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완전히 푹 들었을 때 어느 곳에서 안심입명 합니까.”
“안심입명을 애써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자네가 앉은 자리에
“바로 그것이 있으니 말이네.”
방광의 이적을 보인 일타는 화엄사 선방에 하안거 방부를 들였다. 화엄사는 쌍계사와 달리 비구 대처 간의 시비가 전혀 없었다. 관광객이 드문드문 들르지만 수행하기에 아주 조용하고 기운이 좋았다. 더구나 선방으로 운용되는 구층암은 대웅전 바로 뒤 백여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암자인데도 경내와 달리 깊은 산중처럼 적막했다.
구층암의 천불전이나 요사채도 대웅전처럼 4백여 년 된 건물이었다. 그러니 구층암 선방은 스님들이 기거하는 단순한 방이 아니라 지리산 산신령이 드나들고 조왕신이 상주하는 신령한 공간이었다.
구층암 선방 너머로는 지리산 계곡물이 소리쳐 흐르고, 천불전 계단 옆에는 모과나무 꽃이 만발해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지리산에 자생하는 모과나무였다. 고목이 되면 목재로 사용하는 듯 구층암에는 울퉁불퉁한 모과나무 기둥들이 기와지붕을 떠받들고 있었다.
일타는 모과나무 기둥 사이의 마루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구층암에서 서른 걸음 거리에 자리한 암자가 봉천암인데, 이곳에 전강이 화엄사 선방의 조실로 머물고 있었으므로 화엄사 스님들은 봉천암을 조실채라고 불렀다.
전강(田岡).
스님은 1898년 전남 곡성에서 태어나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 1914년 해인사 인공(印空)화상을 찾아가 불문에 들었는데 제산선사를 은사로, 응해화상을 계사로 비구가 되었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후 전강은 해인사 강원 대교과를 수료한 뒤 1918년 직지사 천불선원으로 가 제산선사 회상에서 용맹정진을 하였다. 그때 전강은 목에서 피를 토할 만큼 심한 상기병을 얻었으나 불퇴전의 각오로 정진한 끝에 참선공부의 문턱을 넘어서는 초견성(初見性)을 하였다.
참선공부를 멈추지 않고 다시 예산 보덕사, 정혜사 등에서 정진을 하였고, 마침내 23세 때 곡성 태안사에서 개오하고 오도송을 남겼다.
어젯밤 달빛은 누각에 가득하더니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부처와 조사도 신명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昨夜月滿樓
窓外蘆花秋
佛祖喪身命
流水過橋來
전강은 첫 개오에 멈추지 않고 대선지식을 찾아다니며 탁마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눈 밝은 선지식들에게 점검받았던 것이다. 1923년에는 금강산 지장암 한암과 서울 대각사 용성을, 부산 선암사 혜월을 찾아가 선문답하며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수덕사 금선대의 만공만이 유일하게 인가하지 않으므로 재발심하여 화두 판치생모(板齒生毛)를 들고 반철 만에 ‘마조가 원상을 그린 뜻(馬祖圓相公案意旨)’의 공안을 깨쳤다. 전강의 나이 25세 때의 일이었다. 이에 만공은 전강을 비로소 인가하였고, 전강이 금선대를 떠나려 하자 만공이 물었다.
“부처님은 계명성(啓明星)을 보시고 오도하였는데, 저 하늘의 가득한 별 중에서 어느 것이 그대의 별인가.”
전강은 만공의 물음에 엎드려서 땅을 더듬는 시늉을 하였다. 전강의 행동을 본 만공이 소리쳤다.
“옳다, 옳다(善哉善哉).”
만공은 길을 떠나는 전강에게 전법게를 내렸다.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하였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이 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뒷봉우리에 있구나.
