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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태극 원문보기 글쓴이: 호두까기
원문>>> http://blog.daum.net/nero1003/160
글: 대수맥
<창힐>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고 기록된 것이다.
이를 들어 두 부족이 모두 桓國에 속해 있을 때 대요는 간지의 술(干支의 術)을 배워갔고 창힐은
부도의 문(符圖의 文-부호와 그림으로 된 글자)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은유하였다.
.....에 이어서 계속
이런 역사적 배경과 당시 정세의 흐름을 머리에 담고 하나하나 살펴 나가보자.
첫 번째로 <삭도>를 꼬투리로 삼아 물고 늘어지는데 한번 <치우>의 전역에 대한 진격로를 분석
하여 이 문제를 풀어보자.
첫 번째로 <삭도>를 꼬투리로 삼아 물고 늘어지는데 한번 <치우>의 전역에 대한 진격로를
분석하여 이 문제를 풀어보자.
- 원래 황토고원인 산서성(山西省) 일대에서 神農과 黃帝의 선조가 이웃해 살았다는 기록도
나타나니 아무튼 판천(板泉)에서 楡罔과 3차에 걸쳐 싸운 후 수세에 몰려 굴복해 [염황군炎黃軍]
이란 연합집단을 구성하였다.
이렇게 손을 잡을 수 있던 이유는 처음 이웃했던 인연 때문인 듯 보여 진다.
한동안은 부족 간에 내부 패권 쟁탈전으로 두 선조가 황하 중류 지역에서 세력을 얻어 강력한 집단
으로 성장했고 그 후 황하 중류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하북성 북부에서 일전을 벌인 후 연합한
것이다.
이에 불복한 신농계의 일부가 최후로 싸워서 많은 부족을 잃은 곳은 복우산(伏牛山-하남성 숭현
嵩縣 서남)이라 명했는데 이 때 살아남은 우양계 신농부족들이 후일을 기약하기로 하고 서쪽으로
나아가 반고(盤固)때에 같이 내려와 정착했던 유소(有巢)씨와 수인(燧因)씨가 연합한 후예였던
유수(有遂)씨가 있는 지역에서 정착해 강(羌)씨족이 된다.
염소와 소의 뿔을 보고 나무를 깎아 몽둥이에 붙여 사용하니 이를 과(戈)라 했고 후에 융족(戎族
-웅雄*웅熊의 전음)의 祖가 되었으며 대대로 熊族과 혼인관계를 유지했다.
이로서 주(周)의 시조인 후직(后稷)의 모(母)였던 강원(姜嫄)과 고공단보(古公亶父)의 처(妻)인
강녀(姜女)를 비롯해 무왕(武王)의 妻였던 읍강(邑姜)이 그 부족에서 나왔다.
판천(阪泉) 싸움에서 승리한 황제군(黃帝軍)은 여세를 몰아 지나(支那)의 지배권을 차지하려고
하남성 중동부의 연(兗)*산동성 태산 이남의 대(岱)*안휘성과 강소성 일대의 회(淮)의 유망(楡罔)
에게 불복했던 군장들을 포섭하여 세를 불린 후 북경(北京) 서북부 천진(天津) 지방의 탁록(涿鹿-
북경부근 천진지방)까지 진격하였다.
만주에서 들어가려면 거쳐야 하는 진입로 상에 있어 지형상으로도 환군(桓軍)의 진격에 대한 맥을
끊고 숨통을 막을만한 전략요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支那의 상황을 전해 듣고 대노하여 징벌을 결심한 환족(桓族)의 天王 <치우-자오지>의 전격
적인 北京 북부로의 진격(백하白河부근 동남에 있는 여수의 남쪽인 색도索度=색두索頭를 거쳐 진군)
및 매복에 걸려 첫 전투(산서성 해현전海縣戰)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공상(空桑)으로 일시후퇴
후 웅거하였으니 이후부터 본격적인 황제-우치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황제는 처음 보는 군대의 강력함과 청동무기와 투구 등 갑주의 위력(동두철액銅頭鐵額)등 각종
신무기에 놀라 정체조차 알지 못한 채 지리멸렬하여 도망을 한 후 사람을 풀어 내력을 알아내기에
고심하였다.
