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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스크랩 1921.05.20 ?독립운동가 유근 사망
환단 추천 2 조회 62 15.06.30 21:26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1921.05.20  독립운동가 사망

 

 

 

 

 

 

 

 

 

 

 

 

유근[ 柳瑾 ]

1861(철종 12) 경기 용인~1921.

언론인·애국계몽운동가.

 

 

한말에는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고, 일제강점기에는 대종교 지도자로서 언론·교육사업에 종사했다. 본관은 진주. 호는 석농(石?).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고, 1894년 상경해 관직에 나갔으나 1년 만에 그만두었다. 독립협회가 창립되자 1897년경 이에 가입했고, 토론회를 지도하며 국민을 계몽하고 자유로운 논쟁을 통해 정부정책을 비판했다. 1898년(광무 2) 남궁억(南宮檍)·나수연(羅壽淵)·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대한황성신문 大韓皇城新聞〉을 인수해, 그해 9월 5일 국한문혼용의 〈황성신문 皇城新聞〉을 창간하고 이를 통한 사회계몽에 힘썼다. 1898년 11월 독립협회 간부 체포와 협회 해산 결정에 항의하는 만민공동회가 전개되자 간부로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그해 12월 정부가 만민공동회를 불법화하고 강제해산을 결정하자 약 400여 명의 회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뒤 석방되어 〈황성신문〉의 주필로 활약하면서 애국정신의 고취에 힘썼고, 1902년 이후 휘문의숙의 숙감(塾監)·숙장(塾長)으로 교육사업에도 종사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장지연이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을사조약과 조약에 찬성한 대신들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게재했는데, 이 글을 쓴 장지연이 너무 격분해 끝을 맺지 못하자 그가 마무리했다. 이 사건으로 장지연이 일본경찰에 붙잡히고, 〈황성신문〉은 무기정간당했다. 1906년 2월 〈황성신문〉이 속간되자 그해 9월 총회에서 사장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1910년 6월까지 신문발간의 책임을 맡았다. 1906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에 가입했고, 대한자강회가 해산된 후에는 1907년 11월 장지연·윤효정(尹孝定) 등과 함께 대한협회의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또한 1907년 4월 양기탁(梁起鐸)·안창호(安昌浩) 등이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자 이에 가입해 언론·출판·교육 부분에서 활동했고, 1909년 나철(羅喆)·오기호(吳基鎬)·김교헌(金敎獻) 등이 단군교(檀君敎:뒤의 大倧敎)를 창립하자 이에 가입했다. 1910년 최남선(崔南善)이 주도하는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의 조직에 참여, 장지연·김교헌과 함께 고전 간행에 힘을 기울였다. 1915년 김성수(金性洙)가 인수한 중앙학교(中央學校) 초대 교장을 지냈으며, 경성고등보통학교부설 교원양성소 학생들이 조직한 조선물산장려계(朝鮮物産奬勵契)의 민족운동을 지도하다가 1917년 박중화(朴重華)·안재홍(安在鴻) 등 130여 명과 함께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1917년 대종교의 2대 교주 김교헌이 탄압을 피하여 만주로 망명하자, 서울 남도본사(南道本司)에서 강우(姜虞) 등의 간부진과 함께 교무를 전담했고, 이듬해에는 정교(正敎)의 지위에 올랐다. 1919년 4월에 개최된 13도 대표자의 국민대회에 대종교계 대표로 참석하고, 임시정부인 한성정부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붙잡혔다. 1920년 4월 〈동아일보〉의 창간 때 양기탁과 함께 편집고문으로 추대되었고, 창간호 1면에 〈아보(我報)의 본분과 책임〉이란 논설을 썼다. 저서로 〈신정동국역사 新訂東國歷史〉·〈초등본국역사 初等本國歷史〉·〈신찬초등역사 新撰初等歷史〉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네이트 백과사전

 

 

유근  민족계몽에 앞장서며 <동아일보>를 창간한 영원한 언론인

지방열(地方熱)을 없이하라. 이것은 조선인의 고질(痼疾)이니 사회를 위하여 활동하는 자,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자는 마땅히 이에 조심하여 그 근절(根絶)을 기(期)하라.

