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창세기 29:21-30
라헬과 레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와 성도들을 상징하는 인물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라헬과 레아를 통해 성도의 신랑이 되시는 주님께서 어떻게 교회와 성도들을 위로하고 사랑하시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야곱은 라헬를 사랑했습니다. 17절에서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말씀합니다.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칠 년을 봉사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을 섬겼으나 라헬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다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을까요? 이게 가능할까요? 칠 년이면 얼마나 긴 시간입니까? 갓 태어난 아이가 자라서 학교에 갈 수 있는 시간이고 초등학생이 대학생이 되는 세월입니다.
저는 30개월 동안 군 복무를 했는데 얼마나 시간이 안 가고 지루했는지 모릅니다. 마치 누가 세월을 뒤에게 붙잡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조국을 사랑하지 못했나 봅니다. 지루하고 먼 곳을 여행할 때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라고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그 마음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면 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위해 칠 년을 봉사하는 기간을 마치고 드디어 결혼을 하였는데 어이없게도 첫 날밤을 보낸 사람은 언니 레아였습니다. 야곱은 장인에게 속아서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또 다시 칠 년 봉사해야 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십 사년동안 머슴을 산 것입니다.
야곱이 대단한 순정파가 아닙니까? 야곱이 고향을 떠날 때 나이가 77살로 적지 않은 나이였음을 생각할 때 라헬에 대한 야곱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그런 것이 아닐까요? 아니 야곱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하나님의 원수인 나를 주님의 아내로 삼기 위해 하나님 나라의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자기를 비워 사람의 모양으로 낮추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나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 멸시와 조롱을 받고 죄인이 되어 아버지께 버림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라헬이 자신을 위해 십 사년을 희생하는 야곱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요? 여러분은 주님의 십자가를 보며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있습니까? 모세는 신명기에서 요단을 넘어 안식의 땅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신음하던 그 노예들을 열 가지 재앙으로 건져내시고,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은 구원하고 애굽은 심판하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매일 아침마나 만나를 주시고, 구름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바산 왕 옥과 헤스본 왕 시혼을 죽이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편 49장 20절에서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짐승 같도다.”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짐승 같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짐승은 죽으면 그 존재가 사라 없어지니 괜찮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인생은 죽으면 없어지지 않고 영원한 고통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말씀한 것입니다.
짐승은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한 자들이며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자들인 것입니다. 본능으로 사는 짐승처럼 그저 타락한 육체의 본성을 섬기며 자신의 정욕과 탐심을 숭배하며 육신대로 살던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이 깨닫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랑과 은혜를 알기 위해 얼마나 힘쓰십니까? 성도는 죽을 때까지 깨달아도 십자가의 사랑을 다 알 수도 없고 갚을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알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의 은혜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세상이나 바라보며 내 소원과 기도나 들어주고 자신의 만족만이 이루어지길 원할 뿐인 것입니다. 이 시대의 성도들이 얼마나 어이없는 줄 아십니까? 드라마나 영화는 보면서 눈물을 흘쩍이지만 주님의 십자가에는 아무런 감격도 반응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조그만 신세를 지고, 밥 한 끼 대접 받으면 미안해하며 그 신세는 갚기 위해 다음에는 자기가 꼭 사려고 하면서 어떻게 죽어야할 자를 대신하여 자기가 죽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그 십자가의 은혜에는 무감각할 수 있습니까? 정말 그런 사람이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성도이겠습니까?
은혜를 깨달은 믿음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라헬을 사랑하며 칠 년을 며칠처럼 여기며 십 사년을 머슴으로 섬긴 야곱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영접하기 위해 주님을 만날 날을 기다리는 성도의 믿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가 한 번은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설교문을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홍성에 갔다 온다고 집을 나갈 때 잘 갔다 오라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하던 대로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곧 다시 들어오기에 뭘 안 가지고 간 게 있나 보다 했습니다. 저는 아내가 집을 나가고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온 그 시간이 주차장에서 차에 탔다가 놓고 간 것을 깨닫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것으로 알았습니다.
