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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비비정(飛飛亭) | 분류 | 건축물 | ||
관련 | 인물 | 비비정공(飛飛亭公) 휘 영길(永吉) | 1570~1631 | ||
가문 | 문성공계 | 문성공 12세손(중랑장공파, 남원종회) | |||
요약 | 비비정공께서 지으신 정자. | ||||
소재지 | 전북 임실군 성수면 계월리, 완주군 삼례읍. |
비비정에 앉아서 백사장에 내려앉는 기러기를 바라본다는 이른바 비비낙안(飛飛落雁)은 전주팔경 중 하나로 예로부터 유명하였다. 비비정공(飛飛亭公)이 지으셨으며, 손자 호산공(湖山公) 휘 후량(後良)께서 스승 송시열(宋時烈)에게 기문을 부탁하니, 송시열이 비비정공, 아들 중추부사공 휘 완성(完成), 그리고 손자 호산공까지 3대가 모두 무관이므로, 중국 역사에서 유명한 장군 장비(張飛)와 악비(岳飛)의 이름이 모두 비(飛)인 것에 착안하여 장비의 용맹과 악비의 충효를 본받으라는 뜻에서 정자 이름을 비비정이라고 지었으며, 정자를 지으신 분은 정자 이름으로 인하여 후손들로부터 비비정공으로 불리게 되었다.
비비정은 원래 완주군 삼례읍 삼례역 남쪽에 있었는데, 비비정으로 인하여 마을 이름도 비비정리가 되었다. 하지만 비비정공의 9세손 화봉공(華峯公) 휘 창열(滄烈)께서 1901년(고종 38) 임실군 성수면 계월리로 이사를 가시면서 정자를 옮겨가서 지금까지 보존해 오고 있다. 하지만 현재 계월리 비비정도 화재로 불타 새로 복원하여 지은 것이다. 근래에 비비정이 없어진 것을 아쉬워한 삼례 사람들이 비비정을 새로 지었는데 위치는 그대로이지만 고증을 거치지 않아 정자의 양식은 원래 양식과 크게 달라 아쉬움이 있다. 비비정공은 무과에 급제, 임진왜란 때 도원수 권율(權慄)의 연락장교로 활약하셨으며, 창주 첨사를 지내셨고, 여러 가지 공을 세워서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번 수록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