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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12) - 2023 .09. 07(목) |
이번 성지순례는 안동교구에 속하는 문경지역이다. 마원 성지, 여우목 성지, 진안리 성지, 그리고 주교회의 공인 성지는 아니지만 가 볼만 한 곳인 한실 성지, 그리고 바로 새재 넘어 청주교구에 속하는 연풍 성지까지 5곳을 목적지로 한다. 이렇게 문경 지역을 택한 이유는 문경 출신의 고 요셉 형제가 동참하여 길을 안내하고 흔쾌히 운전 봉사까지 맡아주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감사하다.
문경(聞慶)에는 새재(鳥嶺)라는 재가 있어 예로부터 영남의 선비들이 청운의 큰 뜻을 품고 과거를 보러 다닐 때 이 고개를 넘었다. 한양을 가기 위해는 추풍령, 죽령을 넘는 큰 길도 있었지만, 속설에 의하면 추풍령으로 가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으로 가면 죽 쑨다거나 미끄러운 대나무처럼 미끄러진다고 하여 피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뜻인 “문희경서(聞喜慶瑞)”에서 “문희(聞喜)” 또는 “문경(聞慶)”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곳은 험준한 소백산맥 자락이라 천주교 박해시대 박해를 피해 잠입하여 비밀히 교우촌을 형성하거나 외따로 떨어져 숨죽이며 살아가던 교우들에게는 조정의 천주교 박해와 천주교도 체포령이라는 결코 ‘경사스럽지 못한 소식’을 들어야 했던 곳이기도 했다.
시간 여유를 위해서 출발은 평소보다 30분 앞당긴 07 : 30 문 베드로, 이 안토니오, 그리고 고 요셉과 나, 이렇게 네 명이 단촐하게 출발했다. 이야기의 꽃을 피우며 가다보니 어느 새 낙동강 구미 휴게소. 가락국수 한 그릇으로 아침밥을 때웠다. 곧장 출발하여 10시 경에 마원 성지에 도착.
마원성지 - 칼레 신부와 박 마티아 순교자의 눈물의 우정 |
마원 성지의 주소는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마원리 600-1 (문경시 문경읍 청운로 95) 이곳 마원(馬院)은 본래 조선 시대 마포원이 있었던 터다. 마포원이란 말을 먹이면서 조정의 관리가 공무로 지방을 오갈 때 숙박과 교통편의를 제공했던 마을을 이른다. 마포원은 ‘마원’ 또는 ‘마판’이라고도 불렸다. 조치원(鳥致院), 장호원(長湖院) 등의 현재의 지명도 이렇게 붙여진 이름이다. 마원에는 일찍이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충청도 지역의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 들면서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한실, 문경, 여우목, 건학 등과 함께 마원은 교우들이 화전을 일구며 모여 살았던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그러던 중 이곳에 박해의 회오리가 불어온 것이 1866년 병인년. 박해의 칼날은 새재를 넘어 이곳 마원에까지 들이닥치게 되었고, 이때 마을의 교우 40여 명이 체포되어 인근 큰 고을인 충주, 상주, 대구 등지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과 혹형을 당한 끝에 순교했다. 특히 이때 30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하게 순교한 박상근 마티아(1837-1867)가 있다. 그는 문경 토박이로 아전(지역 세습 하급 관리) 출신이었다고 전해지는데, 그가 천주교 신앙을 가진 것은 비교적 빠른 시기인 1801년 신유박해 때가 아닌가 한다. 곧 신유박해 시에 이 지방으로 숨어든 충청도의 신자들과 접촉하게 되면서 입교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행히도 그의 신앙행적은 ‘경북의 사도’라고 불리웠던 칼래(Calais, 姜, 1833-1884년) 신부의 전교 기록에 전한다. 이에 따르면 당시 교우촌은 문경에서 가까운 백화산(白華山, 1063m) 중허리에 자리 잡은 한실에 서너 집씩 무리 지어 산재해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 신자들의 영향으로 박상은 마티아의 집안이 천주교를 믿게 된 것으로 보인다.
칼래 신부의 기록(1867년 2월 13일자 서한)에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박상근 마티아는 3월 중순경 좁쌀을 사기 위해 매형과 함께 한실 교우촌(현 문경시 마성면 성내리)에 갔다. 그곳에는 마침 칼래 신부가 숨어 있었는데, 교우들은 한실보다는 문경 읍내에 숨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고, 이에 박 마티아와 매형은 죽음을 무릅쓰고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셨다. 당시 외모가 다른 서양인은 발각되기가 매우 쉬웠고 그렇게 되면 숨겨준 것도 대역죄인으로 취급받아 숨은 자와 똑 같은 형벌을 받게 되는 위험성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깊은 골방에 숨은 지 불과 3일 만에 마을 사람에게 발각되어 위험에 직면했다. 그래서 새벽을 틈타 다시 한실로 가야 했다. 마티아와 칼래 신부는 허기와 갈증으로 고생하면서 험한 산길을 걸었고, 한실 교우촌 가까이 왔는데 박 마티아는 허기가 지고 지쳐서 더 이상 걷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이때 칼래 신부는 자신으로 인해 박 마티아가 어려움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여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마티아, 이제 한실 뒷산까지는 20여리 남은 것 같소. 나 혼자라도 갈 수 있으니 마티아는 이제 곧장 돌아가시오.”