판천(阪泉)은 상곡(上谷)으로 하북성 서북부 탁록(涿鹿)근처의 상간하(桑干河)-양하(洋河)로 이루
어진 하곡(河谷)으로 북경(北京) 배후의 서북 지방에 있던 장성지대(長城地帶)인 장가구(張家口)
지방이다.
치우는 이곳으로 신속히 들어가 주진(主陣)을 펼치면서 갑자기 서쪽에서 나타난 것이다.(지금도
탁록에는 황제성*치우새(寨-산채)*치우泉*치우분(墳)*치우혈염(血染)산과 북경 북부 연경(延慶)현의
상*하 판천촌이 있어 그 무렵의 형세를 파악케 해준다.)
다시 말해 [치우]는 북평(北平) 서북 내몽고로부터 흐르는 동양하(東洋河)*남양하(南洋河)가 선화
(宣化)의 북쪽에서 합쳐 선화(宣化)를 지난 후 동남으로 상간하(桑干河)에 들어감을 일찌감치 파악
하고(이를 구뇨九淖의 강을 거슬러 오르다라는 기록으로 표현했다) 색도(발해만 서쪽의 백하 부근)
로부터 군사를 전진시켜 강을 이용해 산서 陽高-선화와 혹 그 서북쪽에서 은밀히 내려와 공상부근
에 근거지를 잡은 황제의 진격보다 먼저 도착해 신속하게 진용을 갖추고 산서 해현지역에서 급습
하여 적의 허를 찌르고 있다.(육지로 이동할 경우의 시간단축을 위해 강을 거스른 전략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치우가 양수(洋水)에서 나오다 이는 북쪽 양수(洋水)부근에서 남하했음을 의미한다.
치우는 일단 지나(支那)의 패자가 되려는 황제(黃帝)의 기도를 분쇄한 후 염황군(炎黃軍)에 들어간
유망(楡罔)을 토벌해 서쪽변경을 안정시켜놓은 뒤 우리 민족의 중추지대이며 핵심강역을 보호할
생각으로 회淮*대岱사이에 머물며 갈로산(葛盧山)에 도달해 제련과 무기를 제작*정비한 후(오구장
五丘杖*도극刀戟=칼과 굽은 창*태궁太弩=활 틀을 놓고 화살 돌을 쏘는 무기를 생산했다) 이어 탁록
(涿鹿)부근에서 전방을 방어하던 염제(炎帝)를 공격하니 다급해져 황제(黃帝)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이 다음부터는 [앵무새]가 제기한 문제의 핵심을 빗겨가니 더는 설명을 하지 않겠다.
염제군(炎黃軍)은 합쳐서 출병하여 접전(1차전)했으나 대패한 후 공상(空桑)으로 후퇴하니 치우군은
이후 1년 간 황제에게 협력한 부근의 9제후를 공략한 다음 옹호산(雍狐山)에 9개의 야금소를 설치하여
사금*석금을 캐고 지나(支那)에서 쓰기에 적합한 무기들을 제작하거나 개량 및 수리를 했다.
(예과芮戈*옹호창雍狐戟 등을 제작) <일주서 상맥>
갈로산은 아마도 우리말로 가루쇠(철鐵)인 가루나 가로(도검刀劍)에서 파생된 지명이 아닌가도 싶다.
<산해경)>을 보면 <장백산에서 남쪽으로 380리를 가면 갈산(葛山)의 첫머리이다.
예수가 동류해 여택(余澤)에 들어가고 경산(耿山)에서 남으로 300리를 내려가면 노산(盧山)인데 역시
초목이 없고 모래*자갈이 많으며 사수(沙水)가 남으로 흘러 잠수(涔水)에 들어간다 라고 적혀있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갈석(碣石)도 左갈석과 右갈석이 있음을 익히 알 것이니 기록을 보고 그 무렵의
전황과 전역(戰域)에 비추어 신중히 지명고찰을 해야 할 듯하다.
