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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전 사연들이라...(근 30년이 되었거든요.) 최선을 다해서 옛체험을 더듬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다 잘 진행하시고 계시리라 사료되오나, 참고로
1. 이덕성 목사를 추천합니다. 추명순 전도사님이 말도교회에서 정년이 지나고도 후임자가 없어서 섬을 떠나지 못할 때, 자원해서 추 전도사님과 한동안 동고동락하시며 말도교회에서 목회를 하신 분입니다. 촛불 두개 켜고 성경을 보다가 추전도사님으로부터 자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책망도 받으면서 고생하신 분이지요. "촛불 값보다 내 눈 값이 더 비싸답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도 참고 인내하신 목사님이시지요.
2. 부산에 계신 박영빈 목사도 추천합니다. 함께 왕래하시던 분입니다.
3. 고군산군도 교역자회(연합회)에서 발간했던 <섬이야기 고군산군도>를 참고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합본도 만들었습니다.
4. 무녀도, 선유도, 명도, 방축도, 관리도, 말도가 추 전도사님의 사역지였습니다. 물론 붙박이로 상주하실 수는 없었지만, 기도의 대상들이었지요. 각기 교회가 없거나, 있더라도 목회자들이 비어 있었고, 우상숭배가 극성을 부리던 섬들이었지요. 그래서 가능하시다면 각 섬들을 둘러 보시고, 나이 많으신 토박이 어른들을 만나본다면,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5. 선유도의 오흥덕 목사님이 다방면에서 큰 힘이 되실 수 있을 겁니다. -이상- 주내평강하시기를!
보낸사람: "홍준수" <hjsoo@paran.com> |
홍준수 목사님!
졸고를 첨부파일로 보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활천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그리고
카페 '요르단강변'daum.net을 통해서
요르단 소식도 접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청주 서문교회 파송 요르단 선교사'로
요르단의 암만에 있으면서
현지 교회나 학교, 센터 등에 벽화를 그려주고 있답니다.
활동상은 카페에 올리고 있습니다. 11.04.04 23:05
-원고-
고군산군도의 살아있는 복음의 역사 : 추명순 전도사
그해 1982년 여름은 매우 무더웠다.
해풍에 섞여 코를 찌르는 비릿한 바다냄새와 피부를 끈적이게 하는 습기가 낯설었다.
바다가 없는 내륙도 사람이 바다가운데 섬으로 이동한 때문에 생긴 생소한 느낌이었다.
섬사람들이 육지나들이를 할 때면, 여객선터미널 가까운 여인숙이나 여관을 이용했다.
군산이나 여타지역에 거처를 소유한 섬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출항하는 배를 타려면 군산에서 하룻밤을 묵어야하는 섬교회 교역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날 아침도 섬에 가기위해 군산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섬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담소하고 있었다.
표를 사고 개찰이 시작되면 짐을 챙겨들고 서둘러 배에 오른다.
고군산군도의 섬교회 교역자들은 같은 배를 이용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배 안에서 만난다.
하루는 농어촌의 여염집 아낙네처럼 키는 크지 않고, 검게 그을린 얼굴에 잔주름이 가득한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손잡이가 긴 가방을 움켜잡고 비싸 보이지 않는 치마저고리에 스웨터를 걸쳐 입었고,
가운데 가르마를 한 반백의 머리는 매우 단정해 보였다. 말도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추명순 전도사라고 했다.
대개 섬마을 아낙네들은 배에 오르면 출항하기 전에 자리를 잡고 누워 버린다.
배멀미를 최소화하는 방법으로서 체험을 통한 삶의 지혜이다.
추 전도사님도 어디엔가 자리 잡고 누웠을 테고...
섬 교역자들도 때로는 최상의 자리를 잡고 누워서 목적지까지 가게 된다.
한배를 타고 가지만 서로 대화의 시간을 갖기란 쉽지 않은 섬생활이었다.
그 분은 1950년대 후반에 군산 중동교회 김용은 목사님의 권유로 섬지역 복음화에 헌신하게 되었고,
어떤 때는 김 목사님과 동행해서 고군산군도의 각 섬을 순회하며 전도를 했다.
그래서 야미도, 신시도, 선유도, 무녀도, 장자도, 관리도, 방축도, 명도, 말도에
그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고, 기도의 대상이 아니었던 곳도 없다.
