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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양구간 [2부]
4월 30일 (일) 오전 2시 10분. 바람이 서늘하다. 실제로 바람이 부는 것은 아니고, 배가 전진하면서 느껴지는 맞바람이 2.1노트 정도 된다. 바다 한가운데라 육지처럼 낮에 달아오른 여열이 없다. 잠시 바람을 맞으면 오한을 느낀다. 담요를 끌어 몸을 덮어야 체온을 유지할 수 있다. Rpm 1,400. 선속 4.8노트. 남은 거리 1,049해리, 699해리 왔다.
오전 4시 40분. 벌써 여명이 밝아 온다. 하늘의 구름이 비칠 정도로 바다가 잔잔하다. 구름아래 수평선이 보이지 않아 신비하기 까지 한 바다. 인상파 화가가 그린 호수 그림 같다. 세수를 하고 커피를 끓여 온다. 커피 잔을 손에 들고 무풍지대의 바다를 구경하고 있다. 눈에 많이 담자. 언제 또 올지 기약 없는 인도양이다. 제네시스가 진행하는 물결만 바다에 여울진다. 선속 4.7노트. 무풍지대를 통과 중이다.
해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 36년 전 겨울. 입대하고 까까머리로 훈련 받을 때, 나이든 준위 분께 들었던 일장훈시였다. 지금으로선 언제 해뜰 지, 바람이 언제 올지 짐작이 안 간다. 그러나 곧 해가 뜨고, 오늘 저녁이면 무풍지대를 깨러 바람이 달려 올 거다. 오늘 밤이나 내일 아침이면, 이번 항해의 절반 지점을 통과하게 된다. 이번 항해가 내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 줄 지 알 수 없다. 나는 내 인생을 치열하고 조밀하게 만들려고 노력중이다. 적어도 허투루 낭비하진 않았다. 귀국 후의 일을 생각해도, 여전히 뚜렷한 전망을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곧 해가 뜨고 소망들이 이루어 질 거다. 내 나이 60에 곧 해가 뜨리라고 믿는 건, 그리 서두른 것은 아니지 싶다. 식어버린 커피 잔을 손에 들고 혼자 중얼거린다. ‘해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
물이 새는 노이랏의 배처럼, 우리는 주어진 불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출발합니다. 그 배를 타고가면서 그 배 자체를 고쳐야하고, 고칠 수 있습니다. -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중
오전 6시 30분. 연료 탱크의 연료가 절반 남았다. 화요일 오전 6시 30분 엔진 On, 오늘 일요일 오전 6시 30분까지 120시간(5일) 항해에 디젤 175리터를 소모했다. 시간당 평균 1.458리터를 소모했다. 이대로라면 5일을 더 갈 수 있다. 아마 기름 탱크만의 디젤로 인도 끝 부분까지 항해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오늘 오후나 내일 오전 200리터를 보충하기로 한다. 어쨌든 연료는 바다가 잔잔하고, 기회 있을 때 채워 놓는 게 답이다. 다만 바다가 잔잔하니, 200리터를 채우기 위해, 연료탱크의 연료가 150 리터 미만이 될 때까지 기다릴 거다. 선속 5.0 노트, 719 해리오고, 1,029 해리 남았다.
오전 7시 10분. 오늘 아침도 버라이어티하게 먹는다. 일단 씨리얼에 우유. 아주 짠 소시지를 잘게 잘라 넣고 끓인 파스타에, 크노르 야채 스프를 넣어, 걸죽한 국물 파스타로 준비한다. 식빵과 딸기잼도 하나. 아침 식사 음악은 에디뜨 피아프. 인도양의 무풍지대에서 맞는 ‘장밋빛 인생’의 아침 식사다. 이런 멋진 아침 식사를 하고, 나는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를 시작할 채비를 마친다.
으~ 짜다. 특제 파스타를 한입 물고, 나도 모르게 나오는 한탄이다. 이집트에서 산 크노르 스프는 거의 소금국이다. 더운 이집트에서 땀을 많이 흘리니, 야채 스프가 이렇게 짤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탈리아에서 산, 굵은 실에 칭칭 동여매져 있는 먹음직스러운 쏘시지도 거의 소태다. 이건 그냥 잘라 먹는 용도가 아닐 것 같다. 만약 이 소시지를 그냥 칼로 쓱싹 잘라 먹는 용자가 있다면, 나는 항복이다. 소금 한 알 넣지 않은 자작 레시피의 짜디 짠 파스타로 아침을 마친다. 이제부터 30분, 차가운 캔 콜라 하나 들고 맹하니 바다를 조망하는 넋 빠진 시간이다. 생각도, 걱정도 없이, 초점도 없는 눈으로 목적 없이 소실점을 바라보고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인류의 대멸종이 들이닥쳐, 인간이라곤 인도양에 오직 나 혼자만 있다고 해도, 전혀 의심가지 않는 아침이다.
배가 묵지근해서 예방 차원에서 정로환을 먹는다. 그런데 이 정로환이,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러시아와 전쟁을 하며, 일본군인들이 물갈이 배탈하지 말라고 만든 약인 걸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거다. 그래서 이름도 정로(러시아를 정벌) 환이다. 지금의 한자 이름은 바뀐 것으로 안다. 믿거나 말거나다.
오전 8시 10분. 남풍이 4노트다. 바람이 아까워 메인세일을 편다. 선속 5.4노트. 여전히 거울 같은 바다에 날치만 이리저리 나른다.
오전 9시. 통영 비지터지2 이준희 선장님의 위성전화 콜을 받았다. 좌표 북위 14. 02 , 동경 066. 26. 를 불러 드리니, 4시간 후부터 (오후 1시) 뒷바람으로 바뀌며 6~9노트 바람이 불 거라고 하신다. 다른 특이점은 없다. 기름은 현재 180리터 정도 사용 했다고 알려 드린다. 매일 잊지 않고 전화 주신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오전 11시. 디젤유 160 리터를 연료탱크에 보충한다. 게이지가 거의 끝까지 온다. 어쩌면 이 게이지도 자동차처럼 여유눈금을 가졌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320~340 리터 정도 채운 것 같다. 이대로 10일 정도 운항 가능하니 이정도면 스리랑카 Galle 까지 갈 수 있을 거다. 엔진 Rpm 1,400. 선속 5.1 노트. 위성전화가 울리다 끊어진다. 인공위성 신호가 약한가 보다. 인도양은 여전히 무풍.
오전 11시 20분. 카레 파스타와 오이지로 점심.
오후 12시 30분. 무풍. 선속 5.2노트. 남은 거리 998 해리, 750 해리 왔다. 드디어 1,000 해리의 벽을 지났다. 전체 구간의 43%를 통과했다.
어떤 분들은 그럴 것이다. 뭣 때문에 이렇게 자주 거리를 측정하고, 500해리, 1,000해리 통과를 거론하느냐? 별 것 아니지 않느냐? 항해 하다보면 어차피 언젠가 도착할 것이고. 맞다. 그러나 이 기록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최소한 14일 동안 홀로 인도양을 항해하는 외로운 사내. 바로 나를 위한 것이다. 24시간 작은 배에서 하루 종일 바다만 바라보고 있다. 단조로운 엔진 음, 또는 바람, 파도 소리만이 벗이다. 뜨거운 햇살과 공기를 피해 여기저기 차광막을 옮기면서 간신히 그늘을 만든다. 한밤에도 잠들지 못하고, 레이더를 확인하며 견시 해야 한다. 1,000해리의 벽을 통과 했음에도, 여전히 8일이 남아있다. 나는 겨우 5일을 왔을 뿐이다. 반도 못 왔다. 나는 그 고독한 사내에게 용기를 주어야 한다. 축하해! 이제 998해리 남았어. 기다려, 곧 북풍이 올 거야. 이제 254해리만 더 가면 남쪽으로 침로 변경 할 수 있어. 그때는 뒷바람 항해야. 훨씬 빠르게 진행 할 수 있을 거야. 이렇게 작은 목표와 작은 성과를 침소봉대하여, 그 사내에게 힘을 북돋워 줘야 한다. 이 배엔 나 자신 외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레몬 같은 달이 마스트에 걸린 밤엔, 일부러 갑판에 나가지 않는다. 내 심리상태를 누가 알겠는가? 진공의 인도양에서는, 무슨 일이 생겨도 무리 없는 예측이 가능하다. 우울과 좌절은 병이고 적이다. 나는 나를 고무하고, 위로하고, 칭찬하고, 달랜다. 그래서 조그만 변화에도 민감하게 기록하고 기뻐하는 거다. 너무 섭섭해 말기를.
오후 1시 10분. 뒷바람 2.7 노트. 무풍이다. 다만 선속은 5.4 노트로 약간 올랐다. 3번 웨이 포인트까지 251 해리. 1일 23시간 남았다.
오후 2시 15분. 잠깐 졸다 깨다. 뜨거운 햇살에 엄청나게 땀을 흘리며 잤네. 풍속 포트 쿼터런 4.3 노트. 선속 5.8노트. 약하긴 하지만 바람 방향은 북풍이다. 메인 세일 Full. 집세일 110% 편다. 이대로 바람이 조금씩 강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바다 위가 온통 꽃가루 같은 것으로 덮여 있다. 강릉 바다에서 송홧가루가 뿌려지면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하지만, 여기는 육지에서 700 해리 떨어진 곳이다. 기류에 날려 온 것인가? 아니면 조류에 실려 온 것인가? 몇 시간째 바다위에 덮여 있는 노란 먼지 위를 항해중이다.
오후 2시 50분. 풍속 포트 빔리치 5.1노트, 선속 5.5 노트. 제네시스는 약한 바람과 무풍지대의 바람 골들을 지나고 있다.
오후 3시 40분. 아직도 바람이 오락가락 하는 가운데를 지난다. 제네시스는 바람이 오면 선속 5.8노트, 멈추면 5.2노트를 오가고 있다. 출항 전 다운 받아 둔 오늘자 윈디 예보를 보면 마치 양떼구름 같이 바람이 들락날락하는 상태다. 윈디가 10일 앞까지도 잘 맞춘다. 대단하다.
호수 같은 인도양을 바라보다, 갑자기 침울해 진다. 나는 지금 무슨 영화를 바라고 이러고 있나? 스리랑카까지도 아직 8일 남았고, 반도 못 왔다. Galle에서 3~4일 머물며, 물과 기름, 식품을 보충한다. 엔진오일도 교환할 예정이다. 스리랑카에서 랑카위까지 또 1,192해리 9일 항해다. 이후론 동남아시아 항로를 조금 짧게, 한두 명의 지인들을 크루로 함께 항해할 예정이다. 어쨌든 앞으로도 단독 항해로만 17일 이상해야 한다. 결코 흥미진진한, 신나는 항해가 아니다. 지루하고 고독한 내부로의 투쟁이다. 예상했던 항해도 아니다. 콕핏에서 하루 종일 땀을 뻘뻘 흘린다. 미로에 갇힌 것 같다. 세계일주 항해로 직접 배를 가져 오는 것. 내 판단은 옳았나?
문제는 너무나 예상치 못한 항해가 되었다는 거다. 여러 번 패닉에 빠졌었다. 아마 랑카위 부터는 예전 필리핀 항해의 경험으로 봐서, 대략 짐작대로 될 것 같다. 아드리아해, 지중해, 수에즈, 홍해, 아덴만. 여러 나라의 노련한 세계일주 항해 선장들과 인사를 하고, 그들의 소중한 경험을 배웠다. 아마 다시 한 번 이런 기회를 가진다면, 나 역시 마음과 항해의 준비를 전혀 달리 할 거다. 지금은 인도양에서, 예상치 못한 진공의 하루하루를 겪고 있다. 혼자 바다에 소리친다. 김명기 선장! 용기를 내라. 맛난 저녁이나 드시지!
오후 6시 20분. 아직도 무풍이다.
