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박갑순
오후는 분주한 일상이 자리를 잡고 해의 근육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시간이다. 공기는 한층 유순해지고, 아침부터 팽팽하던 마음의 긴장도 서서히 풀린다. 일에 탄력이 붙고 지하철 좌석이 느슨해진다. 빈자리를 차지하려는 경쟁도 사라지고, 무임승차한 마음의 주름마저 저절로 펴진다. 눈치 볼 필요 없는 정다운 대화가 오가고, 바쁘게 흘러가던 걸음들은 한결 속도를 늦춘다. 창밖 풍경도 차분해진다. 오후가 되면 세상이 한 템포 느려진다.
오후처럼 편안한 인연이 있다. 잡지사를 운영하는 분이다. 주 4일씩 문산에서 종로까지 왕복 4시간을 오간다. 구순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만큼 정정하다. 성인병 약 한 알조차 입에 대지 않는다는 말이 놀랍기만 하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 탑골공원 옆 담장 따라 길게 늘어선 줄이 눈에 들어온다. 점심을 얻기 위해 아침부터 이어진 줄이다. 이곳의 오전은 의미가 없다. 배식은 오후에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거리의 오후는 삶의 흔적을 깊이 새긴 채 흘러간다.
인생 오후와 어울리는 카페 ‘오(娛)‧후(逅)’를 찾았다. 즐거울 오, 만날 후. 차 한 잔에 담긴 즐거운 만남을 의미하는 것일까. 오•후는 넓은 길에서 갈라진 골목 소박한 식당들이 모인 곳에 있다. 마치 오전을 닮은 듯한 남자가 혼자 운영하는 아담한 카페는 오후로 기우는 햇살이 유리창을 기웃거린다.
구순과 팔순의 오후가 생강차를 앞에 놓고, 마치 오래된 플레이리스트를 다시 듣듯 천천히 인생을 풀어놓는다. 흐릿한 흑백사진을 넘기듯, 대화는 자연스럽게 과거로 이어진다. 사십 년 된 인연을 더듬으며 첫 만남의 순간으로 돌아갔는지 주름진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그들의 이야기에 취해 시선을 창밖으로 돌린다. 뒷짐을 진 노인의 뒤를 비설거지를 끝낸 해가 느릿느릿 따라간다. 노인의 좁은 보폭에 맞춰 걷는 햇살이 태평스럽다. 산책길 한가운데, 둥근 돌에 걸터앉은 오후가 목을 축인다. 계절의 오후를 지나온 낙엽들이 바스락, 마른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여자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아름다움을 꿈꾼다. 예쁜 옷을 입고 싶고 손목에 팔찌를 두르고 싶고, 반지 하나쯤 끼고 싶다. 그러나 인생의 오후에 접어들면, 그것마저 점점 멀어진다고 한다. 잔잔한 바닷물결 너머로 저무는 순간이 와도 당황하지 않도록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별이 문득 닥쳤을 때, 손가락에서 반지가 빠지지 않으면 어쩌나.’ 불안한 마음에 몸에서 모든 금부치를 제거했다는 말씀이 쓸쓸하다. 어머니도 그러셨다. 요양병원에서 기형처럼 굽어진 마디 굵은 손가락에서 말없이 은가락지를 빼주셨다.
오전이 성급한 사람이라면 오후는 느긋한 사람이다. 오전이 초록의 생명력이라면 오후는 붉은 노을의 온기다. 오전에 해야 할 일을 마치고 개운한 마음으로 온전히 나를 챙길 수 있는 오후는 여유로워 좋다. 그러나 게으름 속에서 맞이한 오후는 여유롭지 않다.
몸에 적신호가 켜지면서 나는 오후의 시간 속으로 들어섰다. 오전의 움직임이 버거워졌다. 이른 아침에 하루 일의 절반을 처리하던 몸은 이제 느리기만 하다.
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 창가에 앉아 조용히 풍경을 읽는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창밖의 세상은 마치 수채화처럼 빗물에 번진다. 빗줄기 사이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에도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우산 없이 서 있는 나무는 묵묵히 빗물을 맞는다. 우산을 받쳐든 손 끝에 시간의 무게가 실려 있고, 허리를 살짝 숙인 채 비를 피하는 모습에서는 삶의 조심스러움이 느껴진다.
해가 기울며 풍경은 한층 더 깊고 아름다워진다. 서쪽 하늘을 홍안으로 물들이는 석양은 종일 논밭에서 씨를 뿌리던 농부가 하루를 마치며 짓는 순한 미소 같다. 본분에 충실했던 하루를 마감하며 내일을 기약하는 석양의 얼굴에는 기품이 스며 있다.
노을처럼 붉게 익어가는 인생의 오후, 혈기 왕성했던 젊은 날의 흔적을 간직하고 더욱 깊어가는 시간이다. 삶의 질곡을 잘 감당한 후, 고요한 안식 속에 안착하는 오후를 맞이하고 싶다. 오전이 아무리 화창해도 오후가 흐리면 그 하루는 흐린 날로 기억되듯, 인생의 오후가 아름다워야 온전히 빛나는 삶이 아닐까.
오전의 햇살을 함께한 인연과 다시 오‧후에서 차 한 잔 나눌 그날이 벌써 기다려진다.
1998년 『자유문학』 시, 2005년 『수필과비평』 수필 등단
수필집 『꽃망울 떨어질라』, 『시들지 않는 꽃』
시집 『우리는 눈물을 연습한 적 없다』 외 저서 다수
14329
경기도 광명시 성채로 37, 401동 303호(역세권휴먼시아)
박갑순
010-9624-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