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원래 "선교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글이 아닙니다.
한신대학교에서 교회사를 전공하고, 영국 버밍엄대학에서 건축과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신 "이정구"박사님의 "한국 교회의 건축"에 대한 글입니다.
이글을 이곳에 옮기는 것은 옛날 조선에 입국했던 선교사들의 관계를 쉽게 알아보기 위해
초창기의 일부만을 옮겨 이해를 돕기위한 것입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체결 이후
미국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를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은 1884년 중국에서 의료선교를 하던
미국인 의사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이다.
미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amuel Maclay 1824-1907)는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1882년 일본에 갔다가 1884년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는 이화학당을 설립한 미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턴"(Mary Fletcher Scranton, 1832-1909)과
배재학당을 설립한 미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를
조선에 불러 들이고 바로 일본으로 돌아갔다.
1885년 "아펜젤러"가 입국할 때 미 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도 함께 입국하였다.
이들은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할 수 없었는데, 당시 서구 열강으로 인해
안정된 조정을 유지하기 어려웠던 조선 정부의 쇄국정책 때문이었다.
이러한 국내외 정세 속에서도 미국과 영국의 선교사들이 연이어 입국하였고,
1887년 장안에는 최초의 장로교회(새문안)와 최초의 감리교회(정동제일)가 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듬해, 조선 조정은 서양 선교사들의 포교활동을 금지하였다.
전통적인 불교 및 유교 문화 때문이기도 했고, 불안정한 정국으로 인해 조정과 국민이
서구 열강의 앞잡이로 인식되는 기독교 자체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군대와 같은 무력을 사용하여 피선교지를 정복하기보다는 가난한 피선교지에
물질적인 구호와 함께 의료, 교육 시설을 설립하는 등의 방법으로 선교를 진행하였다.
이는 서방의 강대국들이 오랫동안 사용해온 선교 방법이었다.
이에 따라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입국 즉시 각자가 소속된
미국 교단의 지원을 받아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병원, 학교 선교와 더불어 피선교지 국민에게 한층 거부감 없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문서 발행이었다.
선교사들은 교회에서 사용할 주보와 간단한 교리문답집, 교단 소식지를 발행하다가
점차 복음서 일부를 번역하여 대중에게 보급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인력, 인쇄기와 인쇄소, 수집과 편집을 위한 업무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서선교에는 상당한 운영 경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병원이나 학교와 마찬가지로 개인이 운영할 수 없었다.
"서회 설립"(書會 設立)의 동기는 이러하다.
장로교 선교사였던 의사 "헤론"(John W. Heron, 1856-90)은 평소
북장로교 선교회장 "모펫"(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에게
복음 전도와 문화발전을 위해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의
연합사업으로 "서회"를 세우자고 의견을 피력한 바 있었다.
1889년 10월 "언더우드" 사택에서는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의 친교 모임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헤론"은 조선에 "기독교 문서 출판사"를 설립하자고 공식적으로 제안했다.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선교사들은 조선의 선교를 위해 병원,
학교와 더불어 문서발행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던 터였다.
1890년 6월 24일 수요일 오후 4시에 "서회 창립"을 위한 회의가 잡히자,
이 회의에 장로교 선교부가 다른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초대장을 보낼 것인지를
논의하기 위해 언더우드 사택에서 "모펫"의 인도로 사전 모임을 가졌다.
6월 24일에 열린 서회 창립을 위한 회의는 언더우드의 기도로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모펫"이 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북장로교 선교사 "기포드"(Daniel Lyman Gifford)가
총무로 선출되어 서회 창립의 첫걸음을 떼었다.
1890년 6월 25일, "The Korean Religious Tract Society"를 창설하고
헌장을 제정하였으며, 1891년 1월 15일에는 조선어 명칭을 "죠션셩교셔회"라고 정했다.
1919년부터 영어 표기를 "The Christian Literature Society of Korea"로 개칭하였는데,
이렇게 명명한 이유는 "영국성서공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 BFBS) 조선지부 초대 총무로
성서 번역과 반포에 정성을 쏟은 "켄무어"(Alexander Gordon Kenmure, 1856-1910)의 제안 때문이었다.
그는 “기독교 문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희생을 통해 개인의 영성,
사회와 국가 생활을 고양하며 정화하는 문학의 온전한 몸이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서회의 창립위원은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를 중심으로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였던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
미 감리교 선교사 "허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
미 남장로교 선교사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 1867-1951),
북장로교 선교사 "기포드", 미 북감리교 선교사 "올링거"(Franklin Ohlinger, 1845–1919),
조선 정부가 최초로 설립한 "육영공원"(Royal College)에서 교수직을 맡았다가
후에 배재학당장이 된 "벙커"(Dalzell Aldelbert Bunker, 1853-1932)이다.
이렇듯 서회는 서로 다른 교단의 연합과 협력으로 세워진 최초의 문서선교 기관이다.
서회 설립 전에 "아펜젤러"는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올링거"를 초청하여
1887년 배재학당 안에 삼문출판사를 설립하였다.
"올링거"는 상하이와 일본에서 인쇄기 및 활자 주조기를 도입하여
한글, 영어, 한자로 각종 서적을 인쇄하였는데 대표적으로 누가복음서를 비롯한 전도 문서를 발간하였다.
