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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정필도목사/복있는 한 사람 (렘 5:1)
오늘 본문 예레미야 5장 1절에 보면 우리가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중에 첫째는 이 세상에서 의인을 한 사람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이 세상이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했으면 예루살렘에서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성읍을 용서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까요. 로마서 3장 10절에 보면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의인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7장 20절에 보면 「20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전혀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미가서 7장 2절에 보면 「2경건한 자가 세상에서 끊어졌고 정직한 자가 사람들 가운데 없도다」 경건한 자는 끊어졌고 정직한 사람을 찾아봐도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타락했는지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억울한 일을 해결해 달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불의한 재판관은 돈이나 좋아하지 인정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힘없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고약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 과부를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과부는 물러서지 않고 매일 찾아가서 간청했습니다. 이렇게 재판관을 너무 귀찮게 하니까 이 재판관이 시달리기 싫어서 할 수 없이 부탁을 들어줬습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끈질기게 찾아와서 간청하는 과부의 소원을 들어줬다면 좋으신 하나님께서도 밤낮 부르짖는 하나님의 자녀의 기도를 분명히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결론이 중요합니다. 8절에 보면 「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이 과부의 행동은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믿음 없이는 이렇게 끈질기게 구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밤에도 어떤 문제가 있든지 하나님께 나와서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분들은 믿음으로 나온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못 나오고 안 나옵니다. 포기합니다. TV나 보고 딴짓이나 하지 절대로 이렇게 나올 수 없습니다. 이 과부의 행동을 주님께서는 믿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예수님 오실 때가 되면 이런 믿음을 세상에서 보기가 쉽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유럽은 이미 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미국교회도 새벽기도 하는 교회 없습니다. 미국한인교회도 매일 새벽기도 하는 곳은 많지 않습니다. 새벽예배를 3부로 드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9시 예배드리고 금요일 날 몇천 명씩 나와서 예배드리는 곳은 지구 상에 몇 개 없습니다. 수영로 교회같이 새벽예배와 금요철야예배에 몇천 명씩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세계교회 앞의 모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얼마나 중요한 사명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이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다 믿음을 잃어버려서 평신도는 물론 목사님들도 철야예배는커녕 새벽예배도 안 드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던 근처에서 새벽예배를 드리려고 교회를 찾아보다가 놀랬습니다. 기도하려는데 문도 안 열어주는 교회가 너무 많았습니다. 대부분 교회가 새벽예배가 아예 없었습니다. 한 사, 오십 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때도 벌써 그랬는데 지금은 더 심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만큼 세상이 타락하고 믿음을 잃어버리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창세기 6장 5절에 보면 「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 시대는 한마디로 말하면 끝난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썩은 모든 것을 다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렇게 타락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세상에서 노아 한 사람은 은혜 가운데 살았습니다. 참으로 귀한 사람입니다. 온 세상이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데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았습니다. 이것은 노아 자기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됩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 마지막 때에 노아와 같은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타락한 세상이고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노아처럼 경건하게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예레미야 5장 1절에 보면 그 당시 예루살렘에는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찾아보기가 어려웠습니다. 1절에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보면 의인은 악인과 함께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의인은 악인들처럼 멸망하지 않습니다. 소돔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됐을 때 아브라함은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창세기 18장 23절에 「23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24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25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조카 롯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과 담판을 짓습니다. 하나님이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한다고 하면 무슨 심판할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꼼짝없이 하나님이 응답하실 수밖에 없도록 결사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나중에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하니까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 고모라를 심판하시기 전에 롯의 식구를 강제로 끌어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멸하셨습니다. 따라서 합시다. ‘우리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시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 실수하지 않는 분입니다. 완전한 분입니다. 사람은 실수가 있지만, 하나님은 절대 실수함이 없습니다. 