-선생의 유언 중에서(1921.5)-

지방 선비에서 서울의 관료로 발을 내딛다

유근 이미지 1

유근(柳瑾, 1861.9.26~1921.5.20) 선생은 1861년 9월 26일 경기도 용인군 용인읍 남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석농(石?)이다. 동아일보사에서 같이 근무한 적이 있는 유광열은 훗날 회고록 [기자반세기]에서 선생을 “학문과 문장에 능한 재사”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를 보아 선생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한 선비로서 문장에 능했던 것 같다.

향리에서 한학에 정진하던 선생이 상경한 것은 1894년 갑오년이다. 이때는 정세가 매우 급박했던 시기였다. 민중들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켜 일제를 비롯한 침략 세력에 저항하고 민씨 세도정권의 수탈에 반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빌미로 일본과 청나라는 한국에 군대를 파견하여 각기 세력 확장을 꾀하다가 결국 청일전쟁을 도발하였다.

한반도가 청일전쟁의 격전장이 된 이 시기에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이 맞닥뜨린 성환전투, 안성전투 지역은 선생의 향리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선생의 위기감은 누구보다도 더 했을 것이고, 그런 위기 상황을 선비로서 앉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미력이나마 보태려고 상경하였다.

상경한 이듬해 4월 선생은 탁지부 주사로 임명되어 김홍집 내각에 참여하였다. 김홍집 내각은 1894년 6월 일본군의 경복궁 습격으로 민씨정권이 무너짐에 따라 성립한 온건 개화파 정권이었다. 선생을 주사로 임명한 탁지부 대신은 김홍집 내각의 실세 가운데 한 사람인 개화인사 어윤중이었다. 이를 볼 때 선생은 이때 이미 한학을 수학한 봉건 유생의 한계를 극복하고, 근대적 사고와 이념을 수용한 개신 유학자로 변신해 있었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근대화를 통한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관료생활은 길지 않았다. 김홍집 내각이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총리대신 김홍집을 비롯한 어윤중 등 갑오내각 대신들이 척살되는 상황에서 선생이 새로 들어선 이완용·이범진 친러내각에서 자리를 보전하고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해 3월 선생은 탁지부 주사 자리를 물러났다. 이는 선생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민족적으로는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이후 선생이 언론과 교육, 그리고 계몽운동단체에 참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조국 근대화와 자주화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민족의 사표(師表)가 되었기 때문이다.

언론인과 저술가로 성장하다

선생은 우선 1896년 7월 결성된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열리는 각종 토론회를 지도하였다. 특히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 때에는 간부로서 활동하며 주권 수호와 민권 신장에 노력하다가 독립협회 해산 직후 붙잡혀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선생은 1898년 남궁억?나수연?장지연 등과 함께 국한문 혼용의 <황성신문 皇城新聞>을 창간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며 민족계몽에 앞장서 갔다.<황성신문>의 전신은 1898년 3월 2일 창간된 <경성신문 京城新聞>이다. <경성신문>의 사장은 윤치호, 사무원은 정해원이었다. <경성신문>은 매주 수·토요일 2회 발행하며 “각도 각군에 송출하여 각항(各巷) 상민의 이익을 돕고자 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경성신문>은 그 해 4월 6일부터 제호를 <대한황성신문 大韓皇城新聞>으로 바꾸어 발행하였는데, 이때부터 선생은 주필을 맡았다고 알려진다. 이 신문은 1898년 9월 5일 <황성신문>으로 제호를 다시 바꾸면서 일간으로 창간되었는데, 선생은 여기에 참여한 것이다. 그리하여 일정 기간 <황성신문>의 주필, 논설위원 등으로 활약하다가 휘문의숙으로 옮겨 교육 계몽운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런데 선생이 <황성신문>에서 활약하던 때인 1905년 11월 일제는 무력으로 광무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함으로써 국권을 강탈하였다. 이에 선생은 을사늑약에 서명한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 대신들과 일제 침략자들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광무황제와 각부 대신들을 협박한 사실을 신문에 게재하여 그 간악함을 폭로해서 필주(筆誅)를 가한 것이다.

[신정동국역사](1906). 휘문의숙 인쇄부에서 발행한 편년체 역사 교과서로 유근 선생과 원영의(元泳義)가 함께 저술한 책이다.