고군산군도의 11개 유인도 전체가 그분의 사역지였던 셈이다.
그렇게 해서 각 섬마다 교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는데, 1958년에 선유도교회,
1959년에 신시도교회와 말도교회, 1963년에 야미도교회가 설립되었다.
어렵사리 교회가 설립되었다 해도 당시에 섬 지역은 신앙적인 환경이나 교통편이 너무 열악해서
섬교회를 지킨다는 일조차도 힘겨웠으며, 어떤 섬은 유명무실해 지거나
무녀도나 방축도, 관리도처럼 아예 폐쇄된 곳도 있었다.
무녀도는 토양이 더 열악했던지 태풍으로 교회가 허물어진 후로 한동안 무교회 지역이었다가
1979년도에 최인식 목사가 들어와 새로 교회를 개척했다.
그러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간다면 추 전도사님의 기도와 노고를 잊을 수 없다.
“군산 앞바다에 가면 무녀도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섬의 모습은 무녀가 춤을 추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무속신앙이 판을 치는 섬이었습니다. ...
그런데 그곳에 추명순이라는 여자 전도사님이 혼자 들어가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무녀들의 온갖 핍박과 위협을 받으면서 기도로 모든 것들을 극복하고 무녀도에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성공했습니다.
무녀도에 교회가 뿌리를 내리니까, 무녀들이 맥을 못 춥니다. ...
그 후에 고군산 군도의 사람들이 사는 11개 섬 모든 곳에 교회가 생기면서
각 섬에 있던 성황당들이 다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십자가를 세우는 순간, 귀신들은 벌벌 떱니다.”
-최승관목사의 설교 중-
추명순 전도사님의 기도와 열정과 희생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섬교회에서 목회를 한
수많은 사역자들의 노력의 결과는 결국 열매를 맺기에 이르렀으니,
반세기가 지난 현재는 각 섬마다 교회가 지역사회의 중심이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오늘 틀림없이 들어갈 수 있어요!”
폭풍주의보나 경보가 발령되면 섬사람들은 섬 출입을 못하는 게 일상이다.
<고군산군도는 스물네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모여있는디 그 절경을 내가 다
야그하면 그곳에 가고자퍼서 미칠라고 허는분들도 있을꺼여. ...
섬 귀경을 가고자프면 제일먼저 날씨를 알아봐야혀유. 전화루다 (131)눌르면 오늘 내일
모레꺼정 해안일기예보가 나와유. 파도높이가 3m이상이면 배가 안가버려유.
당일에 떠나기전에 (442-0116)번 눌르면 여객선 출발여부와 시간을 ARS로 야그해줘유.
여름한철만 여객선이 몇번씩 뻔질나게 댕기고 그외는 하루에 한번여라우.
선유도꺼정 두시간 걸링께 배타고 실컷 늘어지게 자고나면 도착헌당께요.> -희나리
군산항에서 출항하는 여객선은 야미도, 신시도를 거쳐 섬 왕래의 거점이랄 수 있는 선유도에 기항을 한다.
그러면 장자도, 관리도, 방축도, 명도, 말도의 선객들은 대기하던 작은 여객선으로 옮겨 타고,
주선은 무녀도, 비안도를 돌아 다시 무녀도를 거쳐 선유도에 기항한다.
그리고 끝 섬인 말도까지 운항하고 되돌아온 배에 타고 온 선객들은 주선에 옮겨 타고 군산으로 떠나면,
말도행 배는 선유도에 정박하여 다음날을 대비한다.
당시 선유도까지는 적어도 편도 3시간 반(뉴페리호), 말도까지는 4시간 반 가량이 소요되었다.
(건조된 지 오래된 왕경호일 경우는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운적토가 쌓인 뱃길이 낮아지면 조수간만의 차이에 따라 출항 시간도 자주변경 되었고,
폭풍이나 태풍이 몰아치는 때에는 그나마 발이 묶여 섬사람들은 오도가도 못 했다.
하루는 바람이 일기 시작하는 일기여서 여객선이 ‘가네 마네’ 줄다리기를 하다가 출항을 했다.
마침 추 전도사님과 동행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객실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으나,
추 전도사님은 선박 중앙의 짐짝 옆에 웅크리고 앉아 계셨다.