세상 재판장은 잘못 판단하는 실수를 해서 많은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사형받지 않을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그런 실수가 없으십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도 예수 믿고 구원받은 의인은 절대로 심판받지 않습니다. 따라서 합시다. ‘그리스도인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보면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위기 상황이 오면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십시오. ‘아버지 주를 믿는 자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그렇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십시오.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 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말씀대로 지키시는 분입니다. 로마서 8장 1절에 보면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죗값을 다 지급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고 결코 심판이 이르지 않는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말세에 전쟁이나, 기근이나, 지진 같은 일에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은 심판의 대상이 아닙니다. 세상의 주관자가 우리 주님이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다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주장하십니다. 주님은 실수하는 법이 없으십니다. 여러분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자꾸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말씀을 붙잡고 평강을 얻으십시오. 하나님의 신실하신 말씀대로 된다는 것을 믿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19장 15절에 보면 「15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16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17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18 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19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20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 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읍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 21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네가 말하는 그 성읍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22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은 성도를 가리킵니다. 죄 없는 의인은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다 함을 받은 그 의인은 있습니다. 이 의인이 성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믿음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 의인이 있는 곳은 복 있는 곳입니다. 소알 성 사람처럼 의인 때문에 덩달아 복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롯이 저 멀리 있는 산에까지 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옆에 있는 작은 마을로 피난할 것을 허락해 달라고 하니까 그것을 허락하시면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그 성까지도 멸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성의 사람들은 수지맞았습니다. 롯의 가족이 소알 성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소알 성 전체가 멸망에서 제외됐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은 복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 때문에 부산 시민이 복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교회를 무시합니다. 여러분 때문에 해운대가 잘 됩니다. 여러분 때문에 홍수가 나고 태풍이 오고 어려움이 생겨도 이 동네는 고요하게 넘어갑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6.25전쟁 때 제가 사는 동네는 동대문 창신동 청계천 근처였습니다. 전쟁 때 서울은 폭격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모릅니다. 밤중에 시내 쪽을 보면 얼마나 폭격을 많이 했는지 하늘이 환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는 동네는 하나님이 지켜주시는데 한날은 밤새도록 비행기가 폭격을 해대는데 대부분 폭탄은 동네에서 산하나 넘어가서 다 떨어지고 딱하나가 제가 사는 동네로 떨어졌는데 그것도 초등학교 운동장 한복판에 떨어져서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습니다. 서울이 폭격을 당해서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도 제가 사는 동네는 하나님이 그렇게 지켜주셨습니다. 이것을 볼 때 말세에도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곳이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리 세상 마지막 때에 큰 환란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구별하시는 장소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을 증명해 주는 말씀이 요한계시록 9장에 나옵니다. 「4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5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6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보십시오. 얼마나 구체적입니까.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누구는 해하고 누구는 해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마에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지 아니한 구원받지 못한 지옥 갈 인간들만 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다섯 달 동안은 괴롭게만 하고 죽지는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빨리 죽으면 좋겠는데 죽음이 피한다고 합니다. 전갈이 쏠 때와 같은 괴로움이 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적당히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구체적입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시거나 불확실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밤이 깊어갈수록 작은 불꽃 하나가 귀한 것처럼 이 세상이 타락하면 할수록 의인 한 사람이 더욱 빛나고 귀합니다. 엘리야 시대에 삼 년 반 동안 큰 흉년이 들어서 모든 사람이 기근으로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지만 물질적인 기근보다도 더 불행한 것이 영적 기근입니다. 아무리 흉년이 들고 기근이 와도 하나님만 우리와 함께해 주시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아무리 전쟁이 일어나고 홍수가 나고 난리가 나고 사람들이 아우성을 쳐도 하나님만 나와 함께해 주시고 함께해 주신다는 사인만 있다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하늘과 땅을 주장하시고 심판 주되시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신문이나 뉴스에서 세상 소식을 듣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날마다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사인만 있으면 기뻐하십시오. 