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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가장 위대한 불멸의 사랑/호 3:1-5
○ 호세아와 결혼한 여인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찌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은 열 다섯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3.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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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조상호목사
사랑에는 세가지 종류의 사랑이 있습니다.
첫째로 소위 ‘만약에’ 식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만약’ 우리가 어떤 요구 조건을 충족시킨다면 얻을 수 있는 사랑입니다.
“너 말 잘 들으면 아빠가 상 줄게”,
“당신이 나한테 선물을 준다면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당신이 성공해서 출세하면 당신을 사랑하겠어요”,
“저하고 결혼을 약속해 주시면 당신께 사랑을 바치겠어요.”
아마 주위에서 이런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끈 달린 사랑‘ 혹은 ’조건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무엇의 대가로 제공하는 사랑입니다.
둘째로 ‘ 때문에’ 식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사람의 됨됨이나 소유나 어떠한 행위로 기인하는 사랑입니다.
“당신이 이렇게 아름답기 때문에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한테 잘 해주시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성격이 좋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것을 ‘주판알 사랑‘, 혹은 ’계산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셋째로 ‘불구하고’ 식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은 끈이 달려있지도 않고, 보답으로 무엇을 기대하지도 않기 때문에 ‘만약에’식의 사랑과 다릅니다.
또한 사랑 받는 사람 속에 어떤 매력적인 점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니므로 ‘ 때문에’ 식의 사랑과도 다릅니다.
이 세 번째의 ‘불구하고’ 식의 사랑은 상대방이 어떤 상태에 처해 있든지, 어떠한 조건에 있든지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주는 사랑을 말합니다. 이러한 ‘불구하고‘ 식의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불구하고‘ 식의 사랑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배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날마다 변덕을 부린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저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위대한 불멸의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은 세상의 그 어떤 사랑보다 뛰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은 인간이 세상으로부터 얻을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은 세상 흔들리고 사람들이 변화하는 이 시대와 환경 속에서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불멸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전에 본문을 읽을 때, 어떻게 읽으셨는지 모르지만 오늘 본문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호세아와 고멜
지금으로부터 약 2,800여년 전인 BC800년경에 이스라엘 나라에 호세아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음란한 거리의 여인인 고멜을 아내로 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출신 성분이 별로 좋지 않은 음란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결혼 후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낳고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사라졌습니다.
알고 보니 남편과 자식들을 버리고 가출하여 다른 남자에게 간 것이었습니다. 호세아는 그 아내가 부정한 행실을 버리고 성실한 아내와 어머니의 자리로 돌아오도록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그 노력은 허사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의 자녀들에게 너희 어머니를 돌아오도록 탄원하라고 합니다. 남편의 말을 듣지 않는다 해도 자녀들의 간곡한 호소를 그녀가 들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자녀들에게 부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 아내 고멜은 호세아의 가장 순수하고 신실한 사랑을 외면해 버리고 물질로, 쾌락으로 유혹한 한 남자를 따라 간 것입니다. 그녀는 남편의 사랑과 가정과 자녀들 보다, 이 세상의 물질과 쾌락을 더 좋아하여 죄악의 수렁으로 빠져 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멜 자신이 생각하기를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영원무궁토록 행복하게 살 줄 알았는데, 결국 그 남자에게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할 수 없어 또 다른 남자를 만나고 그 남자에게도 버림을 받아, 또 다른 남자를 만나고 이 남자, 저 남자를 바꾸어 가면서 음녀의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아무도 돌보아 주는 자가 없어 굶주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고멜은 노예시장으로 팔려가서 옷을 벗기우고 짐승처럼 경매에 부쳐지게 되었습니다. 젊고 아름답고 건강한 여자라면 높은 값에 팔리겠지만, 고멜은 비싼 값을 내고 사가지고 갈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가련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가 1절 하반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고멜은 ‘아내’라는 자리를 버리고 다른 남자를 좇아 떠나간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사랑하는 남편과 자녀들과 가정을 버리고 떠나간 그 아내를,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아내라고 할 수도 없고 어머니라고 할 수도 없는 음란한 여인 고멜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 여겨야 보아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또’라는 단어입니다.
NASV이나 NIV 영어성경에는 ‘again'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비록 그녀가 배신했을지라도, 비록 그녀가 잘못 했을지라도, 비록 그녀가 가출하여 허랑 방탕하여 살았다 할지라도, 또 다시 받아 들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호세아는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된 아내를 되찾기 위한 대가는 은 15개와 보리 한 호멜 반입니다. 여기에서 한 호멜은 약 228리터로서 한 호멜 반이면 342리터 정도로서 값으로 치면 은 15세겔 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호세아는 제발로 걸어 와서 사정을 해도 받을까 말까한 고멜을 위해 은 30세겔이나 되는 거금을 지불하고 다시 사왔습니다. 노예 시장에 가서 자기를 배신하고 도망갔던 그 여인, 자녀들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달아났던 그 여인, 온갖 음란한 짓은 다 저질렀던 그 여인을 은 30세겔을 주고 다시 사왔습니다.
