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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아버지의 집이라서>의 줄거리:
경북 봉화군에 송석헌이라는 300년된 고택이 있습니다. 안동 권씨의 종손이 8대째 살고있던 집입니다. 일곱동으로 이루어진 이 큰 집을 홀로 지키며 살다 가신 권헌조 옹에게 작가가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혼자 사시냐고.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아버지가 사시던 집이라서! 그래서 아버지의 아버지도 그 아버지의 아버지도 그 집을 못떠나고 아니 안떠나고 300년을 이어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이라서
(요14:1~6)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아버지의 집이라서>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아버지의 집이라서’
2010년 겨울에 KBS에서 다큐멘터리를 하나 방송을 했습니다.
제목이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리고 그 다큐멘터리의 내용이 2012년 12월에 책으로 나왔습니다, 역시 제목은 ‘아버지의 집’입니다.
이 다큐멘터리와 책의 내용이 뭐냐 하면,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에 가면 300년 된 고택이 하나 있는데, 그 오래된 가옥의 이름이 송(松)석(石)헌(軒)입니다.
소나무 송(松), 돌 석(石), 집 헌(軒)자를 써서 송석헌(松石軒)이라고 하는데, 일곱 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안채, 사랑채, 이런 식으로 일곱 동으로 이루어진 고택이 있는데, 다큐멘터리 방송을 제작하던 당시 그 큰 고택에 여든 세 살 된 권 헌조라는 유학자 한 분이 홀로 살고 계셨습니다.
거기서 혼자 밥 해 드시면서 사셨다는 것이에요.
그 고택에 혼자 살고 계시는 권 헌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제작을 한 것입니다.
안동 권 씨의 종손이 8대째 살고 있는 집인데, 경상도 지역 사대부 집안의 면모를 아주 잘 갖추고 있는 그런 집이라서 문화재로 지정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문화재로 지정되는 바람에 정부에서 300년 된 고택이 다 쓰러질 지경이라서 전면수리를 할 계획을 세우고, 그 전면수리를 시작되기 전의 옛 가옥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기 위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된 것입니다.
방송의 내용은 비교적 간단합니다.
그 고택 안에 살고 계시는 여든세 살 된 권 헌조 옹의 삶이라는 것이 단조롭기 때문에.
삶의 내용은 두 가지에요.
집 뒤에 산이 있는데, 그 산으로 가는 한 뼘만 한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책으로 발간되었는데, 그 책을 쓴 사진작가가 제일 처음 송석헌에 도착했을 때 인상 깊었던 것이 바로 그 길이었습니다.
집 뒤에 산이 있지만 인적이 끊어진 곳이었습니다.
근데 한 뼘만큼의 길이 나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다음날 보니까 새벽에 이 권 헌조 옹이 갓을 쓰고 의관을 정제하고 그 길을 올라가는 것을 쫓아가며 사진을 찍습니다.
어디를 가나 봤더니 산소에 도달하고 산소 앞에서 문안인사를 드리는데, 부모님이 묻혀계신 산소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의관을 정제하고 집 뒤의 산에 있는 부모님의 산소에 가서 문안인사를 드리는 것, 그리고 외출을 하고 들어올 때 제일 먼저 곧바로 산소에 가서 외출에서 돌아왔다는 보고를 드리며 인사를 여쭈는 일, 이렇게 부모님 산소에 가서 인사드리는 일과 일곱 동으로 이루어진 고택 송석헌을 구석구석 돌보는 그 일을 하시면서 혼자 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삶의 이야기를 그대로 적은 것이에요.
매체를 통해서 이런저런 모습으로 부분부분 소개되는 것들을 쭉 읽으면서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러한 유림으로서의 삶을 자녀들에게 강요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자녀들은 다 서울에 올라가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당신의 삶의 모습을 알아주기를 바라시지도 않습니다.
하는 일이라고는 송석헌 고택을 돌보는 일과 무덤에 계시는 부모님께 문안인사를 드리는 것, 두 가지뿐입니다.
그 두 가지를 위해서 송석헌을 떠나지 못하시고 혼자 밥 지어 드시고 바느질하시면서 글 읽고 빨래하시면서 그것이 다인 삶을 사신 것이에요.
정말 이상하지 않아요?
그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고, 그 삶의 의미를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고, 그냥 유학자로서 부모님에 대한 유학자로서 가져야 될 태도를 지키느라 혼자 사신 겁니다.
그래서 작가가 물어보았습니다, 왜 이렇게 홀로 계시는가? 하고.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아버지의 집이라서…’ 아버지의 집이라서.
1700년대에 세워진 그 집, 300년이 흘렀습니다, 8대째 안동 권 씨의 종손이 그곳에 삽니다.
300년을 8대째 계속 그 집에서 살아온 이유가 뭡니까?
아버지의 집이라서.
