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백일법문] 제6장 천태종사상
2. 일심삼관
일체제법이 원융한 삼제의 도리를 구비하였다고 하여도, 이것을 바르게 관찰하여 이해하지 못한다면 한낱 수고로운 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천태교학에서는 이론인 교리(敎理)와 함께 수행인 관법(觀法)을 모두 중시하여 서로 병행하여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설명하는 일심삼관(一心三觀)은 경계로서의 이법(理法)인 원융삼제(圓融三諦)를 관찰하는 주체적인 면에서 실천적으로 수행하는 관법을 말합니다. 일심삼관은 공(空) · 가(假) · 중(中)의 삼제에 의거하여 공관(空觀) · 가관(可觀) · 중도관(中道觀)의 삼관을 일심의 세 방면에서 세운 관법이므로 일심삼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일심삼관은 엄밀히 말하면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으므로 부사의삼관(不思議三觀)이라고도 합니다.
천태종에서는 이 일심삼관을 또한 천태삼관(天台三觀)이라 하여 중도실상을 설하는 법문으로 간주합니다.
일체 모든 가(假)가 실로 모두 공하여 공이 곧 실상인 것을 체득함을 공관에 들어간다(大空觀)고 이름하며, 이 공에 도달했을 때에 보는 것이 중도에 계합하여 능히 세간 생멸의 법상을 알아서 여실하게 봄을 가관에 들어간다(入假觀)고 이름하여, 이러한 공의 지혜가 즉시 중도이어서, 둘이 없고 다름이 없음을 중도관(中道觀)이라 이름하느니라.
體一切諸假가 實皆空하여 空卽實相을 名入空觀이요 達此空時에 觀冥中道하여 能知世間生滅法相하여 如實而見을 名入假觀이요 如此空慧가 卽是中道라 無二無別을 名中道觀이니라.(摩詞止觀;大正藏 46,p.25 中)
중도에서는 공과 가가 다름이 없고 둘이 아닙니다. 앞에서 때때로 많은 법이 이루 말할 수 없어서 묘(妙)라 하든지 부사의(不思議)라 하든지 하며 나아가 이것도 성립되지 않는다라는 등 여러 말을 했는데, 자칫 잘못하여 이것을 집착하여 불법인 줄 알면 공변(空邊)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중도관에 대하여 아주 부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방면으로도 설명하여 세간 생멸의 모습을 알아 여실하게 보는 것이 입가관(入假觀)이며 또한 중도관(中道觀)이라고 합니다. 부정이 즉 긍정이고 긍정이 즉 부정으로 아무리 부정하여도 거기에 긍정이 있고 아무리 긍정하여도 부정이 있습니다. 긍정과 부정이 조화를 이루어 지극히 원융한 이것이 불법이며 오직 한편으로 부정만 해서는 결코 진정한 불법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의 법(法)이 일체법이면 곧 인연으로 생한 법이니 이것은 거짓 이름으로 가관(可觀)이요, 만약 일체법이 곧 하나의 법이면 나는 이것을 공이라고 설하니 공관(空觀)이요, 만약 하나도 아니고 일체도 아니면 곧 중도관이니라. 하나가 공(空)하여 일체가 공하면 가 · 중이면서도 공하지 않음이 없으니 다 공관이요, 하나가 가(假)이어서 일체가 가면 공 · 중이면서도 가이지 않음이 없으니 다 가관이요, 하나가 중(中)이어서 전체가 중이면 공 · 가이면서도 중이지 않음이 없으니 다 중관이다. 곧 중론(中論)에서 설하는 부사의한 일심삼관(一心三觀)이니 모든 일체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若一法一切法이면 卽是因緣所生法이니 是爲假名可觀也요 若一切法이 卽一法이면 我說卽是空이니 空觀也요 若非一非一切者면 卽是中道觀이니라.一空一切空하면 無假中而不空하니 總空觀也 一假一切假하면 無空中而不假하니 總可觀也요 一中一切中하면 無空假而不中하니 總中觀也라 卽中論所說의 不思議一心三觀이니 歷一切法竝如是니라.