오후 8시 55분. 전방에 아주 작은 불빛이다. 레이더엔 분명히 나타난다. 하지만 해무 탓인지. 먼 곳 항해등은 보이다, 사라지다를 반복한다. 일단 스타보드 30으로 침로를 변경하고 상대방 배의 진로를 본다. 20분을 지켜보니 내게 더 다가오지는 않는다. 다시 침로를 원상 복귀하고, 레이더로 상대방배의 진행방향을 살핀다. 제네시스와 1해리 간격을 두고 스쳐 지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AIS가 없으니 상대방 진로를 알 수 없어 벌이는 해프닝이다. 상대방 배의 항해등을 살피다 보니 불빛이 몇 개 더 보인다. 레이더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 최소 24마일 밖의 불빛이라는 건데. 야간에는 50키로 밖의 선박 항해등도 보인다는 말이다. 대단하다. 여전히 무풍.
5월 1일 오전 3시 50분. 어둠 속에 별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람 방향은 북동~북풍이지만, 2.3 노트로 의미 없다. 무풍이나 다름없다. 선속 4.8노트. 역조류도 있나보다. 826해리 오고, 922해리 남았다. 나비오닉스에 인도 서부 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루 더 가면, 저 섬들 사이로 빠져 나가야 한다. Unexam와 Elikalpeni Bank 사이다. 여기는 수심 2,000에서 갑자기 20~100 미터가 되는 바다 속 산꼭대기다. 어부들이 친 그물이 있거나, 혹은 암초가 있을 수 있다. 항로를 잘 지키며 주의해서 지나야 한다.
제네시스는 엔진이 있으니 무풍지대를 거침없이 지나간다. 100년 전 뱃사람들의 항해를 생각해 본다. 이들은 오직 바람으로만 항해해야 했다. 5월의 인도양은 남동풍이 대륙을 따라 오만 해안을 거치며 파키스탄 까지 올라갔다가 인도 해안을 따라 내려 온다. 그러면 지금의 이 무풍지대는 꼼짝 없이 기다리며 해류에 의해 표류해야 했을 거다. 어느 방향으로든 바람이 불 때까지 기다린다면 그게 며칠이 될지, 몇 주가 될지 모르는 일이다. 때로 죽음에 이를 때까지 기다려야했겠지. 그래서 그들은 자료를 모으고 책을 만들어 해류와 바람을 이용해서 항해했던 거다. 아덴만에서 스리랑카로 갈 때는 대륙 해안을 따라, 반대로 갈 때는 훨씬 아래의 바람을 타고 갔겠지.
오전 4시 20분. 위성전화가 울린다. 누구지? 아하, 제주도에 살고 있는 대학 후배 강경범 사장이다. 대학 동아리로 만나, 지금까지 35년 가까이 제자리를 지키며 선후배들을 챙기는 의리 넘버 원! 제주도 사내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한국은 지금 오전 9시구나. 5시간 빠르네. 반가운 인사를 하고 안부를 전한다. 밴드를 하지 않아 내 소식을 몰랐단다. 어쨌든 목소리 들으니 너무 좋다. 강릉으로 돌아갈 때, 제주도 들렀다 가란다. 너무 그렇게 하고 싶다. 홍성방 중국요리도 무척 생각난다. 일단 6월 말에 생각할 일이다. 짧게 인사하고 전화는 끊겼다. 오키나와에서 제주도로 가면 김녕항으로 가야하나? 강정항으로 가야 하나?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인도양에 여명이 다가 온다.
오전 4시 50분. 아침은 시리얼에 우유로 해결하기로 한다. 남은 시리얼을 처리해야 한다. 오래 두면 눅눅해 진다. 선실 부엌에 가니 설거지통에 나방이 익사했다. 참 어이없다. 어제 밤부터 콕핏 근방을 팔랑거리며 날던 녀석이다. 어딘지 모르지만 육지로부터 1,300Km를 날아와, 주변이 온통 바다인데 설거지통에 빠져 죽다니. 대단한 노력 끝에 허무한 죽음이다. 여기서 교훈은 있나 없나 한참 생각중이다.
오전 5시 30분. 해가 떴다. 바람이 빔리치 4~5노트가 되자, 4.6노트 이던 선속이 5.2 노트로 회복된다. 이대로 바람은 계속 불건가? 해수면 바람 얼룩이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6~9 노트 바람이 회복되기를 기다려 본다. 이제 속옷, 수건 등 간단한 세탁을 할 시간이다.
오전 5시 40분. 청해 부대에서 위성전화가 왔다. 현 위치부로 더 이상은 연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으로 해수부 종합 상황실에서, 1일 1회 위치 확인을 한다고 한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인사는 짧게 끝났지만 고마움의 여운은 길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대한민국 해군 함정, 청해 부대가 주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힘이 되었다. 앞으로도 한동안 아덴만을 지나는 선박들은, 청해 부대의 지속적인 연락을 받고 나처럼 위로가 될 거다. 그나저나 아덴만의 해적질은 이제 다 끝난 건가? 그러면 다국적 군의 함정들은 철수하나? 지부티의 경제는? 지부티에 상주하는 무싸님과 그 가족들은? 여러 가지 의문이 꼬리를 문다. 오직 신만이 아실 일이다. 무싸님과 그 가족을 위해 기도한다. 아직도 무풍지대는 계속 된다.
노트북을 열어 지난 자료들을 살펴본다. 강릉항요트마리나 정상화를 위해 애쓴 흔적들이 있다. 민원문, 결의문, 라디오 인터뷰, TV 뉴스 인터뷰. 무슨 에너지로 저런 일을 했는지 모를 일이다. 고향 강릉의 해양레저 발전을 위해,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4년간 부단히 일했다. 결국 (사)강릉마리나선주협회는 정식 마리나를 설립 운영하게 되었다. 일종의 기적인 셈이다.
젖먹이 리나와 함께 한 항해들도 본다. 우리 딸이 요렇게 잘 웃는 아기였구나. 나도 모르게 볼이 축축해 진다. 괜찮다. 여기는 아무도 없는 인도양 한가운데다. 나는 그리움으로 울어도 된다. 고독한 항해 중이라면 어떤 아비라도 나처럼 딸이 그리울 거다. 딸이 보고픈 늙은 아비가 좀 울기로서니, 그게 어떻다는 말인가? 서해 외연도 항해 때 마침 생일이었던 임대균 선장과 크루들. 그 즐거운 시간도 동영상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신이 허락하신 참 아름다운순간이었다. 나는 복이 많다.
여전히 무풍이지만, 선속은 5.2 노트다. 아무래도 항해 초반처럼 7~8노트 선속은 기대하기 힘들고, 계속 이정도 항해가 될 것 같다. 결국 나 자신 조바심 내지만 않으면 안전하게 스리랑카에 닿을 거다.
이번에 유럽에서 인도양까지 항해 하면서 계속 보게 되는 것은, 돌고래와 날치다.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페트병이다. 어느 바다고 페트병에 떠다니고 있다. 인도양 한 가운데도 마찬가지다. 여러 번 배 곁을 지나는 페트병을 본다. 푸른 망망대해에 떠 있는 페트병은 신경을 거슬리는 외에 바다의 암울한 미래를 보여 주는 것 같아. 착잡하다.
오전 9시 10분. 통영 비지터지2 이준희 선장님의 위성전화가 받자마자 끊어진다. 통화기록을 보니 5초 통화라는데, 아마 인공위성 신호가 약한가보다. 여전히 무풍이라 변화 상황을 물어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뒤에 카고 하나가 나타났다. 항로가 제네시스와 겹치나 보다. 곧바로 제네시스로 오는 것 같아 신경 쓰인다. 30분 가량 지켜보고 뒤로 지나가는 방향임을 확인한다. 새벽부터 레이더에 배가 몇 척 나타나는 걸 보니 기존 항로인가보다. 레이더 확인과 견시를 더 자주하자.
오전 9시 40분 통영 비지터지2 이준희 선장님의 위성전화가 다시 연결 됐다. 9번이나 전화하신 거란다. 인공위성 신호가 약하니 쉽지 않은 일이다. 너무 감사하다. 위치(13.32.N 068.30.E)를 불러 드리니, 바람이 뒷바람 6노트 정도 일거라고 하신다. 실제로는 무풍이라고 답해 드린다. 아, 뒷바람이라 무풍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고 하시고 나도, 동의한다. 날씨는 내일까지 이대로 라니 큰 변화는 없겠다. 연료는 어제 160 넣은 후, 50리터 가량 사용하고, 물도 충분하다고 알려 드린다. 이대로 밴드에 공지 하신다고 하니 많은 분들이 걱정을 더시겠다. 시간대가 변경 되었을텐데,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일단 인도 가까이 가서 시간대 변경 할 때까지는 이 시간에 연락하기로 한다.
실은 이런 기상정보 위치 등을 확인하는 일은, 랑카위에서 나와 합류하기로 한 크루들이 해야 할 일이다. 역시 그들도 본인들이 어떤 항해를 하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는 거다. 딱하다.
오전 11시. 일부러 아주 짜게 끊인 된장찌개(실은 강된장처럼 만들고 싶었다.)와 햄 조각에 계란 프라이. 그런데 지부티에서 산 계란을 깨어 프라이팬에 깔아 놓은 햄에다 얹으니 노른자가 푹 터진다. 계란 껍질을 보니 세상에! 까만 덩어리들이 있다. 계란이 상한 거다. 햄을 꺼내 일일이 물에 씻는다. 프라이팬도 키친타월로 닦아낸다. 다시 햄을 깔고 계란을 확인 한 후 얹는다. 지부티 바와디 몰에서 4월 15일 쯤 산, 계란 같은데. 도대체 얼마나 오래된 계란이면, 속에 검은 알갱이(생선 알 또는 석류 같은 모양) 가 생겼을까. 어쨌든 내 위장을 믿는다. 흰 쌀밥에 맛나게 먹어 치운다.
오전 11시 20분. 해수부에서 위성 전화가 온다. 위치 확인하고 제네시스 전방에는 서풍 6~8 노트라고 알려준다. 감사인사를 한다. 해수부는 언제까지 전화를 하는 건지 안 물어 봤네. 내일 연락이 오면 확인해야겠다.
오후 1시. 무풍이고 모든 것은 그대로 인데, 선속이 5.7 노트다. 순조류 인가보다.
신기하고 오싹한 일이 있다. 수심계는 수심 160미터 이상부터는 측정이 되지 않고 Depth 표시가 깜빡인다. 그런데 이 마지막 수치가. 23.5 미터, 12.5 미터 하는 식으로 바뀌어져 있다. 뭐지? 그런데 어제 밤 레이더를 살피다 보니 수심계가 24.5 미터 로 정상 작동하고 있다. 나비오닉스 수심은 4,000미터로 나온다. 파악되지 않은 대륙붕인가? 10여분을 24.5 미터로 작동하다가, 다시 Depth 표시가 깜빡인다. 오늘 아침에 보니 수심계의 최종 수심이 12.5 미터로 바뀌어져 있다. 뭘까? 진짜 파악 되지 않은 해저 산봉우리 또는 고래가 물속에서 따라 오고 있었던 걸까? 단순히 수심계의 오류인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인도양 항해 50% 돌파! >
오후 1시 11 분. 남은 거리 874해리, 온 거리 874 해리다. 절반을 왔고, 절반 거리가 남았다. 지난 주 화요일(25일) 오전 7시 출항해서 6일 7시간 만에 50%를 온 거다. 앞으로 6일 10시간을 더 가면 된다. 이후 131해리를 더 가서 웨이 포인트 3번에서 남쪽으로 침로 변경한다. 혼자 물 한 잔으로 자축한다! 아, 환타라도 한 캔! 마셔야겠다. 여전히 무풍이지만 선속 5.8 노트.
그리스 문명이 수많은 식민지들을 통해 제국 곳곳에 전파되어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중 알렉산드리아만이 유일하게 부와 사상의 거대한 물결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내보냈다. 다양한 민족, 사상, 종교가 한데 뒤섞이고 어우러져 새로운 문명을 탄생시키게 될 것이다. 알렉산더는 바로 이런 것들을 준비해 놓았고 그런 연유로 2,000년 전부터 사람들은 이 젊은 승리자의 이름 앞에 멈춰 서서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 알렉산더 대왕 중, 피에르 브리앙
오후 3시 45분. 웨이 포인트 3번까지 117 해리 남았다. 해가 뜨거워 배 뒤에 담요로 차일을 만들었지만,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한다. 바람이 없거나 뒷바람이 5~6노트면 선속 5.3 노트와 상쇄되어 바람이 멈춘 것 같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혹시 몰라 세일을 펴 두었지만, 젖은 빨래처럼 늘어져 있다. 남은 거리 860 해리. 이제는 제네시스의 현 위치와 인도 서부 해안이 나비오닉스에 같이 표시 된다.