그 아버지는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살던 집이라서 그곳을 못 떠나고, 그 아버지는 또 그 아버지의 집이라서 그곳을 못 떠나고… 그렇게 300년째 그곳에 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모두가 다 그 집에서.
오늘 성경본문에 아버지의 집이 언급되고,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송석헌에 살다가 지금은 돌아가신 이 권 헌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이 본문에 대해서는 많은 신학적인 해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책을 쓴 작가가 집 뒤의 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대해 너무 인상 깊어서 사진을 찍고 글을 쓴 것이 있습니다.
‘그 길은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위한 길이었다, 그 길에는 잡념도 공상도 없었다.’
아버지가 계시는 무덤에 올라가 인사를 여쭈겠다는 하나의 목적 때문에 노인이 발걸음을 옮기면서 그 발걸음 때문에 생긴 길입니다.
거기에는 잡념도 공상도 상상도 추측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그 하나의 목적을 실천해나가는 것이에요.
주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의 집’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집으로 주님이 지금 돌아가신다고 하십니다.
더 이상 무슨 얘기가 필요합니까?
권 헌조 옹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송석헌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아버지의 집이었기 때문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집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떠나서는 안 됩니다.
이유는 ‘아버지의 집이라서’, 아버지의 집이라서.
그래서 한번 비교를 해봤어요.
이 권 헌조 옹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어디에 계십니까? 무덤에 계십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어디에 계십니까?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송석헌이 권 헌조 옹의 아버지의 집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집은 어디입니까? 천국입니다.
이 무덤에 계신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그곳에 가서 문안을 드립니다.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또 그 산길을 올라가서 문안을 드립니다.
아무도 다니지 않은 그 길, 오직 아버지가 묻혀계시는 산소에 가기 위하여 노인이 걸어간 걸음 때문에 생긴 길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뭡니까?
유학자로서 아버지의 집을 지키다 돌아가신 이 권 헌조 옹에게서 신앙의 참 내용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이 노인이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을 알아줄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삶을 한정시켜버린 거예요.
아버지가 살다 돌아가신 이 집을 내가 지키는 것이 내 평생의 일이라는 것을 사명으로 깨닫고 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삶을 이 세상에 광고하지도 않았고, 자식들조차도 그런 삶을 따라올 것을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당신 혼자서 아버지가 살던 집을 지키고 아버지가 묻히신 무덤에 문안을 하시느라고 그 고택을 떠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신앙이 바로 이거예요.
증권투자다 IT산업이다, 우주로 인공위성을 쏘고, 대통령이 바뀌고 하는 이 세상과 아무 상관없이, 세상 속에서 다른 세상을 살기로 결정하고 누구도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그 길을 갔던 이 권 헌조 옹의 삶처럼, 세상 속에서 아버지라서 아버지의 집을 떠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하늘 아버지의 자녀 되는 사람들의 이 땅에서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여기에 무슨 잡념과 공상과 다른 해석이 필요하지 않은 겁니다.
왜 우리가 천국에 마음을 두어야 됩니까?
왜 우리가 천국에 아침저녁으로 마음을 두고 무슨 일을 하느라 정신이 잠깐 팔렸다가도 깜짝 놀라 돌아와서 다시 천국에 마음을 두면서 살아야 되는 이유가 뭡니까?
아버지의 집이라서.
여기에 무슨 다른 이유가 필요합니까?
무덤에 묻힌 아버지인데도 조석으로 문안드리는데, 하늘에 계셔서 살아계신 우리의 아버지께는 왜 우리가 인사를 드리지 않고 마음이 거기에 가있지 않는 겁니까?
아! 이게 이상한 거예요.
아니, 이상할 것도 없어요.
우리가 안 믿으니까 그래요.
살아계신 하나님아버지를 아버지로 믿지 않으니까, 그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도 마음이 이 세상 온 사방팔방을 돌아다니면서도 아버지의 집을 잊고 잘도 살아가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할 것이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안다는 얘기는 본다는 얘깁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보고 있다’
그러니까 도마가 말합니다, ‘아닙니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도마가 말하는 길은 뭘까요? 계획이에요, 계획.
지금 주님께서 열두 제자 중 누군가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팔 것을 얘기하시고, 예수님께서 이제 죽을 거라고 얘기를 하시고, 그렇게 점점 확정적인 말로 들리면서 제자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도대체 주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고, 무슨 계획을 갖고 계신지를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주님이 가시는 길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그 길을 안다고 얘기하세요, ‘너희가 지금 길을 보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말씀하십니다.
이건 무슨 얘기냐 하면, 고속버스를 타면 운전기사분이 계시고 그 뒤의 옆쪽으로 맨 앞자리가 있잖아요? 저는 주로 맨 앞자리에 앉게 되는데, 그 자리에 앉게 되면 기사아저씨가 운전하시는 그 길을 저도 똑같이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마음이 함께 묶여서 같이 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시는 그곳이 곧 길인데, 이 길은 흔히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 계획된 길이 아니고, 이미 있는 길을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도마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마는, 주님께서는 너희가 길을 본다고 얘기하십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시는데,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길을 가시는데, 예수님이 가시는 그곳이 바로 길이 되는 거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그 길을 보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십니다.
