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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소작인의 의지
군당 야산대의 세력이 약화되어감에 따라 율어면에 전진기지를 구출하고 있던 백남식의 부대는 각 면으로 분산배치되었다. 전에 볼 수 없었던 적극작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건 상황변화에 따른 자신감 때문만이 아니라 상부의 명령이 불길 같았던 것이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겨울 안으로 산중 빨갱이들의 씨를 말리라고 성화였다. 백남식은 병력을 분대단위로 분산시켜 산골짜기마다 투입하는 전략을 썼다. 이틀 간격으로 교대시키는 그 작전은 기동성 빠르게 이동저항하는 적들을 추격하고, 적들 상호간의 연결을 차단시키기 위해서는 더없이 효과적이었다. 물론 효과에 비해 위험부담이 없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적의 섬멸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불사한다는 상부의 방침이 일단 선 이상 백남식으로서는 효과 있는 방법이라면 그 어떤 것도 시행을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희생된 병력은 보충되어오게 마련이었으므로 그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의 관할구역 안에서 어떤 방법으로든 무장빨갱이들을 쓸어없애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우선 분대장들의 입만 놀리는 전과보고를 믿지 않았다. 전과보고는 증거제일주의를 채택했다. 첫째가 적 살해였고, 둘째가 무기노획이었다. 첫번째의 증거로는 코나 귀 한 짝을 제시해야 했고, 두 번째의 증거는 원시무기가 아닌 총에 한했다. 그건 일본군대에서 배운 방법이었다. 그런 전과를 올린 장병에게 계급 특진이나 표창장이 수여된다는 단서가 붙은 것은 물론이었다.
"남 서장님, 아, 나 백남식이오. 그 문젠 어찌 됐소? 아직도 못 정하고 있는 거요?" 전화에 대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백남식의 어조는 찡그려진 얼굴 만큼이나 거치고 시비조였다. "아, 그 문젠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마땅한 사람을 정해서 그저께 배치시켰소." 전화기에서 울리는 남인태의 목소리에도 어떤 성깔이 묻어 있었다. "그럼 미리 알려줘얄 것 아니오.
대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오?" 백남식은 남인태의 처사나 현재의 태도에 그만 배알이 뒤틀려서 어조는 더욱 거칠어졌다. 그러면서도 '보고'라는 말은 신경써서 피하고 있었다. "그 새끼들이 또 전화선을 절취해가서 전화가 불통된 걸 몰라서 허는 소리요, 시방?" 백남식은 느닷없이 볼때기를 쥐어질린 기분이었다. 그는 머쓱해진 기분이었고, 저쪽에서는 공격에 만족이라도 하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이근술이라고, 회천면에 근무하던 사람을 옮겼소." "늦었지만, 잘 됐소. 근무 철저히 하도록 지시해주시오." 백남식은 먼저 전화를 끓어버렸다. 한바탕 몰아치려던 계획이 빗나가 버려 화가 나기도 했고, 맥이 빠지기도 했다. 아직도 지서주임 자리를 못 채우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얼빠진 놈을 잡아다 앉힌 것이었다.
"하! 개애자석, 지랄허고 여물통 돌리고 자빠졌네. 워따가 대고 지눔이 잘난 칙이여, 잘난칙이. 지눔이 앞으로 멫 조금이나 가겄다고." 남인태는 화가 나거나 마음이 급해지면 자신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사투리를 내뱉으며 수화기를 내동댕이쳤다. 그러나 그는 겉마음만 화가났을 뿐이지 속마음까지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 일에 얽힌 남 모르는 수확을 가슴뻐근하게 즐겨왔던 것이고, 멋모르고 설쳐대는 백남식 같은 존재를 향해서는 통쾌감까지 만끽하고 있었다.
율어면 지서장 자리를 놓고 보름 남짓한 사이에 거둬들인 옹골찬 수입을 생각하면 남인태는 자다가도 입이 벙긋 벌어질 지경이었다. 율어면을 싱겁게 되찾은 다음 당연히 경찰력 배치가 뒤따랐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전에 근무했던 사람들을 복귀시키려고 했다. 그건 자연스럽고도 바른 조처였다. 그런데 그날 밤 전지서장이 집을 찾아들었다. "서장님, 지발 저를좀 살려주시씨요. 제가 거그서 반란사건 터지기 전부텀 근무했응께 연한으로 보드라도 자리바꿈헐 만치 된 디다가 전번 참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왔는디 워찌 또 그 징헌 지옥으로 들어가겄는가요. 서장님 권한으로 다 되는 일잉께 이놈 불쌍허니 생각허시고 한분만 살려주시씨요. 요건 얼마 안 되는디......" 지서장은 품안에서 종이에 싼 것을 꺼내 어려운 몸짓으로 방바닥에 밀어놓았다. 한눈에 그건 돈뭉치였고, 그 크기로 보아 예사 액수가 아닐 것이 분명했다. 남인태는 순간적으로 심장이 찌르르 울리며 어금니 사이에서 신침이 솟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애써 감정을 누르며 고개를 틀어 눈길을 멀리 보냈다.
"그게 거 난처한 일 아니겠소. 김 주임이 가기 싫어하는 것은 거기가 위험허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라고 가려고 하겠소? 목숨 아까운 거야 누구나 다 똑같고, 나는 일을 공평하게 처리해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이오." 있는껏 거드름을 피우며 말하고 있는 남인태의 머리속은 빠른 계산으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선, 생각지도 못했던 돈벌이 기회를 십분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휘하의 면단위 지서장 모두를 한 차례씩 돌려가며 먹이로 삼아야 된다고 생각했고, 그러면 광양에서 빠져 나오느라고 속쓰리게 탕진한 재산을 벌충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을 했으며,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인사청탁을 받으며 그 액수를 확인하지 않고 대답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김 지서장은 머리를 조아리며 돈뭉치를 남인태 앞으로 조금 더 밀었다.
"글세올시다.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운 이 비상시국에 이런 인사청탁이나 하다가 소문이 나는 날에는......" 남인태는 엄하고도 냉정한 어조로 말하며 담배를 집어들었다. "그럴 리가 있겄습니까. 쥐도 새도 몰르게 허니라고 마누래헌테도 입을 봉헌 일이구만요." 김 지서장이 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내가 밤새 생각해볼 것이니 내일 아침 일찍 와보시오." "고맙구만이라, 서장님만 믿겄습니다." 김 지서장은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연신 굽실거리면서 물러갔다.
