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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날마다 배수진>의 줄거리:
날마다 죽는다는 고백이 실제 생활 속으로 들어오면 날마다 배수진의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이 세상 삶의 문제를 염려하는 상태, 이 것이 바로 물에 빠져 죽는 일임을 아는 자에게만 위의 고백은 의미가 있습니다. 염려하지 말라 하심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배수진의 삶이 처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일깨우시는 것입니다.
날마다 배수진(背水陳)
(눅12:22-34)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3.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26.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31.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날마다 배수진>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배수진이라는 말은 여러분들 다 아실 것입니다마는 ‘물을 등지고 진을 친다’는 뜻입니다.
물을 등지고 진을 치는 것은 병법상 아주 어리석은 짓이고 그것은 자살골과도 같은 그런 의미가 있는 잘못된 병법입니다.
그래서 배수진(背水陣)이라는 말이 유래된 그 일화를 들여다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나라의 유방을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 많은 유명한 장수 중, 한신이라는 장수가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의 전쟁을 다 치르고 지친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조나라 군대와 다시 한 번 목숨을 건 사투를 해야 될 형편에 이르렀습니다.
숫자도 열세고 군인들도 많이 지쳐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조나라는 굳건한 성 안에 들어있으면서 이제 한신의 군사들과 싸우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신이 꾀를 냅니다.
몇 천 명을 매복을 시켜놓고, 조나라 군사가 성 위에서 내다보고 있는 가운데 만 명을 빼내서 앞에 보이는 강가로 나가게 하고 그 강을 등 뒤로 하고 진을 치게 합니다.
이때 조나라 군대가 다들 웃습니다, 자기들의 성을 마주대하고 강을 등지고 진을 치면서, 성에서 나오는 군대와 맞서서 싸우려고 하는 한신 장군의 병법을 비웃습니다.
그리고 한신 장군은 군대의 일부를 성으로 보내서 그들을 격발시켜서 성 밖으로 유인해내서 이제 배수진을 치고 있는 아군에게로 유인해옵니다.
그때 매복한 군사가 텅 빈 성 안으로 들어가서 성을 점령하게 되지요.
만 명의 군사로 배수진을 치고 그들을 맞이한 까닭은 지쳐있는 군사들에게, 물에 빠져도 죽고 창칼에 맞아도 죽습니다, 그러므로 물에 빠져 죽느니 차라리 죽기 살기로 결사항전을 하다가 죽자는 결심을 하게 하기 위해서 배수진을 친 것입니다.
날마다 신앙인으로 이 땅에서 산다는 것, 날마다 배수진을 치는 것입니다.
등 뒤에 빠지면 죽을 수밖에 없는 강물을 두고 진을 치고 앞으로 앞으로 전진해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자, 이게 무슨 말일까요?
날마다 죽는다고 사도바울이 고백을 했고,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서 생활을 합니다.
날마다 죽는 삶은 그러므로 출발점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날마다 죽는다는 이야기는 이게 바로 배수진을 치면서 산다는 이야기에요.
세상에 대해서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기준점으로 보았을 때 십자가 저쪽으로 주님께서 인류역사상 그 누구도 걸어가 보지 못한 길을 뚫어놓으시면서 승천까지 길을 내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제 십자가에서 출발하면서 주님이 승천까지 뚫어놓으신 그 길을 향해 걸어갑니다.
이때 십자가 이쪽 편에는 내 육체가 살아있음으로 이루어져가는 삶이 있는데, 이 삶이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 키를 염려함으로 한 자나 더 크게 할 수 있느냐, 그러므로 할 수 없는 일을 왜 염려하느냐?’
이 말씀은 십자가 이편의 삶의 강물에 우리의 마음이 빠져버리게 되면 죽는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할 텐데, 돈이 안 벌리면 어떻게 하지?’ 이 염려, ‘우리 자식 어떻게 되어야 될 텐데…’ 이 염려, ‘우리나라가 어떻게 돼야 될 텐데…’ 이 염려, 이 모든 십자가 이쪽, 십자가 저쪽은 죽음 너머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죽음 너머의 세계로 주님께서 내신 길을 따라 승천하신 곳까지 갑니다, 이게 바로 신앙인입니다.
