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에서 처음 시작한 유엔 성냥 공장
1957년 부산시 연제구 거제동728번지에서 신상철씨가 유연화학공업사라는 이름으로 성냥 제조공장을 설립하면서 시작
되었다. 당시 거제동에서 얼마 멀지않은 남구 대연동에 유앤군 묘지가 있었기 때문에 상표를 유엔성냥으로 정하였다.
흔히들 알고 있는 팔각성냥과 휴대용 소형성냥 외에 일반적인 사각갑 성냥도 생산하였으며,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참전국 16개국 국기를 성냥갑에 그려넣은 독특한 디자인 때문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브랜드이기도 하다.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의 "나체의 마야(옷을 벗은 마야 The Nude Maja)" 1800년경
무엇보다 이 성냥이 유명해진 것은 1969년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 "나체의 마야(옷을 벗은 마야)"를 성냥갑에 인쇄
해 팔았던 "음란화 성냥갑 사건" 때문이다. 유엔성냥 신상철 대표가 구속되어 법정에까지 서게 된 이 사건은 대법원이
"비록 명화집에 실린 그림이라도 공익을 위해 사용한 게 아니고 성냥갑에 인쇄해 판매한 만큼 명화를 모독해 음화화한
것"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최종적으로 벌금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였다.
1970년 10월 31일(음력 10월2일)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이 음란물로 나왔던 것이다.
덕분에 "신상철"씨는 성냥업계에 전국적으로 소문이 났고 1974년에는 성냥조합 이사장에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1970년대 들어와 유연화학은 법인으로 전환하고 사세를 더욱 확대했으나 성냥 산업이 점차 쇠퇴하고 소비자들의 수요가
라이터로 옮겨가는 시장변화에 좀더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고, 결국 적자를 감당하지 못해 1978년 경기도 용인소재
방계업체였던 진흥생필에 회사를 매각하였고, 이후 진흥생필을 인수한 경기도 용인시 소재의 대성삼린이 1981년 유연화학
을 흡수 합병, 부산 소재 공장을 용인군 용인읍 마평리 진흥생필 공장과 통합하여 유엔성냥을 계속 생산하였다.
이후 대성삼린은 회사명도 주식회사 유엔으로 변경하고 국내 최대의 성냥 제조회사로 발전하였지만, 1990년대 이후
1회용 라이터가 일반화하고 성냥수요가 점차 줄어드는 사회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고, 결국 1990년대 후반 용인 공장부지를
아파트로 재개발하고 생산시설은 파키스탄에 매각하며 한동안 수입포장만 하다가 2000년대 초중반 문을 닫았다.
현재는 충청남도 아산시에 소재한 유엔상사가 유엔성냥의 명맥을 잇는 마지막 회사이며, 디자인 스튜디오 오이뮤(OIMU)와
공동으로 다양한 디자인의 성냥을 제작, 공급하고 있다.
옛날의 유엔팔각성냥과 오이뮤에서 새로 듸자인한 팔각 성냥
유엔상사 대표 황기석씨는 (주)유엔 출신이다. 1997년(주)유엔의 용인공장이 문을 닫는 바람에 직원 몇명과 손잡고
만든 회사가 유엔상사이다.
2015년 디자인 스튜디오 오이뮤에서 협업을 제안하여 공동으로 다양한 디자인의 성냥을 제작 공급하고 있다.
요즘도 인터넷 쇼핑몰에는 유엔 팔각성냥이 나온다고 하는데 거의 다가 중국산 짝퉁 제품이라고 한다.
글, 사진 : 인터넷 여기저기서 수집 활용
유엔성냥 공장과의 인연
1966년11월 학장동 홍깨마을 우리집 주위를 포푸라 나무가 둘러싸고 있다.
1971년 9월초, 우리 집 주위에 포푸라 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당시 같이 쌍미에 같이 실습나간 친구가 자기 집 카메라를 가져와 찍어 준 사진이다)
1968년 중3때인 어느날 학교 갔다 오니 우리집 주위에 울타리 처럼 서 있던 포푸라나무가 모두 베어져 없어졌다.
어머니에게 어찌된 일이냐고 물어보니 아버지께서 유엔성냥 공장에 우리집 포푸라 나무를 팔았다고 하셨다.
고3때인 1971년 7월말에 나를 포함 동기 4명이 거제리 쌍미섬유에 실습을 나가게 되었다.
마침 거제리에 하숙하고 있는 고교동기가 두명 있었는데.. 거제리로 출퇴근하다 보니 같이 실습나간 친한 친구하고
둘이서 친구 하숙집에 놀러가게 되었는데 가서보니 그 하숙집이 거제리 유엔성냥 담벼락에 붙어 있는 집이었다.