남인태는 곧바로 종이를 찢어발겼다. 돈 다발 네 개가 허물어지며 모습을 드러냈다. 한 다발을 덥썩 집어든 남인태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 끝에 퉤퉤 침을 튀겨 세기 시작했다. 빠르게 넘어가는 돈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눈은 야릇한 열기와 함께 윤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숨돌릴 틈도 없이 돈 네 다발을 다 세었다. 그리고 짭짭 입맛을 다시며 담배를 빼들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것에 비하면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지만 일단 딴 마음을 먹은 그의 심사에는 어딘가 미흡한 액수였다. 물론 서장 자리와 지서장 자리는 하늘과 땅 차이이긴 하지만, 자신이 쓴 비용에 비하면 너무 차이가 나 남인태는 슬그머니 화가 치밀려고도 했다.
목숨을 안전하게 지키려는 목적은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쌀 다섯 가마니 값이면 적은 돈은 아니다만 요것 갖고는 안되겄다. 하나뿐인 모가지 온존허게 보존헐라먼 그 곱쟁이는 내야 쓸 거이다." 남인태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혼잣말을 또렷하게 하고는 오른손으로는 입을 야무지게 훔쳤다. 그는 이미 목숨을 담보로 잡은 전투놀이를 각 지서장을 상대로 비밀리에 벌일 작정을 하고 있었다. 열 가마니 씩만 후려내면 자신이 쓴 비용을 벌충하고도 또 그만큼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돈 네 다발을 꼼꼼하게 쌌다.
"세상에는 비밀이 없는 법인디, 그런 돈으로 도에 어그러지는 일을 허고 잡지 않소. 서장이란 자리가 오뉴월 참외 익데끼 해서 따낸 자리도 아니겄고." 다음날 아침 김 지서장 앞으로 돈뭉치를 밀어놓으며 남인태가 무겁고도 싸늘하게 한 말이었다. "아이고 서장님, 알겄구만요." 무릎 끓어 앉은 앉음새를 고치며 김 지서장은 억지웃음을 지어내고는,"지가 생각이 짧었구만요, 긍께, 여그다가 을매나 더 보태야 될란지......" 억지웃음이 굳어지며 그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있었다. "어허, 점잖찮게 고것이 무슨 소리요. 장바닥 장사치 흥정도 아니겄고, 서로 체면 생각해서 눈치껏 곱쟁이로 채우든 말든 헐 일이제, 원 그리 짜잔헌 뱃보로 어디 관리로 출세허겄소?" 남인태는 먼눈을 팔며 혀 끝에 힘이 잔뜩 들어간 혀차기를 해댔다. "죄송스럽구만이라. 지가 다 알아서, 이따가 저녁참에 다시 찾아뵙겄구만요." 김 지서장은 허둥거리며 옆걸음질을 쳐 방을 나갔다.
남인태는 출근을 하자마자 안전지대에 있는 면부터 골라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아아, 다름이 아니라, 율어에서 빨갱이들을 몰아낸 걸 박 주임도 알지요? 거기 지서가 비어서 사람을 채워야 되겠는데, 아무래도 박 주임이 가줘야 될 것 같소." 남인태는 지극히 사무적인 듯 건조한 소리로 이렇게 운을 떼었고, 상대방 쪽에서는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났다. "아니, 서장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율어로 저를 보내시다니요, 쪼끔만, 쪼끔만 기다려주십시오. 오늘 안으로 당장 찾아뵈옵겠습니다." 그래서 남인태는 서로 다른 날을 잡아가며 지서장들을 하나씩하나씩 요리해나갔다. 그러는 사이에 벌교의 백남식으로부터는 왜 빨리 경찰병력을 배치하지 않느냐는 독촉전화가 사흘거리로 걸려왔다. 이미 차석 이하의 경찰은 배치시켜놓고 있었으므로 남인태는 이런저런 이유를 그럴싸하게 붙여대며 여유만만하게 목적달성을 해나갔다.
그러던 중에 이근술 지서장이 엉뚱하게도 자원을 하고 나섰다.
"저런 얼빠진 새끼 봤나. 누가 공 알아줄까봐 나서는 건가, 나서긴." 남인태는 담배꽁초를 내던지며 혼자 역정을 냈다. 아직 접촉하지 못한 지서장이 두어 명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원자가 나서 버린 이상 그 일을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놈이 쥐어지르고 싶도록 밉고, 느닷없이 날아가버린 돈이 아까와 배가 아팠지만 남인태는 꾹꾹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놈이 초장에 자원을 하고 나섰으면 어떻게 할 뻔했을까를 생각하며.
한편, 그런저런 내막을 전혀 모른 채 율어면으로 자리를 옮긴 이근술 지서장은 그날부터 빙그레 웃는 얼굴을 하고 집집마다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껑충하게 큰 키에 얼굴마저 펑퍼짐하면서 길었다. 그래서 키는 더 커 보이는 데다, 얼굴 전체에 담긴 선하디 선한 웃음은 큰 키와 함께 그 인상을 그야말로 싱겁게 보이도록 하고 있었다. "회천면에서 새로 온이 주임이라고 허느만요. 요 북새통에 사시기는 좀 워떠신게라?" 그는 이런 식으로 집집을 들여다보며 인사를 하고 다녔다. 더러 그를 알아보는 남자들도 있었다. "아이고메, 그 말로만 듣든 미륵주임님이시구만이라!" 이런 말로 반색을 하는가 하면, "오랴, 그 고진인 말......,아니 쩌 머시냐, 욜로 잠 앉으시제라." 어떤 남자는 계면쩍은 얼굴로 마루를 더듬거리기도했다. 그 남자가 당황스럽게 삼켜버린 말이 무엇인지 알면서 이 주임은 그저 사람 좋은 웃음을 얼굴에 담고 있었다. 자신에게 붙여진 점잖은 별명이 미륵주임이었고, 장난스러운 별명은 말자지주임이었다. 허위대가 크니까 그것도 크리라고 생각해서 그런 별명을 붙인 모양인데, 듣기가 좀 쑥스럽고 민망해서 그렇지, 그는 속으로는 만족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남자의 뿌리고 기둥이고 중심인 그것이 크고 실하다는 것만큼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을 것인가. 그는 '말자지'라는 상스러운 듯한 별명에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호감이 깃들어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만약 개자지도 아니고 토끼자지나 쥐자지라고 몰아댔더라면 어쩔 것인가.
