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0113
<빛과 소금>의 원고청탁으로 쓴 글입니다.
노평구 엮음, 『김교신전집』전 8권 (부키, 2001-2002)
조선을 성서의 진리 위에
힘과 숫자와 돈을 내세우며 ‘현실의 성공’을 자랑하는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이제 더 이상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소금이기는커녕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진리에서 멀어진 이런 어두운 시대일수록 김교신의 올곧은 신앙이 그리워진다.
김교신은 1901년 4월 18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해방을 넉 달 앞둔 1945년 4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우리 민족의 최대 수난기인 20세기 전반을 온몸으로 헤쳐 나간 생애였다.
그는 엄격한 유교 집안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했으며, 함흥보통학교를 거쳐 1919년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했다. 김교신은 일본 유학 중이던 1921년 무교회주의 기독교의 창시자인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가르침을 받으며 기독교 신앙에 들어갔으며, 그 후 약 7년간 우치무라가 주도한 ‘성서연구회’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그는 우치무라를 기독교 신자인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일본 기독교의 자주성을 주장한 일본의 진정한 애국자로서 이해하면서, ‘진정한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이 조국 조선을 구하는 일’이라는 신념을 지니게 되었다. 세이소쿠 영어학교를 졸업한 후, 김교신은 1922년 4월 도쿄 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 영어과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지리박물과로 전과(轉科)하여 1927년 3월 졸업했다.
귀국한 김교신은 1927년 4월 고향인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했으며, 이듬해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옮겨 12년간 재직하다가 1940년 3월에 사직했다. 그 후 1940년 9월부터 경기중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으나, 불온한 인물로 주목받다가 6개월 만에 추방되었다. 1941년 10월에는 개성에 있는 송도고등보통학교에 부임했지만, 1942년 3월 이른바 ‘성서조선사건’으로 15년에 걸친 교사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지리․박물 과목을 담당했던 김교신은 수업 중 학생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민족주의적 교육으로 일관했다.
성서조선 간행
그러나 김교신이 교편생활 이상으로 혼신의 힘을 쏟았던 것은 월간 잡지 『성서조선(聖書朝鮮)』의 발행과 성서연구집회였다. 『성서조선』은 김교신을 비롯하여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양인성, 유석동 등 우치무라 문하의 신앙동지들에 의해 동인지로서 1927년 7월에 창간되었다.
초기에는 서울에 거주했던 정상훈이 주간(主幹)이 되어 공동 집필로 간행되었는데, 창간 이듬해인 1928년 3월에 김교신이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전근하면서부터 김교신 역시 잡지 간행에 힘을 보탰다. 그 후 제15호(1930년 3월호)가 간행되고 나서 정상훈이 고향인 부산으로 떠나자, 김교신이 ‘1개월이라도 더 해보려고’ 단독 책임으로 제16호(1930년 5월호)를 맡아 펴낸 것이, 이른바 ‘성서조선사건’으로 제158호(1942년 3월호)로 잡지가 폐간될 때까지, 통산 15년간 김교신의 공생애 대부분을 바치는 생애사업(lifework)이 되었다.
『성서조선』 발행과 표리일체를 이루었던 활동은 일요일마다 열린 ‘성서연구회’였다. 이것은 1930년 6월부터 주로 가정집회 형식으로 약 10년간 계속되었다. 성서연구회와 더불어 1932년 이후 매년 연말연시에 1주일 간 전국 각지의 신앙 동지 및 『성서조선』 독자들이 함께 모이는 ‘동계성서집회’를 약 10년 동안 자택에서 개최했다. 성서연구회 및 동계성서집회에서 행한 강의와 강연 내용은 모두 『성서조선』에 실렸다.
김교신은 참된 기독교를 천명하고, 성서에 의해 새롭게 거듭나는 인간을 양성하여, 조선의 참된 독립을 추구하는 것을 이러한 모든 종교 활동 및 집회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성서조선사건
『성서조선』은 일제에 의해 불온한 책으로 지목되어오다가, 1942년 3월호(제158호)에 실린 권두언(卷頭言) ‘조와(弔蛙)’가 조선의 민족혼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폐간처분을 당했다.
김교신은 개성(開城) 송도고등보통학교 재임 시 날마다 새벽이면 송악산(松嶽山)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기도를 했다. 골짜기에는 작은 폭포가 있고 폭포 밑에는 작은 못이 있었다. 김교신이 몸을 씻고 찬송을 부르면 개구리 떼들이 반기기라도 하는 듯 몰려들어서 이들을 귀여워했다. 추운 겨울이 되자 못이 얼어붙고 개구리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이윽고 봄이 돌아와 얼음이 녹고 못이 풀렸는데도 못에는 죽은 개구리들이 떠다니는 처연(悽然)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못 밑에는 아직도 몇 마리의 개구리들이 살아남아 움직이지 않는가! 그리하여 ‘조와’는 “아! 전멸은 면했나보다”라는 탄성으로 끝을 맺는다.