하나님과 나
그런데 이 호세아서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이야기, 좀 더 넓게 본다면 하나님과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을 예표하고 있고,
고멜은 다름 아닌 우리 인간들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음란한 아내 고멜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한 호세아의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이 이해가 되십니까?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건포도떡을 즐긴다 할지라도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과거 우리가 죄악 투성이 가운데 있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목사님, 우리 맘대로 세상의 쾌락도 즐기고,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면 되지 않습니까? 어차피 어떻게 살아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와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부르실 때에는 그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차별하지 않고 다 불러들입니다.
그러나 일단 불러들이고 난 후에는 더 이상 옛날 방식으로 살지 못하게 하십니다.
불러들일 때에는 무조건적이지만,
불러들인 후에는 조건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성과 조건성이 함께 있습니다.
무조건성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신분이나 배경이나 빈부 여하를 막론하고 아무 조건 없이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받아들입니다.
조건성이라는 것은 일단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온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그들이 다른 신들을 섬기고, 다른 신들을 따라가도 “그래, 잘한다. 잘해”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 할 때, 앗수르를 일으키셨습니다.
바벨론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정신 차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잘못 해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사랑과 공의로 사랑하십니다. 2절을 보십시오. 호세아가 그냥 고멜을 데리고 왔습니까? 아닙니다. 호세아는 세상의 온갖 죄를 다 저지른 후 노예가 된 고멜을 위해 30세겔 이란 돈을 지불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냥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대가를 지불한 사랑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 대가를 치루어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랑은 대가가 지불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가가 지불되지 않는 사랑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희생 없는 사랑은 진짜가 아닙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사랑하려고 합니다.
적당히 즐기다가 그만두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Enjoy일뿐,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부부간에도 대가와 희생은 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희생 없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내를, 내가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상대방을 위해 희생해야 합니다.
교회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면 희생을 해야 합니다.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희생은 하지 않은 채 사랑한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위선입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랑은 가짜입니다.
보십시오. 주님은 값싼 사랑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말로만 사랑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고멜과 같이 죄 많은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의 구속을 위해 대가를 치루어 주셨습니다.
어떤 대가를 치루어 주셨습니까?
베드로전서 1장 18절과 19절에서 그 답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여기에서 구속(救贖)이라는 말은 영어로 Redemption이란 말로서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사온다’라는 의미입니다.
호세아가 남의 집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고멜을 위해 30세겔을 주고 다시 사온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사오셨습니다. 구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무엇으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까?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써 구속하셨습니다.
즉 주님은 은이나 금 같은 없어질 것으로 대가를 치룬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속전으로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어느 동네에 남편이 병으로 떠나고 다섯 살과 세 살 된 두 아들을 어렵게 키우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이 부인은 가정을 꾸려나가기 위해 철길 가에 있는 신발 공장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었습니다. 부인은 하는 수 없이 매일 아침 출근할 때 두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공장 안의 조그만 방에서 놀게 하고 일을 했습니다. 따뜻한 어느 봄날, 방안이 답답하다고 느낀 두 아이들은 엄마 몰래 철길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철길에서 조약돌을 치기도 하고, 가위 바위 보 놀이도 하면서 놀았습니다. 한편 공장 안에서 일을 하던 엄마는 누군가로부터 애들이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불길한 생각이 들어 밖으로 뛰어 나가보니, 아니다 다를까 공장건물 옆에 있는 철길에서 두 아이들이 놀고 있고, 저쪽에서는 기차가 멀리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얘들아 피해라. 기차가 온다. 기차가 온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아이들은 엄마 소리도 듣지 못한 채 열심히 놀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있는 힘을 다해 철길로 뛰어 갔습니다. 기차가 거의 다 왔습니다. 엄마는 하는 수 없이 두 아들을 철길 밖으로 던져내었지만, 그 순간에 기차가 지나가 버렸습니다. 두 아들을 살리고 난 엄마는 기차에 치여 자신의 몸이 산산조각이 난 채 죽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부인의 장례를 치르고, 두 아들들은 고아원으로 보내어졌습니다. 고아원에 보내어진 두 아들이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들의 과거 이야기를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들었습니다. 두 아들은 오열을 합니다.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어머니, 우리를 위해 철길에 뛰어들었다가 산산조각으로 찢겨지신 어머니....”두 아들은 어머니의 무덤에 조그마한 묘비를 세웠는데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
여러분! 어머니의 사랑의 절정은 두 아들을 기르기 위해 일당 몇 백원을 받으며 일했던 그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두 아들을 기르기 위해 자신이 굶고 아이들 입에 먹을 것을 넣어 주었던 것도 아닙니다. 어머니의 사랑의 절정은 기찻길에서 놀고 있었던 두 아이들의 생명을 건져내고 자신의 목숨을 버렸던 그 사건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사랑의 절정은 병든 자를 고치시며, 눈먼 자를 뜨게 하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를 가지고 5,000명을 먹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의 절정은 우리를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려죽으신 것입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값 주고 산 것처럼 주님께서 친히 자신의 생명을 속전으로 내주심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이 사랑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사랑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그 어떠한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가장 위대한 불멸의 사랑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을 입은 자의 삶
그런데 사랑을 입은 자들은 사랑을 입은 것으로 끝내서는 안됩니다.