그런 악의에 맞서서 그것을 내보일 수 없는 이상 자신은 영락없이 큰 덩지에 어울리지 않는 볼품없는 연장을 매단 병신꼴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그것에 비하면 말자지라는 별명은 얼마나 호의에 넘치는 것이냐며 그는 내심으로 흡족해하고 있었다. 덩치값 하느라고 그는 남들보다 큰 그것을 달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그가 자신의 별명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까닭은 농업학교 시절의 훈육주임을 생각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일제치하의 모든 학교 훈육주임들은 일본놈이면서 악바리였듯이 그가 다닌 농업학교의 훈육주임도 예외가 아이었다. 그런데 훈육주임의 별명은 악바리에 어울리지 않게 '백자지'였다. 훈육주임은 먼발치로라도 그 별명을 들으면 그야말로 부들부들 치를 떨었다.
서너 학생이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거리에 떨어져 "후꾸다 자지는 백자지, 민숭민숭 털이없는 백자지"를 장타령조로 합창을 해대다가 훈육주임에게 추격을 당해 순천 오리정 뒷산 세 개를 넘으며 쫓겨야 했던 일은 너무나 유명했다. 그때 만약 그들 중에 하나라도 훈육주임에게 잡혔더라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거라는 것은 학생들 사이에서 웃음기 없이 수긍된 사실이었다. 그 일이 벌어진 다음부터 훈육주임의 별명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더욱 확실한 백자지가 되고 말았다. 소문이 그렇듯이 별명이라는 것도 진원지나 발설자가 모호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별명이라는 것은 대개 얼굴 생김새나 성질 또는 유별난 버릇 등을 놓고 지어지는 것이지 남성의 그것이 대상이 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훈육주임이 하필이면 그런 별명을 얻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근거를 따지자면 그는 딸만 셋이었다. 조선인 학생들이 그에게 앙갚음하는 심정으로 딸만 셋인 것을 빙자해 그런 모욕적인 별명을 붙였을 확률이 컸다. 그는 네 번째에도 딸을 낳음으로써 백자지인 것을 확고하게 증명하고 말았다. 조선인 학생들은 그 흉사를 더없는 경사로 받아들이며 서로서로 숨죽여 웃으며 고소해하고 통쾌해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근술의 자기 별명에 대한 이해도 다소 빗나가 있었다. 그 별명에 사람들의 악의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은 분명했지만, 그가 해석하는 것처럼 그렇게 그 의미가 단순하지않았다. 그는 허위대가 큰 사람처럼 행동이 민첩하지 못했으며, 특히 그 목소리는 평균 이하로 느릿거리면서 얼굴만큼이나 부드러웠던 것이다. 태평스럽도록 느린 목소리가 부드럽기까지 해서 그의 행동은 더욱 느려 보였다. 별명은 여기서 비롯되고 있었다. 그의 별명 앞에는 '늘어진'이란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근술은 그런 것을 개의치 않았다. 그는 매사를 좋은 쪽으로 해석하고, 순조롭게 받아들이려는 심성의 사람이었다.
그가 모든 지서장들이 싫어하는 율어 근무를 자원한 것도 기회주의적 공명심이나 영웅주의적 객기 같은 것이 발동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지서장들이 서로 그곳으로 가지 않으려고 발뺌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런 행위가 경찰로서 추하고 창피스럽게 느껴졌고, 멀지않아 자신에게도 차례가 오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가도 가야 할 자리였고, 지목을 당하고 가느니 차라리 자원을 해서 그 추하고 창피스러운 소문을 하루라도 빨리 지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곳이 지형적으로 다소 불리할 뿐이었지 좌익무장대가 사방에 분산되어있는 상황에서 다른 면들에 비해 특별히 위험할 까닭도 없었던 것이다.
"주임님, 날도 추운디 멀라고 그리 집집마동 다니시는게라." "그렇구만요,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안 좋구만요. 버리장머리도 없어지고요." 차석 이하 경찰들의 반응이었다. "그려, 다들 앉어보드라고." 이근술은 느리게 몸을 돌려 자리를 잡고는, "자네들, 앞으로 나허고 일헐라먼 나가 허는 말 똑똑허니 들어 두드라고. 우리 경찰이란 것이 머신지 다들 알겄제? 민중의 지팡이 아니드라고. 말만 뻔지르르허게 내걸지 말고 실지 행동도 그렇기를 이 자리서 당부허는 바이여. 나는 일정때버텀 순사질을 험스러도 순사가 사람들 위에 올라스는 것이라고 생각해본 일이 없는 사람이여. 인자 일정때도 아닌 디다가, 이름도 '순사'가 아니라 '경찰'로 달라졌응께 우리 생각도 달라져야 된다 그말이네. 경찰이 사람들을 올라타고 앉어 욱대기고 잡지고 왈기먼 된다는 생각을 싹 없애라는 말이시. 긴말 더 헐 것 없고, 그리 못헐 사람은 나허고 일 못헌다는 것만 알아두더라고."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감돌고 있었으며, 그 목소리도 느릿하면서 부드러웠다. 그런데 부하들은 꼼짝을 못하고 앉아 있었다.
해방이 되고 나서 조선인 순사들이 앞을 다투어 몸을 숨기는 속에서 그런 짓을 하지 않은 군내의 유일한 사람이 이근술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런 해꼬지를 당하지 않았다. 그가 부끄럽게 생각하는 순사질도 전혀 그의 뜻으로 한 일이 아니었다. 그를 농업학교에 보내준 문중의 뜻에 밀려 순사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남다를 뼈대에만 의지해 평생을 가난하게 산 심덕 좋고, 술 좋아한 무능자였다. 그의 아버지가 일곱 형제를 남겨놓고 죽게 되자 장남인 그를 문중에서 공부시켜 주었다. 그는 농업학교의 배움을 실천하려고 했지만 현실적 여건은 그의 뜻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서민영은 순천에서 넘어오고 있었다. 그는 기차의 창밖으로 하염없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일월의 추위만 가득한 황량한 들판이 연이어 지나가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도 들판의 추위가 그대로 옮겨와 있었다. 그의 의식 속에는 겁에 질릴 대로 질린 열두 명의 핏기 없는 모습이 얼어붙어 있었다. 법정의 구형 장면이었다. 낫을 들었던 농부는 사형이었고, 나머지 열한 명은 오 년 징역이었다. 살인죄와 살인방조죄가 각각 적용된 것이다. "너무 서운해하지 마십시오. 저로선 최선을 다한 겁니다." 변호사의 말에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변호사를 대지 않았더라면 모두가 사형을 구형 받았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있었다. 그의 우울은 형량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모두 피해자이면서 법정에 섰다는 사실에 있었다. 지주라는 부류들이 어떤 각성을 하지 않는 한 소작인들과의 관계는 계속 그런식으로 끝판을 보게 될 것이고, 이중 피해자는 늘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 세상이어떤 꼴로 되어갈 것인지는 보나마나한 일이었다.
