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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0장 17-21절
버릴 권세, 다시 얻을 권세로 나타내신 사랑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을 비롯하여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지만 참된 목자를 찾아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예수님 시대만이 아니라 예수님 시대로 오기까지 구약의 전 역사를 보면 수없이 많은 거짓 목자들이 있었고, 그 결과 북이스라엘도 망하고 남유다도 망한 것처럼 보이는 그런 역사였음을 보여 줍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는 모세와 같은 자도 있었습니다. 다윗과 같은 자도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수많은 선지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누구도 예외 없이 오실 메시야를 증거 했습니다. 그 메시아로 인하여 구약의 택한 백성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혈통으로서의 이스라엘 모두가 구원을 받았는가? 그들 모두가 참된 목자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였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결과가 북이스라엘의 멸망이요, 남유다조차 수치스러운 일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던 겁니다.
이런 역사의 연장선에서 바리새인을 비롯하여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있었던 것이고, 바로 그들을 의식하면서 말씀하신 것이 목자와 양의 비유인 것입니다. 즉 너희가 참된 목자라면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자여야 한다. 그런데 내가 양의 문이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온 것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해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런 나를 통해 들어가지도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자도 막아서고 있다. 그런 너희를 참된 목자라 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밝히시기를 내가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시는가?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조차 버리는 자이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왔습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면서 나로 말미암아서만 구원이 있고, 또한 꼴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 것이 자신으로 말미암아서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조차 버리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누가 자기 양 떼인지를 아십니다. 성부가 성자를 알고 성자가 성부를 아는 것처럼, 성부가 자신에게 맡기신 양 떼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들을 위하여 예수님은 자기 목숨까지 내어놓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자기 양 떼를 아시는 대상은 어디까지 확대되는가? 우리 안에 있는 양 떼만이 아니라 우리 밖에 있는 양 떼까지 확대됩니다.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까지 확대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다 영적 이스라엘이 아니듯, 이방인이라고 해서 다 영적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유기하셨다고 할 때 아직까지는 양 우리 안에 있지 않지만 장차 양 우리 안으로 인도하여 들이실 자들, 바로 그들을 위해서도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시는 분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목자요, 선한 목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절도요 강도요 도둑으로 칭해지고 있는 거짓 목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양 떼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지 않습니다. 양 떼보다 자기 목숨을 더 아까워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양 떼를 위협하는 이리와 같은 짐승이 오면 양 떼들을 지키고 돌보기보다는 양 떼들을 버리고 도망합니다. 이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삯꾼으로 칭하시는데, 오직 삯을 위해서만 일하는 자들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들을 의식하면서 오늘 본문은 선한 목자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 내가 양을 알고 결국 양도 나를 아는 그런 긴밀한 관계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데, 17절입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왜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로서 자기 목숨까지 버리시는가? 버리신 목숨을 다시금 취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양 떼들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까지 버리실 수 있기 때문에 선한 목자라 할 수 있지만, 선한 목자의 조건은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버리신 목숨을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잘 알고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시면서 그것이 곧 자기 양 떼들을 위한 것이라고 하시는 것은 그의 죽음으로서만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맨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시고 난 뒤 행위언약을 맺으셨는데, 창세기 2장 16절과 1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아담은 자신의 아내와 함께 먹지 말라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 결과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이 즉시 나타났고 또한 점진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아담과 맺은 행위언약은 아담 개인과만 맺은 언약이 아닙니다. 모든 인류의 대표로 맺은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리고 그 결과는 로마서 3장 10절에서 12절을 통해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런 사실은 선과 악의 기준인 하나님의 율법에 비춰보면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율법이 선과 악의 기준이라고 할 때 율법을 완전히 지키면 그로 말미암아 영생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레위기 18장 5절입니다.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그러나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다고 할 때 죄인으로서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성경은 없다고 가르칩니다. 오히려 율법이 선과 악의 기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범위 안에서 죄를 깨닫는 용도로 사용하십니다. 로마서 3장 20절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나 이어지는 로마서 3장 21절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하면서 22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23절 이하에서 복음을 좀 더 상세히 설명하는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3:23-26)
왜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야 하는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게 되었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죄의 종으로 있던 자들을 사기 위해 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값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로 드리신 것입니다. 화목 제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피 흘려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 하는가? 자기 양 떼들을 위해서요, 자기 양 떼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3장 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의 죽음 자체가 의롭게 만드는 것인가?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의롭게 만드는 것은 그의 죽음이 아니라 부활에 있습니다. 즉 죽음은 죄 사함과 관련되어 있고, 그의 부활이 의롭다 하심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로마서 4장 25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여기에 인간이 무엇이라도 한 것이 있는가?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4절은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심의 동력인, 유효적 원인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 은혜와 긍휼, 사랑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했고, 또한 죽음만이 아니라 부활에 이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 17절에서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의 죽음만이 자기 양 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부활도 자기 양 떼를 위한 것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 양 떼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목숨을 죽음으로 내놓으시는 것이고, 죄 사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양떼들의 의롭다 하심을 위해 그는 내어놓으셨던 목숨을 다시금 취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때문이란 것입니다. 얼핏 이해하기 힘든 말씀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는 이유로 그의 죽음을 말할 수 있는가? 