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컨덕터 – Antonia Brico 전기
아직도 멀었지만, 세상이 평등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긴 것은 오래되지 않는다. 정착생활 이후 인간세상은 정글과 같은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쳤다. 야만의 세상에서 사회적 약자는 인간답게 살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한 채 분노의 눈물을 훔치거나 세상사 팔자소관으로 여기며 참고 살았다.
로마제국과 관련된 영화를 보다보면 주인공보다 더 많이 노출되는 사람들이 노예(奴隸)다. 노예제도는 정착생활이 시작되고 약탈경제가 발달하면서부터 나타났다. 인간의 노동력이 생산력 향상의 주요 자원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강자들은 약자의 재물 뿐 아니라 노동력까지 약탈하기 시작했다. 전쟁도 노예의 주요한 공급처였다. 노예가 고가에 매매되면서 해적들도 노예약탈에 혈안이 됐다. 그러다보니 고대사회에서는 누구나 노예가 될 가능성이 상존했다. 영화 벤허에서처럼 귀족도 몰락하면 한순간에 갤리선의 노잡이 노예로 전락하기도 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에는 로마군을 공격한 갈리아인들을 카이사르가 노예로 팔아넘기는 장면이 나온다. 이 때 팔려간 노예가 53,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빈번한 전쟁과 고도의 남성노동력이 필요해지면서 여성들도 사회적 차별을 받기 시작했다. 여성의 역할은 가사노동이나 육아, 경제활동의 조력자로 제한되었고 그와 같은 역할조차도 사회적인 차별을 받았다. 유교사상이나 기독교 사상에서는 여성의 처지가 정당화, 합리화되기도 했다.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 열강들이 바다를 주름잡으면서 인종과 피부색에 따른 차별이 나타났다.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인들은 신대륙 아메리카에 건너가 총칼과 비열한 술책으로 잉카문명, 아즈텍 문명을 초토화하고 금은보화를 약탈했다. 금광과 은광을 발견한 뒤로는 수천만 인디언들의 생명과 노동력을 착취하여 금을 캐냈다. 17,18세기에는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열강들이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침략하고 자원을 수탈하는 한편 많은 흑인들을 노예로 팔았다.
현대사회에서도 불평등은 상존한다. 민족적, 인종적 불평등도 남아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다. 최근에는 코로나로 인해 빈곤국가에서는 하루 6~7천 명씩 죽어나가는 데도 강대국들은 백신을 독점하고 자국의 이익만을 취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시민혁명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가 도래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회적 불평등은 시민혁명 뒤에도 오랫동안 지속됐다. 평등사회는 법과 제도개혁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평등을 이루는 데 가장 큰 적은 전례에 따라 ‘당연시’하는 관념이다. 특권층은 ‘본래 그랬어’라는 말로 불평등을 당연시하거나 합리화하며 약자의 권리를 무시하고 억압했다. 미국에서도 남북전쟁 뒤 노예제도는 폐지되었지만 흑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그 후 100년 이상 지속되었다. 현재 미국의 흑인들이 누리는 평등한 권리는 1960년대 마틴 루터 킹 목사나 말콤 X와 같은 흑인민권운동가들의 노력과 희생 덕분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기억한다. 200년 전까지만 해도 보통선거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영국의 노동자, 프랑스의 농민, 독일의 여성들은 평등한 선거권을 쟁취하기 위해 피눈물 나는 투쟁을 전개했다.
아직도 우리 세상에는 불평등이 존재한다. 민족과 피부색에 따른 차별도 존재한다. ‘본래부터 남성의 영역’이라며 여성을 배제하는 일들도 무척 많다. 가정 안에서조차 가사노동이나 육아는 여성을 몫이라는 봉건적 관념에 젖은 남자들이 존재한다.
영화 ‘더 컨덕터(The Conductor, 2018)’는 쉽게 접하기 힘든 네덜란드 영화다. 감독은 마리아 피터스라는 여성이다. 그렇다고 ‘퀴어영화’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다만 ‘여성문제’를 여성감독의 시선으로 다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영화의 주인공은 실존인물 ‘안토니아 브리코 (Antonia Brico, 1902~1989)’다. 조금 낮선 이름이지만 ‘클래식 음악 최초의 여성 마에스트라’라고 말하면 이해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최초’는 영예로운 호칭이지만 그만큼 고통과 시련을 동반한다. 사회적 고정관념을 깨고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야만 한다. 통념을 깬다는 것은 비난을 받을 각오가 되어야 한다.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각오도 필요하다.
안토니아 브리코가 꿈을 꾸었던 시대는 192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다. 본래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태어났지만 기구한 내력으로 어려서 미국으로 이주했다. 버클리대학에서 공부했고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유럽으로 건너가 독일 베를린 국립아카데미에서 칼 무크에게 지휘를, 지기스문트 스토요프스키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 어려서 안토니아의 이름은 윌리스 월터스였다. 미혼모였던 어머니는 양부모에게 잠시 아이를 의탁했지만 아이가 욕심났던 양부모는 친엄마 몰래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도망쳐버렸다. ‘안토니아 브리코’라는 본래의 이름도 ‘윌리스 월터스’로 바뀌었다. 양부모는 친엄마를 폄하하고 욕했다. 성장기 내내 안토니아는 ‘엄마로부터 버림받는 아이’라는 자괴감을 가슴에 품고 자랐다.