우현 전방 1시 30분 방향에 화물선이다. 4해리 까지 다가와 자세히 보니, 우리 배의 우측으로 지나가는 모양새다. AIS 리시버가 반드시 있어야 하겠다.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레이더나 야간에는 알 수가 없어, 배가 어느 정도 접근할 때까지 초긴장 상태다. 이탈리아 오트란토에서 AIS 리시버 구매 실패가 뼈아프다. 그렇다고 일주일이나 기다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랑카위는 자유무역지구라고 관세가 없다는데 그럼 거기서 저렴하게 구매 가능할까? 흠...
아, 한국서 사서 들고 오면 어떨까? 스리랑카에서 SIM 카드 산 후, 인터넷으로 확인 해봐야겠다. 그럼 되겠네. 잊지 말고 확인 한 후, 임대균 선장 편에 가져오면 되겠다. 스리랑카 도착하면 처리할 일이 너무 많다. 출항 준비도 하고 곧장 떠나야 하니. 그래도 하나씩 차분하게 잊지 말고 처리하자.
중국인은 로마 제국이 해상로를 이용하여 파르티아인, 인도인과 무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역에서 해상로가 육로를 대신하게 된 것은 해상로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2세기부터였다. B.C. 1세기부터 항해사들은 계절풍을 이용해 대양을 헤치고 다녔다. 1세기 말경 혹은 2세기 초에 쓰인 인도양 항해기록에 따르면 계절풍을 이용하여 항해로를 발견했다고 전하는데, 이 계절풍이 ‘히팔’ 이었을 것을 추정된다. 초여름 베레니케(홍해의 아프리카 지역:역주)에서 출발한 배들은 홍해를 횡단하여 인도양까지 항해한 다음, 12월 상순경에 돌아오곤 했다. - 실크로드 : 사막을 넘는 모험자들 중, - 장 피에르 드레주
맞아, 그래서 7월쯤에 홍해를 출발, 9월쯤 아덴만을 지나 인도양을 건넜구나. World Cruising Routes 자료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역사책에서 또 하나를 배운다. 1,900년이 지난 오래된 지혜를 나만 몰랐네. 溫故而知新(온고이지신).
선원들은 현재의 위치를 알기 위해서 밤에는 북극성을, 낮에는 태양을, 그리고 날씨가 나쁜 날에는 나침반을 이용했다. 항해술 분야의 발달은 당시 중국의 세력 확장에 큰 몫을 했다. 나침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한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항해에 나침반이 실제로 사용되었던 것은 11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그 이전의 항해에서는 5세기의 성지순례자 법현이 전하는 바와 같이 선원들은 동서를 구별할 줄 몰랐고, 단지 해와 달과 별을 보고서 진로를 잡았으며, 날씨가 흐릴 때에는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바람 부는 대로 흘러갔다. 나침반을 처음으로 이용한 민족이 중국인이었는지 아니면 아랍인이었는지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아랍 문헌에 나침반이 나타난 것은 13세기 이후인 반면, 중국에서는 12세기에 이미 항해에서 나침반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많은 자료들이 있다. 12세기 중국 고서에 '남쪽을 가리키는 바늘'이란 이름으로 등장하는 나침반은, 물이 들어 있는 둥근 용기에 자침 하나를 띄워 놓은 것이었다. 나침반이 완벽하게 개량되어 가면서 항해의 안정성도 더욱 높일 수 있었다. - 실크로드 : 사막을 넘는 모험자들 중, - 장 피에르 드레주
오후 4시 45분. ‘날씨가 흐릴 때에는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바람 부는 대로 흘러갔다.’ 아하, <실크로드 : 사막을 넘는 모험자들> 에서 5세기의 인도양 항해를 보고 있다. 지금 내가 죽을둥살둥 건너고 있는 이 바다다. 책에 나온 역사의 현장을 세일 요트로 단독항해 하며 읽으니 실감 200%다. 이 책은 내게 너무 유익하고 재미나서 야금야금 아껴가며 읽고 있다. 아마 2~3번은 더 정독할 것 같다. 책에 코를 박고 있는 동안 선속은 5.5노트로 빨라졌다. 남은 거리 855해리. 슬슬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다. 식사하고, 샤워하고, 담요를 정리하고, 야간 항해등을 켜면, 인도양에 밤이 다가오고 나는 새로운 하루에 대한 기대로 칠흑 같은 어둠을 견뎌낼 거다.
오후 6시 30분. 밥에 된장국 햄에 계란 프라이로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혹시 몰라 지부티에서 산 계란을 하나 깨보니, 완전히 가래 같은 액체가 흐른다. 다 버리고, 오만에서 새로 산, 계란 판을 개봉한다. 껍질을 깨보니 문제없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설거지하고 샤워까지 일사천리 끝낸다. 개운하다.
엔진 룸을 열어 점검하다 보니, 엔진 벨트 예비품이 없다. 갑자기 불안해진다. 스리랑카 가서 하나 반드시 구해야겠다. 한국에도 전화해서 2개쯤 구비해 두어야겠다. 메모한다. 어째 엔진 벨트 예비품 준비할 생각을 못했을까? 하긴 지금까지 엔진 벨트를 구할 만한 정박지는 없었다. 아예 이탈리아에서부터 준비해 둘 것을. 혹시 모르니 내일 배도 한 번 샅샅이 뒤져보자.
갑자기 선속이 6.1노트다. 뭐지? 뒷바람이 조금씩 부나보다. 포트 브로드리치 4노트다.
오후 6시 40분. 마스트 위에는 배가 볼록해진 달이 떠있고, 뒤편에는 오리온자리가 밤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다. 밤이 되어 다시 바람이 약해지며, 선속은 5.6 노트에 머물고 있다.
오후 7시. 상현달이 밝게 비추는, 별이 가득한 밤하늘. 홀로 세일요트를 타고 인도양을 항해한다는 건 정말 평생 동안 상상하기도 힘든 낭만적인 꿈이다. 나는 그 꿈속을 항해중이다. 더위와 고독에 지쳐 늘어져있기보다는, 꿈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현실을 생각하자. 꿈과 실제 항해는 30% 정도 다르지만, 70%는 같지 않은가? 만사 마음먹기 나름이다. 선속 5.7 노트. 웨이 포인트 3번 까지는 99.3 해리 남았다.
"인도양은 중세 유럽인들에게 이국적 향취를 주는 꿈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 실크로드 : 사막을 넘는 모험자들 중, - 장 피에르 드레주
책을 읽는 동안 지금 내가 항해하는 이 항로가, 유럽과 중국을 잇는 두 가지 실크 로드 중 해상로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뜻하지 않게 2~3세기부터, 오래된 문물과 문화가 두 세계에 상호 전달되었던 역사적인 항로를 항해하고 있다. 제네시스와 나의 항해에 소중한 의미가 더해지는 순간이다. 인도양에 바람이 불어온다. 선속 6.1노트.
오후 8시 4분. Rpm을 1,350으로 낮춘다. 선속 5.5 노트. 속도가 너무 빠른 것도 원치 않는다. 시간당 5노트로 하루 120해리 전진이 목표다. 엔진에 무리 없고, 연료도 절약하면서 항해한다. 나머지 더 빠른 속도는 덤이다. 달과 별과 잔잔한 파도의 앙상블이 멋진 인도양의 달밤이다.
5월 2일 오전 1시 22분. 풍속 브로드 리치 4.0 노트. 선속 6.0 노트. 남은 거리 806마일. 상현달이 정확하게 배 뒤에서 비친다.
오전 3시 53분. 레이더의 위치 데이터가 자꾸 꺼지면서 알람이 울린다. 인공위성 신호가 약한가 보다. 선속 6.0 노트. 무풍지대를 벗어난 것 같다. 웨이 포인트 3번까지 8시간 남았다. 이후 계속 남쪽으로 침로를 변경하며 진행할거다. 남은 거리 790 해리.
오전 4시 15분, 여명이 밝아 온다. 아무래도 시간대가 바뀐 것 같은데. 알 수가 없다. 웨이 포인트 3번이 되면 임의로 시간대를 콜롬보에 맞추어 변경해야겠다.
어제 아침부터 하루 종일 실크로드와 바이킹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 이번 인도양 항해의 의미가 개인적으로 조금 달라졌다. 나는 2세기부터 유럽과 중국의 해상 실크로드였던 교역 루트를 항해 중이다. 인도양은 수많은 전투함과 상선이 꿈과 야망, 비단과 재화를 싣고, 죽음을 불사하며 항해하던 옛사람들의 바다다. 눈을 가늘게 뜨고 여명을 바라보니 그들의 범선과 그들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내가 이 바다를 지나게 된 것도, 어린 시절부터 읽었던 역사와 모험담이 기저에 깔린 거다. 단조롭고 우울한 단독항해에 역사적 가치를 부여하니 마음 한편 뿌듯하다. 學而時習之不亦說乎(학이시습지불역열호) 다. 나는 ‘소년의 꿈’을 항해중이다.
오전 5시 25분 풍속 포트 빔리치 7노트. 선속 6.0노트. 구름 위로 일출이다.
천체 관측기의 일종인 '태양 섹터(풍향계처럼 움직이는 바늘이 방향을 표시하는 해시계)'뿐만 아니라 태양의 고도를 알려주는 진짜 고도표를 사용했다. 그 덕분에 그들은 태양의 고도를 잴 수 있었고, 근사한 지점을 찾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측정법은 위도를 재는 데는 충분했지만, 경도는 잴 수 없었다. 아마 바이킹은 바람의 세기와 방향, 이물에 부딪치는 파도, 배가 지나간 자국, 바닷새들의 움직임, 물고기와 고래의 이동 모습, 기온의 변화, 바닷물의 색깔의 변화 등을 참작하여 그들의 속도와 거리를 어림짐작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육지가 보이지 않을 때에는 동서 방향을 축으로 항해함으로써 경도를 알지 못한다는 결점을 보완하려 했다. - 바이킹 - 바다의 정복자들 중, 이브 코아
오전 7시 20분. 엔진 Rpm 1,300으로 다운. 풍속 포트 빔리치 7.1노트. 선속 5.9노트. 풍속이 6~7노트만 되면, 엔진 Rpm 1,300으로 충분하다. 바람이 조금 더 세 지자, 선속은 6.2 노트로 쭉 올라간다. 빨래를 해서 넌다. 그런데 이게 매일 하니, 물 소비가 상당하구나. 스리랑카에 도착하면 일단 세탁기를 찾아보고, 전체적으로 빨래를 한 다음. 항해 중엔 4~5일에 한 번씩 몰아서 해야겠다.
이탈리아에서는 바스코에 코인 세탁기가 있었다. 세탁은 8유로, 건조 36분에는 6유로. 시장 가방 3개 분량의 온 가족의 세탁을 하는데, 총 22유로(29,700원) 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크레타 하니아에서는 세탁소 주인이 세탁물을 받아 세탁해 주는데, 45유로(60,750원) 이었다. 이집트 수에즈에서는 에이전트가 맡아 했다. (40,000원), 수단 수아킨에서는 20달러(26,200원). 이집트와 수단에서는 집에서 빨래를 했는지 제대로 마르지도 않았다. 지부티에서는 70달러(91,700원)을 부르길래 거절했다. 중동 지역의 세탁은 한국의 세탁과는 개념이 다른 것 같다. 설렁설렁 헹군 느낌? 이후로 그냥 손빨래로 필요한 세탁만 했다. 오만부터는 내가 직접 입은 속옷과 티셔츠, 수건만 세탁하고 있다. 땀을 많이 흘리게 되니 세탁을 안 할 수는 없다. 다만 물탱크의 물을 잘 관리해가며 세탁해야 한다.
