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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예전에 얼마동안 농사일을 해본 일이 있습니다.
채소도 심었었고 콩도 심었었고 참깨도 심었었고 벼농사도 해 보왔습니다.
저는 농사를 지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참 많이 들은 것 같습니다.
한번은 복숭아 나무에 약을 치는데 다 하고 마지막 한줄을 하려니 농약이 떨어졌습니다. 다시 농약을 타서 하려니 귀찮아서 그렇게 여러번 약을 쳤는데 한번 빠진다고 뭐 그렇게 잘못될 일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일을 마쳤습니다.
그해 가을 복숭아를 수확할 때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른 곳은 정말 엄청나게 굵은 복숭아가 자기를 뽐 내듯이 열려 있는데 한줄은 대부분이 썩었고요 거의 그줄은 복숭아를 따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과정을 보면서 저는 아 신앙의 모습도 마지막 한 줄을 잘 해야 되겠구나 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해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모내기 철이 되었습니다.
고향 교회에 살다 보니 교회소유로 된 넓은 땅이 있었습니다.
모내기를 하여야 하는데 제가 당시 문서전도를 하면서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제때 모내기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언제까지 모내기를 하지 않으면 수확을 할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빠서 그 날이라고 하는 그 이튿날 아마도 모내기를 한 것 같았습니다.
며칠 차이가 나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기 위하여 하다가 늦었는데 도와 주시겠지 하면서 모를 심었습니다.
그해 가을에 벼수확을 많이 했을까요 적게 했을까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오분의 1정도의 수확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런 것을 보면서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성품도 익을 때를 성품의 씨앗도 때를 놓치면 그렇게 죽정이가 되겠구나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지금은 어느때라고 합니까?
본문과 크게 상관이 없는 듯 한 말씀하나를 올려드립니다.
고후 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은 어떤 날이라고 합니까? 은혜의 날이요 구원의 날이라 하죠?
무슨 말씀입니까? 이 시기도 좀 있으면 지나간다는 말씀 같습니까?
이 은혜의 시기에 이 구원의 날에 우리 성도님들 추수의 날에 놓은 열매들로 나타나는 준비들이 이루어지길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농사와 관련된 비유를 주신 이유를 좀 알 듯 합니까?
이제 씨뿌리는 자로 오신 하나님께서 울면서 씨를 뿌리시고 그 뿌린 씨앗의 결과를 거두러 오시는 날 우리 모두 알곡으로 하늘 창고에 가두어 들임을 받으시는 은혜가 있길 축복합니다.
오늘 비유의 말씀을 보면 네 종류의 땅이 나옵니다.
농사를 짓다 보면 이런 경험을 많이 합니다.
씨를 뿌리다 보면 밭이 아닌 길에도 씨앗이 떨어지기도 하고요.
바위 위에도 떨어지기도 하고요, 풀숲에도 떨어지기도 하고요. 가꾸어 놓은 좋은 땅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많은 경우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가지고 귀중한 진리를 설명하셨습니다.
오늘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의하여 떨어지는 씨앗을 가지고 소중한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이미 교독한 말씀이지만 다시 한번 본문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눅 8: 5-8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습니까?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알듯 알듯 하면서도 잘 이해되지 않는것 그래서 제자들이 다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씨뿌리는 비유를 설명하여 주소서 하고.
주님께서는 친절하게 다시 설명해 주셨습니다.
눅 8:12-15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몇 종류의 땅이 나옵니까? 첫 번째는 길가고요, 두 번째는 바위 위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가시 떨기이고요, 네 번째는 좋은 땅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네 종류의 땅중에 어떠한 땅으로 서길 원하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토양이 되어서 많은 결실을 얻어 우리의 마음에 씨를 뿌리신 우리 하나님께 영광돌리시는 성도되시길 축복합니다.
그 첫 번째의 땅은 어떤 땅이라고 합니까?
눅 8: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첫 번째 땅은 길가입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고 말하죠
여러분 오늘 말씀을 듣고 새들이 여러분들 마음에 말씀을 먹어버리는 그러한 밭이 되지 않길 바랍니다.