"상소를 하시겠습니까?" 변호사의 이 말에도 그는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기각을 밥먹듯이 하고 있는 법원 실정에 상소는 엄청난 비용을 필요로 했고, 아무리 많은 돈을 쓴다고 해도 지주를 살해한 작인을 사형에서 구해내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 법원 분위기이기도 했다. 판검사들은 공정한 법의 집행에 앞서 심정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지주들의 편이었다. 거기다가 그 작인들도 더는 재판비용을 댈 형편이 못 된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는 처지였다.
서민영은 우울과 함께 깊은 허탈에 빠져 있었다. 일을 부탁받고 최선을 다한 결과치고는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미약한가를 다시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자신에게 남겨진 것은 가족들에게 형량을 알려주는 곤혹스러운 일뿐이었다. 가족들이 겪을 마음고생을 생각해서 재판 날짜를 가르쳐주지 않았으므로 그건 자신이 짊어져야 할 어쩔 수 없는 짐이었다. 그는 얼굴을 본 일이 없는 소화라는 무당을 생각했다. 이지숙에게 들은 말로는 그 무당이 해낸 일에 비하면 자신이 한 일은 정말 하잘것이 없었다. 그들은 비록 실형을 받았지만 무당의 덕으로 농토는 잃지 않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다행을 삼을 도리밖에 없었다.
서민영은 절름거리며 역 앞마당을 걸어가고 있었다. "안녕허신게라? 또 순천 댕게오시는구만요."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며 앞을 막아서듯 했다. 서민영은 걸음을 멈추며 무거운 듯 고개를 더디게 들었다. "지구만요. 재판은 워찌 돼가고 있당가요?" 염상구는 고개를 꾸벅 해보이며 물었다. 바로 앞에 있는 염상구를 아주 먼 눈길로 바라보듯 하며 서민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염상구를 헤치듯 하며 걷기 시작했다.
저 쩔뚝발이 빙신이 저것, 사람 알기럴 쥐좆만도 못허게 안단 말이여. 저것을 팍 그냥......
염상구는 침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건 오기였을 뿐 그의 마음에 서민영은 언제나 어려운 존재였다. 풍채도 없고, 입성도 꾀죄죄하고, 권세도 없는 데다, 다리는 절름거리는 병신인데도왜 그 앞에만 서면 기가 죽고 주눅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학식이 많이 들어서 그런가, 뼈대있는 양반이라서 그런가, 남에게 흉잡힐 일을 안 해서 그런가, 그의 몸에서 풍기는 냉기같기도 하고 찬바람 같기도 한 그 범접하기 어려운 기운은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에라, 쩔뚝발이 서민영이야 서민영이고, 나넌 난께로." 염상구는 이빨 사이로 침을 찍 내깔기다 말고 옆구리로 손바닥을 갖다댔다. 상처가 완전히 아물었는데도 총 맞은 자리가 문득문득 맞바람이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때마다 손바닥으로 옆구리를 누르고는 했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 생각은 번번이 손이 옮겨진 다음에 떠오르고는 했다. 물론 전 원장을 찾아가서 따져보기도 했다. "이거 수술이 잘못된 것 아니다요?" 전 원장은 사람을 무시하는 것처럼 이상스럽게 웃기만 하다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다른 큰 병원에 가서 알아봐도 좋지만, 수술엔 이상이 없어요. 총을 맞고, 수술을 하고 했으니 아무리 완치가 된다고 해도 다치기 전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인 데다, 총을 맞은 충격 때문에 정신적으로 그 부분에 맞바람이 통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겁니다. 정신적인 충격이 회복되고, 신경이 안정될 때까지는 어쩔 방법이 없는 일입니다." 염상구는 옆구리에서 손을 떼며 걸음을 옮겼다. 그 자리는 맞바람만 통하는 것 같은 것이 아니라 귀나 코보다도 추위를 먼저 타서 시리고 아린가 하면, 꿈에서는 거기로 창자가 다 흘러나오기도 했다. 강동식을 죽인 댓가가 자신의 몸에 그렇게 분명히 찍혀 있었던 것이다.
그건 강동식 이놈의 귀신이 붙은 것처럼 기분 나쁘고 재수없는 일이면서, 사사로운 원한이 없는 입장에서 더없이 죄스러움을 갖게도 했다. 그런 면에서도 외서댁에게 쌀 열 가마니 값을 줘서 장흥으로 떠나보낸 것은 가슴 편안하고도 마음 홀가분한 일이었다.
그가 외서댁을 찾아갔다 돌아온 다음 며칠이 지나 외서댁의 어머니 밤골댁이 그의 집을찾아왔다. "자네 말 듣고 요리조리 많이 생각혀보고 이리 찾어왔네. 내 딸년 신세 저리 된것이야 다 지 팔자소관으로 치고, 앞일만 생각혀보드락도 딸린 새끼가 있으니 재가나 지대로 될 것이며, 재가럴 헌다 혀도 아시팔자 그른 년이 무신 팔자치레가 지대로 되겄어. 나 생각이나 지 생각이나 매일반인디, 그려, 워쩌크름 뒤럴 봐줄 심산인지 자네 생각얼 들어보세." "어허, 실답잖소. 나 맴이 폴세 변해뿌렀소." 고개를 외로 꼰 염상구의 대꾸였다. "워쩌?" 밤골댁은 몸을 들먹할 정도로 놀라며 소리쳤다. "와따, 배때지 빵꾸 포도시 때와논께인자 귀창에 빵꾸낼라고 그리 소리질르고 그요, 시방?" "맴이 변해뿔다니, 그 무신 쎄빠질새 날아가는 소리여. 니가 사람얼 멀로 보고 이 지랄이여, 지랄이!" 밤골댁은 곧 염상구의 눈을 찌를 듯이 삿대질을 해대며 소리쳤다. "으쩌요, 애맨소리 듣는 맛이. 가심에 콩 얹으먼 톡톡 튀겄제라?"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염상구는 밤골댁을 쳐다보며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무신 소리여?" 밤골댁은 그때서야 자신이 지난번에 염상구에게 했던 억지소리의 갚음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근디, 외서댁도 맘이 통헌 것이요?" "맴이 통허나마나, 지 신세 각다분헌께 자네허고 일 매듭짓고, 나가 살살 달게먼 말 듣겄제 워째." "고것이야 장모님이 알아서 허씨요." 염상구가 담배를 뽑아들며 불쑥 말했고, "워메, 염병헌다 문딩이!" 밤골댁이 화들짝 놀랐고, "야아야, 니 쩌 집으로 장개들기로 혔다냐?" 그때까지 바짝 쪼그리고 앉아 말의 내용을 알아내려고 눈만 깜박거리고 있던 호산댁이 아들의 팔을 덥썩 붙들었다. "머 질게 말헐 것 웂이, 쌀닷 가마니로는 터잡고 해묵을 만헌 장시가 웂고, 이왕 맘쓰는 짐에 열 가마니럴 주기로 혔소." 밤골댁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기껏해야 네댓 가마니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갑작스러움에 고맙다고 할 수도 없고, 놀라움을 드러낼 수도 없어 밤골댁은 난감해져 있었다. "워째, 심에 안 차시요?" 염상구가 눈을 치뜨며 물었다. "아니시, 아녀. 그만허먼 된 상싶으네." 밤골댁은 서둘러 대답했다.