특히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장지연이 을사늑약을 폭로,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유명한 논설을 쓸 때, 그가 너무 격분한 나머지 끝을 맺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에 장지연과 사돈관계로 절친했던 선생이 그 후반부를 끝내고 밤새껏 인쇄하여 배달함으로써 한국 언론사에서 가장 빛나는 논설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장지연은 이 논설이 문제가 되어 일제에게 체포되었고 <황성신문>은 무기정간 당하고 말았다.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되자 선생은 휘문의숙의 숙감과 숙장 등을 연이어 맡아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그러다가 선생이 다시 언론계로 돌아와 <황성신문>의 제5대 사장에 추대된 것은 1907년 9월 17일이었다. 이후 선생은 경술국치 직전인 1910년 6월 11일까지 약 3년간 <황성신문> 사장으로 재임하면서 언론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정신 함양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나아가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존망의 위기 상황에서 청년 학생들을 비롯한 민족대중의 역사의식을 정립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국사 편찬에도 힘썼다. 그것이 1906년 선생이 원영의와 함께 저술한 [신정동국역사(新訂東國歷史)]의 편찬이었다. “조선이라 함은 국(國)이 동방에 재(在)하야 조일(朝日)이 선명(鮮明)함을 취함이라”로 시작되는 [신정동국역사]는 국한문본으로 단군부터 고려까지 서술한 편년체 사서로서, 당시 휘문의숙을 비롯한 민족사학의 역사 교과서로 활용되었다.

역사와 민족에 대한 관심에서 민족 종교로

또한 선생은 이 시기 계몽운동단체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해 갔다.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이 그것이었다. 대한자강회는 을사늑약 강제 체결 직후 해산되었던 헌정연구회의 주도세력들이 1906년 4월 결성한 계몽운동단체였다. 1907년 7월 ‘정미7조약’의 체결 직후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기까지, 교육 진흥과 실업 발전을 목표로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대시키고 <대한자강회월보>를 발행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역할을 하였다. 선생은 여기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교육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대한자강회가 각지에 설립하였던 사립학교의 민족교육을 위해 역사 교과서로 [신정동국역사]를 편찬하였다.

대한자강회가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자 그 해 11월에 권동진, 남궁억, 장지연 등과 함께 대한협회를 결성하였다. 이 같은 표면단체에서의 활동과 함께 선생은 비밀결사인 신민회에도 가입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해 갔다. 신민회는 1907년 4월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조직된 비밀결사였다. 중심인물은 안창호였는데, 서북지방 기독교 신자를 중심으로 교사, 학생 등 800여 명이 가입해 있었다. 중앙의 집행부는 양기탁, 이동녕, 전덕기 등이 맡고, 지방에는 점 조직 방식으로 군 단위까지 책임자를 두고 있었다.

신민회는 계몽운동의 전 부문을 포괄하고 있었다. 교육 계몽운동 기관으로는 평양의 대성학교, 정주의 오산학교, 강화의 보창학교 등 민족 사립학교를, 실업 진흥기관으로는 태극서관, 자기회사, 유기회사 등 민족 기업을, 언론 계몽기관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사실상 운영했고,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청년 운동까지 관장하였다. 이를 통해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민족의 실력양성을 도모하며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선생은 여기에 가입하여 언론, 출판, 교육 부문에서 활약하였다.

특히 선생은 이때 초등학생들의 주체적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1908년 [초등본국역사 初等本國歷史], 1910년 [신찬초등역사 新撰初等歷史] 등 역사 교과서를 편찬하였다. 1908년에 편찬된 [초등본국역사]는 60면의 국한문본으로, 단군부터 융희황제의 즉위까지 서술된 역사 교과서이다. 1910년에 편찬된 역사 교과서인 [신찬초등역사]는 모두 3권으로 1권 59면, 2권 60면, 3권 63면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 또한 국한문본으로 단군부터 융희황제까지 서술되었는데, [초등본국역사]를 보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선생의 민족과 역사에 대한 관심은 민족종교로까지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1909년 나철,오기호 등이 대종교를 창립하자 이에 입교하였다. 대종교에서의 활동은 말년까지 계속되면서 교무 발전에 노력하여 최후까지도 정교(正敎)의 중책을 맡고 있었다. 특히 1917년 포교와 독립운동을 위해 제2대 교주 김교헌이 만주로 망명하자 서울에서 강우 등 잔여 간부들과 교무를 전담하며 해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민족 교육과 정부 수립에 참여하며 고초를 겪다

