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5월이 되어 스승의 날이 되면 내가 국민학교 6년간 다닌 학교의 교장 선생이었던 아버지에게 먼저 전화를 올려 선생님으로서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 나서 종로구의 중앙고등학교 바로 앞에 사시는 내 고 3 선생님 댁을 찾아 인사를 올리곤 했다. 이제 두분 다 수년전 돌아 가시고 해서 살아계신 담임 선생님 사모님께 전화로 인사 올리는 정도 밖에 못 하고 있다. 지난 5월 스승의 달을 맞아 큰 사랑을 주셔서 고마웠던 선생님을 그리며 적어 본 잛은 글임.)
잊지 못할 부고의 세분 선생님
삼한 뒤에 온 사온 중 하루인 겨울날이었다. 고 일 겨울 방학이라 나는 고향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동네 어귀 연 못에서 썰매를 타던 아이들 몇이 얼음이 깨져 물속에 빠졌다는 참변을 외치는 소리에 작은 시골 동네의 평화가 깨졌다. 동네 장정들이 급히 뗏목을 만들어 너 댓 명이 타고 연 못 가운데로 들어갔다, 초등학교 교장이셨던 아버지도 뗏목을 같이 타고 철조망을 말아 둥글게 만든 것으로 연못 바닥 여기저기를 훑으며 끌었고 한 참 뒤 손에 손을 꼭 쥐고 죽은 아이 셋이 함께 딸려 올라오고 곧 이어 한 명 마저도 올라오면서 작은 마을은 며칠간 처절하고 슬픈 통곡 소리에 쌓였다. 육척 장신이던 아버지는 어쩌다 기우뚱하는 뗏목에서 떨어져 얼음 물속에 빠졌고 겨우 뗏목 위로 올라 와서는 흠뻑 젖은 채로 근 두 시간을 버틴 것이 화근이 되어 그 이튿날부터 바로 몸져누워 하반신을 전혀 못 쓰는 중병을 앓기 시작했다. 곧 일어나시겠지 하는 희망을 품고 나는 개학에 맞춰 집을 떠나 부산으로 왔다. 봄 방학 직전 아버지는 병석에서 보낸 편지에서 일 년 간 휴학을 하라고 하셨다. 나는 혼자 학업을 계속 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고 도저히 안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다음 날 카운슬링 담당 김 정규 선생님을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다 들은 후 내 성적을 확인 하신 선생님은 며칠 뒤에 다시 들리라고 하셨다. 2학년이 시작 되면서 나는 어떤 한약 회사 부사장 집에 입주하여 중3을 가르치는 가정교사가 되었다. 부중을 보결로 가서 반에서 꼴찌를 다투는 학생이었지만 부고에만 합격시켜 주면 내 3학년 학비 등 일체의 비용은 물론 대학 입학 등록금도 대 주겠다는 이야기에 고무된 나는 학비와 약간의 잡비를 받으면서 일 년 간 혼신의 힘으로 그 아이를 가르쳤다. 내 평생에 진정 최선을 다 한 적이 언제인가? 라고 누가 내게 물으면 나는 두 말 없이 내 고2 때였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애를 가르치는데 전력을 다 기우렸다. 3 학년 말 때 쯤 성적이 반에서 27 등 정도까지 되기도 해서 기대를 좀 하기도 했지만 부산고는 떨어지고 2차로 부산공고에 붙는 것을 보고 나는 그 집을 나와 하숙으로 옮겼다. 2 학년 말 봄 방학 때였다. 최종 목표 달성은 못 했어도 혼자 힘으로 한 학년을 보내게 되어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김 정규 선생님을 다시 찾았고 이미 중학생 가르친 경험이 큰 자산이 되어 중앙동에서 중 3 세 명을 가르치는 시간제 가정교사 자리를 얻게 되었다. 방과 후 부산역 근처 중앙동으로 가 한 학생 집에서 저녁을 먹고 아이들 가르치고 광복동 야시장 길을 걸어서 도청 뒤 부민동 산비탈 하숙집으로 가면 밤 11시 경 되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이와 같은 힘들었지만 꿈이 컸던 내 고 3 생활도 여름방학 중에 학교에 나와 특별 수업을 받고 있던 8월 초 어느 날 끝이 나게 되었다. 며칠 째 피곤하고 입맛이 없어 도시락을 못 먹은 지 일주일 째 돈 무서워 못 갔던 병원을 결국 찾아 갔다. “급성 간염 황달입니다. 무조건 쉬고 절대 안정을 취하고 한 동안 집중적인 치료를 받아야 됩니다.” 라고 의사는 말했다.
