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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 정리: 거짓 교사의 정체(Summary of Jude: the identity of a false teacher)
할렐루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서신서의 마지막 정리입니다. 이제 요한 계시록 정리만 남겨 두었습니다. 20여 년 전에 광나루 장신대 신대원 준비를 위해서 도서관에 갔을 때 어떤 분의 조언으로 Terry Hall의 파노라마 성경을 보게 하시고 이 책에서 성경을 읽고 결별 장별로 정리를 할 수 있다는 정보를 듣고 바로 시험 준비를 포기하고 성경을 읽고 정리한지 이제 서신서까지 정리를 하게 하시고 계시록만 남겨 두게 되었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라 믿습니다. 구약이 아직 정리하지 못한 성경이 몇 권이 있지만 곧 다 정리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이 자료들을 이곳에 올리게 하시고 온 세상에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 바라는 모든 분께 도전하는 마음을 주시고 성경을 직접 읽고 정리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온 인류에게 하시고자 하는 올바른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시기 간절히 기도합니다. 게으르고 방만한 인생을 한결같이 참으시고 격려하시고 그리고 늘 새로운 내용을 정리하고 읽으면서 배우게 하심을 통해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큰 기쁨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와 십자가 대속의 사랑으로 죄를 용서받고 성령님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성령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시며 지혜를 주심으로 늘 배우는 기쁨과 전하는 행복이 충만했습니다. 모든 분들이 이렇게 정리하고 복음을 세상에 전함을 통해서 제가 누리고 누렸던 행복을 누릴 줄 믿습니다. 사랑의 주여!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성경을 잘 읽고 정리하는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서로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이 세상에 잘못 이해되고 잘못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잡고 이를 모든 성도가 함께 잘 배움을 통해서 이 땅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건설하시고자 했던 율법이 사랑을 통해서 완성되는 정의가 넘치고 인정이 넘치고 모두가 살기에 부족함과 각박함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이 건설되게 하소서!
샬롬! 시작이 반이라 신약의 정리는 비록 온전하지 않지만 요한 계시록만 남겨두고 있고 구약도 조금 있으면 다 정리가 될 것 같습니다. 제 자료를 보면서 도전을 받아서 성경을 읽고 정리를 하신 분은 이미 반은 하신 것입니다. 재미가 있고 새롭게 성경이 많이 올바로 이해가 되고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지지를 하시니 언제가 모든 성경을 읽고 정리하는 날이 올 것이고 이때에는 어떤 성경에 대한 미혹도 모두가 사라질 줄 믿습니다. 신학으로 성경을 많이 이해할 수는 있지만 어떤 신학이 잘못된 상태로 검토 없이 전해지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수백 년 동안 그냥 모든 사람이 그 신학에 빠져서 올바른 성경의 이해도 없이 살 수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의 가장 대표적이 예가 개신교의 로마서를 통한 이신칭의의 이해입니다. 이 칭의론에 대해서 천주교는 별로 찬성하지 않고 개신교내에서도 이제 이에 대한 올바른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개신교의 칭의론과 이 칭의론에서 생겨난 믿음으로 모든 신앙을 풀고자 한 사조는 약 500년의 세월을 개신교의 중심적인 교리가 되었지만 이제 이 교리는 곧 종언을 고할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이런 저를 모든 개신교 분들이 성토하고 욕할 수도 있지만 이 교리를 정말로 성경을 읽고 정리를 해 보면 너무나 작은 성경의 어떤 요소를 다른 이보다 너무나 큰 성경의 가르침을 다 흡수해서 통일하려고 하는 억지를 부린 것이 바로 드러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천주교가 별로 반기지 않고 개신교 중에서도 이제 바로 보고자 하는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신학으로 수용을 하고 내가 확신도 없이 학문으로 그냥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미 오천만의 로마서 워밍업에서 그림으로 설명을 드렸습니다 만 다시 그림으로 설명을 드리면 먼저 로마서를 배우기 전에 반드시 선행해야 되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는 아래 도표와 같습니다.