담대하세요. 평안하세요. 찬양하세요. 즐거워하세요.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을 광야에서 보냈습니다. 광야는 인간이 살 수 없는 환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셨습니다. 날마다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맛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습니다. 반석에서 생수가 나게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아무리 광야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세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모스 8장 11절에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1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여러분 앞으로 물질적인 기근이나 기갈이 와도 그것 때문에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만 함께하시고 하나님이 내게 말씀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산다고 하면 아무것도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것은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고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입니다. 어디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은혜 받을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입을 닫으시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위기입니다. 아무리 흉년이 와도 주님의 음성이 들리면 살길이 열립니다.
창세기 26장을 보십시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는데 이삭 때 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때 이삭이 그랄 지방으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갔더니 하나님이 이삭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3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삭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면 반드시 책임지시는 분입니다. 말씀대로 하시는 분입니다. 주님께서 이삭에게 흉년이 들어도 걱정하지 말고 애굽으로만 가지 말고 지시하는 땅에 있으라고 말씀하셔서 그랄 지방에 그대로 머물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2절에 보니까 「12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흉년들었다고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와 관계가 좋은 관계로만 유지되어 있으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기만 하면 어떤 경우에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전화위복이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해 주시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노예로 팔려가도, 억울하게 감옥에 가도 그 모든 것이 다 축복으로 변하였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많은 축복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이 번창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엘리야 시대의 비극은 흉년든 것이 아니고 영적인 기근이 비극입니다. 누가복음 4장 25절에 보면 「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엘리야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엘리야를 대접해야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자를 대접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기근에 처해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대접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수치요 비극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야를 시돈 땅으로 보내서 사렙다 과부에게 대접받게 하셨습니다. 여기 사렙다의 옛 이름은 사르밧입니다. 이곳은 두로라는 도시와 시돈이라는 도시 중간에 있습니다. 이 도시들은 지금의 레바논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엘리야를 대접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시돈 땅으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누가 주의 종을 대접할 마음이 있는지 믿음이 있는지 다 아십니다. 대접할 사람이 이스라엘에는 없다는 것과 사렙다에는 있다는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백성의 인심은 영적상태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주의 종을 대접할 마음이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이스라엘의 인심이 고약해졌고 싸늘해졌다는 것은 영적으로 완전히 기근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부산사람들의 인심이 좋기를 바랍니다. 지역의 영적상태는 인심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타지에서 부산에 왔을 때 이곳 사람들이 사랑이 많고 인심이 좋다는 것을 느낀다면 그것이 바로 영적이 상태가 건강하고 밝은 사회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친척 중에 가까운 분이 목수입니다. 한번은 같이 일하는 팀이 섬으로 일을 가셨는데 그 동네 깡패들이 와서 왜 인사가 없느냐며 행패를 부렸답니다. 술값이나 뜯어내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한참이나 어린 녀석들이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결국에 싸움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도 가담을 해서 몇 명 안 되는 목수들이 반죽음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 지역 경찰들도 한 통속이어서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답니다. 완전히 소돔 고모라 같은 지역이었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한국에도 정말 저주받은 땅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외지에서 온 사람에게 어떻게 대하느냐를 보면 그 동네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인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사사기 19장 11절 이하에 보면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도망간 첩을 찾으러 간 어떤 레위인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해가 저물었습니다. 여부스라는 동네 가까이 왔을 때 종이 이곳에서 유숙하기를 권했으나 주인은 이곳은 이방인의 동네라서 좀 더 가면 나오는 자기 동족 베냐민 사람의 동네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같은 동족이기 때문에 더 나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냐민 동네에 도착해 보니 얼마나 고약하고 인심이 사나운지 이 레위인을 영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15절에 보면 「15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로 돌아 들어가서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하게 하는 자가 없었더라」 아무도 영접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호텔이나 여관이 없었던 그 시대에는 누군가가 자기 집에서 쉴 곳을 마련해 주지 않으면 잠잘 곳이 없었습니다. 