염상구가 쌀 열 가마니를 선뜻 내놓겠다는 것하고, 밤골댁이 많아야 네댓 가마니를 기대했던 것하고는 어찌할 수 없는 현실적 경제수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힘 안 들이고 모은 돈으로 장터에서 고리대금까지 하고 있는 염상구의 입장에서는 쌀 열 가마니 정도는 손쉬운 것이었고, 시집가기 전까지 쌀 한 말을 먹었으면 잘 얻어먹고 산 것으로 치부되는 소작인의 빈한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밤골댁에게 쌀 열 가마니는 어마어마한 재산이 아닐 수 없었다.
"아이구 상구야, 니 맘 한분 잘 묵었다. 죄넌 진 대로 가고 공은 닦은 대로 가드라고, 하먼 그리 맘써서 니가 헌 일 깨끔허게 뒷감당혀야제 복받제. 나가 인자사 허는 말이다만, 그간에 저 맘씨 너른 밤골댁이 아그엄씨가 짜내는 젖얼 안 내뿔고 고이 받아갖고 쥐도 새도몰르게 나헌테 넘게줘서 니 새끼럴 키웠니라. 그리 허는 것도 하로이틀이제 질게는 못헐 일이고, 사람이나 즘생이나 새끼야 에미가 품고 키우는 것이 순리고 법칙잉께, 쌀 열 가마니 아까와라 않고 니 참말로 맘 잘 썼다. 시상사람덜이 다 니 잘혔다고 헐 거이다." 호산댁은 쌀 열 가마니가 어린것의 양육비로 건너가는 줄 알고 진정으로 기뻐하며 말하는 것이었고, 염상구는 어머니의 그 장님 문고리잡듯 하는 말이 별로 손해될 것 없다 싶어 막지 않고 그대로 있었고, 밤골댁은 염상구가 침묵하고 있는 속마음을 어머니가 대신 말하는 것이라 헤아리면서 평생 살 밑천을 장만한 마당에 애 하나 더 키우는 것 쯤이야 어려울 것 없다고 작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쌀 열 가마니 값과 함께 아이도 데려갔고, 외서댁이 벌교를 떠나기를 원해 염상구는 백남식에게 강동식이가 이미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그녀가 장흥으로 떠나도록 길을 터주었다.
염상구는 다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또 옆구리로 손을 옮기며 희정리삼구 쪽으로 먼 눈길을 보냈다. 찬바람 속에서 진하고도 끈끈한 외서댁의 체취가 물큰 맡아졌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콧날개를 벌름거렸다. 그러나 그 육감적인 냄새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꼬막맛이 제철인 이 깊은 겨울에 그 꼬막맛처럼 짠득짠득하고 쫄깃쫄깃한 그 맛에 전신을 찌릿찌릿 녹아내리며 따스한 아랫목에 눕고 싶었다. 그녀의 풍성한 젖가슴과 탄력 좋은 알몸이 눈앞에 어릿거렸다. 그 맛만을 생각한다면 외서댁을 마누라로 삼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맛만으로 세상살이를 끝낼 수는 없었다. 언제까지나 청년단에 빌붙어 살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벌교바닥의 이렇다 할 유지가 될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겹겹으로 막을 친 데다가 쉴새없이 음죽거리면서 쫄깃거리는 외서댁의 니노지는 명물중에 명물이었다. 그 명물이 가까이에 없다고 생각하자 허전하고도 서운했다. 그러나 그녀가 떠난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녀가 그대로 있었다 해도 강동식이가 밟혀 당분간 가까이 할 수 없는 기분이었고, 그리고 강동식이가 죽어버린 이상 그녀도 전처럼 그렇게 몸을 허락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려나 그녀는 떠났지만 장흥은 엎어지면 코 닿을 데였다.
"가만 있거라, 그 장관눔 이름이 머시더라?" 최익달이가 젓가락을 두어 번 상바닥에서 들었다놓았다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애치슨이지요." 유주상이 불고기를 질겅거리며 말했다. "맞소, 애치슨이. 그 애치슨인가 먼가 허는 미국눔이 영판 느자구 웂는 눔이오. 지까진눔이 먼디 쪽집게로 흰 털 뽑디끼 우리나라만 쏙 빼놓냐 그말이여. 수수만리 바깥에 앉어서 빨갱이덜이 요리 난리판굿 꾸미는지도 몰르믄서 말이여." 최익달은 열이 받치고 있었다. "위원장님 말이 맞으시오. 태평양 그너메에 태평치고 앉어서 여그 위태헌 사정 몰른께 고런 시건방진 결정을 내린 것이요. 빨갱이덜이 저리 죽자사자 지독시럽게 뎀비는 것을 알았음사 워찌그런 결정을 내렸겄소." 윤삼걸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동조하고 나섰다. "글쎄요, 문제는 애치슨이란 한 장관이 아니라 우리나라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문제 아니겠어요?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애치슨이 아니라 미국정부고, 애치슨이야 담당장관으로 발표만 한 것뿐이지요." 유주상이 표정 없이 말했다. "그리 되먼 그거 더 큰 문제 아니오! 미국이 우리나라럴나 몰라라 허는 것인디, 그리되먼 이 나라 꼬라지가 머가 되겄소!" 최익달은 두려움을 드러낸 채 흥분한 어조였다. "보나마나 빨갱이덜이 더 날칠 것이고, 종당에넌 빨갱이 손에 나라엎어묵는 것 아니겄소." 윤삼걸이 화를 터뜨리듯 말했다. "요것 참 예삿일이 아니시. 미국이 워쩔라고 맴이 그리 변해뿌렀으까? 미국이 지키는디도 빨갱이덜이 그리 악착시럽게 나댔는디, 미국이 손띠는 날에넌 더 말헐 것 머 있다고. 그나저나 우리 신세가 큰탈나게 생게부렀네." 최익달이 금방 풀죽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미국이 갑작시리 도망을 허는 것도 아니겄고, 워째 우리럴 서자 보디끼 허는 것 겉으요?" 윤삼걸이 불안한 낯빛으로 유주상에게 물었다.