이것은 물론 단순한 개구리 이야기가 아니라 일제 하에서 수난을 받던 우리 민족을 상징한 글이며, 그는 이 못에서 무서운 시련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다시 웅비할 이 민족의 앞날을 내다 본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교신을 비롯하여 함석헌, 송두용, 류달영 등 13명이 투옥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것이 이른바 ‘성서조선사건’이다. 김교신은 1943년 3월 불기소처분을 받아 출옥한 후 1년간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전도활동을 전개했다.
김교신은 그 후 1944년 7월부터 흥남의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용흥(龍興) 공장에서 근로과 주택계장으로 일하면서, 5천 명 조선인 노동자들의 복지를 위해 진력했다. 김교신은 끝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강제 징용된 동포들에게 기독교의 참된 신앙 정신과 독립 정신을 고취하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그토록 고대하던 민족의 해방을 불과 몇 달 앞두고 1945년 4월 25일 작고했다. 만 44년의 길지 않은 생애였다.
조선 김치 냄새나는 기독교
김교신의 인격은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만난 조선의 선비’라고 표현할 수 있다. 김교신은 젊은 날 공자의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를 십 년 단축하여 ‘육십이종심소욕불유구(六十而從心所欲不踰矩)’를 달성해보리라고 야심을 품었으나, 막상 ‘팔십이종심소욕불유구(八十而從心所欲不踰矩)’마저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도덕적인 ‘낙망의 심연’에 떨어졌다가, 기독교에 입문하여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고 고백한다.
김교신은 기독교를 ‘조선 김치 냄새나는 기독교’로 만들 것을 목표로, 일생 한국인의 심령에 뿌리를 박은 기독교를 추구했으며, 이를 위해 일체의 ‘인공적인 부흥(復興)의 열(熱)’을 배제하고 ‘천품의 이성과 인간 공유(共有)의 양심’을 견지하면서 ‘냉수를 쳐가며’ 성경을 연구했다. ‘조선을 알고, 조선을 먹고, 조선을 숨쉬다가 장차 그 흙으로 돌아가리니 불역열호(不亦說乎)’라고 말한 그의 글에서 우리는 진정한 조선 선비의 풍모를 접하게 된다. 김교신이 제158호까지 『성서조선』을 간행한 것은 ‘성서의 진리’ 위에 ‘조선’을 세우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의 실천에 다름 아니었다.
1942년 ‘성서조선사건’으로 김교신과 그 동지들이 옥고를 치를 때, 취조에 나섰던 일본 경찰들이 그들에게 한 말은, 역설적으로 김교신이 일생 추구한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요약해주고 있다.
“너희 놈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은 조선 놈들 가운데 가장 악질적인 부류들이다. 결사(結社)니 조국이니 해가면서 파뜩파뜩 뛰어다니는 것들은 오히려 좋다. 그러나 너희들은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 민족의 정신을 깊이 심어서 백년 후에라도, 아니 5백 년 후에라도 독립이 될 수 있게 할 터전을 마련해 두려는 고약한 놈들이다.”
후일 김교신은 일본 경찰의 힐난에 대해 “일본 경찰이 보기는 바로 보았거든”하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김교신이 일생 심혈을 기울인 것은『성서조선』의 간행이었다. 김교신은『성서조선』을 위해 실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쳤다. 『성서조선』은 전 호에 걸쳐 적자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김교신의 표현을 직접 빌자면, ‘의식(衣食)의 여분으로 잡지 출판을 한 것이 아니라 출판의 여분으로 생활을 해야’ 했다. 『성서조선』지는 그야말로 김교신의 삶에서 최대의 것이요, 전부였던 것이다. 이 『성서조선』의 내용은 담아낸 것이 『김교신전집』이다.
강직한 성품
『김교신전집』 독자들은 “김교신의 글을 읽노라면 양심이 찔린다”는 말을 종종 한다. 특히 김교신의 삶의 구체적인 궤적이 드러난 ‘일기’를 읽다보면 그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받는다고 한다. 사실 김교신의 다음과 같은 기도를 읽으면서 옷깃을 여미지 않을 독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주 예수여, 당신을 사랑하기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을진대 내 입에서 설교를 끊으시옵소서. 그 나라보다 더 연모하는 생활이 땅위에 있을진대 한 줄 원고도 이루지 못하게 하옵소서.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함이 절실하옵거든, 주여, 그 때에 다음달 호의 원고를 쓰게 허락하여 주옵소서.”(1939. 3. 14)
‘일기’에는 김교신의 성격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몇 가지 에피소드들이 나온다. 예를 들면 1938년 10월 2일자 ‘일기’에는 고향인 함흥에 갔다 귀경하는 모친을 맞이하기 위해 김교신 내외가 청량리역으로 갔다가 벌어진 사건 한토막이 소개되어 있다. 역에서 입장권 파는 매표원이 불친절, 불성실하여 김교신과 다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김교신은 옥신각신 끝에 차표 판매구의 유리창을 맨주먹으로 가격하여 부숴버리고 말았다.
