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2-7
종교개혁의 모델 / 최종원 목사
본래 마틴 루터는 독일 색슨이라고 하는 지방에서 광부의 아들로서 가난하게 났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신앙의 법대로 루터의 가정은 경건가정이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아주 엄격한 신앙지도를 받았습니다. 소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서 졸업한 후에는, 그 당시에 흔히 하던 대로 자기의 몸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칠 뜻으로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수도사가 된 얼마 후에, 신부로서 안수를 받으면서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경을 강의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그가 맡은 과목은
시편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였습니다.
이와 같은 성경과목을 가르치면서 연구하는 동안에 점점 깨닫게 된 것은 당시 교회의 교훈과 행사가 성경의 교훈과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게끔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 신부는 마음 가운데 많은 고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로마 교황 레오 10세는 이 성 베드로(St, Peter)라는 큰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 모자라는 돈을 모금하는데 속죄 표를 선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이 청년 루터는 더 침묵을 지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95조의 그릇된 점을 지적하면서 속죄 표 파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 당시의 소위 참 회개라고 하는 모든 것에 대한 반대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은혜로 죄 사함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인데 속죄 표를 사서 어떻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반대를 하게끔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처음에 비텐베르크 작은 교회에서 시작이 되었지마는 이 소식이 온 유럽에 펴지게 되었고 종교개혁의 불길은 요원의 불과 같이 온 세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교황은 자기의 정치적 세력을 이용해서 물론 능력으로 탄압하기를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신교들도 부득이 핍박을 받다 못해 싸울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소위 종교전이 16세기 와 17세기에 많아졌습니다.
스페인 같은 데서는 종교재판소에서 신교 사상을 가진 사람을 전부 일일이 심사해서 학살한 수가 얼마나 많은지 부지기수입니다.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도 1572년 8월 23일, 성 바돌로매 제일(祭日)때는 갑자기 구교도들이 일어나서 7천명에서 1만에 달하는 많은 신교도들의 생명을 파리에서 학살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30년 전쟁이 일어나서 오랫동안 끌다가 마침내는 1648년 웨스트팔리아 조약에 의해서야 비로소 유럽에서 신교도들이 양심대로 주를 믿을 수 있는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말을 여러분에게 하는 것은 양심대로 믿을 수 있는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얼마나 값비싼 희생이 지불되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신교의 자유가 있다고 하는 것을 감사할 수밖에 없는 까닭에서입니다.
1. 종교개혁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종교개혁"이라고 말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교회 개혁"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초기 선교사들의 문서에 보면 종교 개혁사를 "교회 갱정사"라고 했던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참회 혹은 회개란 개인의 내적 회개뿐만 아니라 외적인 개혁(혁신)을 동시에 의미한 것으로서 종교개혁이란 간단히 말하면 원시 그리스도교 회복운동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교회의 본래적인 신앙과 생활에서 이탈한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의 형식화된 의식적 생활에서 사도적 교회에로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로마 카톨릭의 성례전적인 제도(Sacramental System)와 공적사상 등과 같은 비 복음적인 전통에서 벗어나 근본의 기독교, 사도적 교회로 돌아가려는 운동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은 결코 어떤 새로운(new) 신학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종교개혁 신학은 어떤 새로운 신학(a new theology)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종교개혁을 통한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은 결코 16세기에 형성된 신학이 아닙니다.
이미 사도적 교회로부터 있어 왔으나 오랜 세월동안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권과 미신과 비 복음적인 전통 속에 가려졌던 것이 16세기에 와서 다시 부흥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개혁에서 어거스틴(Augustine)의 은총의 신학을 보며, 사도 바울의 이신득의 교리의 부흥을 보게 됩니다.
그 동안 많은 사람이 종교개혁의 본질을 오해해 왔는데 종교개혁을 단순히 교리적(신학적) 개혁운동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신학이나 의식, 제도 등 중세적 오류에 대한 비판과 거부로 시작된 교회의 신학적 개혁운동으로만 생각해 왔으나 사실 종교개혁은 복음주의적 개혁운동만이 아니라 영적 갱신운동 혹은 영적 부흥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개혁은 교리의 개혁(Reform)과 영적 부흥(Revival)이라는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종교개혁의 3대 원리는 신자로서 언제나 기억할 만한 불멸의 진리입니다.