그러자 박 마티아는 울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신부님 곁을 떠나다니요. 혹시 한실이 습격을 당했다면 신부님께서는 어디로 가시렵니까? 은신하실 곳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신부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함께 가겠습니다. 신부님께서 이 험한 곳에서 죽으신다면, 저도 기꺼이 따라서 죽겠습니다.” 칼래 신부는 말했다. “두 사람 다 살기 위해서는 헤어져야 합니다. 내 말 대로 하시오. 사제로서 신자에게 명령합니다. 순명하십시오. 가지고 있는 말린 과일(곶감) 절반은 가져가고 절반은 나를 주시오. 제발 순명하시오”
칼래 신부는 당시의 사정을 뒷날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그러자 마티아는 저를 보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나도 마음이 짓눌려 참을 수 없어서 그의 손을 잡고 울었다. 끝내 몇 마디 작별 인사를 나누고 떠났다. 한참을 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그는 그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고 울고 있었다. ”
결국 칼래 신부의 당부에 순명하여 미어지는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 박상근 마티아는 병인년 12월 숙모 홍 마리아와 친척 박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었다. 박 마티아는 관아의 아전 신분이라 평소 친분을 가졌던 문경 현감의 간곡한 배교 권유를 단호하게 물리치고 상주 관아로 끌려갔다. 그는 상주 옥에 갇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배교하지 않았고, 문경 인근에서 잡혀온 교우들을 권면하며 순교의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결국 그는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 관장의 명에 따라 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순교 후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찾아다가 고향에 안장하였다. 이곳의 박상근 마티아의 묘는 1981년 후손 박시록(야고보)와 박시룡(3대손)의 증언이 나왔고 1983년 초 안동교구 김욱태 레오 신부가 이 증언과 여러 정황을 종합하여 박씨 문중 산의 임자 없는 이 묘가 “치명 일기”에서 말하던 순교자 박 마티아의 묘임을 확인하였다. 이어서 이장 계획을 수립하여 1985년 9월 15일 현재의 위치에 조성한 새 무덤으로 이장하였다.
이후 안동 교구는 마원에 순교 성지를 조성키로 하고 유해를 모신 데 이어 다각적인 성지 개발 계획을 활발하게 추진하는 한편 순교자의 뜻을 기리기 위한 현양 대회를 꾸준히 실시하였다.
1995년 초 문경지구 사목협의회는 성지 개발을 위해 주차장 부지를 매입하고 진입로를 새로 개설하였다. 아울러 ‘경북의 사도’인 칼래 신부와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의 장한 믿음과 숭고한 우정을 상징하는 두 분의 동상과 대형 십자가, 십자가의 길, 성모상 등을 세우고 1996년 10월 3일 동상 제막식을 가졌다. 박상근 마티아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10시쯤 성지 마을에 도착하니 마원 성지 안내 표지석과 문경 성지 순례 안내판이 있고, 조금 더 가니 주차장 겸 광장이 있고 순례 확인 스탬프 찍는 게시판 같은 시설이 있다. 광장 한 편에 성모상이 서 있다.
확인 스탬프 찍는 시설에 이어 성지 오르막길이 이어지는데 성지로 r가는 높은 언덕 길가에 높다란 마원성지 표지판이 또 하나 서 있다.
마지막 계단 길을 올라가면 성지가 잘 다듬어진 하나의 큰 왕릉 지역처럼 나타난다. 마원 성지는, 이곳 교우촌의 중심인물이며 순교 복자인 박상근 마티아의 묘를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다.
성지 바로 앞에는 순교자의 강철 같은 지조를 상징하는 듯 장송(長松)이 가지를 늘여뜨려 그늘을 지우고 있고 그 아래 벤치가 몇 개 있어 쉼터 구실을 한다. 소나무는 묘원 둘레에도 배열해 있다.
묘원 맨 앞에는 오석 기념비가 좌우로 둘이 있는데 하나는 왼쪽은 ‘경북의 사도’ 칼레 신부의 생애를 소개했고 오른쪽은 박상근 마티아에 대한 소개이다. 가운데 계단을 몇 단 오르면 십자가가 새겨진 제대가 있고 또 몇 계단을 오르면 상석과 묘가 나타난다. 그리고 맨 뒤에 칼레 신부와 박 마티의 동상이 좌우로 서 있고 가운데에 십자고상이 있다.
왼쪽으로 약간 비켜간 곳에 박 마티아 묘 표지석이 있고 한쪽에는 돌 형구인 항쇄돌이 놓여 있다.
