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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2001년 2월 24일에 썼습니다]
엔데의 '모모'는 동화소설이라는 이상야릇한 장르의 대표적인 소설로 이야기되고 있다. 엔데는 동화소설이라는 장르의 창시자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세계를 긍정적으로 보는 동화와, 현실의 다양성을 표현함으로서 세계의 괴물스러움을 드러내려는 소설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자.
모모는 고아원에서 탈출한 10살 내외의 여자 아이이다. 그러나 모모는 삶의 지혜와 천진난만함을 가진 바람직한 인간의 전형으로 그려지고 있다. 고아가 바람직한 인간이다? 물론 그럴수도 있다. 잘만 키워졌다면.
그렇지만 모모의 고아원 생활은 전혀 그려져 있지 않으니 우리는 그걸 알 수 없다. 엔데는 왜 뜬금없이 고아 소녀를 등장시켜 그녀를 멋진 인간으로 그려내는 것일까. 여기서 해리 포터를 생각해보자. 해리 포터에겐 부모가 있으나 그들은 해리를 학대하고 결국 해리는 마법학교로 도피하므로, 그들은 해리에게 모모의 억압적인 고아원으로 밖에 작동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해리도 모모도 고아다. 고아는 부모의 기대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이며, 따라서 자유로운 인간에 대한 상징이라는 말을 주워 들은 적이 있다. 이같은 서양인들의 '고아 지향성'은, 박학다식 과시 및 기하하적 묘사라는 틀로 독자적인 소설을 쓰는 미셀 리오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미셀 리오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초인적이며(육체적으로나 의지로서나) 극히 부유하며 일반 사람들의 고민 따위는 하지도 않는다. 미셀 리오는 이 이유를 그의 소설을 통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극히 특이한 개인이야말로 사회 체제를 거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는지(대충 이런 뜻이다)'. 그렇다면 엔데가 모모를 고아로 택한 까닭 또한 사회 체제를 거부하려는 것이 아닐까. 모모라는 특이한 개인. 고아이면서도 쾌활하고, 아이답지 않게 사람을 모으는 능력과 지혜를 갖춘. 이 점은 '모모'의 줄거리를 따라가다보면 쉽게 느낄 수 있는 사실이다. 회색 인간은 산업 사회에서 메말라가는 인간형 그것이다. 시간(의 꽃)을 점점 빼앗기다 보면 결국 그 인간 자신이 회색 인간처럼 된다는 장면은 이 점을 극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그런데 모모는 다른 수많은 이들이 굴복했던 회색인간의 유혹을 뿌리침으로서 결국엔 회색인간들로부터 인간 세상을 되찾아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과연 '극히 특이한 개인이 사회 체제를 거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까? 그런다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가정은 수많은 사회적 갈등들의 조각에 불과하다. 그 어떤 인간이든 자신의 어떤 가정에서 태어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한 인간은 가정이 가진 숱한 갈등들의 조각들을 태어나서부터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개인으로 태어난 이상 사회 체제를 통째로 거부하는 방법은 없다. 오죽하면 푸코가 '권력 너머엔 아무 것도 없다'고 까지 했겠는가. 단지 역사 속에 드러난 특정 권력 체제를 개선하는 수 밖에 없다. 고아나 초인은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불가능한 이상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이같은 소설 속 논리 전개상의 허점, 철학성의 모자람은 끝내 계속 나아가 '모모'의 결말까지 어그러뜨린다.
모모가 시간 도둑들을 모두 쓰러뜨린 뒤, 사람들은 잃었던 여유를 되찾고 웃는다. 하지만 이같은 모습은 우리가 각박하다 각박하다 하는 평소의 일상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며, 친한 사이끼리는 매정한 계산 없이도 느낄 수 있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현대 사회에 비해 여러 장단점을 가졌던 옛 시대들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도대체 진짜로 바뀐 게 무엇인가. 시간 도둑을 해치워서 얻은 게 고작 몇몇 사람들의 웃음인가. 여전히 거푸집은 올라가고 있고 자동차는 빵빵거리고 있다. 모모는 여전히 고아원에 다시 들어갈지도 모른다. 실제로 바뀐 건 아무 것도 없다. 여전히 현 체제는 똑같은 모습으로 도사리고 있다. 이 같은 결말은 고작해야 현 체제의 긍정에 불과하다. 그렇다. '모모'는 동화 소설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말 잘 들으라고 가르치는 것이 동화의 주류이듯, '모모'는 실제 어른들에게 이 체제야말로 우리들이 받아들어야 할 것이라고 속삭인다. 모모가 회색 인간들을 쓰러뜨렸다고? No! 모모야말로 업그레이드된 회색 인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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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우드 님이 쓰셨습니다]
모모는 시간에대한 일종의 철학을 담고있죠. 게다가 결말은 상당히 희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정된 사회로의 복귀를 말씀하시지만 우리에게는 모모라는 희망적존재가 있지 않습니까. 모모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요소죠. 회색인간에게서 시간을 뺐었던 것처럼 복귀한 사회도 변화시킬수 있는거죠.
그리고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청소부와 여행가이드일을 하는 친구들이 있지 않습니까.