그때까지 고기만 씹고 앉았던 유주상은 끄응 힘을 쓰며 자리를 고쳤다. "그것을 두 가지로 볼 수가 있겠지요. 하나는, 미국이 우리나라 공산당 정도는 자신있다 허는, 좋은 쪽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이 우리나라 정도는 지켜줄 필요가 없다 허는, 나쁜 쪽으로보는 것이지요." 유주상은 여기서 입을 다물었다. 더 말이 계속될 줄 알았던 두 사람의 가슴에는 그만 돌이 얹히는 답답함이 밀려들었다. "허먼, 유 조합장 생각으로는 어떤 쪽일 것 겉으요?" 윤삼걸이 다급하게 물었다. "글쎄요, 그걸 알 도리가 있나요. 신문을 아무리 읽어봐도 시끄럽기만 허지 나라에서도 미국 속을 모르고 있는 눈치거든요." 유주상의 목소리는 맥빠졌고, 두 사람의 가슴은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미국도 넋나간 눔에 나라여. 아, 우리나라가 그 쪼깐헌 대만만도 못허다 그것이여!" 윤삼걸이 버릇대로 밥상을 내리쳤다. "가만 있어 봇씨요." 최익달이 윤삼걸을 제지하며, "만일에 미국이 우리럴 더는 지켜줄 필요가웂다 혔을 적에 나라에서는 워쩔 심판일 것 같소?" 고개를 늘여빼며 유주상에게 물었다.
"그거야 나라 다스리는 사람들이 다 우리와 같은 입장이니까 미국을 향해 그 결정을 바꿔달라고 말하겠지요. 허나 떡을 줄 사람이 줘야 먹는 것이지 안 주기로 작정을 해버리면 아무리 졸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햐아 이것 참, 미국이 뜽금웂이 어쩐 일이까? 사람 복통해 죽을 일이시." 최익달이 검은 연기 같은 한숨을 토하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가만 있으씨요, 나헌테 존 생각이 있소." 윤삼걸이 목을 늘여 마른 침을 넘기고는, "우리가 요리 탁상공론만 허고 앉었을 것이 아니라 미국이 그 못돼묵은 정책을 바꾸라고 좌익척결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군단위로 궐기대회럴 대대적으로 엽시다." 자신의 생각이 어떠냐는듯 그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고, 최익달은 유주상에게로 눈길을 보냈다. 유주상은 벌써 쓴웃음을 입에 물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긴 합니다만 이런 촌구석에서 그래봤자 우리 목만아픈, 김칫국만 마시는 일이라니까요." "그러허먼, 우리넌 아무 방책도 웂이 빨갱이덜 손에 목심이고 재산이고 다 뺏길 때꺼정 기둘리자 그말이오?" 윤삼걸이 눈을 부릅떴다. "그럴 리야 있나요. 미국 생각이 아직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 나쁜 쪽으로만 생각해서 마음 다급하게 먹을 것이 아니라 좀더 기다려봐야겠지요. 우리만 걱정이 아니라 우리보다 더 몸다는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얼마든지 있으니까 무슨 방책을 세워도 세우겠지요." "그나저나 미국이 우리럴 이쁘게 보고 그 안전보장선인가 방어선인가에 우리나라도 끼워넣어 줘야제, 글안허고 미국이 손얼 띠는 날에는 우리덜 신세는 참말로 동냥아치 쪽박신세가 되는 것 아니겄소. 해방되고 작인이고 상것들헌테 당헌 꼴을 또 당해서야 워찌 살겄소. 그때도 미국 심아니었음사 우리가 워찌 되얐겄소. 미국이야 우리 은인이고, 빨갱이덜 씨럴 몰릴 때꺼정은 변심 말고 우리럴 지케줘야 헐 것인디, 요것 참말로 큰탈이요, 큰탈." 최익달이 또 뭉텅이진 한숨을 토해냈고, 윤삼걸도 따라서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애치슨 국무장관이 미국의 태평양 안전보장선을 알라스카.일본.오끼나와.대만.필리핀 선으로 한다는 언명에 따라 한국이 제외되자 새로운 근심거리를 안게 된 것이다.
"그것이야 아직 멀리 있는 문제니까 너무 걱정들 마시고 바로 코앞으로 닥친 농지개혁에나 손해보지 않도록 단속들 잘하십시오. 이번에 정신 똑바로 못 차리고 어물어물하는 지주들은 정말이지 거렁뱅이 쪽박신세가 될 겁니다. 앞으로 세상은 때 낀 족보나 떠받들던 옛날하고는 물론이고 일정때하고도 또 다릅니다. 자본주의 세상이다 이겁니다. 자본이 뭡니까.
돈입니다. 돈이 제일인 세상이 된 겁니다. 옛날에도 돈으로 양반을 사고 팔고 했으니 돈이야 사람사는 세상에서 안 중한 때가 없었습니다마는, 앞으로는 더욱더 돈이 판치는 세상이 될겁니다. 벌써 세상이 얼마나 변했습니까. 요새 젊은 작인놈들 나대는 꼴 보세요. 양반 우습게 알고, 뼈대 안 부러워하지 않던가요. 그게 다 기본출을 높게 보아주는 좌익사상에 물들고, 인간평등이라고 떠들어대는 자유주의 사상에 물들고 해서 그런 겁니다. 그런 놈들한테 돈푼께나 생겨봐요, 양반위세나 뼈대자랑이 통하겠어요? 위신도 체면도 힘도 다 돈이 결정하는 자본주의 세상이 오는데 이번 농지개혁에서 정신 못 차린 지주들은 볼 것도 없이 상놈이 되는 겁니다." 유주상은 금융조합장답게 말하고 있었다.