뒷면에는 ‘순교자의 피는 신앙의 씨앗’이라는 제목 하에 1985년 이장한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칼래(Calais 姜, 1833-1884) 신부는 파리외방 선교회 선교사로 1860년 7월 5일에 사제 서품을 받고 이듬해 4월 7일 한국에 입국하여 1866년까지 5년 동안 경상도 서북지역에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로 여러 차례 체포될 위기를 넘기고 한실 부근 산속에 숨어 있다가 그해 10월 페롱 신부와 함께 한국을 탈출하여 중국으로 피신을 갔다. 그후 몇 번이나 입국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병까지 악화되어 본국 프랑스로 귀국했다.
1869년 4월 수도자가 되어 수도원에 들어가서 일생 동안 한국을 위해 기도하며 생애를 마쳤다. 그의 기록은 한국 교회사를 복원하는데 매우 긴요한 자료가 되었다.
묘원의 둘레로 돌아가며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묘원 앞에 박상근 마티아와 함께 드리는 기도문이 있어 이 기도문을 바침으로 마원 성지 순례를 마쳤다.
다음은 여우목 성지. 마원 성지서 30분 가까이 차로 이동하여 11시 10분쯤 도착했다.
여우목 성지 - 교우촌을 이끌었던 이윤일(요한), 서치보(요셉) |
여우목 성지의 주소는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중평리 96 (문경시 문경읍 청운로 95) ‘여우목’은 여우가 많이 나타나는 길목, 또는 여우의 목처럼 잘룩한 고개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한자어로는 여우 호, 목 항, 호항(狐項)이다. 이와 비슷한 지명으로 ‘노루목’은 장항(獐項)이라고 하는데 경주를 위시하여 전국적으로 이런 이름이 많다.
여우목 교우촌은 소백산맥의 높고 험준한 대미산(1,115m)을 경계로 하여 충청북도 단양과 경계를 이루는 경상북도 문경 지방의 최동북단에 위치해 있다. 여우목은 대미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서 옛날부터 경상도 예천, 영주 등 동북쪽 지방의 사람들이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이 여우목 고개를 넘어 문경읍내와 새재로 넘어갔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곳에 처음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600년경으로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 장원이라는 분의 10대 조상인 장기풍이 단양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움막을 짓고 다래덤불을 걷고 산지를 개간해 살았다고 한다.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 들어온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서다. 원래 충청도 홍주(홍성) 사람 이윤일 요한(李尹一, 1816-1867) 가정이 박해를 피해 경상도 상주 갈골로 왔고, 다시 상주 갈골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같은 무렵에 경상도 지방의 첫 신자인 서광수(徐光修, 1715-1786년)의 손자인 서치보 요셉(徐致輔, 1791-1840년) 가정도 원래 충청도 청풍에서 살다가 박해를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던 중 이곳 여우목 교우촌으로 오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신자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다. 서광수는 김범우의 명례방 공동체에서 활동을 한 초기 신자이기도 했는데 을사추조적발사건 이후 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후손들이 문중으로부터 쫓겨나 경상도 지역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이렇게 이루어진 여우목 성지는 인근의 교우촌인 건학(동로면 명전리)과 부럭이(덕산면 억수리)와는 산길로 불과 20-30리 내에 있다. 그래서 이들 세 교우촌은 처음부터 빈번한 접촉을 갖고 이웃집 드나듯이 서로 긴밀히 연락하고 도와가며 신앙생활을 했다고 추정된다.
성 이윤일 요한 - 대구대교구 제2주보 성인
당시 여우목 교우촌의 공소회장이었던 이윤일(李尹一)은 부친 대(代)부터 신앙을 받아들여 신자의 본분인 수계 생활에 충실하였다. 상주 갈골에서 살다가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 문경 여우목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다. 여우목으로 온 것은 그의 처족(妻族)인 순교 복자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의 후손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외교인 마을에 와서 살면서 외교인들을 권면하여 30여 명을 입교시켜 큰 교우촌을 만들었다. 요한 성인의 성품은 순량하여 남을 꾸짖거나 탓하는 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화평한 모습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이점이 마을 사람들을 많이 입교시킨 이유가 아닐까 한다.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11월 18일(음력 10월 12일) 여우목에 신자들이 많이 산다는 것을 알고 문경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이윤일은 마을의 대표자를 묻는 포졸들에게 선뜻 나서 교우촌 회장임을 밝히고 가족 8명을 포함해 모두 30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오랏줄에 묶여 문경 관아로 끌려갔다. 그리고 문경에서 3일 후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수 차례 문초를 받았다. 여기서 이윤일의 큰 아들 이의서 마티아와 큰 며느리 박 아녜스, 모친과 누이는 풀려났지만 그는 ‘사학의 두목’이라 하여 경상감영이 있는 대구로 이송되었다.