그 모습을 보고 함께 객실로 들어가시자 했더니
“배가 무사히 말도까지 도착할 수 있도록 여기서 기도할겁니다!”라며 사양을 했다.
예상대로 해상의 바람은 거세지기 시작했고, 약간의 부슬비도 뿌리기 시작했다.
여객선은 속도를 늦추며 항진을 계속했다.
선유도에 도착할 때까지 추 전도사님은 바람을 맞으며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바람 불고 쌀쌀한 날씨였는데 갈색으로 그을린 얼굴은 더 검은 흙빛이 되셨다.
그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종선이 말도까지 가리라는 것은 희망사항이었다. 바람은 말도까지 갈 수 없으리만큼 사나워지고 있었다.
“전도사님! 우리 무녀도에 가서 쉬시고, 날씨 좋아지면 가도록 하시지요!”하고 권유했더니 담담하게 대답하셨다.
“오면서 기도했는데, 오늘 말도까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분은 말 그대로 그날 종선을 타고 사역지인 말도까지 가셨다.
이런 모습은 그분의 삶의 한 단면일 뿐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기도함으로 버티셨고,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굳센 믿음으로 열악한 섬에서 때때로 핍박도 받아가면서 전도하고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추 전도사님의 기도에 영험(?)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그분은 더 바쁘게 사셨다.
섬교역자들은 가끔 한자리에 모이기도 했다. 물론 추전도사님도 만나 뵐 수 있었지요.
“우리는 당시 서로 교역자회라는 이름을 걸고 친교를 나누며 '선교지 섬이야기'등을 써나가면서
그때의 현장 이야기를 연신 회보에 담아냈다.” -박영빈 목사
한번은 무녀도의 고군산 중앙교회에서 모였다. 어느 섬에서 모이던지 대개 일박을 하게 된다.
여객선이 매일 한차례만 운항을 하기 때문이다.
한번 모이면 되돌아갈 배편이 없어서 당일에 임지로 복귀할 수 없다.
풍랑이 심해지는 경우에는 며칠을 더 묵을 수도 있었다.
무녀도에서 추 전도사님은 자신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해 주었다.
-일찍 시집을 가서 시집살이를 호되게 했단다. 예수를 믿게 되었지요.
매운 시집살이 때 만난 예수님은 자기에게 최고였다.
예수님 때문에 시집에서 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한번은 남편이 산으로 끌고가서 구덩이를 파고 자기를 얼굴만 내놓고 파묻었더란다.
예수를 버리라고요.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답니다.
다시 꺼내 주고는 교회를 다니지 말라고 협박 섞어 만류했답니다. 결국 시집을 떠나게 되었고...
군산 중동교회의 김용은 목사님을 만나 고군산군도를 책임지는 전도사가 됐다고 했다.
김용은 목사님은 고군산군도의 섬지역 복음화를 위해 정성을 쏟으신 분이시다.
초분(초장)제도를 매장제도로 바꾸는데도 섬 교회들이 큰 역할을 했다.
-추 전도사님은 무녀도를 방문할 때마다 우선 무녀도에서 제일 높은 무녀봉에 올라가서
철야하고 금식하며 기도했단다. 이유는 아주 간단명료했다.
“우선 산귀신을 제압해야...” 했다며 무녀봉을 많이 올라가 봤노라고 조용조용 말씀해 주셨다.
그 작은 체구에 가녀린 여인의 몸으로 어떻게 그런 담대한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선유도의 선유봉, 장자도의 장자봉도 그분의 주된 기도처였다고도 했다.
바다사람들은 해난사고나 자연재해 앞에 보호막 없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추위나 두려움 극복이 가장 큰 과제이다.
그래서인지 뱃사람들은 민속신앙에 심취하거나 술을 많이 애용하기도 한다.
구원자이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알기 전까지는 온갖 사신신앙에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내가 부임하던 해에도 무녀도에서는 여전히 당산제와 풍어제 등
온갖 민속신앙 행위가 주민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금기가 행해지고 있었고, 많은 제물들이 준비되었다.
여성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남성들이 주관하는 제사에 쓸
제물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큰 과제였다. 물론 현재의 섬생활에서는 모두 다 극복된 일들이지만...