물론 부활이 있기 때문에 죽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실 때 그는 100세에 얻은 아들이요, 그만큼 사랑하는 아들이지만 그런 아들조차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받치고자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히브리서 11장은 이렇게 답합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11:19)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없이는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에서 증거 하는 것처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그의 죽음과 부활이 아니더라도 하실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5절에서 증거 하는 것처럼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관계라는 것은 성부 그리고 성자라는 두 위격으로 있지만 한 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담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본성적으로 사랑함이 있습니다. 성부가 성자를 사랑하시고, 또한 성자 역시 성부를 사랑하는 관계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죽음과 부활을 허락하셨는가?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사랑하신다고 알리시는가? 성부께서는 성자를 본성적으로 사랑하시지만, 영원 전에 작정하실 때 본성적으로가 아니라 은혜로 사랑하기로 정하신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맨 처음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죄의 상태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죄의 상태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들 가운데 택하신 자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유일한 중보자로, 누구를 유일한 구원자로 세우셨는가? 성부의 아들이신 성자를 유일한 중보자로, 유일한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들 되시는 하나님을 성육신하게 하시고, 죽음과 부활로 내놓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기로 하셔서 그렇게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성부의 뜻에 대하여 성자께서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17절은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억지로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발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15절로 올라가시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부께서 영원 전부터 어떤 사람은 택자로 어떤 사람은 유기자로 정하시고, 창조와 타락에 이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시는 뜻을 정하셨을 때 성부의 뜻을 성자께서 아실뿐만 아니라 성자의 뜻 또한 성부께서 아신다는 겁니다. 그 말은 성부의 뜻과 성자의 뜻이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다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성자께서 성부의 뜻에 대하여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따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억지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기꺼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내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다. 왜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가? 아버지께서 택자를 사랑하기로 하신 것처럼 성자 역시 택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죽음만이 아니라 부활을 통하여 그 사랑을 나타내시는데, 이 모든 것이 성부의 뜻일 뿐만 아니라 성자의 뜻이며, 성자의 뜻이기 때문에 자기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으시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알리심으로 그의 죽음이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이 아님을 알리십니다. 즉 죽음을 통하여 자기 백성의 죄를 속량하시고,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결국 영화롭게 하기 까지 하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주신 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성자와 구별된 분이신 성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자의 뜻, 성령의 뜻이 다르지 않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이 택하신 자들을 사랑하셔서 성자이신 하나님을 우리를 위해 보내어 죽음과 부활의 역사로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엯사 가운데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모든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발성에 대한 강조가 18절에서 설명됩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죽음은 결코 누군가에 의해 그 목숨을 빼앗기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팔게 되는 가룟 유다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이 군인을 동원해서 잡아오게 됩니다. 거기에 심문이 있고, 나아가 빌라도라는 로마 총독으로부터 공적인 심문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죄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됩니다. 이런 모든 과정에서 예수님은 힘이 없어서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권세가 없어서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고자 하시면 열두 군단이나 더 되는 천사를 보내어 죽음에 이르지 않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26:53 참조).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성자이신 자신의 뜻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작정하신 것처럼 중보자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을 저들의 죄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하십니다. 이 부분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의 죽음은 결코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라는 것이고, 죽음만이 아니라 부활에 있어서도 버릴 권세로서 버리신 것처럼 다시 얻을 권세로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권세는 사실 인성이 아닌 신성을 나타낸 것인데, 인성이 죽었을 때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인 것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할 수 있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요한복음 2장 19절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신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다시 말해 그의 신성이 그의 인성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 근거해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21절의 말씀도 하신 바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자기 목숨을 버리시고, 또 버리신 목숨을 스스로 다시 얻는 것은 바로 자기 양 떼들을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죽음과 부활이라는 이 명령은 아버지에게서 받아 순종하는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스스로 버린 목숨을 다시 취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요한복음에서 자주 언급했던 위격 상호간의 관계를 잘 나타낸 표현입니다. 성부의 뜻과 성자의 뜻이 다르지 않지만,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일치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위격 상호간의 관계를 따라 성부는 전 신성의 근원이시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신 분이시기 때문에 성자이신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목자와 양의 비유, 그리고 그 비유에 대한 설명에서 나타내고자 하신 바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문이요,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풍성함을 누리게 하는 목자요,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그 길을 마련해 놓으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해 보면 우리는 16절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양 우리 밖에 있는 자들,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말씀의 빛을 주시되 율법으로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고 복음으로 우리를 구원의 은혜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특히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책을 제거하셨고,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를 믿음 안에서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율법과 복음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풍성함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시고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고 버리신 목숨을 다시금 취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는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의 말씀으로 인해 유대인 중에 분쟁이 일어났다고 말씀합니다. 19절을 보시면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1절 이하 5절에서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6절에 의하면 당시 바리새인을 비롯하여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의 비유에 대하여 무슨 말씀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6절 이하 18절을 통해 비유가 무엇을 뜻하지는 알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다시’라는 말은 이런 일이 이미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 43절에 보면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9장 16절에도 보면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그의 말씀과 그가 행하신 바가 저들에게는 언제나 논쟁 꺼리요, 분쟁의 원인으로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호의적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어서 늘 분쟁의 중심이 되고 있었던 겁니다.
