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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선희 목사 ( 소망교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다음에 바로 동독 드레스덴을 제가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았는데 같은 독일 사람인데 서독과 동독사이에 이렇게 큰 차이가 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댁에 초대받아서 저녁식사를 하는데 조그마한 빵 하나를 갖다 놓고 그거를 얇게얇게 이렇게 썰어 놓고 토마토 몇 개 차려놓고 치즈 한 쪽하고 이러고 앉아서 그 목사님 댁 다섯식구와 제가 저녁을 먹게 되는 겁니다. 아 그거 한 쪽 더 먹었다가는 다 굶을 판이에요 지금……. 나는 여행 많이 했지만은 저녁식사를 굶고 자 본 일은 그때가 처음입니다. 이렇게 어렵고 가난할 수가 없어요. 홍차를 끓여 가지고 그거 홍차봉지 하나 놓고 물을 얼마나 넣었는지 그거만 자꾸 따라주면서 마시라는 거예요. 인정은 좋은데 아 이렇게 어렵게 지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독일사람 하면 부지런하고 정직하고 그리고 생각이 합리적이고,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
습니까? 근데 같은 독일사람인데 이렇게 다를 수가 없습니다. 또 이렇게 못 살수가 없어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공산주의가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어요.
좌우간 공산주의 나라는 하나같이 못사는 거야. 그 못사는 정도가 우리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왜 이래졌을 거 같습니까? 자본이 없습니까 기술이 없습니까? 아 달나라에 가는 기술도 있잖아요. 그런데 못살아요. 그 원인이 뭘까? 많은 사람이 많은 책을 쓰고 연구합니다 만은 결론은 간단합니다. 사람이 변질됐다는 거죠. 인간이 못쓰게 돼버렸어요.
그래서 우리가 공산주의 사회에서 나온 사람을 만나면 꼭 세 가지를 잊지 말아야 됩니다.
첫째가 불성실하고 거짓말 잘해요.
또 하나는 게으르고
세 번째는 무책임합니다.
모든 일에 책임질 줄을 몰라요.
그 뿌리는 이렇습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제일 많이 쓰는 말이 혁명입니다. 혁명! 혁명! 개혁 혁명! 그러는데 가만히 분석해 보면 혁명이라는 건 내 가난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거예요. 내 잘못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것이 혁명이예요. "내가 잘못했습니다"하면서 혁명하는 사람 봤어요? 개혁을 외치는 사람마다 자기 개혁은 없어요. 꼭 남보고 말하는 거지 이제……. 그 자체도 의식적으로 보면은 의식구조가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얘기예요. 그것도 무책임한 얘기입니다.
우리는 수없이 개혁이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 개혁을 무장하는 그 사람의 속에 개혁이 있는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이건 꼭 모든 세상만 잘못됐대요.
사회가 잘못되고 세상이 잘못됐고
구조적으로 잘못됐고
총체적으로 잘못됐고…….
아무리 외쳐도 그것은 무책임한 소리예요.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올시다.
가난하고 부하고 지식이 있고 없고 지위가 높고 낮고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기본은 성실입니다.
나라도 경제도 정치도 인격도 성실이올시다.
여러분 신뢰 지수에 인격이 걸렸습니다.
신실을 잃어 버렸으면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라고 하는 사람이 쓴 '트러스트' 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이 책을 번역할 때 책이름을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썼어요. '트러스트' 이랬습니다.
이 책의 주제는 이렇습니다.
경제가 지식과 자본과 기술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신용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거다. 이건 세계적으로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여러분 돈이 없어 못사는 게 아니에요. 성실이 없어 못사는 거예요. 기술이 있고 지혜가 있고 뭐 모든 것을 가졌다 하더라도 성실이라고 하는 기초가 없으면 그대로 왕창 무너지고 마는 거예요. 아무 소용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성실지수가 문제입니다. 어떤 사회가 성실도수가 높으냐 하는 거죠. 이 분의 생각은 봉건주의가 성실지수가 제일 낮아요. 그 놈의 체면 때문에. 그리고 자기 가족만 위하는 생각 때문에 성실지수가 제일 낮고 이 보다 더 낮은 것이 공산주의 사회예요. 이 분의 지론은 공산주의가 무너진 것은 성실이 없기 때문이요 자본주의 체계에서 그만큼이라도 살 수 있도록 되는 것은 조금이지만은 성실이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죠. 성실은 안다 모른다, 있다 없다, 할 수 있다 못한다, 이 문제 이전의 일입니다. 기본자세입니다.