시계를 콜롬보 표준시로 바꾸는데, 갑자기 바람이 바뀐 것 같다. 뭐지? 나비오닉스를 보니 COG가 엉망이다. 위치 센서에 이상이 생겼나? 삼성패드를 흔들다가 뭔가 이상해 보니, 이런! 오토파일럿의 오토 모드가 저절로 풀렸다. 뭔 일이지?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단독항해인데 오토파일럿에 이상이 생기면 큰일이다. 또 걱정이 하나 늘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아침 항해 중이다. 풍속 5,6 노트, 선속 5.8 노트. 982해리 왔다. 남은 거리 766해리.
양쪽 휠 체인에 분사식 그리스를 뿌리며 오토 모드가 풀린 시점을 확인해 보니, 아까 빨래를 널던 시간과 비슷하다. 혹시 빨래를 널다가 궁둥이로 오토파일럿을 건드렸나? 그러면 다행인데...
오전 10시 38분(콜롬보 표준시). 풍속 빔리치 4.5노트, 선속 5.5노트. 하늘에 구름이 옅게 끼어서 오늘은 더위가 한결 덜하다. 노트북을 덮고,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본다. 리나와 가족들의 멋진 사진이 정말 많다. 이런 좋은 사진들을 찍어만 두고 들여다보지 않았네. 경주마처럼 그저 앞만 보고 달려왔구나. 세상에 요렇게 귀여운 꼬맹이가 또 있을까? 인도양을 항해하면서 지난 사진들 앞에서 웃다 울고 있다.
갑자기 위성전화가 왔다. 강릉항에 배를 계류하고, 자리 잡고 있는 김진영 선장이다. 일이 하나씩 순서대로 풀리고 있는 모양이다. 잘 된 일이다. 이제 강릉에 세일링 체험하는 배가 제네시스까지 3척이 된다. 해양레저관광도시 강릉을 생각할 때. 적어도 10척은 되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 관광버스 3 ~ 4대씩 소화해 내는, 명실상부한 해양레저 도시가 될 것이다. ‘스리랑카까지 아직도 6일 남았다.’, ‘아이고~ 형님.’ 이런저런 안부와 소식을 전하고 전화를 마쳤다. 아우의 느닷없는 위성전화 너무 반갑네.
오전 11시 20분. 바람이 바뀌었다. 느닷없이 노고존이 된다. 조금 일찍, 스타보드 10 으로 침로를 바꾼다. 하늘이 점점 더 무거워 진다. 비가 올까? 일단 기다려 보자. 분명히 북풍이 확실 할 텐데, 웬 크로스홀드? 바다의 현실은 짐작하기 어렵다.
오후 12시 35분. 통영 비지터지2 이준희 선장님의 위성전화가 왔다. 회의가 있어서 조금 늦으셨단다. 아무렴 어떤가? 어차피 나는 인도양 죽돌이다. 내일까지 뒷바람으로 9노트까지 더 좋아 질 거라고 하신다. 감사한 일이다. AIS 리시버 GX-2400(구형) 과 비슷한 기계로, 최신이면서 가격이 적당한 리시버를 한 번 찾아봐 달라고 부탁드렸다. 전자기기의 전문가시니 부탁드린 것이다. 그것을 한국서 살 수 있으면, 임대균 선장이 랑카위 올 때 가지고 오면 된다. 임대균 선장의 연락처도 드렸다. ‘항해 중 고독 말고 뭐가 가장 힘든 일인가?’ 질문하셨다. 나는 ‘별로 없다.’ 라고 답해 드렸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콜롬보 표준시로 통화하자고 하고, 전화는 끝났다. 전화를 끊고 혼자 질문한다. 정말 별로 힘든 일이 없나? 오직 고독만 99%인가?
오후 12시 42분. 드디어 1,000해리 돌파! 이제 748해리 남았다. 선속 5.9 노트, 스리랑카 Galle 까지 5일 10시간 남았다. 미국 선장 윌리엄이 혹시 급하면, 인도의 Ernakn ulam 의 Cohin 마리나로 피항하라고 했지만, 덴마크 톨스 선장은, ‘혹시 네 항해에 고생이 부족하거나, 혼란이 부족하면 인도로 가보라’고 했었다. 그들은 인도에서 식중독도 걸리고 출입국도 엉망진창이었다고 한다. 나는 항해에 ‘고생이나, 혼란이 전혀 부족하지 않으므로’ 인도를 거를 것이다. 아직까지는 날씨나 바람도 순조롭다. 날씨는 흐린데, 증기 솥 같이 덥다.
오후 1시 30분. 드디어 웨이포인트 3번을 지났다. 이제 4번까지 215해리. 1일 11시간이다. 풍속 빔리치 5.7 노트, 선속 6.0 노트. 인도 서부 해안의 암초 지역으로 향한다.
오후 3시 8분. Rpm 1,300. 풍속 빔리치 5.6노트. 선속 5.9 노트. 비는 오지 않고 바다 위, 대기만 뜨겁다.
오후 4시 54분, 좌현 20마일 지점에 선박이 3~4척 지나고 있다. 제대로 항로에 들어선 모양이다. 첫 번째 낮은 지역으로 North Islet 가 50해리 우측에 있다. 이후 계속 암초와 낮은 해저 지형 선박들이 지난다. 슬슬 긴장하자. 풍속 6.3노트, 선속 5.9노트. 722해리 남았다.
오후 6시. 저녁 식사와 샤워 끝. 바람이 죽고, 선속은 5.3 노트. 지난 화요일에 오만을 떠나 오늘 또 화요일, 인도양에서 맞는 일주일째 항해의 밤이 오고 있다. 여기저기 높게 솟은 구름 기둥들이 바다에서 하늘 끝까지 닿아있다. 존 바에즈의 노래가 잘 어울리는 저녁이다. 존 바에즈가 스티브 잡스와 사귀었다는 건 쇼크다. 존 바에즈는 한때 밥 딜런의 연인이었고, 스티브 잡스는 밥 딜런의 열광적인 팬이었다.
오후 9시 35분. 마스트 위에 보름달로 차올라가는 둥근 달이 떠 있다. 달빛이 무척 밝아 주변 바다가 푸른색으로 빛난다. 사냥꾼 오리온은 제네시스 뒤에 비스듬히 누웠다. 장난감 같은 뭉게구름도 곳곳에 피어올라, 인도양은 마침내 동화의 배경이 되었다. 천천히 인도 서부 해안의 암초 지대로 들어서는 나는, 동화 속 탐험가 인가? 일엽편주. 홀로 인도양의 밤을 항해하는 고독한 현실이지만, 저 달은 마법의 빛 가루를 흩뿌려 비현실적인 밤을 만들었다. 지금 나는 달 빛 아래 꿈꾸는 집시다. Ocean Gypsy.
남은 거리 697 해리. 드디어 600 해리 대로 내려갔다. 1,051 해리 항해했다. 전체 거리의 60%를 온 거다. 선속이 5.2 노트가 되는 바람에 도달 시간은 더 늘어나 버렸지만!
오후 11시 35분. 좌현 12마일 거리에 선박이 6척이나 레이더에 나타났다. 이 배들이 모두 제네시스를 앞질러 가기 전엔 잠깐 졸수도 없다. 그 배들의 진행방향이 제니시스와 평행인지, 제네시스 쪽을 돌진할지, AIS가 없어 파악이 불가능이기 때문이다. 바람은 무풍, 선속은 5.0 노트. 동화 같은 밤이지만 꽤 두꺼운 동화책이 되어, 길고 긴 밤에 예상된다.
5월 3일 (수요일) 오전 1시 2분. 바람이 남풍으로 바뀜. 집세일 방향을 바꾸었지만 중간에 시트가 걸렸다. 싫지만 한밤중에 갑판으로 나가 집시트를 풀어내고 집세일 방향을 바꾼다, 풍속 5노트, 선속 5.2 노트. 남은 거리 679 해리.
오전 5시 44분. 뒷바람 7노트, 선속 5.2 노트. 역조류가 있나보다. 바람에 비해 속도가 나지 않는다. 남은 거리 655 해리. 1,093 해리 왔다. 뒷바람이지만 미세하게 북동풍이라서 집세일과 메인세일 모두 스타보드로 바꿨다. 선속 5.3노트. 역시 미세하게 증가한다. 높은 구름을 배경으로 해가 떠오르고 있다. 진회색 구름 뒤에 붉은 태양빛이 퍼지는 멋진 아침 풍경이다. 5일 7시간 남았다.
오전 6시 50분. 씨리얼과 우유 아침식사. 전방에 카고 한 대 출현. 가드존 알람이 정신사납다. 하지만 스위치가 안 눌려 끄지도 켜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 e-bay에서 산 중고 c80이 너무 아쉽다. 바람이 딱 런(Run)이다. 아주 골치 아프다. 메인 세일을 활짝 열었는데도 펄럭 거린다. 붐을 스타보드 쪽으로 묶었다. ‘풍향이 런 이라서 아주 좋았겠어요.’ 하는 세일 요트 초보 분들을 본다. 그러나 실제로 런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나는 1981년도부터 ‘애플빠’였다. 세운상가에서 마더 보드를 사서 Apple II를 직접 조립해 사용했고, 대학원 때는 Apple IIe를 조립해 동료원생들에게 팔기도 했다. 2014년에 그가 만들었던 매킨토시se를 복원해 한동안 사용하기도 했었다. 나는 맥북 에어가 나온 뒤로 3대째 신형으로 바꾸어가며 사용 중이다. 애플 폰은 쓰지 않는다. 스티브 잡스는 역시 천재다. 그가 월터 아이작슨을 전기 작가로 지목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책이 정말 잘 써졌고, 또 번역도 부드러웠다. 인도양 항해 8일 ~ 9일차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이 빠졌다.
오전 7시 50분. 바람이 약간 북동풍이라서 메인 세일이 덜 펄럭인다. 집세일은 접었다. 레이더엔 정면에서 1대, 뒤에 3대의 선박들이 제네시스를 에워싸고 있다. 신경을 집중한다. 선속 5.5 노트. 644 해리 남았고, 4일 22시간으로 표시 된다.
오전 10시 7분. 주변에 늘 4~5 대의 배들이 2~10 해리 사이로 지난다. 여기는 제법 바쁜 항로인가보다. 레이더의 가드 존 알람이 계속 울려 머리가 지끈 거리지만 끌 수도 없다. 그래도 한 밤중 나를 지켜 줄, 유일한 가드 존이기 때문에 시끄러움을 참고 독서에 집중해 본다.
오전 11시 20분 온 사방에서 다가오는 거대 선박들 때문에 잠시도 견시를 늦추지 못한다. 참치 샐러드 캔 한 통과 물 한잔으로 점심을 대신한다. 선속 5.3노트. 남쪽으로 침로를 바꾸는 4번 웨이 포인트까지 97.7 해리, 17시간 50분 남았다. 스리랑카 Galle 남은 거리 625해리, 4일 19시간.
오후 1시 5분. 메인 세일이 너무 펄렁거려, 세일이 손상 될까 걱정이다. 붐을 고정해 놓은 줄을 풀고, 메인 시트를 바짝 당겨 두었다. 해수부에서 온 기상정보로는 앞으로 바람도 세지지만, 파도도 1.2미터까지 높아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미리 연료를 채워두자. 파도가 높을 때 연료 보충하는 것은 미친 짓에 가깝다. 배가 마구 흔들려 제리캔의 연료가 다 쏟아질 뿐 아니라, 제리캔을 운반하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건 모험이 된다. 마침 주변의 상선들도 다 앞으로 이동된 상황이니 서둘러 연료를 채우기로 한다.
150리터를 채우니 연료통이 꽉 찬 느낌이다. 파도에 게이지가 흔들려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땀이 비 오듯 한다. 세수하고 수건으로 목과 등을 닦는다. 일단 지난 화요일부터 오늘까지 350리터 정도 소모했다. 총 1,050리터에서 700리터가 남은 셈이다. 어쨌든 스리랑카 Galle 까지 가는 덴 큰 지장 없어 보인다. 이번 항해중 제일 긴 코스지만, 아덴만 탈출시보다 보다 기름을 덜 쓸 것 같다. 아덴만 항해는 지금 생각해도 정말 ‘대탈출’이었다. 아덴만 일주일 항해에 거의 650리터를 소모했다. 현재 인도양 항해의 거의 두 배 연료를 사용했다. 선속 5.4노트. 614해리 남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몸이 땀으로 소금덩어리다. 샤워하자. 오늘은 하루 종일 거대 선박들에 둘러싸여 신경 곤두세우고 견시했다. 사면에서 막 다가온다. 야간에는 어떠려나? 오늘도 제대로 졸아 보긴 틀린 것 같다.
