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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6: 17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 히 6: 20 앞서 가신 예수께서
히 6: 17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
본 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를 나타내는 것으로 창 22: 16-17에 대한 언급이다.
* 창 22: 16-17 -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은 아브라함을 포함하여 그의 후손들을 시사한다.
육체적인 후손이라기보다는 영적인 후손 즉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Lane, Morris).
2]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하신 맹세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을 고무(鼓舞)시켜 주는 말씀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 즉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까지 확장되어 적용된다(Michel, Spicq, Foerster).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맹세는 자신의 약속이 변치 않는다는 사실을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증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3]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맹세로 보증하셨나니'는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을 의미한다.
특히 '보증하셨나니'(에메시튜센)는 '중재자'란 뜻의 '메시테스'에서 유래한 말로서 '중재자가 되다', '보증인이 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은 맹세가 필요 없으나 자신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기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셨다.
히 6: 18 변하지 못할 사실 -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
본 절은 '히나'(위하여)로 시작하는 목적절로 하나님께 맹세하신 목적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는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은 첫째로 그의 약속하심 자체이며, 둘째로 그의 맹세하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확실한 약속을 주시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얻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1]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변치)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사실을 인하여)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은 13절과 17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가리킨다(Bruce, Kuss, Michel).
'약속'은 모든 날 마지막에 나타난 말씀인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1: 2), 하나님께서 '맹세'하여 보증하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성취되었다(20절; Lane).
* 히 5: 6, 10 - ⑥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⑩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 히 7: 17, 21, 28 - ⑰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21)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 시 110: 4 -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뒤오 프라그마톤 아메타데톤 엔 호이스 아뒤나톤 프슈사스다이 데온'은 '이 두 가지 변할 수없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은 거짓말 하실 수 없으므로'(by two unchangeable thingsin which it is impossible for God to lie, NIV)라는 의미로 이 두 가지 사실 즉 '약속'과 '맹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성경의 단편적인 한 두 구절에서 유추한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에 흐르는 사상에 뿌리를 둔 것이다.
* 민 23: 19 -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 삼상 15: 29 -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 시 89: 35 -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 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것이라.
* 사 31: 2 -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의 말씀들을 변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들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들을 치시리니
2]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소망'은 본서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재 이룩되었으며 앞으로 완성되어질 구원을 나타낸다(Michel, Grasser, Glaube, Mora).
저자는 '앞에 있는 소망' 즉 그리스도인들의 종말론적 구속의 소망이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약속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사역으로 인해 이중의 보장을 받고 있음을 강조한다(Lane, Schierse).
이러한 소망을 바라보고 삶을 영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죄악을 피해가야 한다(Morris).
3]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큰 안위'는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또는 '용기' 혹은 '위로'를 가리킨다(Robertson).
하나님은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 즉 자신이 행하신 약속과 맹세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으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현재 구원을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변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인해 종말론적 구원의 성취를 소망하고 현재 지상의 삶 가운데서 위로를 받게 된다.
아브라함의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오늘날의 성도들은 그 성취를 맛본다.
성도들은 믿음의 조상된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로서 성도들 자체가 약속 성취의 증인들이기 때문이다.
히 6: 19 영혼의 닻 같아서 -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
성도의 소망은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과 같다.
휘장이라는 말(카타페타스마)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을 가리킨다(히 9: 3).
휘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이 죄로 인해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을 의미한다.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께서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셨으므로, 우리의 소망은 더욱 견고하다.
1]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본 절에서 닻의 비유가 사용되는 것과 같이 '삶'을 '항해'에 비유하는 것은 고대 문학에 있어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이었다(Hilgert).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이와 같은 비유는 오직 본 절에서만 나타난다.
'닻'의 비유는 헬라문학에서도 그러했듯이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Lane).
저자는 소망이 '영혼의 닻'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표현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소망하는 종말론적 구원의 성취가 확고한 것임을 시사한다.
영혼의 닻은 영혼이 세파에 휩쓸리지 않도록 고정시키는데 그것이 곧 소망이다. 그리고 그 소망은 하나님 앞에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께 앞서 나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도 하나님 앞으로 담대히 나갈 수 있다.