속으로 "아 예전에 유엔성냥 공장에 우리집 포푸라 나무를 팔았는데 그 공장이 여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숙하던 친구 두명중 한명은 집이 제주도 성산포이고 한명은 함안군 법수면 이었는데 둘 다 같은 학과 인데다
키 작은 것도 닮다보니 동병상린이라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인데 그 친구들 하숙집에는 그때 처음 가봤었다.
하숙집 주인 내외 분들이 마음이 고운 분들이라 우리가 놀러가서 시끄럽게 하고 귀찮게 해도 싫은 내색을 안하셨다.
하숙집 큰 아들이 우리하고 같은 나이라 친구가 되었는데 거제초교 출신 거제리 토박이 아이들이 그 집에 자주 놀러
오다보니 학교는 다르지만 동갑이라 그 들하고도 또 같이 친구가 되었다.
월급타면 그 당시 거제리하고 하마정 사이 거제로변에 많이 있던 니나노집에 친구들과 같이 가끔 들러서 동동주에
파전에 두부 안주로 목 좀 축이고 나서 니나노집 아가씨들과 젓가락 장단에 맞춰 노래하고 놀던 기억이 난다.
더물게 마른안주나 과일안주로 맥주를 마시며 놀기도 했었다. 비싸니까.. 요때는 좀 더 질퍽하게 놀았던 것 같다.
니나노집은 고향동네 가까운 뽀뿌라마치에서 동네 청년들이나 어른들이 노는 모습을 초등때 부터 가끔 구경했기
때문에 호기심도 있고 해서 별 거부감 없이 드나들 수 있었다. 이때 소맥을 알았더라면 술값을 줄일수 있었는데..
어릴때부터 노래를 좋아한 나는 초등 저학년 시절부터 "남인수의 무너진 사랑탑" , "한명숙의 노란쌰스의 사나이"
등을 흥얼그리고 다녔고 중학교 시절 구덕입구 친척 집에서 전축 털어놓고 따라 불렀던 김정구,백년설, 현인, 최숙자
의 흘러간 옛노래들, 2본 동시상영관 다니면서 들은 최희준, 이미자, 남진, 문주란의 영화 주제가들 그런 노래들을
아가씨들과 어울려 젓가락장단 두드리면서 같이 부르는 게 참 재미가 있었다. 가끔 몸장난도 치니 더욱 재미있었고..
초등학교 6학년때인가 아버지하고 29살 노총각 우리 담임 선생님하고 같이 뽀뿌라마치 니나노집에 간 것을
동네 형님들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뒤에 느낀건데 아버지께서 담임선생님 접대하러 간거라 생각이 들더 구먼요
큰 아들 잘 가르쳐 달라고.. 졸업하고 40여년이 지난 어느 스승의 날에 담임 선생님하고 저녁겸 술 한잔하면서
선생님에게 여쭈어 봤었지요.. "선생님 예전에 우리 아버님 하고 뽀뿌라(포푸라)마치 니나노집에 가셨지요" 하고
물어봤더니 허허 웃으시면서 "그래 갔었다. 우째 알고 있었노" 하며 시인하시더군요..
쌍미섬유에 같이 일하는 여공 아가씨 들이 많이 있었는데 은근히 말도 걸면서 가까이 하고저 하는 아가씨들이
있었지요.. 그래서 가끔 같이 탁구도 치고 영화관에 가기도 했었지요... 시골에서 올라와 주야간 2교대로 하루에
12시간 근무하면서 고생하는 것을 보니 안스러운 마음에 금강원 온천장 구경 시켜주고 하면서 같이 놀러다니다
보니 정이 들고 열혈 청춘 시절 이다 보니 섬씽도 한 두번은 있었지요..
그 때 거제리에서 같이 놀던 친구들 중에 "K"란 친구가 있었는데 당시 부산상고에 다녔었고 후에 고려대를 졸업
했고 아버지가 거제리에서 손꼽히는 부자에다 유지였었는데 이 친구는 연제구 시절에 국회의원도 했었죠..
그 당시 같이 어울렸던 고교 동기들과 거제리에서 사귄 친구들은 지금 까지도 계속 만나고 있지요. "K"란 친구는 제외하고..
성냥에 관한 에피소드도 있다. 10대 후반 이십대 시절에는 저녁에 같이 놀다가 먼저 잠자는 친구 발등에 성냥으로
불침을 만들어 놓아 놀래켜서 깨우기도 하였고 삼사십대 시절에는 친구들이나 직장동료들 집 들이 할때 선물로
팔각성냥이나 곽성냥도 사가지고 갔고 그 중에 한통을 단번에 태우기도 하였다. 살림이 불같이 일어 나라고 ...