그러지 못하고 우리 마음이 십자가 이쪽으로 다시 와서 우리 육체가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삶의 현실이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는데, 그 삶의 현실에 대한 염려에 마음이 휩싸여버리고 나면 이게 바로 강물에 빠져 죽는 것과 같다는 얘깁니다.
오늘 33절을 보면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않는 배낭을 만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 구제에 포인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 않았습니까?
‘너희 소유를 팔아…’, 먹을 것 입을 것을 염려하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소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소유가 있을 때는 어떻게 됩니까?
염려의 반대, 안심을 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안심을 하게 되는데, 이 안심도 염려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강물에 빠져죽는 것이 되기 때문에, 내가 갖고 있는 소유가 없고 내가 갖고 있는 돈이 없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내가 돈이 있고 소유가 있다고 해서 안심을 하는 것,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것을 갖고 있다고 해서 마음이 그것 때문에 안심하는 것도 이 세상 강물에 빠져죽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 키 한 자를 늘이기 위한 염려, 이것은 십자가 이쪽에 육체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삶에서 생겨날 수 있는 모든 염려를 총망라한 것입니다.
육체로 이루어져 있는 이 삶을 잘 살기 위해서 하는 모든 염려가 실제로는 우리를 강물에 빠져죽게 하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를 악물고 이 삶의 강물에 우리 마음이 휩쓸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나가야 된다는 얘깁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단순한 권면의 말씀이 아니에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또 이 세상일들에 대해서 ‘성공해야 되는데, 잘 이루어져야 되는데…’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단순한 권면의 말씀이 아니라,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말씀입니다.
절체절명의 위기가 뭡니까?
‘지금 너는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배수진의 입장에 놓여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므로 다시 이 세상 문제를 마음이 쥐게 될 때, 네 마음 네 인격 네 영혼은 곧 죽는 것이고 사망하는 것이다’라는 얘깁니다.
여러분, 이 세상일에 대한 희망, 걱정, 염려, 계획, 이 모든 것들 다 죽은 거예요.
이어령 씨가 쓴 책에 보면, “사람 살려!”라는 말과 영어의 “Help me!”라는 말을 비교해놓은 것이 있습니다.
왜 우리는 ‘사람 살려!’라고 말할까?
외국에서는 ‘Help me! Help me!’ 그러는데, 즉 ‘나를 살려주세요!’ 그런 뜻 아닙니까?
이어령 씨 얘기는, 사람이라면 사람이 물에 빠져죽는다는 이 상황에서 절대로 그냥 지나가서는 안 된다는,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박애적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이라는 얘깁니다.
즉, 좀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박애적인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외국에서는 ‘나를 도우세요, 나를 도와주세요!’ 훨씬 더 개인주의적이라 그 얘기죠.하지만 저는 신앙적으로 볼 때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빠져있는 자를 구해내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세상의 염려 때문에 마음이 가득 찬 자, 세상 강물에 빠진 자, 또 세상일이 잘된다고 안심하는 자, 그것도 마찬가지로 세상에 빠진 자이거든요.
그건 사람이 아닙니다.
‘Help me!’가 맞아요.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사람 살려! 사람 살려!’ 하는 것에 대한 구원이 아닙니다.
사람이 빠진 게 아닙니다, 이미 세상의 염려에 마음이 빠졌다면 그건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생명, 가수를 가수 되게 하는 생명이 목소리 아닙니까?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생명이 없어진 사람이 아닌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Help me!’가 맞고, 구원 받은 다음에 사람이 되는 겁니다, 실제로는.
따라서 ‘사람 살려! 사람 살려!’가 아니라 ‘나를 살려주세요, 나를 살려주세요, 그래서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이 말이 바로 구원에 맞는 말이라는 얘깁니다.
이 세상의 염려에 빠진 자들은 사람이 아닌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건 죽는 겁니다, 사람으로서는 죽는 겁니다, 죽음이에요, 죽음.
그러면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해볼 수는 없을까요?
만날 먹을 것과 입을 것, 이것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고만 할 게 아니라, 좀 적극적으로 말할 수는 없을까?
