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崔致遠)과 유상대(流觴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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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대(流觴臺)란 무엇하는 곳인가. 유상대는 시를 짓고 담소하며 술을 마시던 당시 선비들의 놀이터
이다. 마치 신라의 포석정처럼 유상곡수(流觴曲水)의 놀이터를 만들어놓고 대(臺)를 만들어 "유상대"
(流觴臺)라고 일컬었다. 유상곡수(流觴曲水)란 "술잔을 띄워 흘러 보내게 만들어진 굽은 물줄기"라는
뜻이다.
시인묵객과 선비들이 둘러앉아서 시를 지어 읊으면서 술잔이 물위에 떠서 자기 앞으로 오면 한 잔씩
마시며 즐긴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명명한 "유상대"(流觴臺)는 곧 유상곡수(流觴曲水)
에서 따온 말이다. 시문(詩文)을 짓고 술을 마시는 학자나 선비들의 풍류의 장소이기도 하다.
원래 유상곡수(流觴曲水)란 말은 중국 동진(東晋) 시대 유명한 서예가 왕희지(王羲之)가 우군장군
(右軍將軍) 및 회계(會稽) 내사(內史) 벼슬을 할 당시 353년(영화9년) 늦봄에 회계에 있는 난정(蘭亭)에
있었던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에 참석한 고사(故事)를 모방하여 그로부터 차용(借用)한 말이다.
그러니까 최치원 선생이 중국 유명한 서예가 왕희지가 참석했던 회계에서의 "유상곡수"(流觴曲水)
연회로부터 착안하여 "유상대"(流觴臺)라고 명명한 것이다.
칠보의 시산리와 무성리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좋은 터이다. 조선시대 군수, 현감과 마을 문사와
수재들이 이곳에 모여 작시(作詩)와 음주(飮酒)를 즐겼다. 정극인(丁克仁) 선생의 최초의 국문가사
<상춘곡>(賞春曲)에서 노래한 바와 같이 태인의 선비들이 답청(踏靑)을 나갔다
면 아마도 칠보 시산리나 무성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상춘곡> 역시 그러한 분위기 속에 창작되었으리라고 본다. 조선 인조 15년 당시 현감이던 조자직
(趙子直)이 유상대 누각이 황폐화되고 비석이 없어져서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여기에 비석을
세우려고 하였다. 돌을 운반하고 비석을 세우면서 친구인 조상우(趙相愚)에게 비문을 부탁하였다.
이 때 조상우가 쓴 비문이 <유상대비문>(流觴臺碑文)이다.
첫 문장은 "태인(泰仁) 고을은 곧 옛날 신라 때 태산군으로 문창후 최치원 선생이 다스리던 고을이
다."라고 시작하고 있다.
유상대는 지금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송산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유상대 자리는 지금은 폐허가
되고 나중에 세운 "감운정"(感雲亭)이라는 정자만이 덩그마니 남아 있다. 감운정은 옆에는 칠보 중앙
노소재가 있다.
이곳이 유상대 터임을 짐작케 하는 바윗돌들이 남아 있다. 곁에는 냇가가 휘돌아 나가고 있다.
태인현감을 지낸 조항진(趙恒鎭:1794∼1799까지 태인현감을 지냄)의 <流觴臺重修記>에 이렇게 글을
썼다.
"현의 동쪽 20리 쯤에 옛 고을 터가 있어 시냇물이 있고 시냇물 위에 대가 있으니, 이름을 유상대
(流觴臺)라 한다. 돌로 쌓고 노수(老樹)가 둘러 있으니 촌로들이 서로 전하기를 고운 최치원 선생이
군수로 있을 때 노닐던 곳으로 일소(逸少: 中國 東晋의 書藝家 王羲之를 말함)의 고사(故事)를 모방
한 것이라고 한다. 천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동강공이 세상에 드문 일이라 느껴 오랫동안 황폐하였
던 것을 대를 쌓고 공무의 여가에 이곳에서 마을 수재(秀才)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다."
세월의 흐름을 감안하자면 이곳의 지형의 변화도 있었겠지만, 칠보산 줄기로 인하여 그곳이 하천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곳 냇가의 물을 끌어다가 유상곡수(流觴曲水)의
놀이터를 만들고 유상대(流觴臺)를 축조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지금 전하는 또한 감운정
정자 현판(懸板)에 새겨진 시 10여 수에 유상곡수 놀이와 유상대에 대한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다.
아마도 조선시대 선비들은 대부분 이곳이 유상곡수하던 유상대 터임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우리 나라 문장(文章)의 조종(祖宗)이시다. 학계에서는 우리 문학사상에서 우리
나라에서 유사 이래로 가장 위대한 문장가라고 평가하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선생은 신라 헌강왕 1년(857년)에 태어난 분으로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이다. 부산에 있는
해운대(海雲臺)는 선생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부산에 있는 바다가 바라보이는 산에 올라와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였다 하여 후대에 선생의 자(字)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신라의 서울 경주 사량부(沙梁部) 사람으로 경주 최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12세(869년: 경문왕 9)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17세(874년:경문왕 13)에 과거에 급제하여 선주표수현위(宣州漂水縣尉)에 등용되
고 성적이 좋아서 다시 승무랑시어내사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이 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다. 그 때 황소(黃巢)의 반란이 일어나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에 있던 고병(高騈)이
황소의 난을 토벌하기 위해 선생을 종사관으로 삼아 소임을 맡겼다.
이 때 쓴 글이 유명한 <討黃巢檄文>이다. 이 당시 쓴 여러 글들이 지금도 전한다. 나이 28세에 본국
에 돌아가 부모님을 뵈올 뜻을 청하자 당 희종(僖宗) 황제가 승낙하였다. 선생은 중국에서 돌아왔으
나 말세의 인심이라서 뜻을 펼쳐 볼 수 없었다.
자원하여 외직에 처음 나간 자리가 바로 태산군(太山郡: 지금의 태인) 태수이다. 선생이 부성군(富城
郡) 태수로 이직(移職)하기까지 몇 년 동안 태인에 재직하고 있었는지는 사료 미비로 지금 알 수 없
다. 태산군 태수로 재직하면서 선정을 베푸는 한편 시서(詩書)와 풍류(風流)를 즐기기도 하였을 것으
로 보인다. 선생이 태인에서 글짓기와 풍류를 즐겼으리라는 것은, 곧 유상대(流觴臺)가 말없이 보여
준다.
우리 지역 태인· 칠보는 선비의 고을이다. 최치원 선생을 비롯한 신잠, 정극인, 이항 등 기라성 같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남고서원의 일재 이항 선생과 그의 제자들 곧, 김천일 장군, 김제민 장군, 변사정
장군 등을 같은 걸출한 의병장이 나온 곳이기도 하다. 태인은 특히 조선시대에 호남의 전지역 가운
데 전주와 함께 오로지 두 군데만 인쇄출판업이 성행한 곳이기도 하다. 그만큼 글공부를 하는 공부
하는 선비와 학자가 많았음을 증명해 주는 예이다.
매우 바람직스러운 일은 2003년 11월 현재 정읍시에서는 태산 선비문화권 문화 콘텐츠 개발을 위하
여 각별히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프로잭트 수행 단계에 있긴 하지만 기대하는 바가 크다. 그 중
에서도 최치원 선생과 유상대는 태산 선비문화권 문화 콘텐츠 개발의 단초(端初)라고 할 수 있을 만
큼 값지고도 중요한 일이다.
*이글은 쓴 유종국 교수님은 현재 전북과학대 교수(국문학)로 재직하며 「정읍통문」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