오후 5시 20분. 저녁을 해 먹었다. 바람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뒷바람 7~9노트, 선속 5.3노트 ~5.5 노트를 오르내린다. 파도 때문에 배가 많이 흔들린다. 오늘 하루만 집세일과 메인세일을 세 번 접었다 폈다. 바람이 끊임없이 변덕을 부리지만, 나는 한가하다. 운동 삼아 약간의 바람이라도 잡아보려 애쓴다. 메인 세일을 다시 펴서 붐을 로프로 매 놓는다. 선속은 5.6~5.7 노트로 약간 올라간다. 근데 자꾸 여기저기 부딪친다. 무릎과 다리 여기저기 생채기투성이다. 우째 내 몸인데, 내 맘대로 안 움직이는 겨? 바람이 서늘하다. 밤에 많이 덥지는 않을 것 같다.
남은 거리 588해리. 웨이 포인트 4번까지는 61 해리 남았다. 12시간가량 남았으니, 내일 새벽이나 아침이면 인도 서부 해안에서 남쪽으로 변침할거다. Chico & Rita 음반 중 Tin Tin Deo 를 듣고 있다. 일상이 뭉그러진 것 같다. 다쳐도 아프지 않고, 기쁨도 두려움도 없다. 걱정만 끈질기게 따라 붙는다. 주변을 둘러본다. 바다, 바다, 끝없이 바다다.
5월 4일 (목) 오전 2시 11분. 뒷바람 5노트, 선속 5.4노트. 달이 밝다. 우현 12마일 근방에 카고 2대. 544해리 남았다. 총 거리 68% 왔다. 3시간 후면 남쪽으로 변침해야 한다.
오전 4시. 배의 롤링이 심하다. 우측의 선박 두 대는 5시 방향으로 멀어져 간다. 변침까지 1시간 20분. 바람 방향이 바뀌니, 메인 세일 붐을 묶은 로프를 풀고 메인 시트를 제자리로 해두고 변침해야 한다. 아니면 붐이 140도 이상 확 돌아가 위험하다. 커피를 끓인다. Best of Bob Dylan을 듣고 있다. 낭만적이라고 생각하자. 선미에 달무리가 크니까.
문득 ‘소망하지 말자.’ 는 생각이 든다. 소망하면 댓가를 치러야 한다. 소망은 뚜렷하지만, 그 댓가는 뭐가 될지 예상할 수 없다. 소망의 설계에 미리 포함되지 않은 탓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그래서 불행이 시작된다. 예상 못한 댓가를 치르는 과정에, 인생은 속절없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지난 삶을 돌아보며, 몇 가지 작은 성취 이후 대책 없었던 추락을 떠올린다. 소름이 돋는다. 성공과 실패는 등가다. 성공을 이루는 만큼, 성취를 움켜쥐고 놓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창업과 수성의 무게를 미리 가늠했다. 소망의 질량이 작을수록, 실패의 중력가속도도 작다. 내게 묻는다. 너의 소망은 지속가능한 것인가? 인도양의 달을 구경하다 이런저런 생각에 함몰되어 버렸다. 기도만이 답이다.
오전 5시 15분. 웨이 포인트 5번으로 침로를 변경했다. 이제 인도 서부해안 70~100 해리 떨어진 곳으로 이틀 동안 곧장 내려간다. 그 후 웨이 포인트 5번에서 6번 스리랑카 쪽으로 또 이틀이다. 아무래도 내가 선택한 항로가 큰 배들이 다니는 메인 항로 인가보다. 견시를 제대로 해야 한다. 뒷바람 5~6노트, 선속 5.1 노트다.
사람 마음 참 희한하다. 어차피 똑 같은 인도양인데, 웨이 포인트가 달라지고 코스가 변침되니 뭔가 새롭다. 읏쌰! 새로 시작이다. 뭐 이런 마음이랄까?
오전 7시 50분. 이제는 해가 정면이 아니라, 좌현에서 떠오른다. 메인세일을 100% 다 펴서 포트 쪽으로 활짝 연 뒤, 붐을 묶어 둔다. 뒷바람 6.7노트, 선속 5.7 노트. 남은 거리 512 해리. Galle 까지 3일 18시간 남았다.
많은 주택 소유자들이 산불로 인해 집을 잃거나, 산림청이 산불의 확대를 막기 위해서 놓은 맞불에 집을 잃을 때, 혹은 산불 때문에 집을 잃지 않아도 거실에 앉아 즐길 수 있던 아름다운 숲이 불타버리면, 산림청에 소송을 제기한다. 산불 예방대책을 위해 공무원들이 나무를 솎아내는 것을 반대하면서도, 산불을 진압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조금도 감당하지 않으려는 것이 다. 하지만 몬태나 주택 소유자 들 중 적지 않은 사람이 그런 반정부적 태도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 문명의 붕괴 중, 재레드 다이아몬드.
바람이 조금만 불면, 선속 5.8노트. 바람이 사라지면 선속 5.2노트를 오르내린다. 세일들이 펄럭 거리는 소리가 사라지면 바람이 8노트 이상이다. 세일이 고정되는 거다. 오만 Hawana 마리나에서 산 사과 5개가 있었다. 야채가 떨어져 비타민 C 섭취가 쉽지 않을 때 먹으려고 아껴 두었다. 오늘 먹으려고 보니까, 2개가 썩었다. 1개는 먹어 치우고, 2개 남았다. 썩기 전에 먹어야겠다. 그러고 보니 세계일주 장거리 항해를 하는 선장들의, 야채 보관이나 식료품을 좀 더 조사해 보아야겠다. 냉장고 없이 항해하는 선장들도 많다. 스리랑카 Galle 마리나에 가면 세계일주 선장들을 또 만날 수 있을 거다. 어떤 먹거리를 어떤 방법으로 장기 보관하며 항해하는지 반드시 알아야만 소중한 자료가 될 거다.
전에 수단 수아킨 앵커리지에서 미국선장 윌리엄이 지저분한 접시에 생선과 생선뼈가 흩어진 스파게티를 먹는 것을 보았는데, 미안하지만 보기 역겨웠다. 윌리엄도 냉장고 없이 세계일주 중이다.
오전 9시 35분. 통영 비지터지2 이준희 선장님의 위성전화 콜을 받았다. 주변 섬이 보이냐고 물으신다. 물론 안 보인다. 육지는 약 30해리, 낮은 섬은 10해리 이상 다가가야 간신히 보인다. 해도 상엔 아주 가까이 보이지만, 실제론 20마일 이상 멀다. 너무 아름다운 섬들인데 들러보라고 하신다. 좋은 말씀이지만, 나는 갈 길이 멀다. 바로 아래 몰디브 울리가모가 있지만 패스한다. 가족도 없이 혼자 거기서 뭘 한 건가? 오만 Hawana 마리나 리조트도 너무 아름다웠지만 진짜 쓸쓸했다. (눈물 난다.) 나는 사이클론이 오기 전에 스리랑카에 입항하고, 거기서 보급만 한 후, 바로 말레이시아 랑카위 까지 가야 한다. 거기까지 가면 약간의 여유가 생길 거다. 어차피 태풍도 피해야 하니, 3~5일 단거리 항해로 쉬엄쉬엄 한국까지 갈 거다. 그래서 나는 그저 유럽에서 한국까지 장거리 항해중이지, 세계일주 항해가 절대 아닌 거다. 다시 말하지만 세계일주항해는 기약 없이, 최소 2~3년 여유를 가지고 그런 아름다운 섬마다 앵커링 하며 세계의 바다를 즐기고 누비는 거다. 목적과 출발점이 다르다. 나는 빨리 고향에 가 딸을 보고 싶은 애비고, 성마른 딜리버리 항해 중이다. 계속 뒷바람이고, 태풍은 10일 이후에나 스리랑카 뒤편에 기미가 보인다니 부지런히 가자.
오전 10시 10분. 임대균 선장에게 위성전화가 왔다. 와 반갑다. 9일 만에 듣는 임대균 선장 음성이다. 날씨 정보와 AIS 리시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나머지는 스리랑카에서 통화하기로 한다. 이제 499해리, 72% 왔다. 3일 31시간 남았다. 이대로라면 5월 8일 쯤, 스리랑카 들어갈 거다.
오전 11시 25분. 감자튀김과 오이 반 개로 점심식사를 마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김승진 선장님의 무기항 세계일주 항해는 멋진 도전이었다. 엔진과 기항, 보급 없이 세계일주가 가능하다는 증거를 확실하게 보여 주셨다. 세계일주 맞다.
그러나 내가 지금 여러 나라의 세계일주 항해 선장들과 보고 이야기하는 의미의 세일 요트 세계일주 항해,
첫째, 날짜 정하지 않고 (대략 일정은 있겠지만)
둘째, 한국에 잘 알려진 유명 메이커가 아닌, 진짜 세계일주 항해에 적합한 배와 장비를 갖추고,
셋째, 여유를 가지고 여기저기 아름다운 앵커리지와 마리나에 들러 멋진 경험을 하는
그런 세계일주 여행 개념의 세계일주 항해는, 한국에서 오직 통영 죽림 옥토푸스 마리나의 윤태근 선장님 한 분 뿐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처럼 세계의 일부를 항해하거나, 동남아시아를 항해하거나, 태평양 항해를 하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세 가지 조건을 갖추고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 세계를 한 바퀴 돈 선장님은, 내가 알기로는 윤태근 선장님이 유일하다. 혹시 내가 정보가 모자라 실수로 빠트린 분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제보 바란다. 나중에라도 세일 요트 장거리 항해의 추가 정보가 될지 모른다.
한국에서 오직 한 사람. 윤태근 선장님은 그 일을 한 사람이다. 그런데 윤선장님은 내게도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해 주지 않았다. 아마 말해도 내가 잘 몰랐을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 내가 유럽서 한국까지 일부라도 장거리 항해 해보고, 실제 세계일주하는 여러 나라의 많은 선장들과 이야기 해보고, 세계일주 항해의 실체와 그 사이즈를 짐작하니, 새삼 그분이 어떤 일을 해 낸 것인지 알게 됐다. 대단하다. 대한민국의 국가 대표 선수들만 해도 수천 명이지만, 세일 요트 세계일주 항해는 오직 한 사람 뿐 아닌가? 인도양 한가운데서 또 한 가지 깨달았다. 동갑내기 벗인 윤태근 선장님께, 새삼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
오후 12시 40분. 메인세일을 80% 다시 편다. 뒷바람이 7노트, 선속 5.6노트. 운동 삼아 열심히 펴고 열심히 접어 보자. 0.1 노트가 아쉽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 오듯 하는 건 어쩔 수 없네.
따라서 그런 카누로 며칠간이나 망망대해를 항해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탈출이라면 모를까,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담배를 사려고 닷새를 카누로 항해하는 요즘의 태평양 뱃사람들에게도 그 정도의 항해는 정상적인 삶의 일부이다. - 문명의 붕괴 중, 재레드 다이아몬드.
오후 2시 40분. 윌리엄이 알려준 Cochin India, Bolgaty 마리나가 113.7 해리 밖에 있다. 하루가 안 걸리는 거리다. 그러나 나는 사이클론이나 연료 부족의 비상 상황이 아니다. 그대로 지나치기로 한다. 더 아래로 가면 몰디브 울리가모도 있다. 역시 비상시라면 피항 하겠지만 지금 상황이라면 지나쳐 갈 것이 분명하다. 사이클론이 두렵다. 빨리 가자. 476 해리 남았다. 선속 5.3 노트.
오후 3시 15분. 우현 2마일 밖에 어선이 지나간다. 지금 위치는 인도 서부 해안에서 70해리 떨어진 바다다. 아마 이 근방에 흩어져 있는 섬들로 향하는 어선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대단히 먼 곳 까지 조업을 하는군. 제네시스 우현 62.4 해리에 Kalpeni Island 라는 섬이 있다. 멋진 해안과 모래톱, 앵커링 가능한 곳이 있을 거다. 진짜 세계일주 요트 선장이라면 저런 곳에서 며칠 쉬어가며 열대의 바다를 만끽해야 옳다. 안타깝게도 나는 바쁘게 지나는 중이다. 이번 항해에서는 놓치는 게 너무 많다. 아쉽다.