우선 우리가 바로 로마서의 이해를 위해서 직행하는 우를 버리고 먼저 갈라디아서를 이해를 해야 되는 부분이 있으니 갈라디아서는 소 로마서로 불리우며 6장으로 구성이 되어 로마서의 대부분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고 갈라디아서는 로마서보다 먼저 작성이 되었기에 6장의 갈라디아서를 16장의 로마서보다 먼저 읽고 이해하는 것이 쉽고 이 이해를 바탕으로 로마서를 보면 깊은 의미나 복합적인 의미의 표현을 단순하게 이해하는 우를 범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구약의 하박국서를 먼저 읽고 올바로 이해를 해야만 칭의되는 믿음에 대한 이해가 올바로 됩니다. 하박국서의 1.2.3장의 올바른 이해가 로마서 1장에서 이 하박국서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의 이해에 반드시 필요가 합니다. 그냥 로마서의 1장 17절을 보면서 믿음에 대해서 이해를 하면 이 구절이 절대로 올바로 이해가 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갈라디아서와 하박국서의 올바른 이해가 선행이 되어야 합니다. 이와 함께 창세기의 내용도 잘 이해가 되어야 하고 특히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로마서에서도 잘 설명이 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의롭다 인정하신 믿음은 75세에 부르심을 받아서 100세가 될 때까지 변치 않고 도리어 강해지는 믿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의롭게 된다고 모든 믿는 사람 즉 오늘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나 혹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믿음의 사람으로 간주하고 모두가 의롭게 된다고 하는 주장과 성경의 표현은 완전히 일치하지가 절대로 아니합니다. 이런 내용도 잘 분별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율법에 대한 이해는 사복음서의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이해가 선행이 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바울의 로마서를 통해서 그 주인이며 천지의 창조주이신 그리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다스리고 계시며 최후 심판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완전히 무시하는 일이 생길 수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사복음서의 올바른 이해가 선행이 되어야 비로소 로마서의 이해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 내가 목사입니다. 나는 누구의 종입니까? 예수의 종입니까? 그의 종된 바울의 종입니까? 아니며 잘못된 신학의 종이 되어서 오늘도 예수님의 종이라 자처하면서 실제로 예수님의 대적이 되고 원수가 되어서 헛소리를 인터넷에도 전하고 설교로 전하고 글로 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대적이 누구이며 거짓 교사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사복음서에서 율법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 어떤 말씀인 줄 아시기나 하시면서 바울 사도의 율법관이 어떻니 율법이 아니고 행위이다 이렇게 가르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야고보 사도의 또 믿음과 행위에 대한 말씀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사도 베드로의 율법을 능가하는 사람의 실천에 대한 부분은 어떻게 이해를 하시고 사도 요한의 사랑은 계명의 실천이다란 말씀은 또 어찌하시렵니까? 그렇다면 과연 사도 바울이 그 스승이며 주인인 율법에 대한 가르침을 무시하고 자신의 가르침을 따라서 무법의 신자가 되라고 가르쳤습니까? 절대로 그럴 일이 없으니 우리가 사도 바울의 로마서를 잘못 이해하고 이 잘못 이해된 내용도 모르고 그냥 신학을 따라서 500년의 가르침을 그대로 정신없이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온 한국의 로마서와 율법의 이해에 대한 대세입니다. 대세이니 대부분이 정신을 속히 차려야 할 것입니다. 단언코 한국의 대부분의 크리스천은 무법의 크리스천입니다. 법이 없습니다. 그냥 마음대로 살아도 되고 그리고 헌법과 하위법을 잘 지키면 되고 자본주의의 법을 잘 지켜서 국가의 법에 저촉이 되지 않으면 너무나 안전한 줄로 알고 믿고 살고 있습니다. 누구 책임입니까? 법이 없는 크리스천 즉 무법자를 성경에서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 아시기는 아십니까? 절대로 참된 스승은 이런 가르침을 펴지 않습니다. 어떻게 질서와 정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의 뜻은 1%도 받들지 못하게 하고 법이 없이 자기 멋대로 사는 크리스천을 길러내고 이렇게 살아도 믿기만 하면 천국의 보장이 된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까?