길가를 예수께서 어떻게 가르쳐 주셨습니까?
눅 8: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길가에 다는 것은 다른 말로는 길가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자니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합니다.
오늘 우리 중에도 길가와 같은 땅이 있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될 때 그렇다는 말씀입니까? 들은 말씀을 상실해 버리면 그렇다는 것이죠?
우리 성도님들 여러분들의 마음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을 사탄이라는 새에 의하여 빼앗기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길 소망합니다,
말씀의 평행절이 되는 마태복음에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누가 복음의 말씀과 무엇이 다른 것 같습니까?
누가복음에는 마귀가 말씀을 들은 자가 구원을 받지 못하도록 말씀을 빼앗는다고 기록하고 있고요,
마태복음에는 말씀을 들은 자의 상태에 대하여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하지 못할 때 사탄이 빼앗아 간다고 합니까?
들은 것을 어떻게 하지 못할 때에요? 예 깨닫지 못 할 때에.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십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말씀을 듣고 무언가를 깨닫지 못한다면,
말씀의 의미가 통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오래 남아 있기가 쉽겠습니까? 사라지기가 쉬울까요? 예 사라지기 쉬운 것임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 전 말씀을 읽을 때 말씀을 잘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할 때도 말씀을 들으시는 분들이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제가 말씀을 좀 더 바르게 깨닫고 이해하게 해 달라고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말씀을 준비할 때도, 준비하는 저도 깨닫게 해주시고. 말씀을 듣는 주의 백성들도 말씀을 잘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드립니다.
깨닫지 못 할 때에는 전하는 자와 듣는 자의 수고가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땅과 길가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차이를 아시게 되면 길가를 옥토로 만드는 복이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마13: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좋은 땅의 의미는 무엇이라 합니까? 말씀을 깨닫는 것이다.
13장19절에는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 할 때는 이라고 기록되어 있죠?
깨닫는 자는 좋은 땅이고 깨닫지 못한 땅은 길가 땅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주님 앞에 나오실 때마다 들려지는 말씀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고 그런 심령으로 주님앞에 나오시길 소망합니다.
상처를 준 사람은 그 말을 금방 잊어버려도 상처를 받은 사람은 그 말을 잊지 못하는것 왜 그런지 아십니까?
상처를 준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한 말인데 상처받은 사람은 가슴에 못으로 밖힌 말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깨닫음이 있을 땐 감동이 있지만 깨닫음이 없으면 아무리 유창한
설교라 하드라도 재미는 있을 찌라도 은혜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귀한 은총을 말씀을 들으시는 우리 모든 분들에게 주시길 소원합니다.
우리 모두 다 들려지는 말씀 밝게 깨닫고 좋은 땅 화 되는 귀한 복을 받아 열 배가 아니라 백배 이상의 수확이 여러분의 삶에 일어나길 축복합니다.
깨닫는 것은 사단이 가져가지 못한다,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오늘 길가에 떠러진 씨앗을 통해 주신 교훈입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성도님들 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두 번째 땅은 바위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눅 8: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바위 위에 씨앗을 심는 사람도 있습니까?
제가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하였습니다.
제가 시골에서 농사를 지을 때 밭 한가운데 한 삼분의 1평 정도 되는 납작한 바위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아깝습니까? 그래서 그 땅을 사용하려고 그 돌 위에다가 흙을 잔뜩 올려 놓고 씨앗을 뿌렸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누가복음 8장 6절의 말씀대로입니다.
싹이 나서 좋아 했습니다.
그러나 가뭄이 와서 비가 오지 않으니 제일 먼저 비실비실 골다고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을 예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눅 8: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어떻게 받으나 합니까?
그리고 무엇이 없어서요? 뿌리가 없어서.
큰 교회엘 있어 보면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이런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예배 시간에는 은혜는 혼자 다 받은 것 처럼 아멘 아멘 하면서 감사하면서 말씀을 받고 기쁨으로 돌아가는데 그의 생활을 보면 교회에 가장 많은 욕을 먹인다. 합니다.
전 그런 분들을 비난이나 잘못되었다고 말씀 드리는것이 아닙니다. 그도 어쩔수 없으니까요. 왜 그러한 모습이 보입니까? 어디에 떨어졌기 때문이라고요?