여러분 돈을 잃어버리면 일부를 잃어버린 것이고
건강을 잃어버린 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성실을 잃어버리면 영원히 잃어버린 겁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어린아이가, 미국에서 된 얘기입니다만은, 유치원에 다니는 꼬마가 저녁에 돌아와서 자기 형님들한테 25전짜리, '쿼터'라고 하는 돈 하나를 들고 오늘 나는 이 돈을 벌었다고 자랑을 하는 거예요. "니가 돈을 어떻게 벌었냐?"하니까 내가 버스를 타는데 그 버스 운전사 옆에 있는 토큰을 넣는 통, 거기다가 이걸 넣으려고 키가 작아서 발버둥을 하고 넣으려고 막 하는데 주위에서 사람들이 왁 하고 미니까 그냥 뒤로 가버렸어요. 그래 돈을 안 내고 타고 돌아와서 요거 내가 벌었다고 자랑을 하는 거예요.
아버지는 이 아들을 붙들고 목을 놓고 울었습니다.
"너는 우리 가문의 정직이라고 하는 높은 전통을 25전에 팔아버린 놈이다." 그리고 울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진실을 어느 정도 소중히 여기십니까?
이건 생명보다 더 큰 것이에요. 이걸 잃어버리면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그리고 성실과 진실이라는 것은 사실로 성품화 되어야 됩니다. 전통이 되야 되고 체질이 되야 되고 바라는 대는 문화화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실이라고 하는 그것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우리의 문화는 잘못됐습니다. 여기에 가장 큰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잘 살고 못 살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모두가 거짓 투성이란 말이에요. 이러고는 망하지 않을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개인이건 인격이건 사회건 성실 없이는 서지 못합니다. 경제고 정치고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는 "성실한 자가 복이 있다" 10절에 말하고요 "충성된 자가 복이 있다" 20절에 말하고 계속 성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성실해야 합니다.
보세요. 스스로 물어보세요,
여러분은 언제나 그 누구에든지 "나는 모릅니다"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성실한 사람이에요. 모른다는 말을 하기가 뭔가 좀 걸려서 모르면서도 체면 위신을 생각해서 아는 척 하려고 그래요. 이게 불성실한 거예요. 우리는 어찌 다 알겠습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죠. "그건 모릅니니다" 이 말 한 마디를 아주 편하게 쉽게 할 수 있어야 되요. 우리는 유교 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그 체면 때문에 모른다는 말을 죽어도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죽을 수 밖에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모르고 아는 척 하는 것, 큰 거짓입니다.
제가 대학에서 강의하고 나올 때 가끔 질문하는 사람이 있어요. 목사님 이러 이러한 거 하고 물어봐요 그러면 제가 "나 그거 모르겠는데" 하면은 "목사님이 그것도 몰라요?" 그래서 "이 사람아 내가 아는 게 몇 가지 되는 줄 아나?" 그러고 맙니다 만은 여러분 교수가 돼서 학생 앞에서 "나는 모른다, 그거 모른다" 이거 말하기 어려워요. 그러나 못할 것도 아니예요. 바로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아는 건 아는 거, 모르는 건 모르는 거, 할 수 있는 건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건 할 수 없습니다.
가진 것은 가졌고 못 가진 것은 못 가졌어요. 못 가지고 가진 것처럼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여자분들이 예쁘게 보이려고 꽤 애씁디다 만은 가끔 제게 물어봐요 "목사님 젊어 보입니다" 그럴 때, 내가 "예 젊어 보이는 것과 젊은것은 다릅니다" 그러고 말아요. 그 늙었다는 소리거든요 그렇잖아요? "젊어 보입니다" 그래 내가 농담 겸 진담으로 대답합니다 "실속이 있어야지요" 그러고 맙니다. 보이면 뭘하누 실속이 없는데…….
여러분 그저 곱게 늙읍시다. 뭐 젊은 척 하려고 그러고 없는 기운 있는 것처럼 요란스럽게 그러지 마세요. 그러다 먼저 갑니다. 그저 그대로 나이 들었으면 들은대로 작으면 작은대로 크면 큰대로 이것이 진실이예요. 작은 사람이 크게 보이려고 할 것 없고 큰 사람이 구부정하고 다닐 필요없고. 안 그렇습니까? 그대로.
또한 제일 중요한 것은 회개에 대하여 진실해야 됩니다.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잘못됐습니다" 라는 말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체질이여야 합니다.