성경 정리는 이렇게 성경을 잘 읽고 내가 직접 이해를 하면서 정리를 하고 정리를 하다가 잘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 다른 번역본도 잘 읽고 대조를 해 보고 그리고 영어 번역도 보고 그리고 인터넷에서 다른 분의 설명도 보면서 성경을 이해해 가고 정리하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을 통해서 이런 잘못된 수백 년의 오류를 바로잡을 수가 있는데 적어도 5년은 중점적으로 성경을 읽고 정리를 해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올바로 정리하고 이해를 한 뒤에 내가 목사로서 신학자로서 혹은 교사로서 가르쳐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의사가 이론만 죽자 살자 배운 후에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고 수술을 한다? 무슨 일이 생기겠습니까? 그나마 이는 끽해야 100년을 사는 육체에 대한 의사인데 말입니다. 우리가 다루는 성경의 이해는 영원한 삶이 대한 공부입니다. 의사나 변호사보다 더 정밀하게 정확하게 그리고 다른 분의 의견이 있다면 잘 검토를 하고 무엇보다도 다 성경에서 비롯이 되니 내가 직접 성경의 내용을 확인을 해 보아야 되는 것이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까? 성경의 내용이 너무나 방대해서 절대로 그렇게 확인이 불가하다 하시는 분은 그냥 전할 때 이렇게 전함이 올바릅니다. 저는 목사이며 혹은 신학자이며 혹은 교사이나 제가 가르치는 성경에 대해서 제가 자신을 가질 정도로 전체적으로 확인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신학으로 배운 것을 전합니다. 그런데 신학은 너무나 분파가 많아서 통일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제가 전하는 내용을 그렇게 신뢰하지 마시고 확신을 가지시고 싶다면 직접 확인을 해 보셔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정직인데 이렇게 하십니까? 그냥 자신도 확인도 확신도 없는 내용을 아멘 아멘 하세요 강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말로 정직한 분은 아직도 이 부분이 정립이 되지 않으신 분은 그동안 전한 내용에 대해서 사과를 하시고 이제부터 직접 확인을 하시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잘못 전한 내용에 대한 조그만 회개가 될 것입니다. 그것도 없이 이런 저를 욕하고 성토하면 반드시 그분은 거짓 교사로 남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을 읽고 시간이 가더라도 반드시 정리를 해야 됨을 이렇게 강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20년이 넘게 정리를 했지만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큰 어떤 잘못된 신학은 틀림없이 보았고 그 부분에 대해선 정말로 확인을 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담대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이제 유다서의 정리를 보면서 박 정우 목사님의 개론도 같이 보시겠습니다. 목사님의 글에 저는 전적으로 아멘입니다.
유다서
1부 | 이단 사상에 대한 경고와 권면 |
부 | 장 | 키워드 | 주요 내용 |
1부 | 1 |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고 | 인사. 거짓 교사의 출현. 심판. 거짓 교사의 길 권면과 경고. 맺는 인사 |
1 장 |
거짓 교사에 대한 심판
1-2 인사: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의 형제 유다가 편지
3-16 거짓 교사에 내릴 심판
3-4 편지를 쓰는 이유: 가만히 들어온 몇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 믿음의 도를 힘써 싸우라
5-7 애굽에서 구원 후 믿지 않는 자 벌하심,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 심판, 소돔과 고모라 형벌
8-13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 자: 유리하는 별, 애찬에 암초,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
14-16 에녹의 예언, 원망하는 자, 정욕대로 행하는 자, 입으로 자랑, 이익을 위해서 아첨
17-23 권면과 경고
17-19 분열케 하는 자, 성령이 없는 자
20-23 믿음 위에 세워라, 성령으로 기도하라,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어떤 의심하는 자 긍휼, 어떤 자는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 어떤 자는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24-25 축복
유다서 개론: 박정우 목사님 글
1. 핵심 메시지 (참고, 레노바레 성경 ‘골로새서 서론’)
본서에서 유다는 처음 인사와 마지막 찬양을 제외하면 가인, 발람, 고라 등 구약의 백자들을 예로 들어 영지주의자들의 특성과 미래의 심판을 말하고 있다. 즉 이단이나 거짓 교사들이 교회를 공격해 올 때 믿음을 위해 맞서 싸울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3절)고 했다.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내부의 육이라고 하는 대적자 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 사단과 그의 사주를 받은 세상이라고 하는 대적자의 공격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때로는 맞서서 맹렬히 싸워야 할 때가 있다.