오후 6시 15분. 핸드폰에 시간을 세팅하는 기능을 찾았다. 인터넷이 안 되니 오만 시간이 그대로 표시되다가, 스리랑카 콜롬보 표준시로 바꾸었다. 대양 항해를 하다 보니 시간대가 계속 바뀌고 그러다 보니 별별 기능을 다 해보게 되는구나.
제네시스 정면을 가로지르는 카고가 있다. 보니 Cochin Port, India로 가는 선박 같다. 앞으로 80 해리 정도 더 가야 Cochin Port, India 입구를 벗어난다. 오늘 밤새도록 견시를 잘 해야 할 것 같네. 항구 앞이니 입출항 하는 배들이 많을 거다. 선속 5.5 노트. 남은 거리 456 해리.
달을 보니 완전히 보름달이다. 오만 Hawana 마리나에서 초승달일 때 떠났는데, 항해도중 보름달을 만났다. 큰일이다. 오늘 밤 달 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많을텐데.
뉴펀들랜드 북서해안에 위치한 랑즈오메도(L’Anse aux Meadow)가 그곳이다. 방사성 탄소법 으로 측정한 결과에 따르면 그 유적은 1,000년경에 세워졌다. 붉은털 에리크의 자녀들이 빈랜드를 여행했다는 전설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또한 전설에 따르면 984 년에 그린란드에 정착한 에리크는 그때까지도 살아있었다. (중략) 하여간 이곳에는 80명을 족히 수용할 수 있는 세 채의 널찍한 집, 소철을 제련하고 선박용 철 못을 만든 대장간, 목수의 작업실, 배를 수리한곳 등 여덟 채의 건물이 남아있다. - 문명의 붕괴 중, 재레드 다이아몬드.
호오,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한 건 컬럼버스가 아니라, 바이킹이었던 ‘붉은털 에리크’ 였다. 고고학자들이 유적지까지 발굴했다고 한다. 붉은털 에리크 가족이 인디언 때문에 쫒겨 가지만 않았더라면, 20세기 미국인들은 영어가 아니라, 현대 아이슬란드어나 페로어처럼 고대 노르웨이어에서 파생된 언어로 말하고 있었을 거란다. 또 새로운 것을 하나 배웠다.
오후 7시. 식수를 세어보니, 1.5리터 6개짜리 팩 13개와 5병이 남았다. 총 83병. 하루에 3병씩 마신다고 해도 28일 분량이다. 이정도면 말레이시아 랑카위 까지도 문제없다. 그러나 Galle에서 구할 수 있으면 5팩 정도 (10일치) 더 사두자. 만사 불여튼튼이다. 풍속 빔리치 6.0노트. 선속 5.8노트. 웬일로 서풍이다.
오후 8시 40분. 9일이나 항해했다. 혹시나 싶어 엔진을 끄고, 기어박스 오일과 엔진 오일을 확인해 본다. 둘 다 적정한 양이다. 이런 일은 생각나면 바로 해야 한다. 내일, 내일하다가 깜빡할 수도 있다. 다시 엔진 Rpm 1,300을 맞추고 전진한다. 선속 5.9 노트. 남은 거리 443 해리. 이제 3일 남았다.
5월 5일 어린이날. 오전 0시 10분. 한국이었으면 리나랑 하루 종일 즐거운 시간을 같이 했을텐데... 아빠 곧 돌아간다. 조금만 기다려라. 사랑한다, 우리 딸.
배가 폭주하는 느낌. 빔리치 풍속 8노트. 선속 7.0 노트. 잠시 후 6.7노트. 순조류를 탔나보다. 바람에 비해 상당히 빠르다. 정면에 카고다. 메인 세일 붐을 묶은 줄을 풀고 메인세일 시트를 당긴다. 스타보드 30으로 침로 변경. 카고를 지나치고 포트 30으로 침로 변경해서 원래 침로로 돌아간다. 상당히 긴장했다.
인도 남단에서 스리랑카까지의 항로를 직선으로 수정한다. 중간에 Obstacle (장애물) 이 몇 개 있다. 웨이 포인트를 하나 줄이고 곧장 가는 거다. 전체 거리가 1,733 해리로 약간 줄었다. 장애물을 피하는 것 외에 별 의미는 없다.
정면에 또 선박이다. 곧장 다가오나 보다. 주변에도 6 ~7 대의 선박이 깔려 있다. 가드 존 알람이 계속 울려 머리 아프다. 그래도 안전 경보다. 참자. 갑자기 선속 7.3 노트다. 풍속을 보니 10노트. 쾌속 전진이긴 한데, 너무 빠르면 안전하지 않다. 상황을 봐서 축범 해야겠다.
세일 요트를 잘 모르는 사람 같으면, ‘뭔 소리야? 7.3 노트면 13.5Km/h 잖아. 그게 뭐 빠르다고!’ 할 것이다. 세일요트는 24시간 운항한다. 13.5Km/h 로 24시간이면 324 Km를 간다. 파도가 넘실대는 밤바다를 시속 7.3 노트로 달리면, 선수에는 파도가 막 들이친다. 윈치에 감긴 시트들에선 끽끽! 조여지는 소리가 나고, 선체와 리깅에 가해지는 팽팽한 김장감이 그래도 몸에 전달된다. 어느 정도 세일 요트를 탄 뒤 그 성능을 짐작하게 되면, 대략 7노트를 넘으면 두렵다. 재빨리 축범한다. 5.5~6.5 노트가 마음 편안하다. 아마 영화 탑건 2의 톰크루즈와 그 애인이 세일 요트를 타고 질주하던 장면이, 대략 7~8 노트 정도 속도일 거다.
예전 부산에서 강릉으로 베네토 393을 가지고 올 때, 파도 1.5미터에 선속 11 해리였다. 뒷바람이라고 신나게 왔는데, 지금 생각하면 큰일 날 뻔 한 거였다. 돈고존(Don’t go zone) 항해를 한 거다. 자칫하면 그대로 파도 속으로 처박힐 수도 있었다. 운이 좋았다. 속도가 필요하면 파워 보트를 타라. 정 급하면 비행기 타면 된다. 우리가 말하는 세일 요트는, 시속 10Km/h 의 놀라운 세계다.
오전 1시 30분.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전자 기기들을 비 안 맞게 이동하고, 선실의 해치들을 닫고, 콕핏의 담요를 치운다. 우현에 달빛이 훤한데, 황당하다. 급하게 물건들을 치우고 잠시 자리에 앉으니, 레이더에 구름이 잡혀 또 경보가 시끄럽다. 스팩터클한 밤이다. 선속 5.1 노트. 남은 거리 379 해리다.
오전 2시 4분, 한바탕 소동을 겪고 다시 레이더를 보니 손바닥 만 한 구름 몇 개가 비 뿌리고, 알람 울리고, 난리였다. 원, 무슨 도깨비장난 같다. 순식간에 바람이 사라졌다. 2시간 전에 너무 빨라 걱정했는데, 비 오고 갑자기 바람이 사라진 거다. 바다 날씨라니. 선속 5.3 노트. 남은 거리 376 해리. 전체 구간의 78%를 왔다. 새벽 커피 한잔 하자.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싸구려 커피, 장기하.
오전 3시 10분. 강릉에서 위성전화가 왔다. 엄마다. 내가 안전하게 잘 가고 있나, 궁금해서 연락하신 거다. 지금 인도 남단으로 가고 있고, 2일 반만 더 가면 된다고 염려 마시라고 말씀드린다. 나이 60에도 여전히 엄마 속을 썩이다니. 안타깝고 속상하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한국시간을 여쭤보고, 현지 시간을 다시 세팅한다. 선속 5.6 노트.
오전 5시 45분. 풍속 11노트, 크로스 홀드 선속 5.6 노트.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하다. 그러나 지금 인도 남단 인도양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몇 가지 기본적인 궁리만 할 뿐이다. 어차피 한국에 돌아가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다. 잡생각 다 치우고 항해에만 집중하자. 바람이 맞을 때 열심히 거리를 좁혀두자.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 여명이 밝아온다.
오전 7시 35분. 어제 밤의 후유증으로 어질어질하다. 바람이 없어졌다. 선속 5.5 노트.
오전 9시 30분. 통영 비지터지2 이준희 선장님의 위성전화를 받았다. 말레이시아 인근의 북위 09.54. 동경 91.48. 인근에서 5월 10일 18시부터 태풍의 눈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가는 방향으로 바람이 빨려 들어가기 때문에 오히려 서풍으로 속도가 더 빨라지고, 최고 풍속은 15~18 노트가 된다는 말씀. 감사한 정보다. 위치를 확인해 보니, 스리랑카와 말레이시아 2/3 지점 쯤 된다. 오늘은 5일. 스리랑카 Galle 까지 앞으로 2일 10시간 정도가 더 소요된다. 그럼 7일 오후나 8일 오전 중 도착하니, 10일 18시에 발생하는 사이클론의 직업적인 영향은 받지 않는다.
진짜 아슬아슬하다. 무려 2개월 이상을 항해했는데, 하루 이틀 사이로 태풍을 피해간다. 만약 기항지 마리나에서 하루, 이틀씩 우물쭈물했다면 곧장 사이클론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거다. 이래서 내가 아프리카 지부티에서부터 서둘렀다. 인도양은 5월부터 사이클론 발생 지역인데, 사이클론이 나만 좋으라고 피해갈 리 없다. 내가 서둘러 사이클론을 피해야 한다. 일단 Galle에 들어가면 다시 일기예보를 확인하자. Galle에서 말레이시아 랑카위 까지 가는 거리도 9일이다. 최소 9일 동안 사이클론이 없어야 한다. 중간 피항지도 확인하고, 엔진 오일도 갈고, 뭐든 면밀하게 준비하자. 랑카위 까지만 가면, 일단 이번 항해의 최장거리 구간 항해는 거의 마친 셈이다. 지부티에서 아덴만 바람 바뀌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면, 올해 가을에나 한국 도착할 뻔 했네. 서풍 빔리치 6.6노트, 선속 6.2노트. 337 해리 남았다.
오전 11시 30분. 바람은 빔리치 7.0, 선속 6.4노트. 콕핏에서 맞는 서풍이 시원하지만 이것이 사이클론이 세력을 모으는 중이라니 뭔가 음산하다. 이 바람에 실린 에너지들이 모여, 5월 10일 말레이시아 근방에서 태풍의 눈이 형성되는 것 아닌가? 그럼 스리랑카에서 말레이시아까지 9일간 평온한 바다는 언제쯤이 될까? 혹시 스리랑카에서 예상보다 대기시간이 길어지는 것은 아닐까? 또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이러다가 생각이 걱정이 되겠지. 걱정해도 소용없는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텐데, 나이가 걱정을 부른다. 어쨌든 지금은 인도양 항해의 막바지. 너울성 파도 1미터, 평온한 항해중이다. 주변에 여러 대의 카고들이 지난다. 나와 같은 항로를 따라 가는 배들이 정말 많구나. 가드 존 알람 때문에 정신이 혼미하다. 남은 거리 328 해리. 이틀 남았다.
오후 12시 30분. 아침에 남은 파스타를 데워, 올리브 열매 절임과 함께 먹었다. 맛 읎다. 무조건 뱃속에 우겨 넣고 커피 한잔 끓인다. 파도가 높아 롤링와 요잉이 심하다. 커피 끓이는 것도 화상에 주의해야한다. 인도의 Kottayam 과 Kollam 사이 앞바다 45마일 지점을 지난다. Trivandrum 앞에서 스리랑카 쪽으로 침로변경 예정이다. 핸드폰은 여전히 서비스불가다. 한국 같으면 이정도 거리에서도 핸드폰 팡팡 터질텐데. 선속 6.3노트.