좋습니다, 우리도 의식주를 적극적으로 염려합시다.
긍정적으로 얘기해서 그 의식주 문제를 위해서 열심히 뜁시다.
그런데 우리 몸의 의식주가 아니라, 몸이 먹고 몸이 입고 몸이 거하는 의식주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먹고 우리 마음이 입고 우리 마음이 거하는 의식주를 아주 적극적으로 염려하면서 추구하자는 얘깁니다.
자, 몸이 입는 옷 대신에 우리 마음이 입는 옷, 그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30절에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우리가 마음으로 입어야 될 옷을 늘 잊지 말고 염려해야 될 것은, 우리가 세상 백성들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딸이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얘깁니다.
신분, 우리 마음이 기억해야 될 옷은 우리 신분이 하늘자녀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얘깁니다.
대선후보가 된 박근혜 씨가 꼬리표를 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고 하는 것, 그래서 유신에 대해서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 5.16 혁명에 대해서 박근혜 씨 개인의 역사적 인식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박정희 대통령이지만 박근혜 씨한테는 아버지에요, 아버지.
그 아버지의 딸이라고 하는 의식을 벗어버릴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박정희 씨를 독재자라고 한 마디로 딱 규정해버릴 수 있듯이 그렇게 하지를 못하는 거예요.
우리는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아버지의 아들딸이라는 의식을 참 잘도 잊어버립니다.
천지의 주인이신 그 하나님아버지가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이 현실적으로 느껴져야 된다는 겁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일을 위하여 내가 그동안 어떤 옷을 입어야 멋질까 하고 염려했던 것, 철 따라서 옷을 갈아입고 하는 것 때문에 염려했던 것처럼, 염려하라는 얘깁니다.
그 아버지를 현실로 느끼는 일에 그만큼 매진하라는 얘기에요.
그게 바로 십자가 저편에 승천하신 주님이 만들어놓으신 그 길을 따라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식(食)은 적극적으로 어떻게 먹을 것을 염려해야 될까요?
몸이 먹을 것을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않는 대신에 먹을 것에 대한 염려는 하자 이겁니다.
무얼 먹습니까?
우리 몸이 목숨을 살아있는 상태로 유지하려면 음식을 먹어야 되는데, 그 음식이라는 게 참 기기묘묘한 것은 다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음식을 먹어서 우리 몸이 살아있도록 유지한다는 것은 죽음을 먹는다는 얘기에요.
김치? 배추가 죽은 거예요, 불고기는 소가 죽은 겁니다, 삼겹살? 돼지가 죽은 거예요.
활어 회라고 해도 살아있는 생선을 죽여서 먹습니다.
산 낙지를 먹어도 결국은 죽은 상태로 먹는 거예요, 그래야 몸이 살아요.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이 진정으로 살아서 하나님께서 ‘너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려면 죽음을 먹어야 됩니다.
한시도 이 죽음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하루도 죽음을 먹지 않으면 몸이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 마음도 죽음의 음식을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상태에요.
주님의 그 죽음을 우리 마음이 먹는 거예요, 어떻게 먹습니까?
내가 죽었다는 것을, 내가 죽은 자라는 것을 기억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걸 기억하는 거예요.
절대로 이 세상에 빠지지 말아야 된다는 그 죽음을 먹는 겁니다, 그래야 내 마음이 삽니다.
우리 먹을 것 염려 하자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면서 우리 몸이 먹을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걱정을 했습니까?
그런데 그 많은 마음의 걱정의 양을 이제는 내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주님을 먹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 쏟자는 겁니다.
그러면 산다는 거예요.
그것을 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마음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냥 주님의 그 죽으신 몸과 흘리신 피를 먹는 거예요, 내가 같이 죽었다고 고백하며 먹는 일을 날마다 밥 먹을 때마다 그걸 기억합니다.
성찬식 할 때 그러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흘리신 피와 찢기신 살을 우리가 기억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것처럼, 세끼 밥 먹을 때마다 주님의 죽으신 몸을 기억하며 ‘나는 세상에 대해 죽은 자다’라는 것을 먹고 마실 때마다 기억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거 하나만 하면 마음이 산다는 거예요.