2. 명칭(Title of the Book)
헬라어 표제는 “이우다(iouda,유다)”이다. 개혁 성경은 헬라어 표제를 따라 “유다서”로 정했다.
3. 저자 (Author)
일반적으로 본 내용에서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1:1)가 이 서신의 저자로 인정되어 왔다. 문제는 이 유다가 과연 예수의 형제 유다인가의 문제이다. 본문 17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라는 표현이 유다서의 실제 저자의 과거로 속한다고 볼 때, 그들의 마지막 때는 저자 시대인 지금 성취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서신의 실제 저자를 확실히 할 수 있는 모든 전거는 부족한 상태이다. 또 유다서에 표현된 수준 높고 다양한 어휘와 독특한 문체는 제법 발달된 신학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유다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막 6:3)라고 본다.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라고 말하였다(1절). 유다는 17절에서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자신을 사도들과 구별시키는 것 같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이었고 사도적 권위를 가진 인물이었으므로(행 15:13;갈 1:19; 2:9) 그의 동생 유다가 본 서신의 저자이었다면 그는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2세기 경에 벌써 허마와 폴리갑은 본 서신을 인용하였다. 초대교회는 본 서신을 영감 된 책으로 받아들였다. 본 서신의 9절과 14절에 인용된 말들이 모세의 승천이나 에녹서 같은 가경서(仮經書)를 인용했으므로 영감 된 책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지만, 공통적 원천인 구전(口傳)에서 인용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4. 수신자
유다서는 수신자를 특정하지 않았다. 유다 자신은 마음속에 특정한 수신자 혹은 교회들을 두고 있었을 수 있다. 수신자를 소개하는 부분(1절)에는 그들이 ‘부르심을 받고 지키심을 받은’ 교회 공동체임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수신자들이 유대인 그룹이거나 유대인의 비중이 높은 기독교 공동체였을 가능성은 있다. 서신서에 구약의 사건과 인물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여러표현에서 유대적 배경을 상기하는 요소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수신자와 공동체는 중간기의 외경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본서에서 분명한 것은 수신자들이 거짓 교사들에 의해 영적으로 시험 가운데 있었다는 것이다. 초대 교회 당시 사도들의 가르침과는 다른 교훈을 가르치면서 성도들을 미혹하던 거짓 교사들이 많았다. 신약성경의 서신서에 그런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유다서는 거짓 교사들과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 분명히 반대하고 있다. 그래서 인사와 송영을 제외한 전 내용이 거짓 선지자와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반대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편지가 유대인 개종자를 상대로 쓴 것인지 아니면 이방인들을 상대로 쓴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 양자를 포함해서 생각하고 쓴 것일 가능성이 높다.
5. 기록 시기와 기록 장소
이 편지가 어디에서 쓰였는지에 대해서도 불명확하다. 집필 장소로는 알렉산드리아, 팔레스타인, 안디옥, 그 밖에도 제3의 장소로 바울의 선교지역 중 하나라는 의견 등이 분분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확실히 규정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기록 시기는 14절 위경인 에녹서(AD 30-50년경에 기록)를 인용하고 있고, 영지주의 사상이 1세기 후반에 일어났다고 볼 때, 유다서의 기록 시기는 AD 70-80년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룬다. 다만 본서 4~18절에 나오는 내용이 벧후 2:1~3:4의 내용과 흡사한 것을 기준으로 추정해 보면 AD 66~68 경으로 볼 수도 있다. 본서에서 유다가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볼 때 AD 70년 이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유다서의 기록 연대의 확정은 매우 어렵다. 만약 유다서가 베드로후서보다 먼저 기록되었다면, 그것은 베드로의 사망한 해로 생각되는 AD 67년 이전에 저술되었음이 분명하고, 만약 유다서가 베드로후서보다 뒤에 기록되었다면 AD 70년과 85년 사이에 저술되었을 것이다.