佛祖未曾傳
我亦無所得
此日秋色暮
猿嘯在後峰
만공의 전법게를 받은 전강은 몇 년 동안 승속을 넘나들며 기이한 만행에 나섰다가 1931년 그의 나이 33세 때 경봉의 초청으로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이 되어 선객들을 지도하였다. 해방이 돼서도 여러 절에 조실로 있으면서 절 밖의 중생교화에도 힘썼고, 특히 6.25 전쟁 중에는 광주에서 가게를 차려 제자 송담(松潭)을 몸소 뒷바라지하기도 했다. 전쟁 후 전강은 대흥사 주지, 담양 보광사 조실, 인천 보각사 조실, 망월사 조실을 역임하고 지금은 화엄사에 내려와 선객들을 접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타는 일찍이 경봉과 막내외삼촌인 진우에게 전강의 얘기를 많이 들었으므로 전강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지중한 인연이 있어 자신이 화엄사로 찾아온 것 같았고, 전강 또한 일타가 방부를 들이려 했을 때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일타가 가부좌를 풀었을 때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있었다. 먹구름장이 지리산 허공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장마철로 접어들면서 지리산의 기후는 변화무쌍했다. 이윽고 굵은 빗방울이 구층암 기왓장을 적셨다. 포행하던 수좌들이 하나 둘 뛰어들어 선방으로 들어갔다. 일타는 편하게 반가부좌 자세로 마루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때 포행 나갔다가 조실채로 가려던 전강이 큰 삿갓을 벗으며 토방으로 올라왔다. 일타는 벌떡 일어나 합장했다.
“큰스님, 비가 멎으면 올라가시지요.”
“그럴까. 비가 오니 여기서 쉬다가 가야겠구먼.”
“출타하신 일은 잘 돼가고 있습니까.”
“인천 용화사 선방 일을 두고 하는 말이구먼. 늦어도 내후년에는 용화사에 법보선원이 개설될 것이네.”
전강은 마루 끝에 걸터앉아 얘기를 했다.
“진우수좌가 속가 친척이라고 했던가.”
“막내외삼촌입니다.”
“전쟁이 나기 이태 전이던가. 진우수좌가 전주에 법성원을 짓고 나를 불러 법문하러 간 적이 있네. 진우수좌 그 사람 열성이 대단하더구먼. 내가 ‘전주가 다 성불하였다고 하니 그 의지가 어떠한가(全州成佛意旨如何)’ 하고 물었더니 진우수좌가 ‘백억의 살아있는 석가가 취해 봄바람 끝에서 춤을 춥니다(百億活釋迦醉舞春風瑞)’ 하고 대답하지 않겠나. 이것이 무엇인가. 전주 사람들을 모두 성불시키고 말겠다는 진우수좌가 믿음직하고 고맙더구먼.”
일타는 자신이 가장 따르던 막내외삼촌 진우를 칭찬하는 전강의 말에 신심이 났다. 소나기는 금세 거세게 내렸다. 낙숫물이 실폭포처럼 떨어져 내렸다. 암자 마당은 낙숫물로 흘러넘쳤다.
전강이 갑자기 일타에게 질문을 던졌다.
“말을 하여도 삼십 방이요 말을 하지 않아도 삼십 방(道得三十棒不得三十棒)이라 하였으니 일타수좌는 어떻게 하겠는가.”
일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늘에서는 구름장이 부딪히어 천둥소리가 나고 번갯불이 일었다. 그러나 일타는 전강이 무엇을 묻는지 그 대의를 재빨리 간파했다. 전강은 말길이 끊어진 그 자리가 무엇인지 묻고 있었다. 그러니 말을 하건 하지 않건 무조건 삼십 방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알음알이로 따지면 대답을 못할 것도 없습니다(解則不無). 그러나.”
“일러보게.”
“실제의 행동으로 말한다면 저는 모릅니다(行則不識).”
전강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모른다고 하는 그것이 가장 친절한 법이다. 다시 무엇을 들어 말할 수 있겠는가. 훌륭하도다. 본분납자여, 부처님의 혜명을 이을 것이니라(不知最親切 如何話喩齊 善哉本分子 續佛如來命).”
천불전 앞 화초 잎을 두들기며 퍼붓던 비가 멈추었다. 낙숫물도 뚝 그쳤다. 허공을 가득 채웠던 먹구름장도 능선 너머로 뒷걸음질 쳤다. 비가 개인 뒤 산색은 더욱 푸르러지고 있었다. 마당에는 미처 되돌아가지 못한 개구리들이 풀숲을 향해 뛰었다.
전강은 흡족한 얼굴로 일타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일타수좌가 묻게나.”
“큰스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을 하시어도 삼십 방이요 말을 하시지 않아도 삼십 방입니다.”
“어서 일러보게나.”
일타는 합장하고 말했다.