본 절의 '영혼'(프쉬케스)는 인간을 '육'과 '영혼'으로 분리하는 헬라 철학의 이원론적 개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本質的)인 생명을 나타낸다(Morris).
2] 휘장 안에
'휘장'은 구약 시대의 성막 안에 있던 두 개의 방 즉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천을 가리킨다. 이 휘장 너머 즉 안쪽은 지성소를 의미한다.
* 출 26: 31-35 - (31) 너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짜서 휘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 놓아서, (32) 금 갈고리를 네 기둥 위에 늘어뜨리되 그 네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서 네 은 받침 위에 둘지며 (33) 그 휘장을 갈고리 아래에 늘어뜨린 후에 증거궤를 그 휘장 안에 들여놓으라.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리라. (34) 너는 지성소에 있는 증거궤 위에 속죄소를 두고 (35) 그 휘장 바깥 북쪽에 상을 놓고 남쪽에 등잔대를 놓아 상과 마주하게 할지며
* 레 16: 2,12,15 - ②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휘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라. 그리하여 죽지 않도록 하라. 이는 내가 구름 가운데에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⑫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 앞 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두 손에 채워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⑮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지니
* 레 21: 23 - 휘장 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하지 못할지니 이는 그가 흠이 있음이니라. 이와 같이 그가 내 성소를 더럽히지 못할 것은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이니라.
* 레 24: 3 -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들어가심으로(20절) 휘장은 찢어졌고,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모든 자들이 자유롭게 지성소, 즉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 마 27: 51 -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 막 15: 38 -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이러한 사실은 종말론적구원의 성취를 통해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3] 들어가나니
'들어가나니'(에이세르코메넨)은 '에이세르코마이'(들어가다)의 현재분사로서 '닻'(앙퀴란)을 수식한다. 따라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닻'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 '닻'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시한다(Windisch, Kasemann, Grasser, Koster, Schroger).
그러나 이 '닻'은 다시 소망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결국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소망'이다(Lane, Kuss, Michel, Spicq).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소망'이라는 사실은 7: 19의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는 말씀으로 더욱 확증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소망은 닻과 같이 튼튼하고 안전하여 세상의 어떠한 시련이나 유혹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Morris).
히 6: 20 앞서 가신 예수께서 -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
1]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앞서 가신'(프로드로모스)는 본 절에서와 같이 단수로 사용된 용례가 고전에서나 헬라 문헌에는 거의나타나지 않는다.
이 단어의 복수 형태인 '프로드로모이'는 주력 부대 앞에 나가있는 '첨병'이나(Herodotus, Polybius), '주력 함대를 앞서 인도하는 배들'(Alciphron), '처음 익은 열매', 혹은 '전령'(Herodotus)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 민 13: 20 -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탐지하라. 담대하라. 또 그 땅의 실과를 가져오라. 하니 그 때는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이었더라.
* 사 28: 4 - 그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그의 영화가 쇠잔해 가는 꽃이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리니 보는 자가 그것을 보고 얼른 따서 먹으리로다.
이와 같은 용례에 비추어 볼 때 본 절의 '프로드로모스'는 '선구자', 혹은 '선두 주자'라는 의미를 지니며 동시에 누군가가 '프로드로모스'의 뒤를 따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2]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선구자(先驅者)로 멜기세덱과 같은 대제사장직 수행을 위해 먼저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다(5: 7-10).
즉 예수께서는 자신의 대속적인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셨으며 그 구속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씻어 백성들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10: 14, Lane).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심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구속을 힘입어 뒤따라 하나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는 확증이 된다(Hewitt).
히브리서 6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성도는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들을 넘어서서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들은 회개, 믿음, 세례, 죽은 자들의 부활, 심판 등이다.
완전한 데라는 말은 성경의 모든 말씀을 알고 믿고 실천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
둘째, 성도는 배교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배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떠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 사상의 변질이며 계명에 대한 불순종이다.
우리는 이런 불신앙과 불순종에 떨어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셋째, 성도는 동일한 부지런을 가지고 확실한 소망에 이르자.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서 친히 맹세로 주신 확실한 내용이다.
그것은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과 같다.
우리는 그 소망을 확실하게 붙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