6. 기록 목적(Purposes of the Writing)
전체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영지주의의 이원론적 사상 체계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 주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고는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론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은 실제가 아닌 외형뿐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만일 그리스도께서 실제 육신을 가지셨다면 이는 악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유다는 주의 동생의 신분으로 주의 식탁을 더럽히고, 굳건하지 못한 성도들을 미혹케 하는 거짓 교사들을 책망하기 위하여 본서를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작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는 초대교회 당시 교회 안에 몰래 들어온 거짓 교사와 이단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경계하는 것이다. 둘째는 성도들이 올바른 믿음 안에서 굳건히 서서 자기 신앙을 지키도록 권면하는 것이다. 그 내용 면에서 베드로후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거짓 교사들에 대한 가르침이 비슷하다. 유다서 1“4-16절과 베드로후서 2”1-18의 유사성은 두드러진다. 베드로후서가 유다서를 활용했거나, 그 역이거나 또는 서로 공통자료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구약의 예화들이 베드로후서의 2장 3절-3장 4절에 인용된 것과 매우 비슷하다. 그러므로 유다서를 베드로후서와 함께 읽을 때 내용이 보충된다.
유다서의 내용은 상당히 엄격하다. 제임스 모팻James Moffatt은 유다서를 ‘교회를 일깨우는 불의 십자가’라고 불렀다. 유다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과 하나님의 은혜를 오히려 방종의 기회로 삼는 사람들에 대해 엄격한 경고를 한다. 특히 이단자들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설명하며 경고한다. 교회 역사에 이런 존재들은 항상 있었다. 이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무법주의자다.(8절)
2) 그리스도를 부정한다(4절)
3) 교회의 권위를 훼손한다(6, 8, 10).
4) 자기 욕심으로 원망과 불만을 쉽게 말하고 스스로 자랑하고 남에게 아첨한다(11~12, 16)
5) 음행과 쾌락을 좋아한다(4, 7~8, 16)
6) 헛된 주장을 하여 공동체를 분열시킨다(12, 16, 19).
7) 짐승처럼 본능과 정욕에 이끌려 살아간다(19절).
7. 주요 신학 (Main theologies)
유다서의 가장 두드러진 신학 사상은 믿음(πίστις)에 관한 전승을 언급한다는 점이다.
거짓 교사들에 맞서기 위해 바울의 신학과 마찬가지로 거짓 교사에 대항한 전승도 언급한다. 유다서에는 모세의 승천기, 이디오피아의 에녹서 외경(外經)이 인용 되어지고 있다.
8. 시대적 배경
유다서의 구성은 "거짓 교사들과 싸워야 할 이유"(1~16절)와 "거짓 교사들과 싸우는 방법"(17~25)에 대한 내용이다. 당시 초대교회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예수의 동생인 유다의 편지이다. 당시의 심각한 문제였던 이단에 대한 경계를 주목적으로 기록하였다. 특히 본서는 많은 거짓 가르침들 중에서도 당시 교회를 극도로 오염시키고 성도들을 미혹하였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고 육체를 악한 것으로 간주함으로 방종을 일삼는 영지주의 이단에 대한 경계 및 경고를 다루고 있다. 1장으로 된 짧은 서신이지만 그 주제가 뚜렷하고 단순히 이단에 대한 방어뿐만 아니라 적극적 대처를 요구하는 투쟁적 변증서이다.
9. 역사적 배경
기록되게 된 당시의 형편에 관하여 아무런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또 그것의 수신인이 될 회중에 대하여 아무런 단서를 포함하지 않고 있으나, 편지의 내용으로부터 어떤 정보를 어느 정도 연역(演繹)할 수가 있다. 분열시키는 요소들이 교회 안으로 잠입하여(4, 8), 사람들을 복음의 순수성에서 이탈되게 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골로새서와 목회 서신들과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암시들은 영지주의적 이단들이 소아시아의 교회들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음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유다서는 이러한 교회들에게 부쳐졌을 가능성이 있다.