그런데 갑자기 <그 앞에 나오는 치우가 서쪽에서 천병을 일으켰다는 구절이 의아한데 원문이
<누기천병어서累起天兵於西>라고 되어있다.임승국은 해석이 되지 않자 여러 차례 서쪽으로 천병을
일으켰다라고 저 편한 대로 해석해버렸다>
-라는 이야기가 왜 튀어나오는가? 자세히 전역이 돌아가는 상황조차 파악해보지도 않고 그저 저
편한 대로 해석해버리는 걸 보는 듯하여 내가 다 민망하다. <애초에 이유립이 낸 오타거나 치우가
제하(중원)를 둘러 싼 강대한 세력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는 망발은 이제 좀 걷어치웠으면
한다.
두 번째 언급한 회淮*대岱지역은 중국대륙에서 가장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하며 기후가 살기 좋은
지역이었던 하북 지방과 같이 이름을 드높인 지대였으므로 일찍부터 북방통로를 통하거나(하북)
동부해안선을 따라 해로를 거치거나(회*대)하여 우리 민족의 본산이 되었음은 앞서도 익히 말하
였으니 다음의 구절로 가름한다.
중국역사가 왕동령(王桐齡)은 <중국민족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4000년 전 지금의 호북*
호남*강서 등지는 이미 묘족(苗族-이들을 상투쟁이라고 하여 우리 민족의 특성으로 알려졌음은
dll 말했다)이 점령하고 있었고 중국에 한족(漢族)이 들어오게 된 후에 차츰 접촉하게 되었는데
이들 민족의 나라이름은 구려(九麗)이며 군주는 치우였다.
이제 마지막 결론 부분이다. 그가 말한 대로 옮겨보겠다. 어이구!!! 이런!! 차마 낯이 뜨거워
다 읽지도 못하겠다.
◀ 자 여기서 치우 이야기가 나오면서 중요한 대목이 지나간다. 보자.
<치우는 범처럼 하삭河朔에 웅크리고 앉아서 안으로 날랜 군사들을 양성하며 밖으로 시세의 변화를
살폈다> 하삭이란 황하 이북의 거친 땅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이유립은 배달국의 영토를 중원에는
전혀 배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이후 벌어진 치우의 진군로를 살펴보아도 뻔히 알 수 있다(태백일사와 삼성기에서 치우가
점령한 영역은 좀 다르다. 태백일사쪽이 훨씬 많다)
1. 갈로산의 쇠를 캐내 무기를 만듬(어딘지 모름. 김산호는 갈석산에 비정. 그나마 정상적인
비정이라 하겠다)
2. 탁록 -탁군 부근
3. 구혼 -어딘지 모름
4. 옹호산雍狐山 -어딘지 모름(단학회에서는 섬서성에 있는 옹산雍山이라고 했으나 그곳을 찾지
못했음)
5. 洋水 -어딘지 모름(임승국은 요동반도에 있는 대양하라고 했는데 지도는 보고 생각이라도 하고
말했는지 모르겠다)
6. 공상空桑 -진류
일단 모르는 지명이 많긴 하지만 탁록에서 진류로 나아갔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빨간색 선이 그 진로를 가리킨다. 단학회가 칠랄레 팔랄레 내키는 대로 찍어 놓은 지명비정을
따르면 파란색이 된다.
[치우전역도] 이 때 공손헌원이 반란을 일으켜서 치우는 다시 탁록으로 진군해서 무찔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 치우는 기주*연주와 회*대의 땅을 모두 차지했다고 한다.
그 땅이 대강 아래 붉게 칠한 영역이 된다.
붉은 색 위의 유주는 애초에 치우의 땅으로 분류한 듯 하다. 이 이야기는 저 붉은색 칠한 부분이
본래 한족의 것이었다는 이야기다.
걔네들 거니까 빼앗을 수 있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 아니겠는가?
대체 환국의 광활한 영토는 어느 틈에 다 사라지고 중국 땅에는 반고의 후예들이 저리 득세했단
말인가? 그 점에 대해서 이 훌륭한 책은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을 해결할 수 없었던 김산호는 <대쥬신제국사>에서 환국 부분을 아예 날려버리고 시작한다.