「16저녁 때에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니 그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서 기브아에 거류하는 자요 그 곳 사람들은 베냐민 자손이더라」 이 노인은 베냐민 사람이 아니라 에브라임 사람이었습니다. 노인이 배려로 그 집에서 쉬게 되었는데 저녁에 그 동네 불량배들이 찾아와서 행패를 부렸습니다. 「22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 이 말은 동성연애를 하겠다는 말입니다. 「23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24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하나」 자기 딸을 내준다는 것도 잘못되었지만 오죽하면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25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이 여자는 이렇게 죽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소돔 고모라 백성과 똑같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동성연애를 하고 외부에서 온 사람이 있으면 겁탈을 하는 이런 지역을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이런 동네는 쓸어버려야 합니다.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이 베냐민을 완전히 멸하셔서 나중에 600명만 도망가서 겨우 살아남음으로 베냐민 지파가 없어지지 않고 존속하게 되었습니다. 비극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복 받으려면 인심이 좋아야 한다.’ 부산사람들이 복 받으려고 하면 인심이 좋은 부산이 되어야 합니다. 창세기 18장에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웬 모르는 나그네가 나타나니까 달려가서 환대하고 극진하게 영접합니다. 씻을 물과 먹을 음식을 주면서 잘 영접하려고 애를 씁니다.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사람들에게만 그렇게 했을까요? 아닙니다. 늘 그렇게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늘 그렇게 나그네 대접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천사를 대접하고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저는 6.25전쟁이 났을 때 걸어서 피난을 갔습니다. 서울에서 충청남도 온양까지 갔는데 거기에 피난민 수용소가 있어서 거기서 주는 하루에 한 끼 주는 배급으로 연명하였습니다. 배급만으로는 살 수가 없으니까 산으로 들로 나물 같은 것을 구해서 먹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11살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수용소가 있었던 충청도 사람들 인심이 얼마나 좋은지! 평생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전쟁 중에 얼마나 먹을 것이 없고 힘듭니까. 이리저리 다니다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보면 먹을 것이 있는데 한 번도 ‘저리 가!’라고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잘 먹었는지 모릅니다. 충청도 사람들의 인심이 얼마나 좋으니! 그 사랑의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시돈 땅에서 살았던 사렙다 과부는 비록 이방인이고 가난했지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해서 아들과 마지막으로 먹으려고 했던 음식을 엘리야 선지자에게 대접했습니다. 이 행동은 너무나 아름다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무조건 순종해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말씀을 좇아갔습니다.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도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사렙다 과부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모든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사렙다 과부처럼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엘리야를 대접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여인을 축복하시기 위해서 엘리야를 대접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아무에게나 이런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좋은 이 여인에게 엄청난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엘리야에게 사렙다로 찾아가라 말씀하셔서 엘리야를 대접할 기회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축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 보면 엘리야를 대접한 다음 흉년이 끝나는 3년 반 동안 곡식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니까 계속해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마지막 때는 이런 기적이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문둥이 나아만을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아만도 특별히 축복받을만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떤 믿음인가 하면 엘리사를 만나러 갈 때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정성을 다해 많은 보물을 준비해서 엘리사에게 찾아갔습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에는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에게 고침 받은 사람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27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나아만의 마음가짐과 행동이 곧 그의 믿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처녀가 말해 줬을 때 ‘엘리사에게 가면 나겠구나!’ 나아만의 마음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갈 때도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정성껏 금 은 보화를 준비해서 갑니다. 아직 병이 나을지 안 나을지 모르는 상태인데도 대접할 것을 준비해서 갑니다. 이것이 나아만의 믿음입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10장 40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0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을 그대로 믿으시고 그대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주의 종을 대접하는 것은 예수님 대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대접하는 것은 하나님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장 14절에 보면 「14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주의 종을 영접하지도 않고 주의 종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주님을 영접하지도 않고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제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제가 전하는 말씀이 성경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사람의 말로 듣지 마시고 하나님 말씀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이라고 해서 사람으로만 취급하지만 말고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타락한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전해도 사람의 말로만 듣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은혜 받을 수가 없고 평생 그 마음이 강퍅합니다. 