‘국민대회취지서’(1919.04). 1919년 4월 23일 서울에서 열린 국민대회에서 한성정부 수립을 선포하며 발표된 취지서이다. 여기에 유근 선생이 13도 대표자로 참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경술국치 이후 1910년대 무단통치 상황에서도 선생은 나름대로의 민족운동을 구상하여 실천하여 갔다. 선생은 전통문화의 계승과 보존에 큰 관심을 두었다. 한국 역사와 역사 교육에 관심이 지대했던 선생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고, 또 거기에 바로 ‘민족 혼’이 깃들어 있다고 보았던 까닭이다. 1910년 한국 전래의 고전 보존과 반포, 그리고 전통문화의 선양을 목적으로 최남선이 설립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 참여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여기서 선생은 김교헌, 장지연, 주시경 등과 함께 고전 간행 사업의 실무를 맡았고, 이인승과 함께 [신자전 新字典]도 간행하였다.

그러다가 선생은 1915년 5월 중앙학교장에 취임하였다. 약 3년간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1917년 사직하였는데, 아마도 비밀결사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勵?) 문제와 관련된 듯하다.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 부설 교원양성소 재학생들은 일제에 탈취 당한 경제권을 탈환하기 위해서는 실업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민족경제의 자립을 목적으로 조선산직장려계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해외에서 발행되는 독립운동 관련 신문들을 들여와 보면서 정신적 단결을 이루어가고 있었다. 나아가 협의원으로 선생을 비롯한 김두봉, 백남운, 남형우, 박중화 등 유력 인사들을 추대하여 이들의 지도를 받으며 본격적인 활동을 계획하여 갔다. 그러던 중 1917년 조직이 탄로나 관련자 모두가 체포되고 말았다. 이 때 선생도 이들을 배후에서 지도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곤욕을 치렀고 그로 말미암아 중앙학교장을 사임하였다.

이후 곧 3·1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을 통해 우리 민족은 국내외에 독립을 선언하였다. 독립국가로서 주권을 행사할 정부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각지에서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전개되었다. 노령 연해주에서, 중국 상해에서, 그리고 국내에서도 그런 노력은 지속적으로 분출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한성정부 수립 운동이었다. 이는 요원(燎原)의 불길마냥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가는 거족적 31운동을 지도하고, 일제 타도 이후 자주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같은 구상 아래 1919년 3월 17일 한성정부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 모임이 서울 한성오의 집에서 홍진, 한남수, 이규갑, 김사국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여기서 이들은 국민대회를 열고 각 지방 대표를 선출하여 정부 조직과 조각(組閣)을 결정하기로 하였다. 4월 2일 이들의 주도로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 대회가 개최되었고, 여기서 한성정부의 조직과 조각이 정비, 확정되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4월 23일 국민대회를 통하여 13도 대표자 명의의 ‘국민대회취지서’와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하는 한성정부의 각원 명단을 발표함으로써 대내외에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국민대회취지서’를 보면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한성정부를 수립한 13도 대표자 가운데 한 분이 바로 선생이었다. 선생은 직·간접적으로 한성정부의 수립에 참여한 것이다. 선생을 비롯한 13도 대표자들은 ‘국민대회취지서’를 통하여 국민대회 소집 취지와 6개조의 결의사항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민대회취지서
우리 조선 민족은 지난번 손병희씨 등 33인을 대표로 하여 정의와 인도에 바탕을 둔 조선 독립을 선언한지라. 이제 그 선언의 권위를 존중하여 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하며 인간 필연의 요구에 따르기 위하여 전 민족의 일치된 행동으로 대소의 단결과 각 지방 대표를 하나로 모아서 본회를 조직하고 이를 세계에 선포하노라. (중략)

결의사항
一. 임시정부 조직의 건
一. 일본정부에 향하여 조선에 대한 통치권의 철거와 군대의 철퇴를 요구할 건
一. 파리강화회의에 출석할 인원을 선정할 건
一. 조선인으로 일본 관청에 재직하는 관공리는 모두 퇴직할 것
一. 일반 인민에게 대하여 일본 관청에 모든 납세를 거절하게 할 것
一. 일반 인민은 일본 관청에 대하여 모든 청원과 소송 행위를 하지 말 것

이것이 문제가 되어 선생은 또다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동아일보>의 이름을 짓다

<동아일보> 창간호에 실린 유근 선생의 논설. <동아일보> 1920년 4월 1일자.