목자와 양의 비유, 그리고 그 비유에 대한 설명에 대한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이 20절과 21절에서 설명되는데,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목자와 양의 비유입니다. 누가 참된 목자냐? 예수님 자신의 참된 목자요 선한 목자임을 알리셨습니다. 자신이 자신의 양 떼들을 위하여 죽으실 것도 말씀하셨고, 또한 죽음에서 부활하실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사실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증거 되어온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말씀 앞에 어떤 이들은 그가 귀신 들려 미쳤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쳤기 때문에 그의 말을 들을 필요조차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 들여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신 사건이 있습니다(22). 이 사건에 대한 무리들의 반응은 놀라면서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23).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24). 물론 기적과 이적의 역사라고 해서 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나온 기적과 이적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기적과 이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적과 이적만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기적과 이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말씀하실 때는 바리새인들조차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습니다. 그의 말씀에 반박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을 수밖에 없는데,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귀신 들렸다고 중상 모략합니다. 귀신의 왕을 힘입어 행하는 것일 뿐이라고 거짓되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고 하면서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이 내용은 요한복음 9장의 사건을 의식한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을 실제로 고친 것이고, 그 사건은 결코 귀신의 능력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가에 대해서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대하여 호의적이지만 결국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는 자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비유에서 예수님은 자기 양은 자신의 음성을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4). 비유에 대한 해석에서도 예수님은 나는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14). 이런 내용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단지 호의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구원의 문이요, 예수가 구원의 길이요, 예수가 생명이 되시며 예수가 그 생명의 풍성함이 되신다는 것을 분명히 고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그런 모습이 있는가? 성경에 기록된 내용으로만 볼 때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후 다른 길로 인도하실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에 대하여 호의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곧 구원과 연결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가 구원자요, 그가 중보자요, 그가 그리스도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가 유일한 구원의 문과 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 고백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를 위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고백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를 위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누구를 위해 있는가? 영원 전에 택하신 자들, 그들만을 위해 있습니다. 때가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신 자들, 그들만을 위해 있습니다.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부르시되 참된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 바로 그들만을 위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호의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참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이 자신의 구원자이심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윤리적인 말씀으로는 좋다고 여기지만,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그리스도의 양 떼들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런 양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불러 인도하여 내십니다. 그리고 양은 그의 음성만을 듣고 따르게 됩니다. 성부께서 성자를 아시고 성자 역시 성부를 아시는 것처럼 목자와 양도 그런 관계에 있습니다. 물론 성자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시는 것처럼 자기 백성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또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더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때 ‘더 풍성히’란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도 더 풍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주의 백성이 예수님은 괜찮은 사람, 좋은 말씀을 하시는 분, 이런 식으로 반응할 수는 없습니다. 그만이 유일한 중보자요, 그만이 유일한 구원자요, 그만이 유일한 목자요, 그만이 유일한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분명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이십니다. 그러나 믿지 않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부딪치는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십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만 하더라도 네 가지 밭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길 가, 흙이 얇은 돌밭, 사기떨기, 그리고 좋은 땅입니다. 이때 좋은 땅 외에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물론 어떤 밭의 경우 말씀을 듣는 즉시 기쁨을 받기도 합니다. 또 말씀 자체를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뿌리가 없습니다.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 박해가 일어나면 넘어집니다. 또한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다 무엇과 같은가?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말씀이 부딪치는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귀신 들려 미쳤다고 말하는 사람이 어떤 면에서 더 심각한 자로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들 역시 그리스도가 부딪치는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어디에 부딪치는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있습니까? 자기 양 떼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으신다는 데 이것이 어떻게 부딪치는 돌이 되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됩니까? 죽음만이 아니라 부활로 인하여 죄사함과 더불어 의롭다 하기까지 하시는데, 이것이 어떻게 부딪치는 돌이 되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됩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그렇게 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6절에 보면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모든 말씀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자들, 그의 행하시는 바를 통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들, 그가 복된 자입니다. 교훈만이 아니라 책망의 말씀을 하실지라도 실족하지 않는 자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자가 같은 삶을 허락하신다 할지라도 실족하지 않는 자들, 요셉과 같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실족하기 보다는 형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들, 그런 자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자요, 그런 자가 진정 복된 자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식으로 인도 하시는지는 모르지만 그리스도가 우리의 목자로 있다는 것만큼은 믿어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가 목자이시기 때문에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내게 부족함이 전혀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시23:1).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게 하십니다. 다양한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주의 지팡이와 막대가기 나를 안위하신다는 사실만큼은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만큼 우리의 목자이신 분은 우리를 위하는 분으로 있습니다. 자기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놓으셨는데, 어떻게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목자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가 나를 아시는 것처럼 나 또한 그를 더욱 알아가는 일이 힘써야 할 것입니다. 거기에 실족함이 아니라 만족이 있으며, 거기에 불평이 아니라 참된 감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 길을 주의 양 떼 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