보통사람들은 이제 주님의 길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죽으신 그 자리가 길이 계속되고 있는 겁니다.
무덤에 들어가십니다, 그곳에서 길이 계속되고 있는 거예요, 길이 중단되거나 끊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활하십니다, 길이 계속됩니다, 승천하십니다, 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따라가 봤더니 어디로 도착하느냐 하면, 아버지께로 도착하는 길입니다.
그 길을 내신 거예요.
송석헌 뒤에 산이 있는데, 사람들이 아무도 다니지를 않습니다.
근데 거기에 아버지의 산소를 쓰게 되면서 권 헌조 옹이 아버지께 문안드리기 위해 없던 길을 다니게 되고 거기에 길이 생긴 것이에요.
마찬가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사이에 길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그 길을 내신 것이에요.
그러면서 주님이 원하시고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은 아침저녁으로 그 아버지의 집에 마음이 문안드리러 오라는 것입니다.
무덤에 계신 아버지에게 문안을 드리는 권 헌조 옹,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유학자의 부모에 대한 마음이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아버지에 대한 마음으로 바뀌었다면, 권 헌조 옹의 영혼을 위해서 그의 자손들을 위해서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아버지께 우리가 권 헌조 옹이 죽은 아버지께 한 것만큼 하지를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사시던 집에 대한 권 헌조 옹의 마음가짐의 백분의 일만 우리 아버지가 계시는 집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다면, 얼마나 우리가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길이라고 얘기하십니다.
작가가 송석헌에 도착했을 때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이 길이었습니다.
대체 인적이 끊긴 집 뒷산에 왜 이 길이 생겼으며 어디로 가는 길인가?
무덤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는 길입니다.
주님께서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아버지께로 가는 길입니다.
이 길을 사도바울은 날마다 갔습니다, 그래서 말씀하기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살아계신 아버지께로 내 마음이 가기 위해서 주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십자가로부터 시작해 죽음으로 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 길을 따라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일로 삼았다는 것이에요.
왜? 아버지가 계시니까, 아버지의 집이니까.
그 아버지의 집을 못 떠나고 사는 겁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에서 바쁘게 돌아가는 일들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귀에 들려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에 그 아버지의 집을 못 떠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신앙인이요, 기독교인이라는 거예요.
왜 주님이 진리이십니까?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는 모든 가르침을 다 듣고 그대로 다 실천해도 아버지의 집으로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가신 그 길을 주님과 함께 갈 때, 실제 아버지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라는 거예요.
이름과 실제가 부합되고 만나지기 때문에.
주님에게서만 하나님의 이름과 실제가 만나지기 때문에 진리라고 하는 것이고, 주님이 생명이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 마음에 항상 담고 있어야 할 유일한 대상이 주님뿐이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권 헌조 옹의 삶의 생명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가 살던 집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계신 무덤이 그분의 생명이었어요, 그분을 살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뭡니까?
주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주님이 내신 그 길을 가는 겁니다.
그게 생명이에요.
그거 없으면 살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이유는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 길을 내셔서 그 길을 아침저녁으로 가기 위해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말씀하신 뜻이에요.
여러분, 다른 것 다 잊어버리세요.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이 땅에서의 성공에 가있지 않는 겁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느라고.
이 땅에서 우리의 형통에 있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의 집이 하늘에 있기 때문에.
그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에 다른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무덤에 묻힌 권 헌조 옹의 아버지와는 다르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살아계시고 천지의 주인 되십니다.
권 헌조 옹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을 살기로 자신의 인생을 한정 짓 듯이 우리가 한정 지어도,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삶은 권 헌조 옹의 삶과는 다르게 일어나야 될 모든 일들이 다 아버지의 뜻과 지혜와 능력과 섭리에 의해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권 헌조 옹이 죽은 아버지의 무덤에 문안하느라 그곳을 못 떠난 것과 비교해 볼 때, 살아계신 하나님아버지가 계신 천국에 마음을 두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우리 마음을 한정 짓는 겁니다, 세상 속에서 다른 세상을 살기로 결정하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이 세상의 미래를 향해 뛰어갈 때, 우리는 위에 계신 아버지의 집을 향하여 조석으로 문안을 드리며 살아가기로 결정하는 겁니다.
이게 우리의 운명이고 이게 우리의 복이자 특권이기도 한 것이지요.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버지의 집이라서 우리의 마음을 천국에 둡니다.
다른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마쳐지는 그날까지 우리 삶의 내용을 한정하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 마음이 언제나 주님 계시고 아버지가 계시는 아버지의 집인 천국에 머물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
십자가의 길을 내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주님,
감사와 찬양으로 죽는 그날까지
십자가의 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