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전 2: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 - 살전 2: 20 영광이요 기쁨
살전 2: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 -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애모(愛慕)하여 보고자 하는 이유는, 그가 그들을 영적으로 존귀하게 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보기 원한 이유는 그들이 바울에게 소망이요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나타날 일을 말한다. 지금 교회들은 지상에서 여러 가지 싸움 속에 있고 불완전하지만,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복음의 결실들이 드러나고 주님의 평가와 보상도 있을 것이다.
1]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소망'이라 함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싹튼 신앙이 성숙하게 자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온 것이다.
'기쁨'이라 함은 그들의 믿음의 진정성(眞正性)에서 나온 것이다.
'자랑'이라 함은 그리스도 앞에 그들이 바울의 전도사역의 열매로 나타날 것이라는 확신에서 온 것이다.
'자랑의 면류관'이란 말의 '자랑'은 어떤 교만을 포함하는 자긍이 아니고, 은혜로 받은 상급을 영광으로 생각함이다.
운동 경기에서 우승자가 받았던 월계관의 뜻이 있다(Bruce).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 특히 자신의 사도적 사역을 표현함에 있어서 운동 경기 용어를 자주 사용하였다. '면류관'은 왕관이라기보다 '승리'를 상징한다.
* 고전 9: 25 -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 갈 2: 2 -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 사도의 전도를 듣고 믿는 자들이 있는 것은 곧, 그가 그 소명(召命)에 충성한 증표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심판 때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사도의 '소망'일 것이다. 그리고 '기쁨'은 바울 사도가 그 사역의 결과로 얻은 내세의 기쁨이다.
* 요 4: 36 -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 잠 16: 31 -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 겔 16: 12 - 코고리를 코에 달고 귀고리를 귀에 달고 화려한 왕관을 머리에 씌웠나니
* 고전 9: 25 -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 빌 4: 1 -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 딤후 4: 7 -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2]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날' 대신에 '그리스도의 강림'이란 말을 쓰고 있다.
'강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루시아'(*)는 고위 관리가 어느 지역을 방문할 때 사용되었는데 특히 거의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는 황제와 같은 지배자가 방문할 때 써졌다.
바울은 '파루시아'를 쓸 때에 이와 같이 황제의 방문을 연상하여 그리스도의 날에 나타날 더 크고 화려한 영광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강림'이란 말은 헬라 문학에서 주로 두 가지 용법을 가진다.
(1) 하나님이 예배하는 자들을 돌아보시기 위해 그들 중에 영광으로 임재(臨在)하심을 가리키는 종교적 술어로 사용되었다(Dibelius).
(2) 임금이 백성에게 내림(來臨)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도 바울은 이 말을 주의 '재림'에만 국한하지 않고 일반적 '내림'의 의미로도 사용하였다.
* 고전 16: 17 -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 고후 7: 6-7 - 6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7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 빌 1: 26 -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 빌 2: 12 -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것 역시 의미심장하고 중대한 '내림'을 가리키는 것만은 사실이다.
게할더스 보스는 말하기를, "이 말이 가리키는 '내림'이 엄숙성과 중대성을 띠는 이유는, 그 내림에 수반하는 사건(구속 완성과 심판)이 그러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Pauline Eschatology, p.74).
이러므로 이 말은 주의 재림을 가리키는 데에 가장 적합하게 채용되었다(살전 2: 19, 3: 13, 4: 15, 5: 23).
* 살후 2: 1 -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살전 2: 20 영광이요 기쁨 -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
헬라어 본문에는 '가르'(*,'참으로')가 첨가되어 있다. 이것은 본 절이 19절의 '무엇이냐'에 대한 확답임을 나타낸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들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확신하였다.
참된 성도들은 말씀의 사역자들에게 영광과 기쁨이 될 것이다. 물론, 실제로 순종함이 없는 이름만 가진 교인들, 참으로 회개치 않은 자들은 목사와 교회의 근심거리이며 수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믿고 순종하는 자들, 비록 실수가 있어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 예수님을 믿고 성경의 모든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은 목사와 교회의 기쁨과 면류관이다.
1]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영광, 기쁨' - 이 두 말은 앞 절의 '소망 ... 기쁨 ... 자랑의 면류관'을 조금 다른 형식으로 재설한 것뿐이다. 앞 절의 '소망'과 '자랑의 면류관'의 내용은 본 절의 '영광'이란 말에 포함되었다(Van Leeuwen).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영광을 취한다는 뜻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 말은
(1) 바울의 영적 소원의 성취를 가리키다.
(2) 그가 그들을 존귀하게 여긴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앙이 성숙할수록 우리는 진실한 다른 성도들을 존귀하게 보게 된다. 다윗은 말하기를,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라고 하였다(시 16: 3).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통해 주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그 말씀은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 딤후 3: 16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특히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주 예수님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다.
* 갈 1: 12 -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을 더 신뢰하다가 죄를 범했고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아내의 말을 듣다가 죄를 범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지 못한 자는 구원과 영생을 얻지 못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받는 자마다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아는 것은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권위로 주신 책이며 우리가 매우 귀히 여기고 겸손한 마음으로 읽고 받아야 할 말씀이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는 것은 참된 성도의 표가 된다. 실상, 이 말씀은 오늘날도 살아 있는 말씀이다.
예레미야는 말하기를, “28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꿈을 꾼 선지자는 꿈을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가 어찌 알곡과 같겠느냐? 2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고 하였다(렘 23: 28-29).
히브리서 4: 12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과 이별하면서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고 말했다(행 20: 32).
둘째, 참된 교회는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은 유대인들에게 고난과 핍박을 받았다.
유대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들의 선지자들을 죽였고 믿는 자들을 쫓아내었고 또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는 것도 금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는 일이며 자기들의 죄를 항상 채우는 일이며 하나님의 진노가 마침내 그들에게 임하였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들도 그들의 나라의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하였다. 우리나라 교회들도 일제시대와 공산치하에서 고난을 당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경건과 도덕성을 지키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도하는 우리의 일을 하면 된다. 그것이 성도의 참된 표이다.
셋째, 참된 성도는 전도자들의 소망이며 기쁨이며 자랑과 영광이다.
사도 바울과 그 동료들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과 생활 교훈과 모든 진리들을 전했다.
사탄의 방해가 없지 않았지만, 사도들은 때때로 그들을 방문하여 가르치고 권면하고 위로 격려하였다. 그들은 전도의 결실이었고 교훈과 양육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영적으로 성장하여 좋은 성도, 좋은 제자가 되는 것은 전도자들의 큰 기쁨이었다.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 곧 하나님의 심판과 보상의 날에 하나님께서는 전도와 목회와 교회 봉사의 선한 일들에 힘쓴 자들에게 좋은 상을 주실 것이 확실하다. 성도들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