(1)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죄 사함을 받습니다.
(2)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행실의 표준입니다.
교회의 전통은 성경으로 판단하여 취사 선택해야 합니다.
(3)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신부, 교황, 마리아가 아닙니다. 누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제사장의 자격이 있습니다. 여기 신앙생활에 있어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의 원칙을 선언합니다.
2. 요시아의 개혁은 그의 성전 수리 도중에 발견된 모세의 율법책으로부터 시작됩니다(왕하22:4-7, 8).
성서적 개혁운동을 말하려면 요시아의 개혁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시아는 퇴락한 하나님의 성전을 수축하는 과정에서 제사장 힐기야에 의해 발견되고 서기관 사반에 의해서 전달된 그 율법책의 내용을 접한 왕 요시아는 처절한 회개와 더불어 전면적이고 파격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던 것입니다.
열왕기하 23:4-20에 기록되어 있는 구체적이며 다양한 개혁조치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유다 왕조시대 전반에 걸쳐 형성되고 확장 발전되어 온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들을 거부하고 타파하여 본래의 야훼 예배의 모습을 회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비 야훼적인 가나안 종교의 전통 요소들이 얼마나 당시 이스라엘의 신앙과 예배에 깊숙하고도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알과 아세라로 대변되는 가나안의 전통종교 요소들은 일월성신 종교와 더불어 예루살렘 성전내부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23:4, 11-12).
가나안의 전통적인 풍요신앙의 산물인 미동의 집이 성전 경내에서 발견되었습니다(23:7).
솔로몬의 성전뿐 아니라 유다의 각 지방에서는 역시 가나안의 종교적 전통의 산물인 산당 중심의 신앙
이 일반적인 종교 행태로 고착되어 있었습니다(23:5, 8, 9, 13).
심지어는 고대 지중해 동부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성행했던 인간제사도 당시 유다의 종교에 낯설지 않은 요소였습니다(23:10).
물론 이스라엘의 종교와 신앙은 여타 종교 및 신앙들과 마찬가지로 그 주위에 존재하는 여러 인접한 다양한 종교와 신앙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 발전되었습니다. 비록 우리들은 이스라엘의 신앙이 주위와는 전혀 구별되는 독특한 것이라고 믿고 싶을지라도, 그들의 신앙이 역사 문화적인 진공 속에서 생성되고 전승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본래 존재하던 가나안의 문화와 종교의 한 가운데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역사를 꾸려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역사 속에서 가나안의 전통종교들을 자연스럽게 발전적으로 수용하고 토착화했다고 너그럽게 이해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다원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인들의 이러한 생각은 성경에서는 별로 설 자리가 없습니다. 요시아의 개혁은 모세의 율법 책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요시아는 성전에서 발견된 모세의 율법을 모든 백성들에게 다시 한번 공포하고 그 율법을 매개로 하나님과 백성들 간의 계약을 재확인한 후(23:1-3) 그 가르침을 바탕으로 유다의 종교를 개혁한 것입니다.
가나안의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곳은 모두 파하며(신12:2), 그 제단을 헐고 주상과 아세라를 깨뜨리며(12:3), 오직 야훼께서 지정하실 한 곳에서 예배드리라는 가르침(12:5, 11)이 그 개혁의 핵심이었습니다.
요시아는 모세를 통해 주어진 이러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실행한 이스라엘 역사상 몇 안되는 왕들 중 하나입니다.
