간 닥칠 몸의 안위까지 생각하면 시인의 서사 깊은 명옥헌에서의 시적 발현은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과거 갇힌 시간을 현재화된 시간으로의 탈출할 수 있는 전환의 계기는 라일락꽃의 향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라일락, 그녀>로 도진 ‘나’의 주변을 끝없이 맴돌고 있는 ‘너’를 생각한다. 너로 다가오는 대상은 꽃이거나 사람이거나 시인의 내면에서는 언제나 다르지 않았다. 조선의 시인의 사랑법이 궁금해졌다. “별들이 하늘로 돌아가면/ 생의 벼랑에도 이슬이 다녀갑니다”라며 이별의 모습이 냉랭하기만 한데 진술하는 어투는 남의 일처럼 담담하기만 하다. 그것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슬픈 이별이 아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꿈결보다 부드럽게 내리는 비는/ 초록이 깊어지는 마음의 빈터마다/ 흠뻑 젖었습니다”에서 처럼 다시 하늘에서 내린 비로 변주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사랑의 완성은 보이지 않는다. 단절되지 않은 만남과 이별의 반복에서 이뤄진 “낱낱의 그리움이 꽃무더기를 이루는 시간/ 무료한 오후는 길게 씰룩거리고/ 새들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라일락꽃의 고혹한 웃음소리가 만개합니다”라며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풍경을 이미 예상한 듯 벌어진 상황에도 초연超然하다. 마치 미완의 사랑법이 궁극의 사랑이라도 되는 듯 말하고 있다. ‘라일락꽃’에 의해 상기된 사랑의 상대는 시인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인 타자로서 모든 것을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공동체임을 알 수 있다. 이미 그녀는 시인과 함께하는 시적 세계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정황은 “향기는 일종의 발효된 침묵/ 끝내 머물기 위해 다시 돌아오는 인생처럼/ 얼마나 많은 슬픔이 있어/ 우리 청춘을 위해 꽃은 피고 또 피어났습니다/ 웃음과 울음이 비바람에 뒤척이며/ 당신을 불러보고 싶은 날/ 꽃의 이마가 시립니다// 라일락 아래에서 사랑을 탕진해도/ 억울하지 않겠다는 사람”을 통해 확신할 수 있다. 시인의 시선에 든 꽃들은 개별성으로 다가왔지만,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꽃에 배태된 절박하거나 기쁨으로 환기된 서사의 곡진함은 인간의 개별적 실존의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전환하는 긍정 기제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라일락 아래에서 사랑을 탕진해도/ 억울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헛된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신한다. 꽃으로 개별화된 시적 대상은 조선의 시인 안으로 향기처럼 스며들어와 어느 순간 일체가 되어 있다. 그것은 오랜 삶으로 체화된 기억을 더듬어가며 이뤄진다. 희미한 기억 속 지류는 얕지만, 마르지 않은 실개천처럼 시인의 가슴으로 흘러들고 있다. <문득, 장다리꽃>도 그중의 한 지류임을 알 수 있다. 작은 지류는 앞산 어딘가에서부터 버터플라이 효과처럼 “장다리꽃이 흔들”리는 미세한 징후로 감지 할 수 있다.
고물고물 구름이 흩어지고
멀리 앞산 자락의 장다리꽃이 흔들렸다
좀 더 정겨운 모습으로 세상에 나오기 위해
숙연하게 몸 낮추고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살면서 조금은 억울하고
때로는 외롭고 쓸쓸할지라도
산목숨으로 계절을 붙들고 있는 자세가
차라리 눈부시다
쉽게 멍들고
쉽게 꺾여도
노란 낙원을 꿈꾸고 있었을까
빛이 오래 눈에 고이면
몸살처럼 서녘 그림자가 드리우고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자세로 내 키는 한 뼘씩 자랐다
-<문득, 장다리꽃> 부분
“빛이 오래 눈에 고이면/ 몸살처럼 서녘 그림자가 드리우고/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자세로 내 키는 한 뼘씩 자랐다”는 말로 먹먹한 슬픔 같은 동정과 연민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장다리꽃을 이미지화하고 있다. “빛이 오래 고이”는 긴 낮의 시간이 무망하게 흘러가 버렸고, 이내 해도 저물고 저녁 어스름이 까맣게 덮어버렸는데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앞 산자락의 작은 집에 살고 있을 사람이 조선의 시인이다. 그럴 때마다 불안한 시간을 감내했을 꽃의 시간 속에 조선의 시인이 있다. 장다리꽃이 시인일 거라는 시적 발상이 서정적인 이미지로 치환되는 데는 무리 없는 친연성과 친숙을 이유로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장다리꽃이 갖는 서사적 의미는 어머니의 부재를 암시해준다. “장다리꽃에 자리를 내주고/ 어머니가 떠난 날도 그랬다”라며 장다리꽃과 어머니 사이에 존재하는 시인과의 순환적이면서 환형적인 의미를 “~그랬다”라며 애써 감정을 억제하고 있다. 시인과 어머니의 관계를 환기해주는 연속적인 세계에 장다리꽃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 일말의 과정은 조선의 시인의 시적 특징이다. 꽃을 통해 간직한 과거 비밀의 시간에 잠금 된 사연들을 시간의 경과를 통해 스스로 꽃이 개화하듯 해제한다. 