이후 선생은 생애의 마지막 사업이 된 <동아일보>의 창간과 발행에 매달렸다. 이는 선생 서거 직후 <동아일보>에 보도된 ‘오호(嗚呼) 석농선생’에도 잘 나타나 있다.

중앙학교장에 취임하여 다시 교육사업에 힘을 기울인지 삼년만에 후진에게 사업을 사양하고 이래 한량(閑良)하던 중 재작년(1919) 독립운동이 일어나며 우리민족의 문화발달이 긴급하다는 부르짖음이 유식자 사이에 일어남에 선생은 다시 신문사업이 가장 긴요함을 부르짖고 동아일보사의 창설을 주창하였으니 선생은 실로 동아일보사의 설립을 발론한 최초의 한 사람이며.

<동아일보>라는 제호도 선생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사실은 “동아일보라는 이름도 선생의 정한 바이라”고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가 잘 말해준다. <동아일보>의 기자로 근무했던 유광열 도 저서 [기자반세기]에서 “이상협이 신문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였으면 좋겠느냐고 상의하였더니, 선생은 ‘우리 민족이 장래 살아가자면 동아 전체를 무대로 하여야 될 터이니 동아일보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그대로 지은 것이라 한다”고 회고하고 있다.

1920년 4월 <동아일보>가 창간될 때, 선생은 언론계의 원로로서 양기탁과 함께 편집 감독으로 추대되었다. 그리하여 창간호 1면에 ‘아보(我報)의 본분(本分)과 책임(責任)’이라는 논설을 써서 다음과 같이 민족지로서의 책임을 굳세게 이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동아일보야, 너의 부담 무겁도다. 너는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이다. 그의 사상, 그의 희망, 그의 목표, 그의 심리 일일이 보도하여 그로 하여금 능히 기립(起立)케 하며 그로 하여금 능히 발전케 하며 그로 하여금 능히 비약케 함은 믿노니 너를.

너는 조선 민중의 권리보호자이다. 그의 정신, 그의 정의, 그의 활동 일일이 지배하여 그로 하여금 능히 압제를 탈면(脫免)케 하며 그로 하여금 능히 권능을 시사(施使)케 하며 그로 하여금 능히 언론을 표현케 하여 인(人)의 고유한 자유를 유지함은 믿노니 너를.

너는 조선 민중의 문화소개자이다. 그의 교육, 그의 경제, 그의 정치 일일이 지도하여 그로 하여금 능히 개명케 하며 그로 하여금 능히 부유케 하며 그로 하여금 능히 공평정직케 하며 세계문명에 병가구치(幷駕驅馳)함은 믿노니 너를.

<동아일보>가 창간된 이후 선생은 합당한 일을 얻었다고 매우 흡족해 하며 편집 감독으로 소임을 다해 갔다. 영원한 언론인, 그것이 바로 선생의 진면목이었다. 그러던 중 선생은 숙환으로 1921년 5월 20일(음력 4월 13일), 환갑을 바로 눈앞에 두고 서거하였다. 서거 전 “지방열을 없이하라. 이것은 조선인의 고질(痼疾)이니 사회를 위하여 활동하는 자,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자는 마땅히 이에 조심하여 그 근절(根絶)을 기(期)하라”고 당부하였다. 오늘의 현실을 생각하면, 선생은 마지막까지도 민족의 사표로서 소명을 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천성이 충후(忠厚)하였으니 실로 우리 신문사의 주석일 뿐 아니라 우리 반도 언론계의 원로이며, 평생을 사회에 바쳤으니 다만 교육계의 공로자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장로이었다”고 한 당시 <동아일보>의 선생에 대한 평가는 실로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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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6.30 21:37

    첫댓글 역경의 애국지사들 우리 모두가 그 충정을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 15.07.01 09:03

    베푸는 7월을 맞이합시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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