저는 다윗왕을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합니다. 하나님도 좋아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신구약 성경에 다윗이라는 말이 팔백번이 나옵니다. 사람의 이름으로서는 최고로 많이 나오는 이름이 다윗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했어요. 내가 알기는 그는 정직한 사람이에요.
나단 선지가 말합니다 "당신이 죄인입니다"고 할 때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남의 마누라를 뺏어왔지요, 남편을 죽였지요. 이 엄청난 죄를 왕의 보좌에 앉아서 그대로 인정을 합니다.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그의 시편에 나오는 참회록에 보면은 단 한번도 밧세바를 원망하는 일이 없습니다. 환경을 나무라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나의 실수였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더 위대한 것은 그래 이렇게 한번 지적을 당하고 회개하고 나서 왕관을 벗어버리고 하야하지 않았습니다.
"나 이 부끄러워서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노라" 그리고 하야해서 베들레헴으로 가 버렸다면 다윗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죄인보고 죄인이라는데 뭐 잘못됐나? 그대로 그 부끄러운 얼굴을 가지고 그대로 나라를 다스립니다. 그래서 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자식이 아버지를 반대할 때에도 그는 나무라지 않습니다.
내 지은 죄의 대가로 이것이 여기에 있다고 "네 집에 칼이 떠나지 아니하리라"하고 말씀하신 나단 선지의 예언이 여기에 응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는 전혀 아무 말도 없습니다. 정직했습니다. 성실했습니다. 맡은 바에 성실했습니다. 위대한 것입니다. 회개, 회개에 성실해야하고 또 자기 책임에 대해서 성실해야 됩니다.
여러분 내 잘못 내 탓이지요, 다른 사람 잘못도 내 탓이에요.
자식이 잘못되는 거 누구 탓입니까? 남편이 잘못된 길을 가는 거 누구 탓입니까? 세상이 이 모양 되는 거 누구 탓입니까?
책임에 대해서 "다 내 책임입니다" "나의 부덕함입니다" "나의 허물입니다" 이것을 신실하게 인정하고 그게 성실함이에요. 이웃에 대해서 보세요. 우리 이웃에 많은 신세를 지고 삽니다.
세상에 받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삽니까?
그것을 고맙게 여기는 마음이 그게 성실이에요. 제 잘난 것처럼 살고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착각하지 마세요. 얼마나 많은 사람의 갚을 수 없는 신세를 지고 삽니까. 이것이 성실이요. 또한 의무에 대해서 성실해야 하고 약속에 대해서 성실해야 됩니다.
어떤 약속이든 목숨을 걸고 지켜야 됩니다.
약속을 무서운 줄 모르는 것, 그것은 무너진 인격이요 파멸된 인격이올시다. 약속을 소중히 여깁니다.
또한 맡은 책임 성실해야 됩니다.
탐욕을 가지지 말것입니다. 왜요? 내 것은 내 것이고 남의 것은 남의 것이니까요. 시기하지도 말고 질투하지 말 것이요 그것이 성실입니다. 소득에 연연해서는 안됩니다.
제가 어느 책을 보니까 너무 재미있는 얘기가 한 마디가 있습디다.
그 백화점을 해서 백화점으로서 세계적으로 성공한 분이 계세요. 그 성공한 분이 그 사훈이 오직하나예요. "Custom is always right" 고객은 항상 옳다 그거예요. "여기에 있는 것 비쌉니다" 그러면 '오 비싼거다'. "작은 겁니다" 그러면 "아니에요. 큰 거예요" 이 말을 하면 안되요. 손님이 항상 옳아요. 바로 이 하나 가지고 성실하게 크게크게 성공한 분이 있습니다. 그럴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성실해야 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입니다.
은혜의 선물에 대해서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 받은 것뿐입니다" 하는 그 마음 이게 성실이요. 또 믿음, 믿음이 성실할 때 두려움이 없어요. 믿는다고 하면서 두려워하고 걱정, 근심하는 것은 믿음이 부도나는 것이에요. 믿으니까 아무 두려움도 없습니다. 이게 성실이요. 하나님의 경륜과 사랑을 믿기에 인내합니다. 서두르지 않습니다. 조급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대로 너무 급하게 부자가 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 얼마를 썼던지 족하게 여깁니다. 이것이 성실입니다.
시간에 대해서 성실해야 됩니다.