그럼 이제 저 붉게 칠한 땅은 언제 어떤 바보짓을 해서 잃어버리게 되는가? 이유립의 흥미로운
설정은 이어지나니 차회를 기대하시라▶[앵무새]
[반론]여기에서 우리의 착시현상을 유도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중국 전체 지도를 올려
한 귀퉁이만 조그맣게 붉은 칠을 해 놓은 뒤 나머지 부분과 대비시켜 우리 민족이 거주한 영역이
아주 일부분이라는 인식을 주려는 느낌이 짙다.
설마!!!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예나 지금이나 전역의 전개과정을 주시하여 조망해보면 공통점을 금방 발견하게 된다.
이기느냐? 지느냐? 의 기본 목표가 전략의 전체구도를 방향 짓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사람은 서토 내에 거의 70여개의 제후국을 거느리고 있다는 桓國의 天王이요. 다른 한
사람은 사마천이 농경민족의 祖先으로서 굳게 자리매김한 영웅으로서 그동안의 세력판도를
뒤집으려고 마음먹고 일어난 인물이다.
한마디로 한 시대를 풍미한 걸출한 사람들이라고 가정해볼 때 두 사람은 전쟁의 국면을 어떻게
생각하고 전략을 운용하였을까? 여기에서 시간을 뛰어넘어 관통하는 기본적인 맥을 잡을 수 있다.
1) 전략 목표가 그 시대의 전쟁국면을 움직일 수 있는 가치가 있는 곳인가?
-주민의 핵심거주 지대이며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지역인가?
2) 전쟁의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인가?
3) 전쟁수행의 필수요소인 거점공략인가? -물자나 산물의 차단과 독점 가능성
4) 적의 숨통을 끊거나 재기불능을 유도할 수 있는 중핵지대인가?
이에 덧붙여 전역 상황의 현실적 판단을 위한 전략가치의 집중이 필요하다.
1) 전쟁지역이 주로 어디인가? -양자강 남부지역에서도 일어났는가?
2) 전투의 핵심지역은 어디였는가?
3) 진군로가 어디였으며 전쟁의 승패를 가름할 전략요충이 어느 방향으로 집중되었는가?
4) 전쟁의 완료 후 어느 지방에 웅거하였으며 관경을 설정하였는가?
5) 두 사람이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한 강역은 과연 어디였는가?
6) 그 후에도 어떤 영역을 지속적으로 장악했으며 중요시하였는가?
이러한 기준을 두고 판단해 볼때 그 무렵 두 민족이 가장 치열한 각축을 벌인 곳이 자연스럽게
부각되며 바로 그 지역이 당시 중국대륙의 핵심강역이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징표이다. 우린 이점을 반드시 명심해야 만이 이러한 엉뚱한 결론에 이르지 않게 된다.
※ 회수 이남지역을 두루 살펴보아도 주나라 시대까지 각축전이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춘추
말엽-전국시대에 겨우 단초가 잡힌다.
최소한의 전력으로 적의 숨통을 끊어 전역의 성공을 극대화하려는 게 전략의 기본인데
이 사람은 이를 아예 무시하고 중국대륙의 전체 지도를 떡 펼쳐놓고 두루뭉술하게 모든 걸
희석시킨다. 왜 싸우는지 알지도 아니 알 필요도 없는 미개종족들이 살고 있는 지역까지
포함하여 산술적 평균으로 시대상황을 판단하고 있는 조잡함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다.
혹시 군대를 가지 않았을까?
周나라에 이르기까지 양자강 이남지역은 동부 해안지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불모지였다.
지대가 낮아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늪(低濕地)과 호수가 산재하였으며 침식지대를 흐르는
강줄기마저 수없이 얽혀 사람이 살기가 적당한 환경이 아니었으므로 인구가 희박하여 원시
미개민족들이 있는 변방으로 취급되었다.
춘추 전국시대 가장 남쪽에 있었던 楚나라가 겨우 이들의 일부를 정복*교화시켜 국세를
확장하여 <장왕>에 이르러 웅비한 것을 보아도 잘 알게 된다.(열국지)
그 동남쪽에서 전국 후반기에 오*월이 득세한 지역을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서남부지대도 그리 차이가 없었는데 巴*蜀이라하여 멸시하고 있었다.