당시 삼문출판사는 "정동예수교출판소", "미이미활판소"로도 불렸으며
한국어, 영어, 중국어를 출판한다고 해서 "한미화출판소"(韓美華出版所)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삼문출판사는 당시 한국 정부가 설립한 인쇄소 "박문국"(博文局)과
민간인이 설립한 인쇄소 "광인사인쇄공소"(廣印社印刷公所)와 함께
조선의 출판문화와 문서선교를 이끈 유일한 기독교 출판사였다.
서회의 초기 사업자금은 "언더우드"가 주선한 영국과 미국의 "소책자협회"(The Tract Society)의 원조,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부의 원조, 또 주한 선교사들의 회비와 개인들의 기부금 등으로 충당하였고,
출판경영은 여러 교단 선교사들의 무보수 봉사로 이루어졌다.
설립 초기, 서회는 원조와 기부금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사옥을 마련할 형편이 아니었다.
설립된 이후 10년이 지난 1900년에서야 "성서공회" 건물 안에 사무실을 빌려 둥지를 틀게 되었다.
하지만 "성서공회"와 "서회"는 모두 몇몇 교단과 서양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세워진 연합기관이었기 때문에,
이런 상태로 서회가 사업을 확장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서회는 조만간 독자적인 사옥을 마련하기 위해
서회 실행위원회를 중심으로 사옥 마련을 위한 모금계획을 세우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1903년 3월에는 기금조달위원회를 구성하여 건물터를 물색하는 등의 모든 일을 이 위원회에 위임하였다.
당시 서회의 한 해 매출은 400달러(800엔)였는데, 1903년 10월에는 선교사들과
외국인 거주자들의 도움으로 건물 터를 매입할 수 있는 600달러(1,200엔)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여 모금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미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로, 제중원 3대 원장을 지낸 "빈턴"(Charles Cadwallader Vinton, 1856-1936)은
‘성서공회’의 창립회원으로, 서회의 총무를 맡았다.
"빈턴"은 서적 출판비를 모금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1905년 4월에는 국내에 있던 외국 선교사 150여 명이 터를 매입하기 위해
무려 3,000달러(6,000엔)에 이르는 서약을 하였고,
영국과 미국에서는 서회 건축을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노력했다.
이로 인해 1906년에는 종로 2가의 대지와 낡은 건물을 1,586엔에 매입할 수 있었다.
이것이 서회가 설립된 이후 16년 만에 매입한 첫 사옥이다.
이듬해인 1907년에는 매입한 목조 기와집을 수리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리한 목조 기와집은 문서 출판 선교사업체로서 본격적인 업무를 하기에는 너무 협소했다.
1907년 총무 "빈턴"이 미국으로 돌아가자,
서회는 건물 신축과 사업 발전을 위해 신임 총무를 물색하기 시작했고,
1910년 영국 출신의 구세군 "본위크"(Gerald Bonwick, 1872-1954)사관에게 총무직을 맡겼다.
1910년 10월 12일에 서회의 첫 유급 전임 총무로 취임한 "본위크"는
1937년까지 무려 27년 동안 총무로 재임하면서 서회의 기반을 튼튼하게 다졌다.
서회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당시 월급 20엔을 받고 서회 서적 판매책임을 맡았던 "이용균"(이모세) 씨 역시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빈턴"이 귀국한 이후 "본위크"가 총무로 부임하기까지는
모든 선교사가 칭찬해 마지않았던 "이용균"씨가 공석인 총무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그는 낮에는 판매 일에 헌신하고, 퇴근 후에는 총무 일에 집중했다.
새로 취임한 "본위크" 총무는 외국에서 최선을 다해 서회의 발전을 위한 후원금을 모았고,
서적 판매를 위한 서점을 건축할 계획도 세웠다.
본위크 총무의 모금에 힘입어 미국 기독교서회가 3년 동안 매년 금으로 450달러를,
런던 기독교서회가 3년 동안 매년 100파운드를 약속했고,
1910년 가을에는 서회 이사장인 "언더우드"를 통하여 익명의 두 미국인 후원자가 금 600달러를 기부하였다.
건축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던 서회는 1910년 11월 초 지역 건축업자와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서둘러 건축을 시작하려고 겨울에 착공을 하는 바람에 공사가 진척되지 못했고,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드디어 종로2가에 기와집을 헐고 2층 벽돌 양옥으로 신축하기에 이르렀다.
서회는 1911년 6월 28일 수요일에 사옥 개관식을 하였다.
신축 건물의 개관식 날짜를 서회 설립일인 6월 25일에 맞추지 못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경비 문제로 인해 원래 계획대로 건축하지 못한 탓에 새 건물의 공간은 넉넉하지 않았으나,
건물을 건축했다는 것 자체에 큰 의미가 있었다.
이는 또한 서회가 다양한 사업을 기획하며 진일보하는 새로운 시작점이기도 했다.
이날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이사회의 한 사람으로 "언더우드"가 신사옥 개관 축사를 하였고,
뒤이어 당시 미국에서 성서학의 대가로 알려진 "화이트"(Wilbert Webster White, 1863-1944) 박사,
친일 편향이 매우 심했던 미 감리교 선교사
"메리맨 콜버트 해리스"(Merriman Colbert Harris, 1846-1921) 감독 외에
몇 사람이 더 축사하였다.
서회의 주체가 조선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인이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는 시기였다.
건축 기금에서 250.60엔의 잔액이 남았으나
임시로 다른 계좌에서 404.60엔을 급히 지급했기 때문에 남은 금액을 채워 넣어야만 했다.
또 건축업자에게 177.10엔을 지급해야 했기에 323.10엔이 부족했다.
가구와 비품은 불가피하게 빌리거나 있던 것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