하루하루 그 소중한 시간을 성실하게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성실이요. 특별히 생산적 성실을 가져야 됩니다.
"작은 일에 충성했음에 더 큰 일을 맡기리라" 일을 남기는 것이에요. 성실이 열매를 맺는 그런 생을 살아가야 한다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의 성실을 스스로 점검해 봅시다.
성실지수가 어디까지 왔습니까?
재미 사업가 중에 백영중이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이 회장님의 별명이 지금 미국 현재 강철왕입니다. 10월 7일자로 출간된 새로운 책에 책제목이 이렇습니다. '나는 정직과 성실로 미국을 정복했다' 이런 책입니다. 그런데 원문이 더 재미있습니다. 원문 영어로 된 책제목은 이렇습니다. "No Money, No English", 돈도 없고 영어도 못해요. 그런데 강철왕이 됐어요 미국에서. 이 회사는 소위 패코스틸이라고 하는 회사인데 아이빔을 생산하는 곳입니다. 년 매출액이 2억불에 해당, 그리고 경량 철근 분야에서는 시장 점유율 60%입니다. 엄청난 회사의 회장이 됐습니다. 그는 선천에서 피난 온 하나의 청년이요, 단신으로 월남을 해서 남한에서 살아보려고 하다가 길이 열리지 않아서 오십불을 손에 쥐고 미국으로 떠납니다. "No Money, No English" 돈도 없고 영어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고 특별히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내게 좋은 분들을 만나게 할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너무 고달프고 어려웠을 때 그는 식당에서 일을 하면서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북에서 쫓겨나고 남한에 발 못 붙이고 미국까지 밀려왔다. 이제는 더 물러설 곳이 없다. 그래서 오로지 성실하게 진실하게 살자' 그리 살았습니다. 물건을 팔 때 "이거는 얼마입니다." "그거 얼마예요?" 어떤 사람이 "이거는 좀 비싼데요"하면 그 자리에서 깎아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시 계산을 해서 다음 번에 값을 내려서 정가를 매겼답니다. 그리고 어떨 땐 물건을 사러 온 사람에게 "이 물건은 이제 곧 없어지게 될 거 같은데요, 혹 참고하셔서 필요하다면 여분 있게 사시는 게 좋겠습니다" 어떤 물건은 "값이 곧 좀 더 내려갈 거 같은데요 좀 기다렸다 사시지요." 이렇게 손님편에서 성실하게 손님에게 봉사했습니다.
마침내 "No Money, No English" 돈 없고 영어도 못하는 사람이 미국에서 백만장자가 됐다 이 말이예요. 공부 많이 하고 똑똑한 사람들 생각 좀 하세요. 무엇이 근본인가? 성실을 잃어버리면 소용없는 거예요. 교육이라는 것은 신앙을 잃어버리면 약바른 악마를 생산하는 것뿐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늘 듣는 바하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바하는 라이프치히에 있는 "성 토마스 교회"라고 하는 시골 조그마한 교회입니다. 그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있으면서 주일마다 성실하게 오르간을 연주하는데 누가 알아주던 말던 매일같이 새로운 곡을 작곡해서 연주합니다. 그 곡은 한번도 출판된 일도 없고 발표회를 한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실하게 매일 매일 새 곡을 만들어서 연주를 합니다. 마침내 265곡의 오르간 곡을 만들고 263곡의 합창곡을 만들고 162곡의 피아노 곡을 작곡합니다. 그는 이렇게 될 때까지도 무명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알려지기 시작해서 그는 음악의 악성이라고 하는 높은 이름을 가지게 될 때 그 수십년 전에 작곡한 것이 이제 와서 다시 빛을 봅니다. 오로지 성실로 하나님 앞에서 교회 앞에 살았던 오늘의 바하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도산 안창호 선생님, 그의 학벌은 중퇴입니다.
중학교 2학년 중퇴입니다. 그는 이력서를 쓸 때마다 "중학 중퇴"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특기란에는 "배 노 젓는 일"과 "청소하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내 특기는 "청소". 그는 정직했습니다. 정직을 모토로 하고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정직함이라는 것은 생명보다 앞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 보면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그랬습니다.
내가 교회를 핍박했으나 나는 진실했다. 오로지 성실을 보고 하나님께서 내게 직분을 맡기셨다고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수익과 출세와 명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실이 먼저입니다. 성실에다가 생명을 거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요 순교자입니다. 우리는 진실을 너무 헐값에 팔아버리고 있습니다. 오직 성실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내일을 기다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