오후 4시 32분. 오늘은 드디어 299 해리 남았다. (83% 왔다.)는 게 유일한 기록일 것 같다. 뒷바람 때문에, 붐을 매놓은 메인 세일은 계속 펄럭이고, 집세일은 접었다. 그래도 속도는 5.9 노트다. 잔뜩 흐리고 배들이 많이 지나다닌다. 오후 내내 상당히 불편한 항해가 계속 된다. 7시간 후엔 스리랑카 쪽으로 침로 변경한다. 7일 오후냐? 8일 오전이냐? 침로 변경하고 바람 상태를 보고 결정하자. 무리할 것도 서둘 것도 없다.
오후 6시 25분. 범고래 떼가 제네시스 주변에 모였다. 2~3 마리씩 짝을 지어 다니는데, 범고래는 절대로 뛰어 오르지 않는다. 돌고래보다 훨씬 큰 개체가, 등지느러미만 쓱 보여주고 푸~ 물을 뿜고는 물속으로 들어간다. 돌고래들처럼 뱃머리에 모여 들지도 않는다. 제네시스를 슬슬 맴돌며 먹이나 공격대상인지? 포식자답게 슬슬 주변을 탐색한다. 돌고래처럼 귀엽고 친근한 이미지가 아니다. 사파리에서 보는 사자나 호랑이 같은 힘과 위협이 느껴진다. 범고래가 세일요트의 러더를 물어 뜯었다든가, 러더를 뜯다가 선미까지 같이 뜯어, 세일 요트가 침몰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제발 제네시스에 덤벼들지 않기를 소망한다. 직접 보면 신기함을 넘어 정말 두려운 대상이다.
오후 11시 27분. 스리랑카 쪽으로 변침했다. 이제 하루하고 23시간 남았다. 뒷바람 5 노트. 선속 5.5노트. 롤링이 심해, 시소를 타고 있는 것 같다. 이대로 가면 Galle에 한밤중에 도착한다. 차라리 8일 오전 도착으로 느긋하게 가자. 서둘러 될 일이 아니다. 잔뜩 흐려서 달무리가 커다란 밤이다.
5월 6일 (토) 새벽 1 시. 뒷바람이 8노트라, 메인 세일이 펄럭인다. 세일 상할까봐 축범 한다. 선속 5.8 노트. 252 해리(466Km) 남았다. 오밤중에 커피 한잔 한다.
적도에 가까운 위도로 내려가니 엄청나게 더워진다. 물을 아껴야 하지만, 매일 군대식 샤워라도 안할 수 없다. 온몸이 끈적거려 견딜 수 없다. 땀에 절은 속옷을 간단히 손세탁이라도 해야 한다. 그냥 소금기만 빼고 말려 입는 거다. 그러자니 워터 메이커 없이 2~3명이 항해한다고 하면 당연히 물이 부족하다. 바닷물로 샤워하고 마지막에 수돗물로 헹구는 수밖에 없다. 세탁도 마찬가지.
꿈이었던 세계일주 항해. 유럽에서 수에즈를 지나 몰디브와 동남아시아의 멋진 항구에 들러 관광도 한다. 해지는 인도양에서 와인 한잔? 풍랑이 치면 항구에 피항, 잔잔할 때만 항해 하지 뭐. 한국을 떠날 때는 대략 이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처음 세일링 시작한 게 2012년. 매일 몇 번씩 세일링해서 5년, 울릉도 독도 제주도 필리핀 항해 경험도 있으니... 세일링에 대한 자신도 어지간했다. 그래서 큰 부담 없이 출발했다.
중동지역 장거리 항해에 따른 불편한 상황을 정리해 본다. 일단 좁은 배에서 4개월 이상 살아야 한다. 외국에서 출항하니 전기, 물, 음식, 어느 것 하나 편한 게 없다. 배는 끊임없이 고장이 난다. 부품과 장비를 구하기 거의 불가능이다. 이탈리아에서 크레타까지는 추웠다. 겨울옷을 입어야 한다. 항구에 들를 때마다 세탁을 해야 했다. 물가도 비싸지만, 적당히 입에 맞는 식재료를 찾기 힘들었다. 입출항 절차와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래도 크레타까지는 비자카드로 다 해결됐다.
지중해를 지나 이집트 포트사이드로 가는 동안 벌레의 습격을 받았다. 배가 온통 까만 벌레로 뒤덮였다. 여자들은 질색할 일이다. 포트사이드에서 무전기로 떠드는 포트 콘트롤의 영어를 도무지 알아 들을 수 없다. 이집트 억양이 심하다. 영어 맞나? 포트사이드에서 입국절차를 하는데 박시시만 100달러가 나갔다. 이스마일리아에서도 에이전트의 바가지가 말도 못했다. 꼼짝도 못하게 하고, 지들이 가운데서 바가지 씌우는 거다. 디젤유는 거의 구정물 수준. 배는 이것저것 자꾸 고장이다. 동네 포구 수준도 안 되는 수에즈 마리나에서 몇 가지 수리를 해야 했다. 이것저것 예상도 못했던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거리는 지저분하고, 에이전트끼리 바가지 경쟁에 짜증났다. 비자카드가 되다 안 되다 해서 스트레스가 많았다. 수에즈 통과는 거의 감옥 수준이었다.
그다음 아프리카 수단은 아예 앵커리지. 덥고 모기 파리 벌레가 기어들었다. 텐더를 타고 수아킨에 나가도 다 부서진 건물에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벌판에 거적을 치고 살고 있었다. 포트수단에 가서도 식재료를 살 수 없었다. 라마단이라 식당도 닫았다. 수단을 떠난 뒤, 수단에 쿠테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역풍 때문에 지부티에 갇혔다. 엄청나게 더웠다. 아프리카의 흙먼지가 섞인 바람이 분다. 갈 곳이라곤 걸어서 700미터 거리 바와디 몰 뿐. 더우니 매일 샤워하고 세탁도 해야 하는데, 물을 쉽게 구할 수 없다. 수돗물은 염분이 많았고, 비누가 풀리지 않는다. 그나마 에이전트에게 미리 말하고 한 밤중에 물을 받아야했다. 모기가 장난 아니다. 말라리아모기라고 하니 모기 기피제를 발랐다. 이것도 여자들은 거부감이 클 거다. 모기에, 흙먼지에, 더위에, 갈 곳 없이 배에 갇혀 있는 지부티 앵커리지. 문제는 바람이 언제 바뀔지 모른다는 거다. 나는 4월에 도착했는데, World Cruising Routes 자료엔 9월에 출항하라고 나온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나? 미칠 지경이다. 배에 기름을 가득 싣고, 역풍 항해를 감행. 목숨 건 필사의 대탈출을 해야만 했다.
오만 샬랄라에서는 연락했던 에이전트가 사라져, 아예 입항거부 당했다. 7시간을 바다에서 대기한 후, 결국 ‘나를 체포하라’ 고 뱃장 부리고 밀어 붙였다. 오만 주재 한국영사관의 도움으로 간신히 하루 입항하고 앵커링했다. 당연히 덥고 아무데도 못 갔다. 다음날 이동한 Hawana 마리나는 비싼 파라다이스였다. 그래도 덥고 모기가 극성이었다. Hawana 리조트 밖으론 나갈 수 없었고, 나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2박 3일 내 배에서 머무는 데만 300만원 가까이 들었다.
일부러 지금까지 겪은 불편한 점만 나열했다. 식재료 부족, 더위, 추위, 흙먼지, 벌레, 모기, 물 부족, 수리 부품 부족 바가지요금 등이 대부분이다. 멀미는 기본이다. 바다에서의 항해는 풍랑만 피하면 오히려 큰 불편 없었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동남아시아 항해는, 더위와 물 부족, 모기와의 전쟁일거다. 중간 기착지마다 에이전트들의 바가지와 불편한 입출항 절차(모든 나라가 다 조금씩 다르다!) 이런 점들을 미리 예상하지 않으면, 중동 동남아 지역 장거리 항해는 감옥이다. 당연히 멋진 점, 낭만적인 부분도 많다. 하지만 불편하고 힘든 부분에 대한 이해와 마음가짐을 미리 단단히 가져야 한다. 항해도 힘들지만, 장기적인 해상 생활이 더 힘들다. 가족과 함께 항해하는 멋진 선장이라면, 몇 배의 비용과 가족들의 불만에 찬 항의는 덤이다. 따라 나선 가족들은 예상 밖의 불편한 생활에 놀라고 실망할 수 있다.
장거리 항해는 낭만이 아니라 생존이다.
오전 5시 23분. 뒷바람 11노트, 선속 5.8 노트. 먹구름 속에 달이 갇혔다. 인도 남부를 벗어나 Gulf of Mannar 앞바다로 진입 중이다. 롤링이 더 심해졌다. 바람 때문에 파도가 커진 모양이다. 사이클론이 서둘러 온건 아니겠지? 226 해리 남았다. 10시 방향에서 여명이 밝아 온다.
오전 7시 25분. Rpm을 1,550으로 올린다. 도착 시간이 너무 애매하다. 선속 6.5노트. 내일(7일) 오후 5시쯤이면 도착 가능 할 것 같네. 일몰 전에만 들어가면 된다. 매번 마리나 도착 할 때마다 시간 때문에 애매하다. 내 습관이 잘 못 된 건가? 이번엔 오전 7시에 출항했는데도 이러네...
혹시 몰라 기름을 50리터 더 채운다. 2/3 탱크 230리터 정도 있다. Rpm 1,550일 때 시간당 2.7 리터 소모된다. 여유 있게 3리터 잡고 34시간. 총 102 리터 소모된다. 여유분 128리터, 충분할 것 같다. 메인세일을 스타보드로 돌리고 붐을 로프로 잘 매어둔다. 오늘 저녁 일몰이 몇 시고 완전히 어두워지는 시각이 언제인지 확인해야겠다.
오전 9시 49분. 통영 비지터지2 이준희 선장님의 위성전화를 받았다. 지금부터 뒷바람이 점점 강해진다는 예보다. 스리랑카 근방에 가면 18~20 노트까지도 불고, 돌풍도 있으리란 말씀이다. 어차피 집세일은 접고 메인 세일만 80% 펴서 가고 있다. 돌풍이 크게 불면 얼른 더 축범해야 한다. 펄링 방식 메인세일은 그 점에서 장점이 있다. 뒤바람을 잘 받아 내일 오후 늦게 라도 잘 도착하면 좋겠다.
오전 10시 11분. 드디어 198해리 (1,535 해리, 89% 왔다.)남았다. 선속 6.5. 파도가 커서 계속 롤링과 요잉 중이다. 어질어질하다.
오전 10시 45분. 예전에 강릉항요트마리나 옆 자리에 배를 댔던 이수명 여주믿음교회 목사님께서 위성전화로 연락을 주셨다. 너무 반가웠다. 그러나 하루 종일 입을 다물고 있으니 목소리가 쉬어 잘 나오지 않았다. ‘저는 건강하고 안전하게 항해중입니다. 안부 연락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 작은 인연도 소중하게 여기고 돌아봐 주는 분들이 계시다.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하겠다. 선속 6.4 노트. 194마일 남았다.
정오. 수에즈에서 산 아랍 라면에, 오만 살랄라에서 산, 계란 한 알. 김치 약간. 4월 15일 오후 지부티 홍무싸님 부인께서 작은 병에 담아 주신 김치를 5월 6일 현재 아직도 먹고 있다. 21일간 먹고 있다. 아직 한 끼 더 먹을 량을 남겨 두었다. 어떤 소중한 음식도 이보다 더 귀하게 보약 달이듯 먹은 기억은 없다. 아덴만 탈출과 인도양 항해에 진짜 보약이 되어 주었다. 김치 없인 못살아 나는 못살아! 홍무싸님 부인 너무 감사합니다.
1.2 미터의 파도가 5시 방향에서 몰아치고 있다. 나는 아덴만 항해 때 이런 파도를 겪었다. 두 번 다 정면에서 몰아치는 역파도였다. 펑펑! 배를 부시듯 펀칭하던 두려운 파도. 첫 번째 출항에서는 바람과 파도에 져서 지부티로 회항했다. 안전을 위해 정말 잘 한 결정이었다. 두 번째 출항 시엔 바람의 틈을 노리고 소말리아 해안 쪽으로 전진했지만, 그래도 3일은 이런 파도를 정면에서 맞아야 했다. 지금 그 파도가 뒤에서 밀어주고 있는 거다. 커다란 파도가 달려드는 것으로 보며 안도하고 있다. 역파도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야. 풍속 12.4노트, 선속 6.8 노트. 183 해리 남았다.