비밀은 불필요해질 때에 폐기하는 것이라지만, 조선의 시인의 꽃에 대한 비밀을 풀어내는 방법은 그와는 상반된 인식으로 접근한다. 필요뿐만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동등한 인식에서 수많은 접속을 시도하여 통어한 꽃의 신비를 인간적인 서사로 긍정하며 다가가기에 가능한 것이다. 서정시의 주조는 추억의 축적에서 온 이미지의 확장으로 볼 수 있다. <생살 터지도록 개망초>도 유년의 추억이 존재한다. 성장의 시간 개망초도 낮은 풀숲에서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틈만 나면 키를 멀대처럼 키웠을 것이다. 그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흘러 이제 인간의 시간으로 환원된다. 흔하게 피는 꽃이 개망초이듯 언뜻 천박함마저 민중의 형상을 빼닮았다. 개망초가 살아온 시간도 고통스럽듯이 대다수 민중이 살아온 배고프던 시절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밑 빠진 희망의 시기에/ 지천으로 피어/ 한숨마저 공중으로 날려버리고자/ 창백한 세월을 겨냥했을 너”는 곧 민중의 형상임을 알 수 있다. 개망초(상고머리)가 입신을 위해 떠나는 길목에서 “마른 침을 삼키는/ 시오리 밖까지 소리 없는 갈채뿐”이었다는 막막한 이미지는 고독한 고뇌만이 살길이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호기심의 희망은 헛된 희망이 아니었기에 이제 그마저도 “발길 머무는 안식 위에 세월의 단절을 잇고자/ 호사스러운 사치 다 버리고/ 몹시 그리운 시절을 회상하노니” 그 시간을 절실한 그리움으로 소환하고 있다. 무던하게도 피고 지는 개망초의 생장 저편에 맺힌 민중의 삶을 묵화 한 점 속에 은유하듯 사연 깊은 긴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시선의 파격도 간혹 있는 법이다.
엎드려 입맞춤하려는 순간
하늘의 어느 모서리를 구름이 흩날리는지
빛을 가린다
오랫동안 꿈은 찾아오지 않았다
누군가의 몸을 통해 다시 태어날 내일에는
고독과 눈물을 지나온 환희가 있을까
뛰어내리기 위해
바닥을 응시하는 진취적인 모습과
허리 꺾일지라도 비굴하지 않을 자세가
사뭇 당돌하다
솟구치는 욕망과 더운 눈물이 치마폭에 고여 있음은
다 하지 못한
상사相思가 남아있기 때문일까
생각의 밑동을 자르면
차가운 몸의 말이 실어증을 앓았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생애 가장 눈부신 당신이 있는 곳까지
그리움의 다리를 놓는다
-<당돌한 엘레지> 부분
예민하도록 민감한 그래서 흔하지 않은 엘레지는 생태 환경적으로 서식 가능한 지리적 벨트가 있다. 주로 남부 지역의 산에 야생으로 서식하는 꽃으로 5월경 개화를 한다. 활짝 핀 모습이 마치 꽃말처럼 ‘바람난 여인’과 닮은 듯 요염한 자태를 보여준다. 엘레지의 그런 모습을 시인은 전혀 다른 시각으로 다가가고 있다. 의외의 까칠한 “엎드려 입맞춤하려는 순간/ 하늘의 어느 모서리를 구름이 흩날리는지/ 빛을 가린다”는 엘레지를 본다. 알고 보면 엘레지는 죽음 이후 “누군가의 몸을 통해 다시 태어날 내일”까지도 일편단심으로 절명을 담보하며 피운 꽃이다. “솟구치는 욕망과 더운 눈물이 치마폭에 고여 있음은/ 다 하지 못한/ 상사相思가 남아있기 때문일까”라고 묻고 있지만, 이미 다 알고 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생애 가장 눈부신 당신이 있는 곳”까지 찾아가겠다는 무섭도록 애절한 사랑을 못다 이룬 꽃이 엘레지임을 말해준다. 고흐를 떠 올리며 광기를 먼저 생각해버리면 그림에서 진실한 진면을 보지 못한다. 반대로 고흐의 치열한 감각의 재현을 위한 절망과 슬픔으로 먼저 다가간다면 조금이라도 더 나은 그림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선의 시인은 꽃에 대한 외면보다 내밀한 습성을 인간적인 사유로 천착하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시적 대상으로 포섭된 꽃에서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확인해가는 과정도 지난할 뿐 더러 시적 위의威儀로 수렴해가는 것도 고통스러운 작업임은 분명하다. 감각적인 이미지로 다가오는 꽃은 서정시에서 중요한 대상이란 것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 꽃을 통해 인간의 욕망이란 것도 무망하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미물에 불과한 꽃들로부터 생명의 소중함과 실존의 생존을 위한 치열한 생의 여정이 인간의 일상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해준다. 그것은 단순하게 꽃을 사랑이나 에로티시즘적 관점으로 접근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순간의 시각적 즐거움으로 소모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꽃의 관계는 시간의 반복을 통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성장해가는 동일체임을 제기하고 있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후미진 산비탈에서 생의 한 자락을 힘겹게 부둥켜안고 난간을 버티고 있는 꽃을 바라보며 ‘너’와 ‘나’ 그리고 ‘우리’를 생각하는 시인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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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람의 깊이 원문보기 글쓴이: 박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