(摩詞止觀;大正藏 46 p.55 中)
공이 있고 가가 있고 중이 있다고 하여 마치 무슨 흙덩이같이 참으로 하나 하나 있는 줄 알면 실로 공 · 가 · 중을 모르는 것입니다. 공이라 하면 가와 중이 거기에 포함되고, 가라 하면 공과 중이 포함되며, 중이라 하면 공과 가가 거기에 포함되어 삼제(空 · 假 · 中)가 완전히 원융해집니다. 아무리 각도를 달리 하여 잡아도 포착할 수 없는 실제의 참된 부사의한 도리를 표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말하지만, 실로 하나를 들면 전체가 다 따라가고 전체라 하면 그것이 곧 하나로, 전체를 제외하고 하나가 따로 없고 하나를 제외하고 전체가 따로 없습니다. 이를 부사의한 일심삼관이라 하는데 삼관만이 아니라 일체만법이 또한 이와같은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법(法)과 하나하나의 능(能)과 하나하나의 소(所)에서 모두 즉공(卽空) · 즉가(卽假) · 즉중(卽中)하여 제(諦) · 연(緣) · 도(度)를 구족하면, 이것을 통함도 없고 막힘도 없으며 통함과 막힘을 쌍으로 비추는 것이라 이름하느니라.
若於一一法과 一一能一一所에 皆卽空卽假卽中하여 具足諦緣度하면 是名無通無塞 雙照通塞이니라.(摩詞止觀;大正藏, 46券 p.87 中)
주체(能)이든지 객체(所)든지 진진찰찰(塵塵刹刹)에서 공 · 가 · 중하여 사제(四諦), 십이연연(十二因緣), 팔정도(八正道)를 갖추면 트임도 없고 막힘도 없으면서 서로 통하고 서로 막힙니다.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이면서도 산과 산, 물과 물이 각각 완연하다.(山山水水各宛然)'는 말입니다. 결국은 쌍차쌍조(雙遮雙照)를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중도제일의관(中道第一義觀)이란 먼저 가가 공함을 관하니 이는 생사를 공하고, 뒤에 공이 공함을 관하니 이는 열반을 공하여 두 변을 쌍차하니라. 이것을 두 공관(空觀)이 방편도가 되어서 중도를 아는 것이라 이름하느니라. 그러므로 마음 마음이 적멸하여 살바야해에 들어간다고 하느니라. 처음의 관에서 공을 사용하고 뒤의 관에서 가를 사용하니 이것은 쌍으로 존재하는 방편으로 되어 중도에 들어갈 때 능히 이제를 쌍조하느니라. 그러므로 경에 말하되 마음이 만약 정(定)에 있으면 능히 세간의 생멸하는 법의 모습을 안다고 하니, 앞의 두 관법을 두 종류의 방편으로 삼은 뜻이 여기에 있느니라.
中道第一義觀者는 前觀假空하니 是는 空生死하고 後觀空空하니 是는 空涅般하여 雙遮二邊이라 是名二空觀爲方便道하며 得會中道니라.故言心心寂滅하여 流入薩婆若海하니라.初觀用空하고 後觀用假하니 是爲雙存方便하여 入中道時에 能雙照二諦니라.故經에 言호대 心若在定하면 能知世間生滅法相이라하니 前之兩觀을 爲兩種方便意在此하니라.
생사와 열반은 서로 상대적인 것으로 모두 변견(邊見)입니다. 이 변견을 타파하기 위하여 열반도 공하고 생사도 공하여 생사와 열반을 쌍차하여 완전히 버려야만 합니다. 중생의 병을 고치기 위한 방편으로 필요한 약이 부처인데 병이 다 낫고 보면 부처란 약이 필요 없습니다. 병이 다 나으면 부처란 약이 필요없는데도 불구하고 부처란 약을 집착하게 되면 이 병이 더 큰 병입니다. 사람이 건강하여 약이 필요없는데도 약을 자꾸 고집하면 이 사람도 미친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와같이 중생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불(佛)아나 열반이니 하는건데, 참으로 병이 나으면 약이 필요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열반이고 해탈이고 다 필요없습니다. 생사는 좋지 못한 것이고 열반은 좋은 것이라 하여 끝까지 취한다면 결국 불을 피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같습니다.
살바야해(薩婆若海)는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뜻하므로 살바야해에 들어간다는 말은 곧 성불(成佛)한다는 뜻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살바야해에 흘러 들어간다고 하니 중도를 깨쳐서 다시 살바야해에 들어가는 줄로 알면 잘못입니다. 실제로 중도를 바로 깨치면 그 깨친 그대로가 살바야해인 것입니다.
유 · 무가 쌍조되고 생 · 멸이 쌍조되면 참으로 원융무애한 무장애법계가 벌어집니다. 생멸법상을 바로 바라보면 그것은 중도로서 참으로 적적합니다. 그러나 적적하다고 해서 거기에 취해 있다면 그것은 중도를 바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들은 적멸이라 하면 적멸에 빠지고 생멸이라 하면 생멸에 빠지므로 앉아도 병이고 서도 병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병을 고치기 위해 몸소 애써 유 · 무나 공 · 가의 방편을 활용하여 중도의 법문을 설하는 이것이 부처님의 뜻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