예! 바로 돌밭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까 농사를 지을 때 돌위에 땅이 아까워 씨앗을 뿌렸다고 말씀드렸죠.
첨에는 잘 자랍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자라다가는 더 이상 자라질 못합니다.
왜냐고요, 더 이상 뿌리 내릴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전 그래서 그 아래 있는 돌을 파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옥토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귀한 성도님들 여러분들 가운데 이러한 돌밭 신앙 가지신 분 계시지 않나요. 어쩜 우리 모두 그러한 신앙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그 밭을 말씀하시면서 뿌리가 없어 시험이나 환란이 오면 넘어지는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힘으로 할수 없는 것입니다.
씨앗이 돌 위에 떨어져서 싫다고 한들 돌이 없어집니까?
우리의 농부 되시는 주님께서 돌을 제거해 주시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저는 농사를 지을 때 곡식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아래 돌을 파내어 달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즉시는 못 하였지만 그 돌을 파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리를 들으실까요?
돌 때문에 더 이상 뿌리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도와 주소서 돌을 제거하여 주소서 라는 우리의 신음 수리를 들으실까요? 예 더 잘 들으십니다. 신음하는 소리까지 들으십니다.
싫어 몸부림치는 소리도 들으십니다.
단 우리가 뿌리 없는 신앙을 싫어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돌을 제거하시지 못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모습일 때는 하나님께서도 하지 못하신다고요?
우리가 싫어하지 않으면 말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장유의 재림을 기다리시는 귀한 하나님의 백성들이시여 뿌리없는 신앙을 싫어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발 아래있는 뿌리 내리지못하게 하는 장애물들을 다치워주시길 축복합니다.
또 하나는 돌을 치웠을 때 우리는 뿌리를 내리기 위해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실천 신앙입니다.
정말 좋은 땅 되기를 원하신다면 매일 짧은 시간이라도 기도의 시간을 정하여 실천 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루 한절씩이래도 말씀을 대하는 습관을 가져 보시길 바랍니다.
처음에는 잘되지 않아도 질이 나면 그러한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기까지 그러한 연습이 필요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신앙을 하게 되었고 제가 나이 13살 때 부모님과 함께 신앙을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은 그만둔다고 교회는 가지 않지만 식사 때마다 기도하는 것은 습관이 되어서 밥상을 받으면 으레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니 저희 아버지께서 기도도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것도 한참 노력을 한 후에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삶이 억지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야 할까요?
그래서요 전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다 안식일 금요일은 말할 것도 없고요, 화요일 저녁에도 교회 가지 않으면 좀을 수시는 것 처럼 같아서 마음이 편하지 않은 그런 상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입니까? 아멘이 안되나요?
새로 오시는 목사님 눈에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전을 찾는 것으로 들어나는 것처럼 보이길 소망해 봅니다.
교회 가고 싶은데 차좀 태워 주세요 라는 그런 것은 염치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신앙의 아름다운 습관들이 자연스레 일어나도록 우리 자신을 훈련 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좋은 땅이 되어 백배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소원하시는 성도님들 예수님안에 더 깊이 뿌리를 내리기 위하여 매일 실천 신앙을 연습하시는 성도님들 되시어서 어떤 폭풍우에도 견뎌내는 믿음의 사람들로 서게 되길 축복합니다.
세 번째 밭을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 8:7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이 말씀은 어떻게 설명하십니까?
14절입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이 말씀은 어떤 말씀입니까?
우리의 믿음의 성장을 가로막는 가시떨기가 무엇이라는 말씀입니까?
신앙하면서 필요 이상의 걱정들을 하시는 분들 많이 있죠? 우리 성도님들은 그런 부류에 속하지 않으십니까?.
제가 그러한 삶을 많이 살았습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무엇임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하나님 자리에 언제나 서려 한다는 것입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토양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가르쳐 주던가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요 도리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가꾸어 주시는 농부를 통해서 주어지는 영양분을 공급받아 식물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 농부의 자라에 서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땅이 농부가 되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가시 떨기에 뿌려졌다고 씨앗이 노력한다고 가시떨기를 제거할수 있나요?