오후 2시 15분. 뒷바람 12노트. 선속 6.8~7.1노트. 이대로면 24시간 후에 Galle에 도착이다. 내일(7일) 오후 2시 15분 도착이라는 말이다. 섣부르지만 제 시간에 도착한다면, 예상보다 빠른 도착이 될 거다. 스리랑카 Galle에서 엔진 오일 갈고, 엔진 벨트 여분 준비하고, 몇 가지 잔 고장을 수리한다. 식료품 마련을 위해 장을 보고, 다음 기항지인 랑카위까지의 9일간 항해를 대비해, 물과 디젤연료를 사야 한다. 10일에 사이클론이 온다니 Galle에서 며칠 머물러야 한다. 일기 예보를 철저하게 확인해서 사이클론을 피한다. 중간 피항지 몇 군데를 미리 확인해 두고, 말레이시아 랑카위에서 가장 저렴하고 물과 전기를 공급받고, 부품을 구매할 수 있는 마리나를 찾아야 한다. 여전히 할 일이 많다. 남은 거리 170해리. 24시간 남았다.
오후 3시 30분, 풍속 우현 브로드리치 11노트. 집세일을 100% 편다. 엔진 Rpm 1,550. 선속 7.3노트. 엔진과 세일을 같이 쓰는 하이브리드 항해다. 늦은 오후부터 바람이 어떻게 변할지 잘 살펴야 한다. 지나치게 바람이 세지면, 메인 세일을 축범 할거다. 선속이 7.8노트를 오르내린다. 인도양 항해의 마지막 코스를 완전 폭주하는 제네시스다. 새삼 바바리아 50 모델의 주행성능에 놀라고 있다. 이대로라면 내일 1~2시 사이면 Galle 들어간다.
오후 5시 30분. 파스타를 끓인 후 양송이 스프 가루를 넣어 나만의 파스타를 만들었다. 오이 절임과 생오이 자른 것을 반찬으로, 저녁을 뚝딱 해치운다. 파도가 심해 파스타가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다. 그릇 엎을까봐 꼭 쥐고 얼른 먹었다.
오후 6시 15분. 뒷바람 15노트가 되니 선속이 8노트를 넘어간다. 지나친 과속은 건강에 해로 울 수 있다. 엔진 Rpm을 1,300 으로 낮춘다. 선속이 6.8~7.4 노트를 오르내린다. 오늘 밤은 이렇게 가고, 내일 오전에 상황 봐서 Rpm을 조절할 예정이다. 드디어 석양이다.
오후 6시 40분. 갑자기 비가 온다. 하늘에 비가 올만한 구름이 없는데 빗방울이다. 서둘러 해치들을 닫고 스프레이 후드도 잠근다. 이제 동남아시아 항해를 하다보면 비가 올 때가 많을 거다. 스코올을 대비한 연습도 해야겠다. 우산도 몇 개 사두고. 오후 6시 50분까지는 주변 사물 구분이 가능하다. 늦어도 이 때까지만 입항하면 되겠다.
비가 오며 돌풍이 분다. 풍속 18노트, 선속 8.2 노트. 커다란 구름이 제네시스를 앞질러가며 레이더 가드존을 덮었다. 한동안 알람 소리를 들어야한다. 설마 사이클론이 앞질러 생긴 것은 아니겠지? 기상이, 이준희 선장님이 오전에 이야기 해준 그대로네. 그럼 사이클론은 10일 부터니, 돌풍만 주의하며 가자. 인도양 항해 마지막 날 밤 고생 좀 하겠네.
5월 7일(일요일) 0시 30분. 벌써 한 시간 째 가드 존 알람이 울리고 있다. 보통 바다에서는 세일 요트가 가장 느리다. 엔진으로 가는 대형 선박들은 세일 요트 보다 훨씬 빠르다. 레이더 상에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은, 절대로 세일 요트가 추월하는 게 아니다. 100% 상대 선박의 진행 방향이 나와 반대인거다. 그런데 딱 제네시스 진행 방향의 선박 하나가 가까워지기는 하는데, 벌써 한 시간 째 가드 존 안에 있다. 뭐지? 타 선박이 가까워지면, 금방 서로 교행 한다. 이 선박은 정말 제네시스가 추월이라도 하듯 제자리에 고정돼 있다. 접근하면서 보니 붉은 등이 보인다. 같은 방향 맞는가? 좀 더 진행해 보니 엇! 녹색등도 같이 보인다. 그러면 배의 앞이나 뒷부분 정면이라는 거다. 몸에 소름이 돋는다. 배가 진행 중이라면 충돌 확률 50%.
결국 300~400미터 거리까지 (야간에 이 정도 거리면 정말 충돌이나 다름없다.) 접근되어 보니, 정말로 바다 한가운데 멈춰 있다. 뭐지? 고장인가? 브리지에 커다랗게 W 자가 붙어 있다. Galle 까지 93해리. 입항 시간을 맞추려고 대기 중인 배인가? 어쨌든 파도 심한 바다에서 한 시간 내내 신경 썼더니 머리가 지끈 거린다. 레이더에 다른 배들도 많이 잡힌다. 엄청 번잡한 항로다.
오전 1시 10분. 간신히 멈춘 배로부터 멀어졌는데, 이번엔 비구름이 또 난리다. 밤새도록 가드 존 알람이 울리네.
오전 3시 15분. 콕핏 옆 갑판에 뭔가 파라락 거린다. 비린내가 확 풍긴다. 불을 켜보니 물고기다. 손에 묻히기 싫어 수저로 다시 바다에 돌려보낸다. 재수 좋은 물고기다. 내가 발견하지 못했으면 아침에 바싹 말라 북어포가 되었을 거다. 바람은 15~22노트, 선속 7.5~8.2 노트. 파도가 높다. 저녁에 도착할까봐 일부러 늦게 오려고 했는데, 바람이 돕는다. 그나저나 Galle 도착해서도 파도가 이렇게 강하면 접안이 쉽지 않을 것 같다. 펜더도 다 내리고 다시 묶어야 하는데. 이래저래 쉽지 않겠다. 설마 사이클론인데, 이준희 선장님께서 나 놀랄까봐 10일부터라고 안심시키신 건 아니겠지?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오전 6시 30분. 그래도 먹어야 한다. 씨리얼에 우유로 아침을 해결한다. 어제 메인세일 방향 정리하다가 밧줄에 얻어맞은 왼쪽 눈의 안통이 조금 심해졌다. 충혈 되고 시선 돌릴 때마다 뻐근하다. 안경이 깨지거나 눈알이 터지지 않아 다행이다. 시력도 그리 나쁘지 않다.
오늘 새벽은 버라이어티한 항해였다. 파도 1.5미터, 풍속 18~22노트. 여기까지는 아덴만 항해와 같다. 그러나 뒷바람이란 점에서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수많은 선박들, 비, 먹구름. 때문에 밤새도록 가드 존 알람에 시달렸다. 아직도 환청이 들린다. 멈추어 선 거대 선박까지, 놀랄 일들이 많았다. 인도양 구간 마지막 항로에 왜 이렇게 배가 많은지 생각해 보니 답은 간단하다. 내가 잡은 항로가 최단 거리인 거다. 다른 선박들도 동남아시아를 출발해 인도 남단을 거쳐 중동지역으로 간다면 바로 내가 가는 이 항로로 갈 거다. 전 세계의 모든 선박이 지나는 통로다. 그러니 레이더가 가득 차게 배들이 다닐 밖에.
선속 6.6노트, 49.7 해리 남았다. 8시간 후면 스리랑카 Galle 다. 스리랑카에 가까이 갈수록 주변의 배들이 줄어들 거다. 바람이 조금 잦아지나 싶기도 하다. 엔진 Rpm을 1,450으로 높인다.
오전 8시 20분. 너무 많은 배들이 앞에서 다가온다. 레이더 볼 때마다 10척이 넘는 배가 주변에 있다. 어지럽다. 가드 존 알람이 계속 울린다. 어린 시절 즐기던 게임기 같다. 다만 이것은 게임이 아닌 현실이고 상대는 거대 선박이다. 실수하면 죽는다. 나중에 Galle에서 랑카위 갈 때도 이런 상황일거다. Galle 마리나에 노련한 선장이 있으면 조언을 좀 받자. 왼쪽 눈이 불편하니 책보기도 만만치 않다. 선속 6.2노트. 남은 거리 39.4 해리. 파고가 2.0~2.5미터 되는 것 같다. 바람은 12노트로 약해지고 있다. 6시간 이상 남았다.
오전 9시 12분. 통영 비지터지2 이준희 선장님의 위성전화다. 바람이 이제부터 슬슬 약해진다고 하신다. ‘어제 저녁이 태풍 같았습니다. 말씀대로 바람은 약해지고 있고, 5시간 후 도착입니다.’ 마치 자기 일처럼 너무 안도하시고 좋아 하신다. 감사하고 또 감사한일이다. 도착해서 SIM 카드 사서 연락드리기로 한다.
오전 10시. 29 해리 남았다. (98.3% 왔다.) 아직 핸드폰은 서비스 불가다. 그러나 시간은 현지 시각으로 바뀌었다. 머잖아 비싼 로밍이 될 거다. 4월 16 ~ 5월 7일 지부티에서부터 3주간의 단독 항해였다. 오만에서 3일 쉬고, 4월 25일 출항했다. 인도양은 13일간 항해했다. 예정보다 하루 빨랐다.
빔리치 순풍항해도 며칠하고, 잔잔한 호수에 갇힌 듯한 무풍항해도 했다. 어젯밤부터는 거친 뒷바람으로 평균 8노트 가까운 쾌속으로 Galle에 접근했다. 지금은 바람이 잦아들어 선속 6.3노트다. 나에게 묻는다. 이번 장거리 단독항해에서, 나는 뭘 느꼈나? 뭘 배웠나?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질문은 꼬리를 물고 나는 침묵한다. 빨리 가서 우리 딸 얼굴이나 보자. 뭐가 소중한 것인지는 확실하게 알았다.
내일이 마침 어버이 날이다. 사무친 그리움의 눈물 외엔 부모님께 드릴게 없네.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사이클론 조짐인가보다. 사이클론이 빨리 끝나고 바다가 잔잔해져야 말레이시아로 출발하는데, 뭐 걱정해봐야 소용없다. 하늘이 하는 일이다. 기도가 답이다.
오전 10시 40분. 비구름이 배 위를 가득 덮어서 가드존 알람이 난리 났다. 할 수없이 레이더를 끈다. 뭐 이제 4시간만 가면 된다. 그래도 혹시 몰라 다시 레이더를 켜니 헛! 모든 스위치가 정상 작동한다. 재빨리 필요한 세팅을 하고 나니, 다시 스위치가 안 된다. 흠... 그럼 앞으론 레이더 켜자마자! 이것저것 다 세팅해 버리는 방법이 있구나. 아쉬운 대로 일단 이 레이더로 랑카위까지는 가야한다.
오전 11시. 전화기에 문자가 우르르 쏟아진다. 열어보니 아직은 아니다. 잠깐 로밍 연결이 됐었나보다. 아직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22.6 해리 밖에 스리랑카가 있긴 있나보다. 파도가 높아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임대균 선장에게 랑카위 올 때 가져올 물품을 정리해 본다.
[정로환, 바르는 모기 기피제, 라미실 원스(약품), C 타입 고속 충전 Usb 케이블 3개, 방수 실리콘, 나사 고정용 록 타이트, 성능 괜찮은 쌍안경, 한국 식료품, 라면, 포장 김치, 캔 김치. D2-75 엔진 벨트 한 개.] 미리 문자로 보내줘야겠다.
어! 스리랑카는 한국 로밍이 되나보다. 잘 됐다. 그래도 SIM 카드 따로 사서 써야지 너무 비싸다.
오후 12시 12분. 바람은 10노트로 낮아지고 파도는 2.0미터로 높다. 선속 6.1노트 2시간 30분 더 가면 도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