이윤일은 대구로 이송되기 전 자손들을 불러 놓고, “나는 이제 치명하러 가니 너희는 가서 열심히 수계하다가 나를 따르라.”고 훈계한 후 치명하는 장소까지 따라오지도 말고 보지도 말라고 하였다. 결국 대구로 끌려온 지 3일째 되는 1867년 1월 21일(음력 1866년 12월 16일) 함께 잡혀온 한실 교우촌의 김예기(金禮己), 김인기(金仁己) 회장 형제와 함께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이윤일의 아들인 이 시몬은 부친보다 앞서 1866년 1월 27일 건학 교우촌에 사는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체포되어 공주에서 순교하였다.
순교 후 그의 유해는 이 토마스에 의해 관덕정 형장 근처에 가매장되었다가 2년 후 아들 이의서와 가족들에 의해 대구 비산동(날뫼) 뒷산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1912년 경기도 용인군 묵리(먹뱅이)에 살고 있던 동생 이시영에 의해 용인군 이동면 묵리 산으로 옮겨 모셨다. 1976년 6월 24일 다시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가 성인의 유해임을 밝혀져 1987년 1월 21일 대구대교구청 내 성모당에 안치되었고, 이날 대구대교구의 제2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다가 1991년 1월 20일 관덕정 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봉안식을 가졌다.
서치보 - 순교자 가정의 빛나는 후손들
서치보(徐致輔)는 가족들과 함께 여우목 교우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기해박해가 일어난 이듬해인 1840년 9월 19일(음력)에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서치보가 선종한 후 장남인 서인순徐隣淳)은 어머니와 4명의 동생 서명순(徐名淳), 서철순(徐哲淳), 서익순(徐翼淳, 요한), 서태순(徐泰淳, 베드로)을 데리고 풍기로 이사를 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1860년 경신박해 때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다시 온 가족을 데리고 경산 모개골 교우촌으로 이사를 갔다.
결국 그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모개골 교우촌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대구의 경상 감영에서 문초를 받고 옥고를 치르다 1868년 4월 29일(음력) 옥사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그 후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경산 모개골에 안장하였다가 후에 부친 서치보의 묘소가 있는 여우목으로 이장해 왔고, 1999년 9월 18일 새로 조성된 현재의 여우목 성지에 부친과 함께 이장하여 모셨다.
5형제 중 4남인 서익순은 1867년 박해가 잠잠해지자 한티에서 대구의 집으로 돌아가던 중 서울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절두산에서 백지사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5남인 서태순은 박해를 만나 대구에서 문경 한실 교우촌으로 피난 갔다가 문경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문초를 받고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다시 혹독한 심문을 받은 후 상주 감옥에서 옥사했다. 이때 홍 베로니카라는 노파는 이곳에서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가는 도중에 마을 앞 노상에서 순교하였다. 이렇게 5형제 중 3명이 순교하였다.
목숨을 구한 3남 서철순(徐哲淳)의 손자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벌여 일제로부터 경제적 예속을 막으려던 대구 갑부 서상돈(徐相燉) 아우구스티노였다. 그는 부친을 따라 교우촌을 전전하며 갖은 고생을 다하며 보부상을 시작으로 장사를 해서 큰돈을 벌었다. 그는 재물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잠시 맡긴 것이라는 관점에서 전 재산을 교회와 사회에 환원했다. 이런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그런데 1913년 경주공소(현 성동성당)가 설립될 때 건물과 대지 400평을 기증한 사람이 대구의 서병문(徐炳文)이라는 분인데 아마 이 분도 서상돈과 가까운 친족이 아닌가 한다.(성동성당 60년사)
성지 조성
1992년 대구대교구에서 큰 마을 중평리 한복판에 성지를 조성하려 했으나 외교인들이 사는 마을이라 부지를 구하기가 어려워 중단했다.
1995년 여우목 성지를 관리하는 안동교구는 문경 성당의 서공석 신부의 도움으로 교우촌 터 부근에 1,255평 규모의 부지를 마련하여 1999년 서치보 요셉과 그의 장남 서인순 시몬의 묘를 이장함으로서 자연스럽게 성지화가 되어 여우목 성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다음해 4월에 대형 십자가, 11월에 제대와 성모상과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고 꾸준히 조경 작업을 실시하여 2002년 9월 29일 안동교구 권혁주 주교 주례로 성지 축복식을 가졌다.
2016년 대구대교구와 안동교구는 공동으로 성지를 단장하기로 하여 이듬해 2017년 두 교구의 교구장 주교가 함께 축복미사를 드리고 성 이윤일 요한 흉상을 제막하였다.
성지 주차장에 내려 한참 걸어 올라가니 성지 표지석과 성지 주변 안내판이 나온다. 표지판을 보니 이곳 성지와 교우촌, 그리고 원래의 묘지터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다시 숲길을 따라 200-300m 정도를 걸으니 순교자 묘역이 나타난다. 입구에 안내판이 있고 옆에 십자고상을 쥔 성 이윤일 요한의 흉상이 있다. 안내판의 내용은 이곳 성지를 개발하는 과정을 밝힌 것이다.
