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하면 누구나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문열공계 경절공(사강)파 16세이며, 초상화가 보물로 지정된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의 할아버지로 충북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 묘소와 신도비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신도비(神道碑)는 국왕이나, 2품 이상 벼슬에 오른 사람 묘소 앞에 그 사람의 평생 업적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이다. 이 비석은 숙종 28년(1702) 세운 것으로, 비문은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이 짓고, 증손 곤륜공(昆侖公) 최창대(崔昌大)가 글씨를 썼다. 1980년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세웠다.
봉분(封墳) 3기가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가운데 약간 뒤로 둘레석을 두르고 있는 것이 지천공 묘소이고, 앞에 있는 두 봉분은 부인들 묘소이다. 전부인 인동장씨는 우찬성 장만(張晩)의 딸이며, 후부인 양천허씨는 종묘서 영 허린(許嶙)의 딸이다. 묘갈문은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의 글씨이다.
문화재가 지천공의 신도비와 묘소이므로, 문화재 이야기는 이정도로 해 두고 지천공에 관하여 알아보기로 하겠다.
장씨 부인에게 아들이 없어서 조카 후량을 후사로 삼았는데 뒤에 허씨 부인이 아들 후상을 낳았다. 당시 사대부들은 후사를 세우고 나서 아들을 낳으면 양자는 제처 두고 자신이 낳은 소생자가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는 것이 풍속으로 굳어져 있었는데,
張夫人無子公取從子後亮爲嗣後許夫人生子後尙時之士大夫旣立後而子生使所生子主祀流而爲俗
공은 생각하기를 “이미 양자하고 사이에 부자 관계가 맺어졌고 천륜에는 순서가 있는 것이니 바꿀 수 없다.” 하면서 조정에 요청하여 양자 후량으로 하여금 자신의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그와 같이 하는 것이 법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公以爲父子已定天倫有序不可易也請於朝以後亮主祀因著爲令
옛날에는 아들이 없으면 조카 항렬에서 데려다가 양자를 삼았는데, 양자를 삼은 뒤에 아들을 낳았다 해서, 소생자로 대를 이어버리면 양자는 파양하는 셈이 되어버리므로, 윤리적 문제는 모르겠으나 인간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최명길을 치면 기사 624개가 떠오르므로, 이야기를 다하자면 몇 시간도 부족하겠지만,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최명길(崔鳴吉, 1586~1647). 자 : 자겸(子謙), 호 : 지천(遲川), 창랑(滄浪). 시호 : 문충(文忠). 문열공계 경절공(사강)파 16세. 아버지 영흥 부사 최기남(崔起南). 할아버지 최수준(崔秀俊). 증조부 최업(崔嶪). 어머니 전주유씨. 참판 유영립(柳永立)의 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문인.
경절공(敬節公) 최사강(崔士康)의 막내아들 최승종(崔承宗)의 6세손으로, 전서공(典書公) 최득평(崔得枰), 문정공(文貞公) 최재(崔宰), 평도공(平度公) 최유경(崔有慶), 경절공까지 이어오던 찬란했던 영광이 주춤해 지는 시점에 다시 명가로 일으켜 세웠다.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은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1384~1455), 석계(石溪) 최명룡(崔命龍, 1567~1621)과 함께 <명신록>에 이름을 올린 전주최씨 3분 중 한 사람이다.
선조 38년(1605) 을사증광시 [생원] 장원 (1/100)
선조 38년(1605) 을사증광시 [진사] 2등 3위(8/100)
선조 38년(1605) 을사증광시 병과 22위(32/33)
20세 젊은 나이에 생원시 장원, 진사시, 문과까지 한꺼번에 급제하였으니 대단한 쾌거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전교하였다. “최명길은 관작을 삭탈하여 문밖으로 내쫓아 보내고 윤우는 파직하여 석방하라.”
傳曰崔鳴吉削奪官爵門外黜送尹佑罷職放送
명나라 차관(差官)이 조선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광해군은 병조 낭청과 선전관 한 사람 씩을 붙여서 감시했다. 마침 설날로 차관의 부하들이 시내에 나가 돌아다녔는데, 포도청 군사들이 호위를 하였다. 서학(西學) 유생 이홍임(李弘任)이 술에 취해가지고 중국 사람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다가 포도청 군사에게 붙잡혔는데 포도청에서 이홍임이 중국인과 밀담을 했다고 보고하여 포상을 받으려고 했다.
이이첨(李爾瞻)이 문제 삼아 파직.
명나라 차관 호위는 병조 책임이므로 병조 좌랑 지천공이 취조를 해보니, 술 취한 유생의 호기심에 불과하므로 석방했는데, 이이첨(李爾瞻)이 문제를 삼아 파직되었다.
그후 1616년 모친상, 1619년 부친상으로 벼슬에 나가지 않다가,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이 되었다.
사신은 논한다. 이서나 신경진 등은 모두 무장으로서 반란군을 토벌하는 임무를 띠고 있으면서도 싸우지 않고 산골짜기에서 배회하기만 하였으며, 나가 막으라는 명령을 받았는데도 나가 싸우지 않고 먼 곳에 주둔하여 구경만 하고 있었다.
史臣曰李曙申景禛等俱以武將或握征討之權而不能交鋒徘徊山谷或受進禦之命而竟不出師退次遠地
최명길은 백면서생인데도 불구하고 홀로 위험을 피하지 않고 강 언덕에서 군사가 무너졌을 때 만사일생의 계책을 내어 임진강을 건너가 원수 장만을 만났는데 언사가 강개하여 그의 장인을 격동시켜 드디어 사현에서 크게 승리할 수 있었다. 원수 장만은 최명길의 장인이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