유다서의 자료 중의 많은 부분이 또한 베드로후서에서도 나타나 있다는 사실에 의하여 하나의 흥미 있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유 4-18; 벧후 2:1-3:3). 그 사상들이 같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에 그 단어들까지 꼭같이 사용되었는데, 그중 어떤 단어들은 매우 드물게 쓰이는 단어들이다. 유다가 베드로후서로부터 모방하여 사용한 것일까, 아니면 그들 둘이 오늘날 알려지지 않은 공통적인 자료로부터 표절(剽竊)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확정적으로 대답을 할 수가 없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두 편지 중에서 유다서가 더 일찍 기록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베드로후서에 이미 잘 표현되어 있는 내용 이상으로 할 이야기가 거의 없었다면 도대체 그가 왜 편지를 쓰는지 그 까닭을 설명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이 학자들은 베드로가 유다의 간략한 편지서에 표현된 사상들을 이용하고 또 거기에다 자료를 추가시킨 경위를 설명하기는 쉬운 일이라고 주장한다. 문헌 연구에 의하면, 두 개의 유사한 작품이 있을 경우, 그중에 보다 짧은 작품이 더 일찍이 기록된 것이 상례이다. 그렇지만 소수의 학자들은 베드로후서가 유다서 보다 선행하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그들이 제시한 이유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베드로후서 2:1은 거짓 교사들의 출현을 장래 일로 말하고 있는 반면에 유다서는 이러한 교사들이 이미 활약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유 4).
(2) 유다는 회의주의자들이 나타날 것에 대한 경고를 과거에 있은 일로 말하는 반면에(유 17, 18), 베드로는 현재적인 경고를 발하고 있다(벧후 3:3).
양측의 논증들이 모두 그 두 편지서 가운데-유다서냐, 베드로후서냐-어느 것이 더 일찍이 기록된 것인지를 결정하기에 충분한 증거를 갖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유다서의 연대를 매기는 일은 불가능하다. 만약 유다서가 베드로후서보다 먼저 기록되었다면, 그것은 베드로의 사망한 해로 생각되는 A.D. 67년 이전에 저술되었음이 분명하고, 만약 유다서가 베드로후서보다 뒤에 기록되었다면, A.D. 70년과 85년 사이에 저술되었을 것이다.
10. 전체 개요(Outline)
유다서는 그 내용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1~4절 수신자에 대한 인사와 편지를 기록한 목적
둘째 5~23절 거짓 교사들에 대한 진술과 성도들에 대한 경고
셋째 24~25절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주 내용
1) 1~2 인사
2) 3~4 저술 경위, 방탕한 자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거짓 스승들의 훼방을 막기 위함
3) 5~19 거짓 교사들의 잘못과 형벌
5~7 유사한 행악자들의 심판을 기억나게 함, 광야에서 이스라엘, 타락한 천사들, 소돔과 고모라
9~13, 16, 19 거짓 교사들의 행악에 대한 묘사
14~15, 17~18 에녹은 그들에게 다가올 형벌 예언, 사도들은 마지막 날이 오는 것을 예언함
4) 독자들에게 믿음 위에 자기를 세우도록 권면하고 잘못된 이들의 취급에 관한 지시(20~23)
5) 송영(24~25)
<주요 메시지>
우리 시대의 특징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대표되는 다원주의 사회이다. 절대적 기준의 진리나 삶의 증거를 거부하고 나름대로 진리가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진리의 유일성을 교회 내에서도 주장하기를 꺼려 하게 한다. 마치 산꼭대기에 도달하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고 어느 산책로를 이용하든지 정상에 오르면 되듯이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정상은 하나이나 그 오르는 길은 여러 경로가 있다는 사상이 꽤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여러 종교들은 같은 산 정상을 향해 오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길을 통해 다른 산꼭대기로 향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교회 안에서도 이와 비슷한 논쟁이 발생할 수 있다. 교회 안에서의 모든 외침과 가르침이 동등하게 우리의 신앙 여정을 올곧게 이끌어가지는 않는다. 성경이 제시한 산 정상이 아니라 다른 꼭대기를 목표점으로 삼고 끌어가는 지도자들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그런 거짓 교사들이 존재했었다.
유다서에 등장하는 거짓 선지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속박 없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으니 이제 어떤 영역의 삶 속에서도 자유 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 결과 그들의 가르침은 성도들로 하여금 부도덕한 삶을 살면서도 양심과 신앙의 가책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으로 오해시켰다. 죄짓는 면에서도 자유 하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했다. 이러한 반율법주의 영향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신자들로 하여금 어떤 형태이든지 그들이 선택한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자유를 갖게 한다는 오해를 했었다. 결과는 열매 맺는 삶에서 실패하고 도덕적 타락으로 귀결되었다. 이것은 중대한 오해였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용서되었을 때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거룩한 삶으로 반응하게 하시는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신 분이심을 상기해야 한다.