사진의 가장 왼쪽(청색 원)에 아무 석물이 없는 무연고자 묘가 있는데 이는 이전의 토지 소유 집안의 묘라고 한다. 계약 당시 잔류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세 영원히 추모를 받을 수 있어서인가?
대형 십자가 오른쪽에는 성모님이 지키고 서 계신다.
11시 30분 출발. 내려오는 도중에 홍 베로니카 치명터에 차를 멈추었다. 올라올 때 입간판을 봐두었는데 내려올 때 보기로 한 것이다.
표지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곳은 성 이윤일 요한이 30여명의 교우들과 교우촌을 이루어 살던 여우목의 입구이다. 1866년 병인박해시 이윤일 요한이 가족 8명과 교우 30명이 체포되어 문경현으로 끌려가던 중 교우 홍 베로니카가 순교한 곳이다.
홍 베로니카는 여우목 아래 살던 80세 할머니였다. 포졸들에 의해 잡혀갈 때 나이가 많아 걸음을 잘 못 걸어 대열의 뒤에 처지게 되었다. 포졸은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한 마디만 하면 풀어줄 텐데 왜 굳이 이런 고생을 하느냐”고 물었다. 이때 홍 베로니카는 “믿고 있는데 어찌 믿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느냐”면서 그럴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포졸은 계속하여 “죽고 없는 것을 왜 믿느냐”고 핀잔을 주자 베로니카는 “살아있는 천주님을 왜 죽었다고 하느냐”고 항변하였다. 이에 화가 난 포졸은 베로니카를 때려 죽였다. 80노인이 죽는 순간까지도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았고 드디어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이제 식당으로 간다. 오늘 점심은 고 요셉 형제가 자신의 고향 문경으로 왔기에 꼭 점심식사 만큼은 자신이 대접해야 한다고 우겨서 받아들이기로 했다. 메뉴는 이곳 청정지역에서 양식한 송어회이다.
청운각(靑雲閣)
식당에 거의 다 와서 청운각이란 옛집이 있어 둘러보기로 했다. 청운각은 박정희 대통령이 1937년 초임 교사로 부임하여 약 3년 간 재직했을 때 살았던 하숙집이라고 한다. 2012년에 정비를 하여 옛날 집의 형태가 남아 있고, 기념관과 사당을 지어 여러 가지 사진자료를 전시하고 박대통령 내외분을 추모하는 분향실을 만들어 놓았다.
아래 오동나무는 박정희 대통령이 이 집에 사셨을 때부터 있었던 나무인데 누가 심은 것이 아니라 우물 벽에서 저절로 싹이 튼 것이라고 한다. 예부터 오동나무엔 봉황새가 앉고, 봉황새는 성군이 다스리는 때에 나타난다고 하니, 이런 이야기를 갖다 붙인 것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박근혜 오동나무’이라는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
식당은 송어회 전문식당인 대명식당. 오랜만에 맛본 송어회로 고향 문경에서 자라서 출향하게 된 요셉 형제의 삶의 내력담을 들으며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벌써 13시 20분 진안리 성지에 가기로 돼 있는데 한 곳을 더 들르기로 했다. 한실성지다. 한실 성지는 주교회의 인정 공식 성지는 아니지만 문경 지방에 빠뜨릴 수 없는 성지다.
한실 성지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상내리(上乃里)에 위치한 한실 교우촌은 백화산(1063m) 서북부 중턱에 위치해 있는데 한실 뒷산을 넘으면 바로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 성지와 연결된다. 그리고 왼쪽은 뇌정산(991m), 오른쪽은 문경 새재와 조령산(1017m)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자연적인 요새의 특성을 갖추었기에 임진왜란 때 피난처가 되었고 박해 시대에는 은신처가 되어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곳 한실에 처음으로 신자들이 들어온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상주 이안면 배모기에 살던 서광수(徐光修, 1715-1786년)의 넷째 아들인 서유도(徐有道, 1772-1837)의 가족들이 이곳 한실 잣골로 피난을 오면서부터라고 한다.
한실 교우촌은 경상북도의 사도로 불리는 칼래(Calais, 姜, 1833-1884년) 신부가 병인박해 때 백화산을 넘어 문경과 연풍 등을 다니면서 전교에 심혈을 기울였던 사목의 중심지였다. 칼래 신부는 이곳을 중심으로 인근의 건학, 여우목 교우촌과 백화산 너머 연풍 등지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며 전교 활동을 했다.
칼래 신부가 병인박해 직전에 한실 인근의 건학(문경시 동로면 명전리) 교우촌에 성사를 주러 갔을 때 마침 1866년 1월 27일(음력 1865년 12월 11일) 여우목의 공소회장 이윤일의 아들 이 시몬과 함께 체포되어 공주 감영으로 이송된 후 옥중에서 교살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순교한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부인과 아들이 칼래 신부에게 연미사를 청하자 이를 집전했다. 하지만 바로 박해가 닥쳐 한실 교우촌에 미치자 칼래 신부는 한실을 중심으로 문경과 백화산을 넘어 연풍 등지로 쫓겨 다니면서 모진 고생을 해야 했다.
