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55. 카슈가르와 탁스쿠르간
‘부처님 치아 모신 탑’ 흔적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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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스쿠르간 가는 길> |
사진설명: 카슈가르에서 탁스쿠르간으로 가는 길은 상태가 양호했다. 홍수로 곳곳이 파였지만, 대부분 포장되어 있었다. 만년설이 녹아 만들어진 호수옆을 지나 탁스쿠르간으로 가는 트럭이 만들어내는 먼지마저 인상적으로 보였다. 2002년 9월13일 촬영. |
중국 신강성 타림분지 최서단 오아시스 도시인 카슈가르의 가을 햇살은 따사로웠다. 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을 거쳐 중국에 들어온 어제(2002년 9월12일) 일정이 마치 1년 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카슈가르는 그만큼 정겹게 다가왔다. 조식을 마치고 카슈가르 동쪽 40km 지점에 있는 모르불탑(莫爾佛塔)으로 갔다. 호텔을 출발해 40분 정도 달리니 넓은 평원이 나타났고, 평원 멀리 동쪽 언덕에 불탑이 보였다.
불탑 부근에 정차하고, 언덕 위로 올라갔다. 불탑과 4각형의 거대한 토대(土臺)가 남북 일직선상에 놓여 있었다. 금당과 탑, 남·북 쌍탑(雙塔)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탑을 돌아가니 계단이 그대로 있다. 부처님이 봉안됐던 불단 비슷한 유적의 흔적이 계단 위에 보였다. 부처님이 앉아계셨던 자리 같았다. 합장한 채 목례했다. 반가운 마음에 탑을 만지니 진흙부스러기만 떨어졌다. 2000년 전에 조성된 불탑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게 신기했다. 부처님 가르침의 영원성을 상징하는 듯 했다.
발길을 돌려 4각형의 토대(土臺) 쪽으로 걸어갔다. 한바퀴 돌면서 살폈다. 별다른 특이점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넓디넓은 평원을 보았다. 잡초만 무성하고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옛날 사원이 있었고, 도시가 있었을 이곳이 이제는 황량한 평원으로 변한 것이다. “세월의 흐름 앞에 모든 것이 다 변할 뿐”이라는 사실을 새삼 절감했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불탑을 중심에 두고 웅자(雄姿)를 자랑했을 사원 또한 어느 곳으로 사라져 버렸을까.
다시 차를 타고 차크마크 강변으로 달렸다. 세 명의 신선이 살았다는 ‘삼선동’(三仙洞), 그곳에 가기 위해서였다. 도착해보니 삼선동엔 올라갈 수 없었다. 지난 8월에 있었던 홍수로 강바닥이 깊이 파였고, 동굴 역시 바닥에서 15m정도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사다리가 없으면 올라가기 힘든 곳이었다. “동굴 속에는 부처님을 그린 그림이 있다”고 안내인이 말했다. 멀리서 동굴만 쳐다보았다.
사실 삼선동이 위치한 곳은 카슈가르에서 대월지, 대원(페르가나 지방), 강거국(사마르칸트)으로 넘어가는 ‘테레크 고개’ 입구에 해당된다. 아마도 왕래하는 구도자들이나 순례자들, 사막의 대상(隊商)들이 동굴 속에서 쉬며, 스님의 설법을 들었으리라. 아쉬움을 가득 안고 시내로 돌아왔다.
물 많고 풍요로왔던 카슈가르
카슈가르 시내는 붐볐다. 차들이 오가고, 많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다. 서역에선 우루무치 다음으로 큰 도시라고 했다. 카슈가르의 옛 이름은 소륵(疏勒). 물이 많다는 뜻이다. 사막 주변에서 물이 많다는 것은 풍요롭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현재 카슈가르 주변엔 70여개 이상의 댐들이 있다고 한다. “‘소륵’이라는 이름이 허언(虛言)은 아니다”고 안내인이 덧붙였다.
인도에서 귀국하던 당나라 현장스님(?~664. 629~645 인도 순례)도 카슈가르에서 잠시 머물렀다. 당시에도 카슈가르는 풍요로웠던 모양이다. “거사국(카슈가르) 둘레는 5000여 리이고, 모래와 자갈이 많고 토양은 적다. 농사는 번성하고 꽃과 과일도 풍성하다. 가는 털로 짠 옷이 나며 가는 털과 양탄자를 짜는 기술은 훌륭하다. 기후는 온화하고 화창하며 비와 바람은 순조롭다(대당서역기).”
카슈가르가 당나라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던 듯, 현장스님은 인심(人心)을 좋게 적어놓지는 않았다. “카슈가르 사람들의 성품은 난폭하고 풍속은 남 속이기를 잘한다. 예의가 경박하고 학예도 천박하다”고 〈대당서역기〉에 묘사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는 성했다.
“부처님 법에 대한 믿음이 굳고 부지런히 복과 이익을 베풀고 있다. 가람은 수백 곳이 있으며, 승도는 10,000여 명이 있는데, 이들은 소승의 가르침인 설일체유부를 배우고 있다. 하지만 이치를 깊이 연구하지 않고 대부분은 그저 글만을 외우고 있다.” “난폭하지만 불교를 믿는다.”는 현장스님의 기술은 앞뒤가 맞지 않는 듯 하다.
신라 혜초스님(705~787. 719~723 인도 순례)도 인도에서 돌아오던 길에 카슈가르에 들렀다.〈왕오천축국전〉엔 이렇게 적혀있다. “총령으로부터 한 달을 걸어 카슈가르(疏勒)에 도착했다. 외국인들은 가사기리국(伽師祇離國)이라 한다. 여기엔 중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데, 사찰도 있고, 스님도 있으며, 소승불법이 행해지고 있다. 이 곳 사람들은 고기·파·부추 등을 먹으며, 전포로 된 옷을 입는다.”