당시에는 어려운 일이 생기면 육지에서 무당을 불러다 집이나 바닷가에서 굿판을 벌리기도 했다.
이와 같은 고군산군도의 여러 섬들이 추 전도사님의 복음전도의 대상지였고,
교회가 설립되면서 각 섬마다 교역자들이 부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분은 아무도 가지 않는 끝 섬, 말도에 들어가 섬 주민들과 고락을 함께 하셨다.
나이가 많아서 은퇴를 원했으나 지원하는 후임자가 없어서 늦도록 섬을 지키고 계셨다.
한번은 말도에서 섬 교역자들의 모임이 있었다.
그분은 여전히 허름한 치마저고리에 단정한 모습으로 섬지역 목회자들을 웃음으로 맞아 주셨다.
마침 당시 이덕성 전도사가 들어와 영성을 키워가며
‘50여세 부인 전도자가 들어가서 75세 할머니가 되어 나오시기까지’
섬마다 다니시며 전도하신 추 전도사님의 검소하고 경건한 삶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이덕성 전도사가 추 전도님의 후임으로 말도교회를 담임했다.
하늘과 바다만 보아야하는 낙도에서, 연고지도 아니며, 아는 사람도 없는 폐쇄사회에서
‘오직 주님’과만 소통하는 삶을 살면서 혹은 무시당하며 혹은 핍박받으며 복음을 전하는 삶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여자들은 부정탄다면서 어선에는 태워주지 않았기 때문에 싫다고 해서 쉽게 뛰쳐나갈 수도 없는 곳이 섬이다.
그 모든 환경과 여건을 초월하고 ‘오직 복음을 위해’ 일신의 안일을 희생하신 분이 바로 추명순 전도사님이시다.
든든한 후임자가 결정되자 군산 중동교회에서 은퇴식을 하신 추 전도사님은 말년을
대전 ‘성락원’에 의탁하셨다. 은퇴 후에도 가끔 섬을 방문하셨고,
섬 지역 복음화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시다가 소천하셨다.
추명순 전도사님은 가깝고도 먼 섬들을 품고 기도하시면서,
현장에 들어가 발로 뛴 ‘살아있는 복음의 역사’이시다. -관-
부연설명 :
이 사건들은 본인이 무녀도의 고군산중앙교회에 부임한 1982년 이후의 이야기이다.
그 시기에 섬 지역에는 전기가 없었고, 그래서 가전제품은 꿈도 꿀 수 없었으며,
여름에는 군산에서 얼음을 사서 여객선에 실어와 아이스박스에 넣어 김치를 보관하던 시절이었다.
전화는 동네 공동 무선전화로 하루에 한, 두 번 정도 정한시간에만 육지와 통화했다.
나무를 때서 밥해 먹던 환경에서 연탄이 막 보급되는 시절이었으며,
빗물을 받아먹어야 하는 물이 귀한 섬에서는 목욕을 자주하는 일도 사치일 수밖에 없었는데,
때로는 행정선이 실어다 주는 수돗물을 배급받아 먹기도 했다.
하물며 전도사님이 시무하던 1950년대 말이나 60~70년대의 생활환경은
상상을 뛰어넘는 열악한 시대였음은 자명하다.
지금은 선유도 무녀도 장자도 대장도가 소규모 다리로 연결되어 있고,
각 섬마다 화력발전소를 건설해서 220V의 전기를 공급하기 때문에
각종 가전제품을 사용하거나 전기를 활용하여 냉난방을 하게 됐고,
지하수를 개발하거나 산골짜기를 막아서 댐을 만들어 물을 공급하는 등
도시생활에 버금가게 환경이 좋아졌다.
교통편도 속도가 빠른 선박으로 교체되었고, 선유도는 하루에 두 차례 운항을 한다.
야미도와 신시도는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육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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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활천’에 추 전도사님에 관한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내용을 기억할 수 없는데, 이번 글과 중복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표현만 다를 뿐이지, 내가 겪은 일은 같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편집자께서 이전의 글을 참고하셔서 편집을 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 희나리는 필명으로 무녀도 출신 여자 집사입니다.
* 최승관 목사는 미국에 있다고 들었으며,
* 박영빈 목사는 부산에 와 계십니다.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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