사랑을 입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호세아는 대가를 치르고 그의 아내 고멜을 데려다 놓고 하는 말입니다.
호세아는 밟아 죽여도 시원치 않을 아내를 용서하며 말합니다.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와 함께 지내자’,
‘더 이상 바람을 피우지 말라’고 합니다.
대가를 치루시고 구속해 주신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위해 살아라.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해 주었다. 이제는 새롭게 살도록 하라.”
여러분! 구속함을 받은 자답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답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돼지는 주인이 아무리 깨끗하게 목욕을 시켜 주어도 도로 더러운 곳에 누워버립니다.
주인이 감당할 수 없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백성은 돼지가 아닙니다.
돼지와 같이 반복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사랑을 입었으면 사랑을 입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구속함을 받았으면 구속함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을 입었으면 사랑을 입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미국 닉슨대통령 시절에 대통령 보좌관으로 있으면서 정치적인 권력을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는 머리가 비상할 뿐더러 지독할 정도로 냉철한 사람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런 그가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헤트필더와 휴스, 그리고 퀴에라는 상원의원 세 사람이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노력을 했습니다. 찰스 콜슨이 투옥되자, 그들은 그를 위해 날마다 기도 시간을 정하여 함께 기도하였고, 그를 찾아가서 위로하며 책을 주었습니다. 찰스 콜슨의 형 집행기간이 7개월 가량 남았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평상시처럼 기도하는 가운데 퀴에 상원의원의 마음에 그를 위해서 대신 옥살이를 해야겠다는 감동이 생겼습니다. 변호사이기도 했던 퀴에는 특수 법조문 안에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형기를 치를 수 있다는 내용이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법원에 제안해 보았지만 거절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퀴에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콜슨이 마침내 감옥에서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값없이 베푼 사랑 앞에 교만하기 그지없던 그의 자아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습니다. 남아 있는 형기 동안 그가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대상은 오로지 동료 죄수들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어떻게 하면 저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하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죄수들이 제일 싫어하는 빨래를 자청해서 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 죄수들은 그런 그의 태도를 믿지 못하고 다른 속셈이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죄수들은 자신들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결같이 봉사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하나 둘씩 감동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기도 모임을 시작하고 사랑의 교제를 나눕니다. 콜슨은 그의 자서전에서 “평생 동안 집안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던 나는 저들을 사랑하면서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발견했다”고 고백할 만큼, 비참할 수밖에 없는 감옥에서 사랑을 베풀며 지냈습니다. 그 때 그는 일평생 죄수들을 위해서 살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형기를 마치고 나와서 ‘거듭나기’(Born Again)라는 책 한 권을 발행했는데, 그 책은 한 때 미국 사회의 커다란 화젯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감옥에서 결심한대로 “교도소 선교회”(Prison Fellowship)라는 단체를 조직해서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씁니다. 그후에 그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템플턴상을 받게 됩니다. 어느 외국잡지에 탬플턴상을 수상한 찰스 콜슨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하였습니다. “현재 미국의 가장 건강한 사상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저술가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전도자, 그리고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가장 따뜻한 이웃인 그가 새로운 이웃이 되어 우리 곁에 돌아왔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답게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입은 사랑은 싸구려 사랑이 아닙니다.
끈 달린 조건적인 사랑도 아닙니다. 주판 알 튕기는 계산적인 사랑도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참된 사랑입니다.
고통의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에는 언제나 고통이 따릅니다.
고통이 없는 사랑은 가짜 사랑입니다.
자식들 때문에 고통을 당해도 부모님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에 고통스러운 것도 참습니다.
주님은 한번 맞으면 핏줄이 터질 만큼 무서운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양손에 양발에 못을 박히시고 옆구리에 창을 찔리셨습니다.
목숨을 거셨습니다.
자신의 피를 철철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라. 내가 너를 사랑한 이 십자가를 잊지 말아라. 내가 너를 위해서 받은 고통과 고난을 잊지 말아라.”
오늘 이 시간 주님의 이 고통의 사랑을 다시 한번 느끼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