최익달은 태연하게 앉아서 큼큼 목을 다듬었고, 윤삼걸은 불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나가 글안해도 유 조합장헌테 상의헐라고 혔었는디 말이요, 명의변경을 시키고 어쩌고 허고도 안직 남은 논이 솔찬헌디, 고것얼 싼값에라도 작인눔덜헌테 찢어서 폴아야 헐 것인지, 그냥 농지개혁얼 당혀야 헐 것인지, 워떤 것이 더 유리허겄소?" 윤삼걸이 무슨 쓴 것이라도 씹는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 "글쎄요, 싼값이라는 게 얼만지가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 가격 결정이 지주 입장에서는 시기적으로 아주 불리합니다. 명의변경 날짜를 작년으로 소급작성하는 것이야 담당직원한테 몇 푼 집어주면 되니까 하등 문제가 아닙니다만, 농지개혁이 곧 실시될 거라는 소문이 이리 자자한데 값이 아주 싸지 않고서야 작인들이 사려하겠어요? 농민들도 얼마나 귀가 밝고 똑똑해졌습니까. 시기적으로 가격 결정권이 작인들한테 있는 형편이니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곤란하군요." "빌어묵을 것, 나도 염전을 맹글 수도 웂고." 윤삼걸은 신경질적으로 성냥을 그어댔다.
"그보담도 더 중헌 문제가 있소. 작년 시월에 잽혀들어갔든 들몰것들이 풀려나갖고 또 들고일어날 것이라든디, 그 소식 들었소?" "그려라?" 최익달의 말끝과 윤삼걸의 놀라는 소리가 겹쳐지고 있었다. "고것덜이 또 난장판을 지기먼 애써 숨콰둔 논할라 뺏기게 될 판이오. 고것덜이 다시 일어나덜 못하게 막는 방도가 급선무요."
최익달이 구겨진 얼굴로 짭짭 입맛을 다셨다. "그눔덜이 물줄기니 둑을 쌓겄소, 바람이니 포장을 치겄소. 또 일어나게 냅둡시다. 또 일어나기만 허먼 그때는 주모자 눔덜얼 빨갱이로 몰아치도록 손을 쓰는 것이오. 한분 잽혀들어갔다가 폴려난 눔덜이 또 그 짓거리헐 때넌 빨갱이로 몰아치기가 딱 좋소." 윤삼걸이 단호하게 말했다. "고것 한분 쓸 만헌 방법이요." 최익달이 폭넓게 고개를 끄덕였고, 유주상은 의미모호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김종연과 서인출 등 일곱 명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한 번의 시위로 석 달 동안이나 옥살이를 한 셈이었다. 계엄하의 집단시위를 주동하여 공공질서를 파괴하고 민심을 교란하였으며, 로 계속된 거창한 내용의 조서 탓도 있었지만, 변호사가 붙지 않은 소작쟁의 사건에대해서는 법원에서 자꾸 뒤로 미룬 탓이 더 컸다. 살인이나 방화가 동반되지 않은 단순 소작쟁의 사건에 대해서는 그런 식으로 시일을 끌어 집행유예로 내보냄으로써 소작쟁의를 막고자 하는 판검사들의 의도가 작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가 어려웠다.그런 눈치는 당사자들이 먼저 알아챘고, 그래서 그들의 기는 꺾인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살아 올랐다. 지주만이 아니라 판검사한테까지 당했다는 억울함이 그들의 가슴에 또 하나의 켜를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가 진작에 다 알고 있었든 일이지만서도 요분에 당해봉께로 법얼 맹근다는 국회의원눔덜이나 법얼 공평하게 시행헌다는 판검사눔덜이나 모다 지주눔덜허고 한통속이란 것이 더 확연해졌소. 거그다가 관리에 군경꺼지 한울타리럴 치고 있는 판이니 우리편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웂는 것이요. 요런 판굿에서 우리가 우리 밥통얼 지대로 찾아묵자먼 워째야 쓰겄소. 우리 찌리 뭉치는 방도밖에 웂소. 선수머리 뻘맹키로 찐득찐득허게, 상답서 난 찹쌀떡맹키로 쫀득쫀득허게 우리찌리 똘똘 한덩어리가 되야 쓴다 그것이요. 우리가 요분참에 우리밥통 못찾으먼 배꼽이 등짝에 들러붙는 신세 영영 못 면허게 될 것이요." 약간 수척한 모습인 김종연의 눈에서는 전과 다른 힘이 뻗쳐나오고 있었다.
"우리가 이 시상얼 삼스로 질로 중헌 것이 머시요! 밥얼 지대로 묵고 사는 것 아니겄소. 근디, 작인덜 살기 좋게 혀준다는 농지개혁이 벌어지는 판에 우리넌 지주덜 드럽게 만내 소작신세만도 못허게 굶어죽게 생겼소. 안 굶어죽을라먼 워째야 쓰겄소." 평소에 별로 말이 없던 서인출도 말재주 좋은 김종연의 열기에 못지 않았다. 그는 자형 하대치 때문에 언행을 될수 있는 대로 조심을 해온 처지였는데 이번 일을 당하고는 분함과 오기가 한꺼번에 뻗질러올라 어느 면에서는 김종연보다 더 강한 발언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고 있었다.
두 사람보다 나이가 많은 유동수도 마음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앞에 나서서 자극적인 말은 하지 않았지만 뒤에서 두 사람의 행동을 응원하고 있었다. 평소에 늘 온건한 태도로 조심스럽게 살아온 그로서는 큰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이 이번에 계획하는 것은 전과 다른 방법이었다. 관을 상대로 지주들의 불법행위를 고발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이 이쪽만 당하므로 각기 소작인별로 뭉쳐 지주집으로 직접 치고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작년 하반기에 실시한 농가실태조사라는 것이 농지개혁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갇혀 있는 동안에 알게 되어 그들의 분노는 한층 더 뜨거워졌다. 농가실태조사를 해간 그대로 자기네들이 소작하고 있는 논이 농지개혁을 통해 분배되리라 믿었던 것이고, 읍사무소 직원이나 이장도 그런 식으로 말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주들의 논 빼돌리기를 읍사무소에서 막아달라고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참고조사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농사실태조사가 그러한 오해유발을 할 염려가있었기 때문에 그 무관성을 홍보하라는 지시가 뒤따랐지만 좌익문제에 정신을 팔고 있던 군에서부터 그 문제를 소홀히 지나치게 되어 줄줄이 그냥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시래기죽을 한 사발 비우고 트림을 한 차례 하고 나서 담배를 말고 있는데 누가 찾아왔다는 말에 김종연은 지게문을 팔굽으로 밀쳤다. "아재, 울 아부지가 쪼깐 오시라고 그요." 문이 열리자마자 계집아이의 카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니가 누구냐?" 짙어진 어둠 속에 선 계집아이를 향해 김종연은 눈길을 모았다. "나요, 필자도 모르요?" 계집아이의 목소리가 더 야물게 카랑했다. "잉, 니가 워쩐 일이냐?" 저 쥐방울만한 것꺼지 애비 탁해서 느자구 웂기넌, 김종연은 싸악 기분이 상하고 있었다. "아부지가 불른당께라." "무신 일로?" "나가 아요." "니 여그 말고 딴 디도 심바람 댕기냐?" 김종연은 이상한 생각이 스쳐서 물었다. "동수아재헌테 말혔고, 인자 인출이 아재헌트로 갈 참이어라." "알었다." 자기 혼자만이 아닐거라는 예감의 적중에 김종연은 이상스러운 거부감을 느꼈다. 이제 마름 오동평은 필요한 존재도, 두려운 존재도 아니었다. 그는 오직 지주의 편에 서 있는 또 하나의 간사한 적일 뿐이었다. 그의 꼴은 보기도 싫었지만 그렇다고 만나는 것은 기피할 이유는 없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긴 했지만 김종연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일어났다.