모모는 혼자가 아닙니다. 친구들과 함께 이미 마을사람들을 변화시켰고 그건 또다른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혼자라면 아무것도 변화시킬수 없지만 그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가 변화시키는 것 아니겠습니까?
너무 유치한 얘기인가요?
세상은 혼자돌아가지만 어떨때는 돌려야 돌아갈때가 있죠.
그리고 돌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미카엘의 의도는 더 낙관론적인 것이라 믿고 싶군요. 해석은 사람마다 다른 거지만요. 전 비관론자 보다는 낙관론자가 되고싶습니다.
그대들의 걸음마다 진실함이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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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그라토)가 썼습니다]
그렇지만, 작가의 의도와는 엇나가는 일도 있어요.
그리고 '모모'의 결말은 분명 마치 자본주의 세계 체제(회색 인간들)가 패배한 것처럼 꾸며지 있지 않나요?
물론 사람들이 변화시키려고 해야 바뀔 가능성도 생기겠지만, 그러기엔 이 체제가 너무 두터워요.
'팔아버린 웃음'의 작가 제임스 크뢰스가 왜 마지막에 마악 남작을 확실하게 패배시키지 않는지 생각해보시죠. 그 많은 세계 석학들이 비판을 해대고 대안을 내놓아도, 이 약탈적 세계 체제는 굳건하네요. 오늘날의 미국적 세계화를 과연 모모가 바꿀 수 있을까요? 미카엘의 조국인 독일 또한 그 조류에 휩쓸려 가고만 있군요.
'모모'의 결말은 성급하고 순진해요. 그 때문에 결국 패배적 결론을 내고 만다고 전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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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우드 님이 쓰셨습니다]
자연으로 돌아가서 원시시대의 무한 공유체제로 사회를 퇴화시키자는 의도가 아니었을까요?
모모가 하는 짓이 그렇잖아요. 아무것도 없어도 상상놀이하고.
자본주의를 깰수있는게 뭐겠습니까. 설마 공산주의를 말하는건 아니겠죠. 미카엘 엔데=공산주의자? 게다가 공산주의도 결국 졌잖아요.
그렇다면 공산주의의 원형이라 할수있는 원시사회가 아닐지요. 쩝.
완전히 헛소리군요.
그냥 잡설들었다 하구 생각하세요.
그대들의 걸음마다 진실함이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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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과 인간의 공존,드래곤 라자 카페(http://cafe.daum.net/raja/)에서 리카 님이 제 글을 보시고 쓰셨습니다]
님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 오랫만에 공들여서 읽게되는 비평을 보는군요. 앞으로도 님의 글을 많이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님의 말처럼 이글은 사회체재를 거부하기위해서,(돌킨의 환타지가 비판을 위해 만들어진 가상공간이듯이)비판하기 위해서 쓰여진 소설일 것입니다. 작가가 고아원에서 자란 모모를 묘사하지 않은 이유는 독자의 상상력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저것 다 말을 해놓는다면 또 그것이 꼭 설명하지 않아도 알수 있는 내용이라면 글은 난잡해 지겠지요. 이미 바르게 자란 모모라고 설명을 끝낸 이상 이글의 본론인 비판으로 넘어가야한다고 작가는 생각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모모는 고아입니다. 사회에서 격리 되었죠. 그렇기에 모모는 세상을 비판할만한 자. 즉 한발 물러선 자입니다. 하지만 모모는 끊임없이 친구를 만드는 능력을 발휘하지요.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한발 물러선 자에게 있어서 친구란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자신과 같이 한발 물러선 자일까요, 아니면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 여기는 하나의 구실일까요?
답은 모르지요. 하지만 추측은 해볼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대목에서 모모는 회색인간의 유혹을 뿌리칩니다. 그리고는 주변사람들이 여유와 웃음을 되찾았다고하죠. 하지만 잘생각해보면 님의 말씀과같이 모모는 진화된 회색인간일 뿐이죠. 모모는 결국 그들을 자신의 관점에 끌어들인것일 뿐입니다. 시간을 잃어버린 회색인간과 그들로 인해서 정상이 아니게 된 모모..회색인간은 계속해서 사람들을 유혹해가고 모모는 친구를 찾아가죠. 그리고 결말은 모모의 승리. 이렇듯 모모에게 있어서 친구란 의미는 시간의 꽃이 아니었을까요? 회색인간에게 있어서 시간의 꽃을 빼앗는것은 아마도 자신과 다른 타인을 가만히 보고 있지 못하는 우리들의 내면심리를 반영한 것이 아닐까요? 또한 진화된 회색인간 모모는 자신과 다른 산업사회 사람들을 그냥 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친구라는 특이한 관계를 만들어 나감으로서 자신의 보편성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구요.
우리는 비판하는 글을 볼때 한가지 유의해야 할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을 보는것이 아니라 작가를 보는것이라는 것을 말이죠. 무의식적으로 글을 읽다보면 어느덧 작가의 생각이라는 것을 까먹고 자신이 생각하는듯 여기게 됩니다. 과연 우리가 그 소설속의 인물이었다면 모모의 생각을 옳게 볼 수 있을까요? 일본의 교과서를 배우는 일본학생들은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듯이. 어쩌면 모모의 작가는 그것을 이용해 책을 읽는 독자를 비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