삼국시대에도 궁벽한 오지로 취급하여 <유비>를 보낸 정황을 살펴보아도 짐작이 가능하다.
▶ 양자강 남방에 만족(蠻族)이 살고 있는데 미개하여 이마에 문신을 했으며 화식(火食)을
하지 않는다.
▶ 초국(楚國) 남쪽에 나국(裸國)이 있는데 의복을 입지 않고 사람의 고기를 먹는다.
결국 그보다 훨씬 전이었던 황제시대의 관심지역은 비옥하고 농경집산물이 많이 산출되는
황하 이북지역-산동지방-황하 이남에서 회수 아래까지의 벨트였던 화북*산서*섬서*산동성 전
지역과 하남성 동남*안휘성 중북부*강소성 서북*호북성 동부지대였다.
아울러 이 강역은 이미 BC 5000년부터 꾸준하게 진입하여 온 우리 민족이 기반을 닦고 개척한
중핵지역이기도 하였다.
<사기 하본기> 조이피복 鳥夷皮服의 정의에 조이는 숙신이다.
동이의 중심인 숙신은 천제족이다. 肅愼氏天民 肅敬也 愼畏也 <회남자淮南子 수형훈隧刑訓>
상고시대 하남성 일대를 중심으로 발전하던 중국족과 가장 일찍이 접촉한 종족이 이미 殷商시대
이전에 산동반도로부터 淮*泗유역으로 분포되었던 동이족이었다.
<후한서>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이들은 중국족으로부터 동이족으로 불리어졌을 뿐아니라
종족에 있어서도 한반도와 만주 일대의 민족과 실로 공동의 한 원류에서 분파되었다고
할 것이다. <김상기 東方史論叢 1984 423 P>
하남성 앙소문화(BC 4800-2500 最古의 농경취락유적)는 황하 중*상류와 황토지대인 하남성*섬서성
의 토착 중국인 채도문화로서 요령지역의 우리 민족 문화보다 사회발전단계가 수백년
뒤져있었다.<윤내현>
이런 상태는 전국 시(戰國 時) 오吳*월越의 발흥과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흥성(興盛)으로 겨우
벗어난다.
이로보아 황제와 치우의 전역이 벌어진 중심지역(그 이전에 신농과 황제가 격전을 벌인 지역도
같다)과 장악한 강역들이 바로 그 당시 가장 노른자위(要地요지)였음을 금방 알게 되는 것이다.
그 지역의 동이부족을 황제가 빼앗으려다가 마침내 치우에게 패전하여 다시 동이족이었던 신농
(神農)이 다스리던 실지(失地)를 회복한다.
[앵무새]는 이런 점을 깊이 분석하거나 살피지 못하고 또 문제의 핵심을 놓치는 우(愚)를
범하고 있다.
참고로 [하삭河朔]은 [삭방朔方]을 의미하며 황하가 직선으로 올라가는 흐름의 상류지역을
말한다. 그래서 양수(羊水)를 타고 내려온 <치우>가 탁록전을 준비하면서 <황제>를 기다리고
있는 과정과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무슨 <하삭이란 황하 이북의 거친 땅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이유립은 배달국의 영토를 중원에는
전혀 배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라는 글로 은근슬쩍 하북성과 그 북쪽
지역까지 걸고 넘어가 이걸 이유립과 연결시켜 배달국의 영토를......운운하는 전혀 웃기지도 않는
무식함을 드러내면서 짜증만 자꾸 돋우는지 모르겠다.
이 사람이 그토록 궁금하게 생각하는 <대체 환국의 광활한 영토는 어느 틈에 다 사라지고 중국 땅
에는 반고의 후예들이 저리 득세했단 말인가?>라는 어리석은 오판과 어이없는 착시현상에 대해서
이유립이나 [환단고기]라는 훌륭한 책은 가벼운 태도로 흘려 넘기며 일언반구 쓸데없는 말을 언급
하지 않고 있다.