결국 요시아가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가르친 바대로 예배하고 행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문제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느냐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종교제도 혹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회의 제도 또는 권위와 어떤 관계를 갖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제도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정도의 권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현실이 그렇게 되어 있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대대로 전래되어 오던 선친 왕들의 예배와 신앙의 전통이 그 자체로 독자적인 권위를 갖게 되어 모세의 율법책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망각 속에 묻어버린 상황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만 의존하여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개혁을 실시한 요시아의 경건은 아무리 칭송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3. 한 가지 반드시 지적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요시아의 종교개혁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올바른 예배와 신앙을 회복하는 그 자체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그 자신의 신실함과 경건함을 입증하고 만대의 성군으로 길이 기억되는 데에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신앙과 예배행위는 유다의 국가 민족적인 존폐가 달려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요시아는 발견된 모세의 율법 책을 대한 후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발하신 진노가 크도다"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왕하 22:13).
이는 신명기 28:15-68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불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내가 만일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여호와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 네가 그곳에서 네 열조의 알지 못하던 우상을 섬길 것이라"(신 28:15, 65). 이것은 신학적 도덕적인 차원일 뿐 아니라 문자적으로 생존차원의 문제입니다.
북 왕국은 이미 이 저주의 말씀의 본보기가 된 상황입니다(왕하 17:7-18).
열왕기하 22:13에 담겨진 요시아의 현실인식은 바로 이러한 국가와 민족의 존폐의 문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시아에게 종교개혁은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반드시 행하여야만 하는 절대절명의 선택이었습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요시아의 종교개혁에서 보이는 지도자의 중요성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나타나듯이,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왕 요시아의 위대성입니다.
열왕기하 22:3부터 23:25에 이르기까지 성경본문을 구성하는 5개의 주요 기사들은 모두 요시아가 그 행위의 주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요시아가 보내며 가로되"(22:3), "왕이 명하여 가로되"(22:12; 23:21), "왕이 보내어…모으고"(23:1), "왕이 명하여"(23:4). 그리고 그가 주체가 되어 실행한 개혁의 결과 그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23:25)는 최상급의 칭송을 얻는 것입니다.
물론 그의 개혁이 결국 실패로 끝나지 아니하였는가라는 질문은 타당합니다.
그 직접적인 이유는 그의 급작스러운 서거(23:28-30)로 인해 그의 정책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된 역사적인 상황 전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23:31이하고). 그리고 성경은 요시아의 신실함과 경건함도 그의 조상 므낫세의 죄악으로 인한 야훼의 진노를 돌이킬 수 없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23:26).
그 이전에 축적된 배교와 죄악이 너무 심각했다는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유다는 멸망하고 하나님의 저주의 말씀대로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25:1-7).
이런 점에서 요시아의 개혁은 실패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위로부터의 개혁이 갖는 한계에서 찾는 의견도 있습니다.
실제로 역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요시아의 개혁은 힐기야를 정점으로 하는 그를 추종하는 예루살렘의 제사장 집단과 관료집단, 그리고 궁정 예언자들을 주축으로 하는 중앙의 지지세력을 주축으로 하여 지방의 여러 전통세력들을 제압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내지는 정치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올바른 종교와 신앙에서 지도자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지적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유다의 멸망을 초래한 하나님의 진노는 유다의 열왕들의 실패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유다의 열왕들도 결국은 산당을 폐하지 못한 실패를 안고 있습니다(왕상 15:14; 22:43; 왕하 12:3; 14:4). 그리고 므낫세의 배교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의 타락과 그로 인한 파괴적인 결과에 대한 지도자의 책임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널리 알려진, 그래서 다소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는 사실이지만, 이스라엘의 왕은 곧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시 2:7; 삼하 7:14). 그리고 친히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포함하는 일체의 예배제도를 조직 관장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대 이스라엘에서 종교의 타락 및 회복 여부는 왕의 책임하에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요시아가 모세의 율법을 보존하고 전승하는데 신실했다는 점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당시 제사장들의 직무유기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한 동안 잊혀져 있다가 성전에서 우연히 발견된 것은 제사장들이 마땅히 담당해야 할 직무를 소홀히 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역시 종교 지도자의 중요성을 시사하는 부분이라고 여겨집니다.
모두가 다 진실하게 맡은 일에 충성을 했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참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수나 미장에게 공사비로 맡긴 은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행하는 일이 다 진실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감시하지 아니해도 다 자기 일처럼 성실하게 할 수 있다면 참된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