뭘 가지러 왔냐고 했더니 홍성에 가서 일을 보고 왔다는 겁니다. 제가 시계를 안 보고 있었으니 얼마나 흐른 것인지 확인할 수도 없었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정말 이냐고 몇 번을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책상에 앉아 말씀을 그저 잠시 묵상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몇 시간이 흘러간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합니다.
칠 년이란 세월이 며칠로 여겨졌다는 야곱의 체감시간이 이해가 됩니다. 깊은 사랑으로 소망을 이루어갈 때 지루할 틈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향해 깊은 사랑에 빠진다면 그 사랑에 집중할수록 소망을 이루어가는 그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지 않을까요?
어떤 성도에게 주님을 만나기 위한 시간은 지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주님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성도에게 소망을 향해가는 그 인생길은 기쁨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머슴을 살아야 하는 인생일지라도 주님의 영광스런 신부가 되고자하는 확실한 소망이 있다면 성도는 모든 것을 이기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랑이 되시는 주님의 완전한 위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헬은 주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장에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 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말씀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갈 이스라엘을 라헬이 자식이 없어져서 슬퍼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라헬을 이스라엘의 어머니로 표현한 것입니다. 자식을 잃고 위로를 받을 수 없는 그 라헬이 이 세상에 파송되어 육신의 만족을 위해 살았으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성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위로를 받을 수 없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런데 그 슬픔과 절망에 빠진 라헬에게 위로가 선포됩니다. 다시 자식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겁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입니다. 우리는 죄의 포로가 되어 사망에 붙잡혀 돌아올 수 없는 자들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심으로 말미암아 그 십자가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고 사망의 결박을 풀고 주님의 아내가 되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위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위로를 받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레아는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레아가 시력이 약하였다는 것은 ‘눈매가 선했다.’는 말로 평범한 여인이었다는 말입니다. 남자에게 어필하는 외모를 갖고 있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세계는 참 신비로운 것이 야곱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레아가 먼저 야곱의 아내가 되고 레아에게서 약속의 자손이 나오는 것입니다. 31절에서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인 레아를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신부는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자들 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 받은 신부는 이 세상에서 멸시와 천대와 외면을 받는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와 같은 낮은 자들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를 사랑하신하고 하셨습니까? 이스라엘에게 늘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를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돈과 재물과 물질의 힘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반드시 버림을 받고 사랑을 받지 못하고 외면을 받는 자들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세상을 지배하는 가치관에서 나와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기 때문에 약하고 힘없는 자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진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받은 그 믿음 때문에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았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이 세상은 사라질 것을 알았기에 세상에 소망을 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성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산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 살아야 하는 주님의 신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밖에 의지할 수 없기에 본향을 떠나와 천국을 사모하고 천성을 향해가는 나그네이며 예수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는 과부이며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온 고아인 것입니다.
레아와 같은 성도는 이 세상의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사랑을 받기 원하십니까? 사람들이 다 나를 존경하고 인정해주면 좋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사랑을 받으면 하나님께 받을 칭찬과 사랑은 그만큼 사라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상을 받은 자들에게 그들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받지 못하는 레아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에게 약속의 자손을 낳는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 야곱과 함께 무덤에 묻히는 것도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올린 여자들이 다 레아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다말과 라합과 룻을 보십시오. 그녀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는 버림을 받고 사랑을 받지 못하는 외로운 여자들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는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자들을 찾아가셔서 그 은혜로 위로하시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여자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면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원했겠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에서 사랑받는 부자들은 천국에 들어가기가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세상에서 버림받고 사랑을 받지 못하던 나사로가 들어간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사랑 받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하나님께 사랑과 영원한 위로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이 세상에서 사랑 받는 사람들을 조금도 부러워할 것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외면을 받고 천대를 받을수록 주님은 우리를 더 불쌍히 여기셔서 사랑하시고 위로해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와 같은 성도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아내로 삼기위해 세상에 오신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으로 위로 받아 주님의 아름다운 신부로 단장되어 주님 만날 때 기쁨으로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