유다서 저자는 본서를 통해 그들 중에 거짓 교사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들의 가르침이 매력적이면서도 위험하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분명히 정죄 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거짓 교훈의 위험한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서 분별력 있는 신앙에 몰두하기를 권면한다. 수신자들은 마치 교회와 교리 안에서 자신들을 편안하게 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자장가에 영향을 받아 잠자고 있었는데 이제 유다는 그러한 교회와 성도들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바른 신학과 신앙 속에서 온전한 열매 맺는 삶으로 매진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 그 당시 수신자 교회는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교회 속에 침투한 거짓 가르침과 그 영향력은 무엇인가?
번영 신학이 팽배하고 있다. 유다서를 받는 교회와 성도들이 반율법주의라는 자장가에 취해 부도덕한 삶을 살면서도 자신들이 잘못 가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평안함을 외쳤듯이, 오늘날의 많은 교회와 성도들은 번영의 신학이 불러주는 자장가에 깊이 잠들어 있어 참된 진로를 벗어나고 있다. 번영의 신학은 어떤 자장가를 불러주는가? 예수 믿어 커지는 것이 목표이다. 그들은 십자가의 길을 통해 이 땅에 그리스도의 삶과 정신을 계승하는 길이라는 주님의 쩌렁쩌렁한 음성에는 귀 막고 번영의 신학이 불러주는 자장가에만 심취되어 깊이 잠들어 있다.
건전한 교리 속에서 이 땅에 예수께서 걸어가신 그 발자취를 한번 따라가 보자는 마음에서 솟구치는 의기투합보다는 예수께서 한 번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신약 성경에서도 언급되지 않은 물질적 축복이라는 사탄이 던져주는 달콤한 말에 함몰되어 비틀거리고 있다.
어느 시대든지 거짓 선지자들, 거짓 교사들은 존재했다. 유다서 당시에 거짓 교사들은 비도덕적인 삶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으로 바꾸는 일에 선구자가 되었듯이 오늘날의 거짓 선지자들은 번영신학이라는 피켓을 들고 사람들을 모으면서 결과적으로 사람들을 주님의 반대편에 세우고 교회를 심히도 쇠약하게 하고 있다. 이제 교회는 우리에게 어느 정도 익숙해진 그 번영신학에 대한 반문화적 태도를 보여야만 할 때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이란 교회와 사회 속에 침투해서 은근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 반성경적 가치관과 관행에 대해 날선 검을 들이대면서 아픔을 감수하더라도 그 환부를 도려내는 사람들이다. 구약과 신약성경을 통해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을 그러한 용감한 행동을 보였다.
유다는 본서를 통해 거짓 교사들을 찾아낼 진단 도구들을 제공했는데 그것은 비도덕적인 삶의 양식,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적 성향,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물질주의적 동기였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실상은 이러한 지적에 부끄럽게도 근접해 있을 뿐 아니라 더 심화된 부분은 없겠는가? 예수님과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걸으시며 세상을 깨우쳤던 그 진정한 사랑과 봉사의 길에서 멀어지고 언제나 성도들에게 가장 큰 대적이었던 맘몬(물질의 신, 돈의 신)이 실질적으로 오늘날의 성도들의 마음속에 숨어서 자리 잡고 있다면 이제 우리는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세상을 돌아보면 우리가 치유해야 할 영역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어찌 우리들은 번영의 신학이 불러주는 자장가에 깊이 취해 영적인 잠에 빠져들어 주께서 가셨던 그 길에 서기를 주저하며 세상적 기준과 동일한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적 태도, 그리고 물질주의에 깊이 빠져있는가? 초대교회 시대에 유다가 반율법주의적이고 방임적인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잠에서 깰 것을 촉구했듯이 오늘날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 시대의 가장 큰 매력임과 동시에 유혹인 맘몬주의에서 벗어남으로 번영의 신학에서 탈피해 십자가에 길을 걷도록 강권한다. 이것이 이 시대에 영적인 각성 없이 잠자고 있는 우리를 깨우치는 성령의 외침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