아마 역 구내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사건 발단의 책임이 전적으로 매표원에게 있었음이 판명되어 유리창 변상의 요구도 취소되고 김교신 부부의 입장료도 안 받는다고 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옳지 않은 일을 보고 참아내지 못하는 강직한 모습이다. 김교신은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수의 성전확청 같은 이 사건을 보고 일반 승객들이 심히 만족해하는 양을 보면 청량리 역원들의 횡포, 태만은 작금에 시작된 일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심지어 청색 제복 입은 철도 품팔이꾼까지 나에게 접근하여 찬사를 말하면서 나의 행동을 지지했다.”
신앙과 애국
1938년 7월 27일자 ‘일기’를 보면 김교신이 강습 차 옹진 근교의 한 광산에 견학 갔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김교신은 갱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캄캄한 굴속에 착암기를 잡고 서있는 15, 16세 가량의 소년 한 명을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광맥보다 그 소년이 그의 모든 관심을 사로잡은 것이다.
김교신은 그 소년이 마치 자기 동생, 자기 아들만 같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갱내가 컴컴한 것을 기화로 광벽을 향하여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기록한다. 갱내에서 이런 소년 품팔이꾼 3, 4인을 만나는 대로 나이를 물은즉 16세, 학업은 보통학교도 못 다녔다 하며, 하루 수입은 55전이라고 했다. 김교신은 이 날 ‘일기’에 이렇게 비통한 심정을 토로한다.
“저들도 보통학교 교육을 받고 바울을 읽으며, 예수의 복음 듣는 날 오기까지 우리가 어찌 편안히 눈을 감겠는가.”
조국과 민족에 대한 김교신의 주체할 수 없는 동정과 연민은 1935년 9. 28일자 ‘일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로마서 8장부터 낭독하려니 9장 3절 상반부까지 읽고는 목이 막혀 중단. ‘대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가 그리스도께 끊어지는데 이를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라는 바울 선생의 말씀이 나의 폐부를 찌르는 때문.”
김교신의 『성서조선』은 글자 그대로 그의 ‘성서’와 ‘조선’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것이다. 일제의 검열 때문에 차마 내놓고 표현은 못했지만, 김교신의 글의 ‘행간’마다에는 그의 절절한 ‘신앙’과 ‘애국’이 배어들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김교신의 ‘일기’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두 계명을 온 몸으로 실천한 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교신전집』의 발간
김교신 선생이 타계한 후 『성서조선』에 수록된 글은, 김교신의 제자이자 한국 무교회신앙의 2세대 지도자인 노평구(盧平久)의 손으로 편집되어, 1975년에 『김교신전집』으로 완간되었다. 그 후 김교신의 신앙과 삶이 고스란히 담긴 『김교신전집』은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지면서 한국 기독교의 고전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고, 수많은 가슴에 공명과 파장을 일으켰다. 곡학아세(曲學阿世)와 가치전도(價値顚倒)로 얼룩진 우리 현대사에 이런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그러나 노평구가 편집한 『김교신전집』은 독자들로부터 예약 주문을 받아 제작된 관계로 그 후 곧 물량이 소진되었고, 유감스럽게도 일반 독자들로서는 좀처럼 다시 구해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 도서출판 부키의 호의로 말끔히 새 단장한 모습으로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되었다. 시대 변화에 맞추어 몇 가지 수정이 가해졌지만 기존의 편집 방침은 고스란히 유지되었고, 『성서조선』 원문을 일일이 대조하여 기존의『김교신전집』에 있었던 탈자, 오자를 크게 바로잡았다. 학술 인용에 부족함이 없는 ‘정본’ 『김교신전집』이 비로소 확립된 것이다.
김교신은 이제 가고 없다. 그러나 『김교신전집』과 더불어, 그의 신앙과 삶은 영원히 우리 곁에 머물 것이다. “백년, 5백년 후에 동지를 구하겠노라”고 한 김교신의 뜻이, 새롭게 간행된 『김교신전집』과 더불어 젊은 세대들 사이에 널리 펼쳐지기를 바란다.
박상익 (우석대학교 교수 / 서양사)
첫댓글 교수님, 부키 출판사에 박교수님 소개로 김교신전집 구입한다고 했더니 잘 해주셨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부키에 전화했더니 책 주문하셨다더군요. 정말 귀한 책입니다. 주변에도 소개해 주세요. (책값 할인을 위해 제 이름 얼마든지 파셔도 좋습니다. ^^)
스크랩을 해 갑니다. 허락하실런지,,,
다동 님, 스크랩 괜찮습니다. 단 출처만 밝혀주시길...
고맙습니다^&^
가신 분을 그리워하고 지금도 그 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은 노평구 선생님이
역할이 크신거네요. 한 번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꼭 보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