"자네덜이 나헌테꺼정 유감을 묵은 모냥이제? 풀려나고 나서 낯이라도 비칠지 알었등마나가 요리 뫼셔서야 대면덜얼 허게 되네잉." 오동평이 마뜩찮은 얼굴로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오라고 호출을 해놓고, 뫼셔라?" 김종연이 툭 쏴질렀다. "아아니, 술 한잔썩 허자고 헌말이 자네 귀에는 호출로 딛기든가?" "그런 말 못 들었소." "요런 빙신 겉은 가시네, 워야,필자야아!" 오동평은 방문을 떠다밀며 고함을 질렀다. "다 끝난 일, 냅두씨요. 어린 것이 어둔디 심바람헌 것만도 고상혔소." 유동수가 말했다.
김종연이 이상하지 않느냐는 눈길을 서인출과 유동수에게 빠르게 옮겼다. 동감을 표시하는 세 사람의 눈길이 등잔불빛으로 흐린 허공에서 순간적으로 합해졌다. "필자야아, 술상 싸게 내오니라아." 오동평은 어딘가 허풍기가 섞인 듯한 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곧 술상이 나왔다. 겸상소반에는 음식이 그득했다. 상 가운데 놓인 통째로 삶아낸 닭이 유별나게 눈길을 끌었다. 오동평이 전에는 한번도 차려낸 바 없는 걸고 푸진 술상이었다. "짜아, 고상덜 허고 나왔는디 한잔썩 허드라고 우리." 오동평이 포개진 술사발을 하나씩 건네며 상으로 바싹 다가들었다. "요것을 그냥 목으로 넴게서는 안 된다는 무신 냄새가 폴폴 나는디라?" 김종연이 오동평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 주전자를 들던 오동평이 멈칫하더니, "아니시, 아녀, 냄새넌 무신 냄새가 폴폴 나? 고상덜 허고 나왔응께 그냥 한잔 허잔 것이제." 그는 태연한 척하며 손까지 내저었다. 그러나 세 사람은 그 어색스런 몸짓에 담긴 그 어떤 목적을 동시에 읽어냈다. "그러덜 말고 용건부텀 내놔봇씨요. 술 다 묵어불고 우리가 아재 말 못 들어주먼 본전 생각나 배창시 꾀일 것잉께요." 김종연은 농담같은 말을 딱딱한 표정으로 하고 있었다. "자네 시방 나럴 멀로 보고 허는 소리여. 나가 요까징 것 아까와 배창시 꾀일 쫌팽이고 빙신으로 뵌가?" 오동평은 화를 내는 척 호기를 부렸다. "그러먼 되얐소. 토해낼 때 토해내드락도 말대접혀야 쓴께 묵고보드라고." 서인출이 가시박힌 소리를 하며 김종연의 무릎을 툭 쳤다. "어이, 하먼 그래야제." 오동평이 기세 좋게 주전자를 들어올렸다. 김종연은 서인출에게 눈총을 쏘며 묘하게 웃었고, 유동수는 헛기침을 하며 술상으로 다가앉고 있었다.
막걸리 한 사발씩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닭부터 뜯기 시작했다. 시래기죽을 먹었을 뿐인 세 사람의 손에서 닭 한 마리는 금방 자취를 감추었다.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세 사람의 모습을 오동평은 경멸하듯 천시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막걸리를 다시 한 잔씩 비우고 나자 오동평이 입을 열었다.
"자네덜이 각단지게 지주집으로 밀고 들어갈 심판이람시로?" "그러요." 기다렸다는 듯 김종연이 말을 받았다. "근디 말이시, 글안허고는 안 될랑가아?" 오동평은 낮으면서 끈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에 무슨 뜻인가를 담고 있는 은근함이었다. "글안허게 헐라먼 빼돌린 논얼도로 지자리에 갖다놔야제라." 이미 막보기로 작정을 해버린 김종연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어허, 그리 대꼬챙이맹키로 말허덜 말고 말시, 나 말 잠 들어보드라고." 오동평은 목소리를더 낮추며 어깨를 숙이고는, "시상일이란 것이 말시, 그리 무대뽀로 몰아때린다고 되는 것이아니시. 워쨌그나 간에 자네덜이 그리 발싸심허는 것도 다 한 평상 살아보자고 허는 짓인디,워쩐가, 나가 새중간에 서서 자네덜이 지끔 부치고 있는 논얼 반값에 넘게주게 헐 팅께, 자네덜언 앞장스는 일에서 발얼 빼는 것이." 그의 은밀한 말이었다.
방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김종연은, 에라이 잡새끼야, 뒤져서도 마름질이나 해처묵어라,하는 말을 참아내고 있었고, 서인출은 가소롭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유동수는 심장의 박동이 갑자기 빨라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반값이 아니라 공짜로 줘도 우리넌 그리 못허겄소!" 서인출의 말이었다. 김종연이 아니고 서인출인 것에 유동수는 놀라며, 쟈가 즈그 자형을 탁해간다냐 어쩐다냐, 생각하며 머쓱하게 건너다보고 있었다. "아니 이사람아, 공짜로도 그리 못허겄다니, 고것이 무신 심뽀여?" 오동평이 어이없다는 얼굴이었다. "우리넌 그런 드런 짓거리 험스로 살고 잡지 않소. 빼돌린 논얼 지자리로 안 돌려놓먼 우리넌 끝꺼정 한덩어리로 뭉쳐 뎀빌 것잉께 그리 아씨요. 이약끝났소." 김종연이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서인출이 일어났고, 유동수도 따라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