병인박해 때 이곳의 많은 교우들이 포졸들에게 잡혀 상주 진영 옥에 갇혔다가 순교하였다. 한실 교우촌의 김예기(金禮己) · 김인기(金仁己) 회장 형제는 신자들의 괴수라 하여 여우목 공소에서 체포되어 온 성 이윤일 요한(李尹一, 1816-1867년) 회장과 함께 대구로 이송되어 1867년 1월 21일(음력 1866년 12월 16일) 관덕정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조선교구의 제8대 교구장인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병인박해로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 · 정리하여 1895년에 간행한 “치명일기”(致命日記)의 순교자 명단을 보면 병인박해 당시 한실 교우촌에서 체포되어 상주에서 순교한 15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여우목 교우촌 서태보의 5남 서태순 베드로(徐泰淳, 1823-1867년), 공소회장 김 아우구스티노, 김 토마스, 또 다른 김 아우구스티노. 김 안토니오, 김 베네딕토, 김 빈첸시오, 김 프란치스코, 김 생원, 또 다른 김 생원, 장 서방, 장 서방 부인, 김 요셉, 김 베드로, 모 막달레나.
이들의 순교 이후 한실 교우촌은 점점 쇠퇴해갔다. 안동교구는 교구 설정 40주년을 맞아 순교자 현양사업의 일환으로 2009년 9월 12일 상주시 함창읍 나한리의 한 논두렁에서 순교자 서유형 바오로의 묘소를 발굴해 유해와 묘소 흙 등을 옹관에 담아 한실에 새로 조성한 무덤에 안치했다. 그리고 형수인 순교자 박 루치아의 가묘도 조성하였다. 서유형은 경상도 지방의 첫 신자였던 서광수의 친척으로 문경시 산양면 평지리 일대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1865년 10월 부인 성재추 막달레나, 7세 된 딸과 아들 순보(3세), 하인, 형수 박 루치아 등과 함께 체포되어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가족들은 모두 풀려났지만 서유형과 그의 형수인 박 루치아는 1866년 겨울 상주 옥에서 순교했다.
식당에서 네비게이션 따라 약 20여 분을 차로 달리자 한실 성지 이정표가 나타난다. 하지만 한실 성지는 더 이상 차로 갈 수가 없고 차에 내려서 산길을 좀 걸어야 한다. 차가 들어갈 수 있는 데까지 가서 차를 대 놓고 걸었다. 이곳에 오니 험한 오르막길에 있는 곳마다 지팡이를 준비해 둔 점이 특이했다.
오르막을 오르면 다시 내리막길이다. 우리가 가는 길은 한실 성지 뒷산을 넘어 가는 길이다. 반대로 한실 성지 계곡을 따라 들어오는 길도 있다. 내리막길을 얼마 내려가지 않아 넒은 교우촌 터가 나온다. 생각보다 멀지 않다.
교우촌 터에는 물론 집 한 채 없다. 나무 십자가에 통나무 의자가 높이 야외 제대가 있다. 교우촌 터 바로 아래에 순교자 묘 2기가 있다.
시동생과 형수 둘다 1866년 상주 감옥에서 순교했다. 이처럼 수숙(嫂叔)이 나란히 묻힌 것도 드문 일이다. 나오는 길은 역방향이다. 16시가 넘었다. 아직 진안리 성지와 연풍성지 두 곳이 남았다.
진안리 성지 -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 “예수, 마리아” |
일명 ‘새재’라고 하는 조령(鳥嶺)은 예로부터 영남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통로이며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새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신립 장군이 이곳을 지키지 않고 탄현에 진을 쳤다고 패전했다. 그런 이유로 조선조 숙종 34년(1708년)에 영남의 현관인 이곳에 관문과 성벽을 축조하였다. 제1관문인 주흘관(主屹關),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關)이 서 있는데 각각 약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렇게 이 지방이 충청도와 경계를 이루는 영남의 관문이기에 서울로 과거(科擧)나 일을 보러가는 이들은 물론, 최양업 토마스 신부와 경상북도의 사도인 칼래(Calais, 姜, 1833-1884년) 신부 등 선교사들과 교우들이 몰래 관문 옆 수구문(水口門)을 통해서 충청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전교 활동과 피난길로 이용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특히 조령과 이화령 고개 갈림길에 위치한 진안리(陳安里)는 최양업 신부가 사목활동에 대한 보고를 위해 서울로 가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한 곳이다.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1821-1861) 신부는 1821년 3월, 충청남도 청양의 다락골 인근에 있는 새터 교우촌에서 순교 성인 최경환 프란치스코(崔京煥, 1805-1839년)와 순교 복자 이성례 마리아(李聖禮, 1801-1840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36년 15세 때 모방(Manbant, 羅, 1803-1839년) 신부에 의해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崔方濟, 1820?∼1837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1821-1846년)와 함께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1837년 11월 동료인 최방제가 열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고, 부제 때인 1846년에는 한국의 첫 사제이자 동료인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런 아픔을 겪은 후 1849년 4월 15일, 마침내 상해 서가회(徐家匯) 성당에서 마레스카(Maresca)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한국의 두 번째 사제가 되었다. 서품을 받은 그 해 12월 변문을 떠나 어렵게 조선으로 입국한 최양업 신부는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산간벽지를 찾아다니며 각처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고 성사를 집전하였다. 진천 배티를 사목중심지로 삼은 그의 열정적인 사목 활동은 이후 11년 6개월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다. 전체 여정 9만리, 127개 공소를 걸어 다니며 12,000여 신자에게 성사를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휴식기간을 이용하여 한문 교리서 및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선교사들의 한국 입국을 도왔으며, 신학생들을 말레이 반도에 있는 페낭(Penang) 신학교로 보냈고,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였다.
