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청궁(乾淸宮) 편액은 고종의 어필(御筆)이다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고종(高宗)은 초기에는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섭정(攝政)을 하였다.
즉위 10년을 맞은 1873년 고종(高宗)은 명성왕후(明成王后)와 힘을 모아 아버지로부터 자립(自立)을 선언하면서
경복궁의 가장 후미진 곳에 비밀리에 건청궁(乾淸宮)을 짓고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건청궁(乾淸宮)으로 처소를 옮긴 명성왕후(明成王后)는 흥선대원군을 탄핵하고 민씨세력의 세도정치를 시작한다.
결국 고종(高宗)은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아내 "명성왕후" 사이에 끼어 말기 조선의 정치를 힘들게 이어간다.
건청궁 정문을 들어서서 정면으로 사대부 안채에 해당하는 왕후의 처소인 곤녕합으로 들어가는 함광문(含光門)이다.
옥호루(玉壺樓)
옥호루(玉壺樓)는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 : 고종(高宗) 32년 8월 20일) 당시
명성왕후(明成王后, 1851~1895)가 일본의 칼날에 생을 마감한 가슴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서의 세력을 더욱 확고히 한다.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이 일본을 견제하자, 이를 본 "명성왕후"는 러시아와 손을 잡고 반일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일본은 "미우라"(三浦梧樓) 공사의 주도로 명성왕후를 시해하고 시신을 인근 녹산에서 불태웠다.
이를 "명성황후시해사건"(明成皇后弑害事件)이라고 한다.
곤녕합(坤寧閤)은 명성왕후가 일상 생활공간으로 사용된 건물이다.
곤녕합(坤寧閤) 편액 역시 고종(高宗)의 어필(御筆)이다
"곤녕합" 누각의 남쪽은 "옥호루", 동쪽은 "사시향루"(四時香樓 : 사계절 끊이지 않고 꽃향기가 풍긴다) 현판이 걸려 있고,
8개의 주련이 있다.
綵채 碧벽 九구 雙쌍 春춘 天천 樓누 陌맥
扇선 簫소 城성 闕궐 殿전 門문 前전 上상
平평 雙쌍 初초 瑞서 晴청 日일 舜순 堯요
分분 引인 日일 煙연 曛훈 射사 樂악 樽준
雉치 鸞란 照조 籠농 赤적 黃황 動동 傾경
尾미 聲성 蓬봉 菡함 羽우 金금 南남 北북
齊제 細세 萊래 窞담 旗기 榜방 薰훈 斗두
(1) 陌上堯樽傾北斗 (맥상요준경북두)
밭두둑의 요 임금 술잔은 북두(北斗)를 기울게 하고,
(2) 樓前舜樂動南薰 (누전순악동남훈)
누각 앞의 순 임금 음악은 남쪽 훈풍 불어오게 하네.
(3) 天門日射黃金榜 (천문일사황금방)
황궁(皇宮) 문엔 햇빛이 황금 편액을 비추고,
(4) 春殿晴曛赤羽旗 (춘전청훈적우기)
봄 전각엔 저녁 해가 적우기(赤羽旗)를 비추네.
*적우기(赤羽旗)-주작(朱雀)이 그려진 깃발
(5) 雙闕瑞煙籠菡窞 (쌍궐서연농함담)
대궐의 상서로운 연기는 연꽃을 감싸고,
(6) 九城初日照蓬萊 (구성초일조봉래)
도성(都城)의 아침 해는 봉래궁(蓬萊宮)을 비추도다.
(7) 碧簫雙引鸞聲細 (벽소쌍인란성세)
벽옥(碧玉) 퉁소 쌍으로 끄니 난새 소리 가느다랗고,
(8) 綵扇平分雉尾齊 (채선평분치미제)
고운 부채 반으로 나뉘니 치미선(雉尾扇)이 가지런하네.
왼편의 누각인 "추수부용루"(秋水芙容樓)에서 향원정을 바라보면 멋진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장안당(長安堂)과 왕후의 처소인 곤녕합(坤寧閤) 은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장안당(長安堂) 편액 우측 상단에 어필(御筆)이라는 글씨가 씌어져 있는 고종(高宗)의 친필이다.
장안당(長安堂) 전면 화단에는 괴석을 배치하여 신선의 세계를 표현하였다.
장안당(長安堂)은 고종(高宗)의 처소로 건청궁(乾淸宮)의 중심 건물이다.
"추수부용루" 북편으로 이어지는 정화당(正化堂)
1895년에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를 당하자 바로 고종(高宗)의 부름으로 엄상궁(嚴尙宮)이 10년만에 재 입궁한다.
고종(高宗)은 자신도 암살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싸였고, 자신을 돌봐줄 여성으로 엄상궁(嚴尙宮)을 다시 불러들인 것이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오랫동안 준비한 엄상궁(嚴尙宮)의 치밀한 계획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성공한다.
고종(高宗)은 왕세자와 함께 궁녀의 가마를 타고 극비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친 것이다.
엄상궁(嚴尙宮)은 일년동안 궁을 드나들면서 꼭 가마를 두 채 움직였다고 한다.
그리고 궁을 출입할 때마다 수문(守門)을 지키는 군졸들에게 항상 약간의 금품을 주었다고 한다.
처음 한참은 가마 내부를 조사했지만 가마 안은 항상 비어있고 뇌물을 받은 덕분에 후에는 검사없이 통과했다고 한다.
안전하다고 생각된 날 엄상궁(嚴尙宮)은 뒤의 빈 가마에 고종(高宗)과 왕세자를 태우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친것이다.
"향원지"(香遠池)와 "향원정"(香遠亭)
"향원지"(香遠池)에는 몇년 전까지만 해도 "향원정"(香遠亭)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남쪽으로 있었다.
향원정(香遠亭)으로 들어 가는 취향교(醉香橋)는 원래 북쪽에 있었으나 6.25전쟁으로 파괴되었고
당시 건청궁(乾淸宮)이 복원되지 않아 남쪽으로 새롭게 만들었으나 복원된 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향원정(香遠亭)과 취향교(醉香橋)
"열상진원"(洌上眞源).
향원지(香遠池) 북서쪽에 있는 열상진원(洌上眞源)은 '차고 맑은 물의 근원'이라는 의미로
북악산 기슭에서 발원된 지하수로 1395년 경복궁(景福宮) 창건 때부터 있었다.
"열상진원"(洌上眞源) 글자를 새긴 우물 뚜껑은 1868년 경복궁(景福宮) 중건 당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열상진원"(洌上眞源) 샘에서 솟아난 물은 두 번 직각으로 꺾여서 연못으로 천천히 흘러들도록 만들었는데
이는 "향원지"(香遠池)에 드리워진 정자와 꽃나무의 그림자가 물결에 흔들리지 않고 고요히 비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꺾어지는 수로(水路)의 둥글고 오목한 돌웅덩이(지름 41Cm, 깊이 15Cm)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서류동입(西流東入)의 돌로 된 통로를 만들어 흐르는 물이 더욱 생기를 띠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열상진원(洌上眞源)에서 솟아 향원지(香遠池)로 흘러 들어 간 물은
"함화당"(咸和堂)과 "집경당"(集慶堂) 아래 지하통로를 통하여 "경회루"(慶會樓)로 흘러 간다.
"취향교"(醉香橋)는 2021년 11월 고증과 문헌을 통해 원래의 모습으로 북쪽에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