“잠이 완전히 푹 들었을 때 일각(一覺)의 주인공은 어느 곳에서 안심입명 합니까(正睡着時一覺主人公 在甚處安心立命).”
전강이 일타의 물음에 말하지 않고 오히려 일타에게 물었다.
“잠이 완전히 푹 들었을 때 안심입명은 또 무엇인가(正睡着時甚安心立命).”
그러나 일타는 도솔암에서 자나 깨나 화두가 성성한 오매일여(寤寐一如)의 경지를 경험하여 보았으므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잠이 완전히 푹 들었을 때라고 하여 어찌 안심입명이 없겠습니까(正睡着時 何無安心立命).”
전강은 마루로 올라앉더니 말했다.
“차나 한잔 마시게(喫茶去).”
일타는 다기를 가져와 전강 앞에 놓았다. 전강은 즉시 찬물에 녹차를 풀어 빈 찻잔에 따랐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차 한 잔에 온몸을 적셔 보게나. 거기에 안심입명이 있을 것이네.”
울퉁불퉁한 모과나무 기둥에는 주련이 하나 걸려 있었다. 전강이 주련을 보더니 무릎을 치며 말했다.
“안심입명이 저 기둥에도 있었구먼그래. 일타수좌가 소리 내어 한 번 읽어보겠는가.”
일타가 주련의 한 문장을 읽었다.
정좌처다반향초 묘용시수류화개(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
“일타수좌가 읽었으니 해석도 마저 해보게나.”
일타는 망설이지 않고 주련의 문장을 풀었다.
“조용히 앉아 차를 반 마셨으되 향기는 처음 그대로이고, 묘용의 때 물 흐르고 꽃이 피누나.”
“안심입명을 굳이 애써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자네가 앉은 자리에 바로 그것이 있으니 말이네. 하하하.”
전강은 차를 좋아하지 않은지 한 잔만 마셨다. 차를 우려 일타에게만 따라 줄 뿐이었다. 일타는 차를 마시다 말고 전강에게 또 물었다.
“큰스님께서는 후학들에게 판치생모 화두만 들게 하고 있습니다. 화두를 타파하는 데 판치생모가 지름길입니까.”
“공안은 다 같아. 지름길이 따로 없어. 다만 나 같은 성정의 사람이 의심을 짓는 데는 판치생모가 더 도움이 되지 않나 확신하고 있다네.”
1천 7백 가지의 공안 중 하나인 판치생모의 유래는 이러했다.
어떤 스님이 조주선사를 찾아가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이에 조주선사가 대답했다.
“판때기 이빨에 털이 났다(板齒生毛).”
판때기 이빨이란 달마의 앞니를 뜻했다. 동굴에서 9년 면벽을 한 달마의 앞니에 털이 날 수밖에 없었던 도리를 조주는 말했던 것이다.
모과나무 꽃향기가 촉촉한 바람결에 밀려왔다. 쏟아졌던 소나기로 계곡물이 불어 바위를 치며 흐르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초여름의 햇볕이 들자 마당은 금세 빨래처럼 고슬고슬하게 말랐다. 전강은 일타에게 해인사의 소식도 전해주었다.
“요즘에는 해인사 퇴설당 선방에 눈 밝은 수좌들이 모여들고 있다는구먼.”
“큰스님. 그렇지 않아도 해제하면 해인사로 가려고 합니다.”
“지월스님, 서옹스님도 퇴설당에 있다고 그래. 모두 바른 수좌들이지.”
일타는 문득 장경각에서 7일기도를 했던 일이 떠올랐다. 문자에 대한 미련을 떨어뜨리지 못했던 일타에게 사교입선의 문을 들어서게 한 7일기도였다.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각에서 사교입선의 계기를 마련하였으니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었다. 비로소 참선공부만 하는 수좌로서 대발심을 갖게 한 7일기도였던 것이다.
일타는 전강과 함께 조실채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조실채 사립문을 나서려는데 전강이 소리쳤다.
“참선하려면 화엄사보다는 경허선사의 선풍이 깃든 해인사 퇴설당이 더 좋아. 내 눈치 보지 말고 언제든지 떠나게.”
그러나 일타는 화엄사를 떠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해인사 선방이든 어느 절의 선방이든 하안거를 한 철 보내고 나서 움직일 생각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