나는 담임 서문경 선생을 찾아가 말씀드리고 나을 때 까지 휴학을 하고 고향 집에 가야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아르바이트 하며 고생하더니 몸을 버리다니 안 됐구나! 빨리 나아 가지고 오너라.” 하셨다. 우리 반 담임이 되어 내가 고3이면서도 고학을 하는 것을 알게 된 선생님은 나를 끔찍이 위하고 생각해 주셨다. 공납금 안 낸 학생들 일으켜 세워 야단치려 하기 전에는 내가 냈는지 먼저 확인 하고 혹시 미납이면 “태희! 월급 날 언제냐?” 물어서 답하면 내 월급날까지 공납금 이야기 안 꺼내셨고 두발 긴 학생들 강제로 자르기 전에 혹시 내 머리가 길면 이발료를 여러 번 내 손에 쥐어 주시던 분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상처 받을 까봐 그렇게 사려 깊게 마음을 써 주셨던 것이었다. 약 한 달 반 후 완전하지는 않지만 학교로 돌아가도 좋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9월 중순 복학을 하게 되어 다시 담임 서문경 선생님께 인사를 올리고 진학 상담을 하게 되었다. 내 개인 대입 관련 관리 대장을 앞에 놓으시고 “2학기 가장 중요한 때 정규수업과 방과 후 특별 수업을 못 받았으니 입시가 걱정이구나.” “처음 목표로 하던 공대는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고 문리대로 바꾸면 어떨까?” 하시기에 나는 두 말 없이 선생님 말씀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뒤 세 번의 모의고사 성적에서 내 석차가 떨어지기는커녕 나아지는 것을 보고 다시 나를 불렀다. “너 같은 놈 처음 본다. 가고 싶은데 아무데나 가도 좋다.” 하며 격려해 주셨다.
집에서 부쳐 와야 할 돈이 며칠 늦어진 어느 날, 나는 국어를 배웠던 김 무조 선생님을 뵈러 갔다. “空手來 空手去 人生事 如浮雲” 열 두자를 칠판에 적고 하는 선생님의 멎진 인생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 개인적으로 친숙해진 선생님이라 왠지 모르게 내 인생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저 실은 집안 형편상 대학 진학을 포기 하고 공무원 시험을 치를까 합니다.“ ”어떤 공무원?“”예 세무 공무원을 생각하는데 같이 하숙하는 **대학생에게 영어 수학을 제가 며칠간 집중 적으로 가르치고 그 사람 합격했는데 그 사람 말이 제 실력이면 공부 좀 하면 문제없다고 했습니다." “학생의 생각 잘 알겠는데 내가 너 같으면 나는 이렇게 하겠다.” “입시 공부에 계속 정진해서 우선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게! 합격자 발표를 본 후 그 대학 정문 앞에 서서 크게 외치게!”나는 이 대학에 몇 년 몇 월 며칠 합격하였지만 집안 사정으로 부득이 등록을 포기한다!“ ”대학을 못 나와도 좋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자네가 일생을 살며 자신 있게 사는 길이라 생각하네!“ 나는 마음을 고쳐먹고 그 방을 나왔다.
나는 내 아버지 다음으로 부고의 이 세분 선생님의 가르침과 사랑 덕으로 지금까지 큰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위의 세 분 선생님께서 내게 주신 가르침과 사랑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제 고인이 되신 내 영원한 담임 서 문경 선생님 그리고 불민해서 근황조차 잘 모르는 두 김 선생님! 아직도 주신 은혜 잊지 않고 항상 감사히 생각하고 있음을 이 글을 통해 꼭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1012 년 5월 스승의 달을 맞아
첫댓글 어려운 환경 가운데 훌륭한 멘토 역할을 해주시고 네 일생의 방향을 잡아주신 선생님들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는구나.
나는 중학교 시절에 특별히 아껴 주시던 담임선생남을 대학진학후에는 찾아 뵙지도 못했는데 지금은 돌아 가셨는데 노년에 내 동창들에게 내 말씀 많이 하셨다는 이야기 전해 듣고 얼마나 섭섭하셨을까 하는 마음으로 항상 죄를 지은 것만 같다.
언제 기회를 만들어 성묘라도 해야 할것 같다.
내 오늘을 있게 해 준 과거에 감사할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떠나는 날 빚을 가능한 한 적게 남겨야 하지 않을까 해서,
좋은 글 잘 보았다. 좋은 인연과 함께 엄청난 노력으로 학창생활을 보낸 태희에게 찬사를 보낸다.
과찬! 쑥스럽다. 우리 세대 누구나 다 비슷한 아픔과 시련은 있었게 마련인데 --- 나는 행운아였었고 그래서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고 짧은 문재지만 글로 써 본 것일세. 이 외에도 내가 걸어 온 발자취들 중에서 남기고 싶은 이야기 들에는 제목을 붙여 취미 삼아 글로 표현해 보고 있는 중이야. 내 손자에게 전해 주려고--읽어 볼지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