우리는 항상 성도들을 대할 때 예수님 대하듯이 해야 합니다. 우리가 소자에게 한 일이 다 주님에게 한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주의 종에게는 물론이고 성도들 가운데 연약한 자들을 우리가 돌보고 대접하는 것이 다 주님에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믿으시고 받으시고 실천에 옮기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렸을 때 주의 종을 잘 대접하는 장로님이 우리 교회에 계셨습니다. 그 장로님은 시골에 살다가 오셨는데 시골 교회에서 목사님이나 전도사님 장로님 집사님이 서울에 오시면 이 장로님 집에서 항상 대접을 잘해서 그 집은 항상 손님들이 바글바글했습니다. 꼭 아브라함같이 대접을 잘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자녀가 많은 시골 남자 전도사님이 무작정 서울에 올라왔는데 살길도 없고 돈도 없으니까 그 장로님 댁에서 몇 달을 살았습니다. 장로님이 그 분들 살길을 열어주기까지는 할 수 없이 같이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고 훌륭해도 그런 장로님은 제가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때가 되니까 장로님을 축복하시기 위해서 축복받을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장로님이 계셨던 시골교회에서 예배당을 짓는데 교회에 돈이 없어서 성전을 짓다가 중단되었습니다. 지붕도 없다 보니까 비만 오면 온 예배당이 다 젖곤 했습니다. 돈 구할 길이 없으니까 목사님이 서울에 계신 이 장로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 내용이 교회를 짓다가 돈이 없어서 중단되었는데 나머지는 장로님이 지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장로님이 가난하셨는데 편지를 읽는 순간 목사님이 좀 이상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부인 권사님이 얼마나 믿음이 좋으신지 그런 생각 말고 하나님이 주시면 지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교회마다 여자가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남자들은 실수를 참 많이 합니다. 따라서 합시다. ‘주시면 짓고 안 주시면 못 짓는다.’ 권사님이 믿음의 말을 하는 순간에 장로님이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순종하고 짓기로 했습니다. 그때부터 돈을 보내는데 적으면 적은 대로 주시는 대로 보냈습니다. 그렇게 순종하자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데 처음에는 명함이나 찍던 작은 인쇄소였는데 나중에는 큰 회사의 포장부터 인쇄까지 모든 것을 다 맡게 되었습니다. 기계도 최고로 좋은 것을 들여와서 회사가 아주 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니까 장로님이 아주 부자가 되었습니다. 성전 지으면서 부자 되고 장로님 집도 이 층으로 아주 크게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장로님 가정을 축복하시는데 그 이후에도 자손들을 얼마나 잘되게 하시는지 자손들이 다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성전을 서울에서도 몇 군데 더 지었습니다. 지금은 미국에 사시는데 제가 미국에 가면 좋은 것으로 대접을 잘해주십니다. 평소에 나그네 대접 잘하는 장로님을 하나님께서 크게 축복할 계획이 있으시니까 성전 지을 기회를 주셨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지만 주시면 하겠다는 믿음 가지고 나아가니까 성전 짓는 동안에 엄청난 부자가 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위한 소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소원을 품게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축복하기 위해서 소원을 주십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보면 「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아무에게나 이런 소원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로 계획한 그 사람에게 소원을 품게 하시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이런 소원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한 사람에게만 그 소원을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좋은 소원이 생겼을 때 그것을 우연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시고 나를 통해 하나님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나에게만 그 소원을 주셨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보니까 절대로 그런 소원을 아무에게나 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시면 그런 소원을 품을 믿음이 없습니다. 그런 소원을 품은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작년 동짓날에 집사람이 너무 바빠서 팥죽도 못 먹고 그냥 넘어갈 것 같아서 집사람에게 한마디 했습니다. ‘여보 올해에는 동짓날에 팥죽 맛도 못 보고 넘어가네.’ 그런데 이 말을 누가 들으셨을까요? 주님이 들으셨습니다. 그 다음 날 여기 계시는지도 모르겠는데 어느 권사님이 기가 막히게 맛있는 팥죽을 가져다주셨습니다. 그래서 둘이서 실컷 맛있게 먹었습니다. 두 사람이 안 가져다줘도 됩니다. 한 사람이면 됩니다. 그 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감동을 주시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어느 권사님인지 모르지만, 그분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분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분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축복하실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소원을 품고 계십니까? 좋은 소원은 많이 품으시기 바랍니다. 불가능해 보여도 가지십시오. 좋은 소원은 그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이루어지고 아니고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소원이 전도 많이 하고 이 나라 백성을 구원하고 전국에 다니면서 복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일본과 태국을 돌면서 전도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생각만 하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연세 높으신 목사님이 찾아오셔서 저와 함께 전도여행을 가자고 하셨습니다. 이분은 한국과 일본의 대표 목사님들이 모이는 단체의 총무를 맡고 계시는 분이셨습니다. 이 목사님과 일본과 태국을 다녔는데 가는 곳마다 말씀전하고 일본의 유명한 모리야마 목사님 혼다 목사님 같은 분들을 만나서 그곳에서 집회도 하고 그렇게 은혜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또 한 번은 예수님 오시기 전에 중국을 한번 돌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라서 어려운 일이죠? 그런데 한 두어 달 전에 차관이 찾아와서 중국의 도시마다 집회하고 중국 목사님들 세미나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내년 4월부터 10월 중에 부탁했습니다. 좋은 소원은 생각만 해도 현실로 이루어집니다. 저는 너무 엄청난 일이기 때문에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밤에 돈 드는 일 아니니까 좋은 소원을 많이 가지십시오. 좋은 소원을 가지고만 살아도 은혜가 되고 복이 됩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놀라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우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