1860년의 경신박해 때 최양업 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경상남도 언양의 죽림굴에서 3개월간 피신하기도 했다. 이때 스승에게 보낸 마지막 서한에서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의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라고 쓰기도 했다.
죽림굴에서 빠져나온 최양업 신부는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방문을 다 마친 후, 베르뇌(Berneux, 張, 1814-1866년) 주교에게 성무집행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새재와 이화령의 갈림길인 문경 진안리의 오리터 주막에 들렀다가 식중독에 과로가 겹쳐 장티푸스 합병증으로 1861년 6월 15일에 선종하고 말았으니, 이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최양업 신부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배론 성 요셉 신학교의 교장으로 있던 푸르티에(Pourthie, 1830-1866) 신부가 소식을 듣고 달려와 임종을 지키며 병자성사를 주었다.
선종 후 최양업 신부의 시신은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작은 교우촌에 가매장되었다가, 11월 초 베르뇌 주교에 의해 성대한 장례가 치러진 후 배론 신학교 뒷산으로 옮겨 안장되었다. 1942년 12월에는 제천의 신자들이 무덤을 단장하고 그 앞에 묘비를 세웠다. 김대건 신부를 ‘피의 순교자’라고 한다면 ‘땀의 순교자’인 최양업 신부는 이렇듯 당시 유일한 한국인 신부로서 5개 도(道)를 끊임없이 넘나들며 교우들을 방문하고 성사를 집전하며 관헌의 눈을 피해 다니다 지친 끝에 발병하여 선종한 것이다.
안동교구는 문경 성당을 중심으로 1999년 진안리 오리터에 마련한 356평 규모의 부지에 대한 토목공사를 시행하고, 2000년 5월과 11월에 대형 십자가와 돌 제대를 설치했다. 이어 조경공사를 마친 후 2002년 9월 29일 안동교구 교구장 권혁주 주교의 주례로 성지 축복식을 가졌다. 그 이후로도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고, 돌 제대 뒤편에 조형 벽채를 세우는 등 순례자를 배려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한국 교회는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된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에 대한 시복시성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오후 3시경 진안리 성지에 도착했다. 입구 커다란 성지 표지석을 지나 성지 안으로 들어갔는데 마침 수녀님 한분이 반갑게 맞이한다. 알고 보니 수녀님은 안동교구 소속으로 길 건너에 있는 양업명상센터에 거주하면서 진안리 성지를 위시하여 이웃한 인근 성지를 맡아 안내하고 해설하는 분이었다. 수녀님의 성은 김씨이며 본명은 해드 빅. 원래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사였다고 한다.
먼저 수녀님의 제의에 따라 성지 한쪽에 서 있는 최양업 신부 시복시성 기도문을 일행 모두가 함께 바쳤다.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박해로 고통 받는
교회의든든한 목자로 세워 주셨음에 감사드리나이다.
모든 교우들이 오로지 하느님 자비에 희망을 두고
박해를 피해 산골 깊이 숨어 신앙을 지켜야 했던 시대에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주님을 닮은 착한 목자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쉼 없이 양들을 찾아 복음을 전하고
주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은총을 전했나이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 간절히 청하오니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에게 시복 시성의 은혜를 허락하시어
그에게 주셨던 굳건한 믿음과 온전한 헌신의 정신을 본받아
오늘 저희도 한마음으로 복음을 살고 전하는 일꾼이 되게 하소서
.저희는 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시복 시성의 은총을 빌며
그의 전구에 힘입어 기도드리오니 들어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성지 안에 있는 시설물은 간단했다. 입구 맞은편엔 야외제대가 있고 그 오른쪽에 대형 십자가가 있다. 그리고 성지 담장을 따라 십자가의 길이 있고 마당 가운데 큰 느티나무 쉼터가 있다. 그리고 최양업 신부 시복 기도 입간판 이외에 따로 진안리 성지 안내와 최양업 신부 소개 입간판이 각각 한 개가 더 있다.