양부는 청소부였다. 가난한 이민자 가정에서 양모의 배려로 겨우 피아노를 배웠지만 악기를 구할 수 없어 종이에 건반을 그려 연습했다. 지휘자가 되겠다는 당찬 꿈은 양부모와 주위 사람들로부터 비하되고 폄훼되었다. 공연장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피아노 레슨을 받고 음악학교 입학의 꿈을 이뤘지만 이것을 알게 된 양모는 입학금을 압수하고 합격통지서를 찢어버렸다. 독지가의 도움으로 입학한 음악학교에서는 지도교수의 성폭력에 저항하다가 오히려 학교에서 쫓겨났다.
음악학교에서의 처지도 가정이나 사회와 다르지 않았다. 관례대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남자만이 할 수 있는, 여성은 꿈을 꿔서는 안 되는 영역이었다. 흡사 흑인이었던 재키 로빈슨이 최초의 미국야구 메이저리거가 되자 ‘야구는 본래 백인들의 스포츠’라며 게임을 보이콧했던 프로야구선수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휘자를 꿈꾸는 그가 항상 들었던 말은 ‘여자가?’라는 단어였다. 심지어 열렬히 사랑했던 남자친구조차 음악가로 성공하기보다 결혼 후 가정주부로 살아주기를 희망했다. 그것이 여자의 역할이며 삶이라고 강변했다. 하지만 안토니아는 음악과 사랑을 모두 갖고 싶었다. 두 가지 조건이 병립할 수 없자 과감히 음악을 선택했다. 그에게 음악은 여성해방이었고 자유였기 때문이다.
음악학교에서 쫓겨난 안토니아가 선택한 곳은 음악의 본고장 유럽이었다. 안토니아는 고향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엄마를 찾았다. 딸의 생사를 찾아 헤매다 2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엄마의 무덤에서 양부모의 거짓과 범죄를 알았고 버림받지 않은 소중한 자신의 인생을 찾았다. 양부모에게 받은 윌리 월터스를 버리고 친어머니가 지어주신 안토니아 브리코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은 변화와 깨달음의 증표였다.
안토니아는 강철 같은 의지와 평생의 후원자 로빈 존스의 도움으로 베를린 국립아카데미에 입학하여 꿈에 그리던 지휘와 피아노를 배웠다. 데뷔 초기에는 피아노연주자였지만 1930년 베를린 필하모니를 객원지휘하며 본격적인 지휘자로 자리 잡았다. 같은 해에는 미국의 할리우드 홀의 초청을 받아 LA필하모니를 지휘하면서 미국무대에도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하지만 여성지휘자의 자리는 여전히 좁았다. 여성음악가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안토니아는 1934년 뉴욕여성오케스트라를 창설했다. 여성들만의 오케스트라였고 그가 상임지휘자였다. 하지만 여성오케스트라는 오래가지 못했다. 2차 대전 뒤에는 아프리카를 방문하여 바흐연주의 세계적 권위자 슈바이처 박사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배움과 탐구의 연속이었다.
안토니아는 미국 콜로라도의 덴버시에 정착했다. 지휘자로 커리어를 쌓기보다 제자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등 교육활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간간이 뉴욕필, 베를린 필, 덴버필을 객원지휘하고 덴버기업가오케스트라 등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는 활동했지만 단 한 번도 세계 유수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지는 못했다.
아직도 여성들에게는 클래식음악계 지휘자의 벽은 매우 높다. 현존하는 세계적 오케스트라 중에 여성지휘자가 한 명도 없는 것이 현실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근래에는 클래식 음악계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대중들도 굳이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남자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있다.
여자경이라는 여성지휘자가 있다. 그에게는 ‘한국이 낳은 걸출한 여성지휘자’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근래에는 경기필하모니 상임지휘자로 성시연이라는 여성지휘자가 선임되었다. 2021년 5월 28일 예술의전당에서 개최되는 제766회 KBS교향악단 정기연주회에 캐나다 출신의 여성지휘자 타니아 밀러가 지휘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KBS교향악단 역사상 정기연주회에 여성지휘자를 초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국립교향악단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두 번째라고 한다.
커리어를 봐도 이들이 KBS교향악단이나 국내 유수의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선임되지 않을 이유는 전혀 없다. 예컨대 여자경만 봐도 그렇다. 여자경은 한양대를 거쳐 오스트리아 빈 국립대학에 유학하여 작곡, 피아노, 지휘, 오페라 코치, 음악학을 최고점수로 수료했다. 2005년부터 유럽의 주요 콩쿠르에 지휘부분 입상하고, 빈 라디오 심포니오케스트라를 비롯하여 파리 리옹 국립오케스트라, 체코 프라하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 유수의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했다. 우리나라에 정명훈을 제외하고는 이정도의 커리어를 갖고 있는 지휘자가 있을까 싶다.
나는 페미니즘을 잘 모른다. 그럼에도 몇몇 제자들이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며 남성혐오 발언을 하는 것에는 분명히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과거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것은 과거의 굽어지고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자는 의도지 결코 ‘그동안 남성들이 누려왔던 불평등한 기득권을 여성만 누리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근래 여자경이나 성시연 같은 여성들이 그동안 남성의 전유물로만 알고 있던 클래식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참으로 환영할만한 일이다. 국내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KBS교향악단이 정기연주회에 여성지휘자를 초청한 것도 반갑다.
세상에는 남성의 일, 여성의 일이 따로 있지 않다. 인간은 인종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신(神)이 내려준 재능으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강자와 약자, 성별의 차이, 피부색의 차이에 상관없이 서로 돕고 나누며 상생하는 것이 진정한 신의 뜻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세상을 꿈꿔야 한다. 그와 같은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2021.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