마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생명이 생기는 생명현상이 뭐라고 했습니까? 만족과 기쁨입니다.
돈을 벌어서 되는 게 아니에요, 높아져서 되는 게 아닙니다.
애인을 만나서 되는 게 아니더라는 거예요.
그냥 그 죽음을 먹으면 내 마음이 살아납니다.
그 다음, 주(住)거 공간, 아파트 값이 내린다 오른다, 날마다 난리 아닙니까?
‘나도 내 집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우리는 하늘나라 아버지가 계시는 그 집을 지금 현실로 느끼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겁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집 한 칸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씁니까?
그런데 그거 하지 말고, 하나님나라 아버지 집이 내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현실감으로 느끼기 위하여 날마다 애를 쓰는 거예요.
현실로 느끼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아버지도 그렇고, 그리고 주님의 죽으심을 먹었을 때 현실적으로 내가 이 세상일에 대해서 죽는 것도 그렇고, 또한 아버지가 계시고 주님이 승천해 계신 그 아버지 집을 현실로 느끼는 것도 그렇고, 현실로 느끼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겁니다, 의식주 문제를, 마음의 의식주를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뭡니까?
말씀을 듣는 거예요.
왜 말씀을 듣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세상 염려에 빠져있습니다, 세상 염려에 빠져있다는 것은 마음속에 세상의 말씀들이 가득 들어와 있다는 얘기에요, 말씀의 강물, 세상의 강물이 들어와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뭡니까?
돈이 없으면 망한다, 영토를 수호해야 된다, 이 모든 세상의 가치를 담고 있는 말들, 세상의 가치를 담고 있는 언어들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서 ‘아, 내가 지금 돈이 없으니까 큰일 났구나, 우리 자식이 공부를 이렇게 하다가는 인생을 망치겠구나!’ 이 모든 세상의 언어가 들어와 있기 때문에 말씀을 듣는 겁니다.
말씀을 듣는 현장 속에서 이 세상의 말씀들이 빠져나갑니다.
돈 벌지 말고 살자, 먹을 것 입을 것 염려하지 말고 살 수 있다, 하늘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다, 이런 말씀들이 세상의 말씀들을 몰아냅니다.
그래서 결국 어디까지 끌어오는가 하면 십자가까지 끌어옵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죽은 자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배수진을 치는 각오까지 끌어옵니다.
‘내가 이제는 다시 마음을 세상일에 빠지게 하지 않겠다.’
그 다음에는 말씀은 끝납니다.
그리고 나면 각자가 기도하는 겁니다.
기도함으로써 주님께서 십자가 저편에, 이제는 십자가 뒤쪽으로 세상강물이 흐르는 쪽으로 마음을 뺏기지 않을 것이고, 주님께서 앞으로 뚫어놓으신 그 길, 저 하늘나라까지 임하는 저 길을 걸어가면서 하늘나라와 그곳에 계신 아버지가 나의 현실로 느껴질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리는 거고, 강청하며 기다리는 거고, 소망하는 겁니다.
이게 우리가 할 일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몸이 먹고 살고 행동하고 사는 일은 아버지께서 알아서 해주시겠다는 겁니다.
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이 세상일은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당신이 마음을 쓰고 계시니까 우리 마음은 여기에 쓰지 말자는 거예요.
그래서 날마다 배수진을 치고, 십자가 이편의 삶의 강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십자가를 기억하며, ‘나는 죽었다, 나는 죽었다!’ 주님의 죽음을 먹는 겁니다, 힘을 쓰기 위해서 주님의 죽음을 내 마음이 먹을 때에 내 마음에 하늘나라가 현실로 느껴지고, 하나님아버지가 현실로 느껴지면서 이 세상을 근심하느냐 마느냐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게 의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창조 작업을 나를 통해서 해나가실 수 있는 기가 막힌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얘기죠.
날마다 배수진을 치고 사는 삶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에서 우리의 마음이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죽음을 기점으로 배수진을 치고 매일 매일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육체의 의식주는 십자가에서 이미 끝이 났으니 이제 마음의 의식주에 온통 집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배수진을 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