'70년대 중반 군대생활 할때 많이 불렀던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 노래와 성냥 스토리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1917년 인천에 조선인촌(성냥)주식회사가 들어섰고 인천 성냥이 가장 유명했다고 한다..
[민속이야기] 생필품 ‘성냥’ 역사 속으로… 국내 공장 모두 문 닫아
이창준 민속 칼럼니스트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정의 생활필수품이었던 성냥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겨우 명맥을 유지해오던
의성군 성광성냥에 이어 김해 진영의 경남산업공사마저 2017년7월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곳은 팔각성냥을 만들던 충남 아산의 UN상사뿐이다. UN상사도 케이크용 성냥 외에 팔각통의
성냥을 더 이상 만들지 않은 지 몇 해 됐다.
성냥을 처음 만든 사람은 영국 화학자 존 워커다. 1826년 화학실험 중 우연히 ‘마찰성냥(friction match)’을
고안했다. 현재와 같은 ‘안전성냥’은 1847년 스웨덴 사업가에 의해 만들어졌다. ‘성냥’은 석류황(石硫黃)에서
유래된 말이다.
우리 조상은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마찰성냥’을 사용해 왔음이 2011년 밝혀졌다. 독일 그라시 민속박물관
에서 발견된 조선시대 홍만선(1643~1715)의 ‘산림경제’와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에 기록으로 남아
있던 ‘인광노(引光奴)’가 그것이다.
성호사설에는 “화(樺)나무 껍질로 많이 만드는데 처음에는 새벽에 일어나 글 읽는 자가 만들었다. 부싯돌에
인화 물질을 대고서 부쇠로 친 다음 유황에다가 불꽃을 일으키면 등불 켜기가 쉽다”고 기록돼 있다.
우리나라에 성냥을 처음 들여온 사람은 봉원사 승려였던 이동인이다. 그는 1880년 9월 수신사 김홍집과 함께
일본에서 귀국할 때 성냥을 가져왔다. 이 때 석유와 램프도 들여왔다.
이후 우리나라에 성냥공장이 처음 생긴 것은 1880년대 중반이다. 성냥의 대중화는 1910년대 부산과 인천
등지에 공장을 지으면서 부터다. 호황을 누리던 1970년대는 공장수가 300여개에 달했다.
쌍노루표(대한성냥), 기린표(경남산업공사), 비호표(대림성냥), 복표(인천성냥), 돈표(영화인촌산업), 비마표
(조양성냥), 아리랑(조일성냥), 두꺼비표(금남산업), UN(유엔화학), 비사표(남성성냥), 향로(성광성냥)… 등
추억의 상표들이다.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 노래도 이때 유행했다. 다방 테이블에는 반드시 성냥이 놓여 있었고
애연가들과 연인들은 성냥개비 탑 쌓기 놀이를 하면서 사랑을 키우기도 했다. 당시 가정의 중요한 생필품
이기 때문에 선물용으로도 인기가 좋았다.
그러다가 1980년대부터 1회용 라이터가 등장하고, 가스는 자동 점화되고, 난방은 전기로 하는 세상이 되니
성냥공장은 하나둘씩 문을 닫게 된다.
1948년 설립 후 70년 동안 기린표 성냥을 만들던 김해시 경남산업공사가 결국 올 2017년7월 말 문을 닫았다.
김해시는 이 회사의 역사성을 인정해 공장에 있는 성냥 제조 기계와 현판 등을 역사박물관에 보존할 계획이다.
1954년 설립된 경북 의성군 성광성냥도 경영난을 이기지 못해 2013년 말 가동을 중단했다. 이에 경상북도와
의성군에서는 근대 문화유산인 성광성냥 공장을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세계의 성냥시장은 저가의 중국산이 차지했다. 미국과 유럽, 일본에서도 성냥 산업을 살리려고 노력중이다.
특히 유럽의 경우 향초 전용 성냥, 주요 관광지와 미술품, 사진 등을 연계한 관광상품 개발로 그 맥을 잇고 있다.
이제 성냥 만들던 공장의 기계소리는 멈췄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할아버지 곰방대에 불을 붙이던 성냥은
추억이 됐다. 우리가 살아온 흔적이 또 하나 없어지고 있는 중이다.
천지일보 (newscj@newscj.com) 승인 2017.08.31 17:08
경북 의성 성광성냥공업사(향로표 성냥) 모습 2013년말 문을 닫았다.
경남 김해시 진영읍 경남산업공사 성냥공장 외부(왼쪽)와 내부 모습. 1948년 설립돼 70년의 역사를
지닌 경남산업공사(기린표 성냥)는 지속적인 주문량 감소와 수익성 악화로 2017.7.31 문을 닫았다.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