그럼 이제 저 [앵무새]가 떠들썩하게 붉은 칠을 한 땅들이 언제 어떤 바보짓을 추가함으로서 한낱
웃음거리가 되어버리게 되는가? [앵무새]와 그의 그림자들의 합작으로 어떻게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개되는지 한번 궁금한 마음으로 차회(次回)를 기대해보겠다.
[마지막 Tip] 시베리아 문명에 대한 학습자료
신체적 형질의 특징으로 볼 때 세계의 3대인종인 황색 몽골 인종(Mongloid), 백색 코카서스 인종
(Coca-soid), 흑색 니그로 인종(Negroid)중에서 한민족은 몽골 인종에 속한다.
한민족은 피부 색깔뿐만 아니라 곧은 머리카락과 짧은 얼굴에 광대뼈가 나오고 눈꺼풀이 겹쳐져
있으며 둔부에 몽골 반점이 있는 등 몽골 인종의 공통된 신체적 형질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
몽골 인종은 그들의 집단이동과 지역분포에 따라 서로 다른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신체적 형질과 생활양식에 차이가 생겨서 고시베리아족(Paleo-Siberians)과 신시베리아족
(Neo-Siberians)으로 구분된다.
그중에서 한민족은 신시베리아족에 속하며 그후 기온이 상승하여 빙하가 녹으면서 후기구석기
시대 및 신석기시대 때 시베리아로부터 남쪽으로 이동했다.
터키족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북쪽까지 몽골족은 지금의 외몽골을 거쳐 중국의 장성 및 만주
북쪽까지 그리고 한민족은 흑룡강 유역을 거쳐 중국 동북부인 만주 서남부의 랴오닝[遼寧]
지방을 지나 한반도 남부까지 이동하여 하나의 단일 민족으로서 초기 농경시대에 정착생활을
시작했다.
이와 같은 한민족의 형성 및 이동 과정에서 발전된 문화는 지금까지 남아 있어 후기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철기시대의 고고학적 유물과 유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역사상 고대의 중국문헌에 나타나는 숙신(肅愼) ·조선(朝鮮)·한(韓)·예(濊)·맥(貊)·동이(東夷)
등의 여러 민족들은 우리 한민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특히 랴오닝 지방에 정착하면서 한민족은 북부의 초원지대에서 목축을 하는 한편 남부의 평야
지대에서 농경을 주로 하는 가운데 농경·목축 문화를 발전시켰고 한반도 남부까지 내려온
한민족은 자연환경의 조건에 따라 목축을 버리고 농경에만 집중하면서 독특한 철기문화를
발전시켰다.
이처럼 오늘의 중국 랴오닝 지방과 한반도에서 농경과 청동기 및 철기문화를 발전시킨 한민족
이 하나의 단일 민족으로서 명실상부한 고대국가를 성립시킨 것이 바로 고조선(古朝鮮)이다.
그 이후 국가가 나누어져서 몇 개의 새로운 독립국가로 분열되었다가 다시 통합되는 역사적
과정은 매우 복잡했지만 꾸준하게 하나의 단일민족으로서 한민족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최근 러시아와 중국이 발굴해 내는 고고학 증거들은 분명히 시베리아와 동북아시아의 선사문명
이 타 지역과 구별되는 문화공동체의 성격이 뚜렷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을 위해 최몽룡,이헌종, 강인욱등이 러시아 고고학자들과 공동연구로 펴낸 "시베리아
선사고고학"(도서출판 주류성)의 일독을 권한다.
빗살무늬 토기와 세형돌날 석기(Microlic Flint)의 발상지로 대표되는 이 지역의 선사문명은 인류
최초의 세계화를 촉진한 문명이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세계 역사학계와 고고학계가 고민하는 시베리아-동북아 문화공동체 문제
에 대해 [환단고기]는 그것이 사실이든 상상이든 대답을 이미 해왔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단 우리는 환단고기를 우리 민족의 시원을 밝혀주는 <텍스트>로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환단고기가 누군가에 의해 쓰여 질 무렵에 지금과 같은 시베리아 -동북아
선사문명의 수수께끼가 제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환단고기와 고고학을 놓고 볼 때 환단고기의 <선 대답> 고고학의 <후 질문>이라는
기이한 상황이 빚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