상념을 접고 카슈가르 박물관에 들어갔다. 소조(塑造)불상 등을 둘러본 뒤 중국 파키스탄 국경이 있는 파미르고원으로 갔다. 그곳에 가려면 반드시 탁스쿠르간을 거쳐야 된다. 탁스쿠르간. 동진의 고승 법현스님(317~419. 399~412 인도 순례)이 천축에 갈 때 거쳤던 도시. 지금은 어떤 상태일까. 몹시 궁금했다. 히말라야 산맥 속으로 난 길을 타고 올라갔다. 길은 험했지만, 주변 풍광은 일품이었다. 산에는 나무가 없고, 풀들만 있었다. 황량한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론 숲 없는 계곡의 ‘깊은 속살’을 볼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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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낙타와 말을 타고 중파공로를 가는 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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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탁스쿠르간 거리 전경. |
카슈가르에서 탁스쿠르간 사이엔 공로가 뚫려있다. ‘카라코람 하이웨이’가 그것인데, 중국에서는 중파공로(中巴公路)라 부른다. 지난 홍수로 중파공로 곳곳이 패였다. 갈수록 좌우 경치는 좋아졌다. 넓은 평원도 나타났고, 깊은 협곡 사이로 지나가기도 했다. 대부분 포장돼 있었으나, 일부 구간은 비포장 상태였다.
히말라야 산맥 속으로 들어가자, 눈이 녹아 만들어진 호수가 보였다. 그렇게 달리길 3시간. 중간 기착지인 카라쿠리호가 나타났다. 설산의 만년설(萬年雪)이 녹아 형성된 호수 카라쿠리호. 카라쿠리호 주변에는 유목민들의 텐트인 파오가 3개 있었다. 파오에 들어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길을 떠났다.
카라쿠리호부터 탁스쿠르간까지의 길은 상태가 양호했다. 지금은 차를 타고 쉽고 편하게 가지만, 그 옛날 구도자들이 이 길을 걸어갈 땐 대단히 힘들었으리라. 이 길을 지나갔던 법현스님은〈불국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마국을 떠난 지 25일 만에 갈차국(탁스쿠르간)에 이르러 혜경스님 등과 합류했다.” 25일 동안 걸어 겨우 탁스쿠르간에 도착했는데, 우리는 카슈가르를 출발한 지 하루도 안돼 탁스쿠르간에 도착했다. 편해진 만큼 신심은 약해졌을 것이다. 탁스쿠르간 시내는 다른 오아시스 도시들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백양나무들이 서 있고, 사람들이 오가고….
현장스님 “난폭하지만 불교 믿는다”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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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멀리서 본 탁스쿠르간과 눈덮인 산. |
법현스님이 도착했을 당시 탁스쿠르간은 어떠했을까. “이 나라는 산지(山地)고 추운 곳이어서 다른 곡식은 나지 않고 오직 보리만 난다. 스님들이 수세(受歲. 여름 안거의 수로 법랍을 셈하는데, 여름안거를 마치고 법랍이 더해지는 것을 말한다)가 끝나면 번번이 서리가 내리므로, 왕은 매양 스님들에게 보리가 익은 연후에 수세하도록 말한다. 나라에는 부처님이 쓰시던 타호(唾壺)가 있는데 돌로 만들었으며, 색깔은 부처님이 쓰시던 바리때와 비슷하다. 부처님 치아도 있으며, 나라 사람들이 치아를 모시기 위해 탑을 세웠다. 1000여 명의 스님이 있고, 모두 소승을 익히고 있다(불국기).”
탁스쿠르간에 도착한 다음날 사방을 둘러봐도, 부처님 치아를 모신 탑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탁스쿠르간을 지나 중파국경으로 계속 갔다. 지난해 5월4일 도착했던 쿤제랍고개 정상. 탁스쿠르간에서 거리는 160km. 아침 일찍 일어나 출발한 지 3시간 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고개엔 여전히 중국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5월4일엔 파키스탄 쪽에서 올라와 기념촬영하고 갔는데, 이번엔 중국 방면에서 올라가 고개를 보니 참으로 감개무량했다. 파키스탄 영토에 살짝 들어갔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경비병들이 장난스런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쿤제랍고개의 흙을 만져보고, 지난날을 회상하며 탁스쿠르간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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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탁스쿠르간 거리에서 만난 노인. |
가는 도중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구도자들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고개를 넘은 법현스님은 신두하(인더스강)를 건너, 오장국(파키스탄 스와트 지방)에 도착했다. 당시 파미르고원을 넘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던 듯하다.〈불국기〉에 “북 천축을 향해 떠난 지 1개월 만에 총령(파미르고원)을 넘을 수 있었다. 총령은 여름에도 눈에 덮여있고 독룡(毒龍)이 있어 만약 그것이 노하면 독풍(毒風)과 눈과 비를 토하며, 모래와 자갈을 날리므로, 이를 만나는 자는 한 사람도 온전할 수 없다.”고 적고 있다.
울적해진 마음만 가득안고 달렸다. ‘부처님 치아를 모신 탑이 있었다’는 탁스쿠르간에도 불교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불교를 아는 사람이 아예 없는 듯 했다. 2000년 전 쿤제랍고개·탁스쿠르간·카슈가르를 통해 전래된 불교나, 카슈가르·탁스쿠르간·파미르고원·북천축으로 간 법현스님 등 구도자들이 사라진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서산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는 동안, 인도대륙에서 느꼈던 “불교는 왜 쇠퇴하게 됐나”가 다시금 떠올랐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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