김 해드빅 수녀님은 진안리 성지의 최양업 신부의 선종과 관련해서 기록에는 없는 일종의 비하인드 스토리도 소개한다.
당시 최양업 신부는 언양 죽림굴에서 프랑스 신부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 후 비장한 심정으로 서울로 가는 길에 이곳 신자촌의 주막집을 찾았다. 최 신부는 이 주막집의 주모를 신뢰하고 있었기에 지날 때마다 임시로 머무는 은신처로 삼았다. 이는 그만큼 신부님이 주모를 사람 차별하지 않고 잘 대해준 결과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 신자가 잔치에 갔다가 소고기를 구해서 신부님께 가져다 드렸다. 더운 날씨에 좀 상한 것 같기도 하여 함께 다니던 신부님의 복사 조화서는 드시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최 신부는 신자가 나를 위해 주는 정성스런 음식을 어찌 먹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드셨다. 그로 인해 몸에 탈이 나서 눕게 되었다. 이튿날 조화서는 프리티에 신부가 있는 베론으로 가서 치료를 받게 하려고 신부님을 말에 태워 출발하려 했으나 도저히 몸을 지탱할 수가 없어서 프리티에 신부를 모시고 오려고 조화서 혼자 떠났다. 이렇게 지체가 되어 프리티에 신부가 도착하자 거의 최양업 신부는 인사불성 상태였다고 한다. 그런 중에서도 계속하여 ‘예수 마리아’를 염했다고 한다. 결국 프리티에 신부는 병자성사를 주고 선종하자 베론으로 모셨다고 한다.
진안성지가 성지로 지정되던 당시 이곳에 사는 나이 많이 드신 할머니 한 분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인즉 이곳 주막집 주모는 코가 없는 여자였다고 하며 이 집에서 신부님 한분이 이 집에 살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코가 없다는 것은 아마도 박해시 받은 형벌을 의미한다. 따라서 주모 역시 천주교 교우였기에 신부님을 보호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그리고 배론 신학교 프리티에 신부님의 쓴 글에 비록 이곳 지명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베론에서 170리쯤 되는 작은 마을에 가서 최 신부를 직접 만나 병자성사를 주고 왔다고 했기에 거리로 볼 때도 이곳이 가장 믿을 만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이까지가 수녀님 설명이다.이 증언에 최 신부의 조카 최상종(빈센치오)의 증언이 더해져 이곳 진안리가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가 된 것이다.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는 이곳 문경 진안리 성지 이외에 진천 베티 공소 설도 있다. 하지만 어느 곳도 구전에만 의존할 뿐 객관적 근거는 없다. 이 모두가 최양업 신부의 선종을 지켜본 프리티에 신부가 구체적 지명을 밝히지 않음에 연유한다.
수녀님에 의하면 안동교구에 속한 이곳이 사실일 것 같은데 근래에 청주교구에서 유력한 학자들을 동원하여 진천 베티라는 사실을 강하게 주장한다고 한다. 들리기에는 안동교구와 청주교구 간의 교세로 인해 야기된 것이라는 뉘앙스로 들리기도 한다.
하기는 최양업신부가 어디에서 선종했는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박해시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숨어서 수만리 길을 다니며 사목여행을 하시다가 끝내 길에서 “예수 마리아”를 염하며 선종한 거룩한 행적이다. 비록 순교자가 아니어서 시복, 시성의 영광은 받지 못했지만 12년 그의 발자취는 순교 이상의 고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최양업 신부의 시복 시성 운동은 너무나도 당연하며 오히려 늦은 감이 있는 것이다.
수녀님은 여기 오기 전에 경희의료원에서도 근무했는데 중환자를 돌볼 때마다 임종경처럼 “예수 마리아”를 염했던 최양업 신부를 ‘임종의 사도’로 떠올리며 기도한다고 했다. 오늘날 많은 교우들이 본받아야 할 점으로 지적했다.
그리고 마원 성지의 박 마티아와 칼레 신부의 아름다운 우정의 이야기를 강조하고, 여우목 성지에서는 한 마을 외인촌을 교우촌으로 바꾼 이윤일 요한 성인의 타인을 존중하는 전교 방식을 오늘날 배워야 하며, 서태보 순교 가문에서 빛나는 후손들이 나와 사회적 활동을 많이 하는 것은 선조들의 음덕에 힘입은 바가 아닐 수 없다고 했다. 소위 ‘積善之家 必有餘慶’(적선지가 필유여경)이라는 것이다. 기념촬영을 하고 수녀님과 헤어졌다.
16시가 다 되어간다. 이제 남은 한 곳 험준한 새재 넘어 있는 연풍 성지이다. 연풍성지는 청주교구에 속하지만 거리상으로는 얼마 되지 않는다. 지금은 새재를 넘지 않고 터널이 뜷린 이화령를 통하여 그리 힘들지 않게 갈 수가 있다. 10분 남짓 달렸는데 이미 성지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