땅이 가시떨기를 제거 할 수 있습니까?
전혀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 가시 떨기를 우리의 힘으로 제거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나요? 그렇게 해서 노력하여 얼마나 제거하셨나요?
성경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마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염려해서 키를 키울 수가 있다면 키 작은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겠죠?
우리를 땅으로 설명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땅은 토끼가 오줌을 싸도 생쥐들이 밟아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세상 염려와 재리의 유혹은 하나님 백성 들로 하여금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사단의 작품임을 기억하시고 필요 없는 염려와 걱정들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벧전 5:7을 보겠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우리의 열매를 위해 애쓰시는 주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우릴 도우시는 분이 주신 말씀입니다. 염려를 다 어떻게 하라고요?
주께 밭겨 버리라 주신 말씀처럼 주께 맡겨 버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있는 모든 가시들 잡초들 주님께서 다 제게하실 줄 믿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밭이 바로 좋은 땅입니다.
네 번째 땅 좋은 땅에 대한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눅 8: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오늘 이곳에는 우리가 좋은 땅이 아니더래도 실망하지 않고 용기를 얻을수 있는 한가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말씀은 “더러는“이라는 말씀입니다.
더러는 길가에 더러는 돌밭에 더러는 가시 떨기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씨앗중 4분의 1만이 좋은땅에 떨어졌습니다.
나의 밭이 길가라고 실망하지 마시고요?
돌밭에 덜어졌다고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가시 떨기에 떨어진 씨앗이라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위해서도 갈바리로 가실 만큼 그분은 자기 농장을 아끼시고 사랑하심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하물며 4분지 3이되는 씨앗을 주님께서 관리 하시는데 소홀 하시겠습니까?
결코 실패함이 없는 우리의 농부되시는 주님께서 자기의 몸을 우릴 위해 거름으로 주시고 자기의 피를 우릴 위해 수분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목숨을 다하도록 우릴 돌보시고 가꾸어 주셨습니다.
다만 나의 태도에 달렸습니다.
예전에 저희들이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밭 한 중앙에 조금 다른 포도나무 한그루가 있었습니다. 보니 다른 나무하고 달랐습니다. 열매도 더 굵은것 같고 모든 것이 다른 나무보다 더 좋아 보였습니다.
그러니 저의 마음이 다른 곳보다 더 관심이 갔습니다.
그래서 밭에 가는 일이 있으면 거의 그 나무를 보고 돌아왔습니다.
이제 열매가 익어갈 즈음이 되었습니다.
비록 다른 나무의 열매처럼 큰 송이는 아닐찌라도 그런대로 잘 익었습니다.
먼저 하나 따서 먹어보왔습니다. 근데 맛이 영 아니였습니다.
이건 캄벨맛도 아니고 거봉맛도 아니고 머루맛도 아니고 하여튼 맛이 없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였겠습니까? 이와같은 이야기가 성경에도 나옵니다.
눅 13:6-9“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8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지금 우리의 마음의 토양은 농부되시는 주님께서 가꾸는 시기입니다.
지금은 길가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돌밭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가시밭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것들을 제해주시고 좋은 토양을 만들어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니까요. 그리고 그 일을 시작하셨음을 우리는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아무리 좋은 토양을 만들어 놓아도 우리가 씨앗을 거절하면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늘이 우리에게 보여준 이 귀한 은혜를 거스리질 마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우릴 열매맺는 백성 만들기 위해 하늘이 치룬 그 희생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 좋은 땅이 되어 주님 거두러 오실 때 열배 백배의 열매를 주께드릴 수 있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기도
하늘에 계시는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 마음의 땅에 말씀의 씨앗을 주시어 감사합니다. 농부되시는 아들을 보내시고 돌을 제거하고 가시덤불을 제거하여 좋은 땅으로 만들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 말씀에 순종하고 섬기는 것이 무엇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섬기는 종들이 되어 풍성한 열매 맺는 밭들로 영광의 날을 맞이하게 하옵소서
우릴 사랑하시되 끊임없이 사랑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눅 8: 5-8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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