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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방(東方)의 세가(世家) 명벌(名閥)로서 국사(國史)에 실려 있는 것은 수 없이 많으나, 더러는 처음에는 번성하였다가 나중에 가서 쇠퇴하고 더러는 중간에서 정지되어 그만 떨치고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대를 이어갈수록 가업이 더욱 빛나고 번창한 집으로는 청주 한씨(淸州韓氏)가 가장 유명하다. 맨 처음 한난(韓蘭)이라는 분은 고려를 도와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벼슬이 태위(太尉) 삼중 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고, 한강용(韓康用)에 이르러서는 유술(儒術)로 드러난 데다 충렬왕(忠烈王)을 도와서 벼슬은 중찬(中贊)에 시호는 문혜(文惠)이며, 한사기(韓謝奇)는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이고, 한악(韓渥)은 우의정(右議政) 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에 시호는 사숙(思肅)이다. 또 한공의(韓公義)는 정당 문학(政堂文學) 청성군(淸城君)에 시호는 평간(平簡)이고, 한수(韓脩)는 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으로서 역시 공훈으로 청성군에 봉하여지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한상경(韓尙敬)은 영의정(領議政)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에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그리고 한혜(韓惠)는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이고, 한계희(韓繼禧)는 좌찬성(左贊成) 서평군(西平君)에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대략 9대를 연이어서 경상(卿相)이 되었고 이 뒤의 4대도 벼슬은 비록 크게 높지 않으나 역시 모두 이름난 인사들이니, 한사무(韓士武)는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에 증(贈) 좌참찬(左參贊)이고, 한승원(韓承元)은 정선 군수(旌善郡守)에 증 좌찬성이며, 한여필(韓汝弼)은 중추부 경력(中樞府經歷)에 증 영의정이고, 한효윤(韓孝胤)은 경술(經術)과 예학(禮學)으로 여러 공들 사이에서 드러났고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세상을 마쳐 영의정이 추증되었으니, 공은 이분의 셋째 아들이다.
공의 휘(諱)는 준겸(浚謙)이고, 자(字)는 익지(益之)이며, 호(號)는 유천(柳川)이다.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태위(太尉)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이고 예빈시 정(禮賓寺正) 신건(申健)의 딸이다. 공은 가정(嘉靖) 정사년(丁巳年, 1557년 명종 12년)에 한성(漢城)의 집에서 태어났는데, 의젓하고 숙성하여 겨우 6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아서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한 문장을 내놓았고, 겨우 12, 3세에 종유(從遊)하는 바가 모두 명승(名勝)들이었으며 이따금씩 시(詩)와 문(文)을 남기어 사람들이 전하여 외게 하였다.
기묘년(己卯年, 1579년 선조 12년)에 생원시(生員試)에 장원을 하고 진사 제7시(進士第七試)의 삼장(三場)에서 모두 합격하고 시의(詩疑) 역시 으뜸이어서 명성이 자자하였다. 이듬해 경진년(庚辰年)에 아버지 영의정공의 상(喪)을 당하였고, 을유년(乙酉年, 1585년 선조 18년)에 태릉 참봉(泰陵參奉)에 추천되었다. 이듬해인 병술년(丙戌年, 1586년 선조 19년)에 급제(及第)를 하여 곧바로 예문관(藝文館)에 선발되어 검열(檢閱)이 되고 얼마 후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가 되었는데, 선조[宣廟]가 어제(御題)를 내어 유신(儒臣)들에게 시를 지어 올릴 것을 명하였을 때 공이 수석을 하자 표피(豹皮)로 된 요를 내려 주었다. 이산해(李山海)공이 자주 칭찬하기를 뒷날 문형(文衡)을 잡을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이라고 하였으며, 또 어제시(御製詩)에 차운(次韻)을 하여 올리어 말안장을 하사받았다. 이윽고 주서(注書)로 옮기었다가 다시 봉교(奉敎)로 돌아왔다.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에 규례에 따라 전적(典籍)에 승진하였다가 곧바로 금천 현감(衿川縣監)으로 보임되어 나가는데, 선조가 정청(政廳)에 물어보아 공에게 노모가 있는 것을 알고는 이에 낙점을 하자, 여러 의논이 떠들썩하게 인재 기용이 거꾸로 되었다는 것으로 정관(政官)을 탄핵하였다. 가을에 독서당(讀書堂)에서 사가 독서(賜暇讀書)를 하였는데, 겨울에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이 발각되면서 공이 이진길(李震吉)을 추천한 일에 연좌되어 파직을 당하고 체포되었다가 달포 지나서 공은 석방되고 맏형 참의공은 장형(杖刑)을 받고 북쪽 변방으로 유배되니, 사람들이 모두 공을 위태롭게 보았으나, 공은 태연히 대처하며 원주(原州)에 가서 농토를 사들여 집을 옮기어 농사를 지었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예조 정랑(禮曹正郞)에 서용(敍用)된 뒤 강원도 도사(都事)와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를 역임하고 겨울에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나갔는데, 유랑하여 흩어진 백성을 불러모으고 피폐한 백성을 구제하여 주어서 온 경내가 힘을 입었다. 을미년(乙未年, 1595년 선조 28년)에 지평(持平)으로 불려 들어와서 필선(弼善)으로 옮겼다가 정언(正言)을 거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가 되어 필선을 겸임하였다. 이때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승 유성룡(柳成龍)이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불러서 양서(兩西, 황해도와 평안도)에 같이 갔는데, 유 정승이 공을 기중(器重)히 여기어 평교(平交)처럼 허교(許交)를 하고 군국(軍國) 대사(大事)를 의논할 것이 있으면 반드시 공을 결의(決議)에 참석시켰다. 조정의 의논이 공을 파격적으로 등용하고자 어느 날 정사에서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비의(備擬)하였다가 또 경상도 관찰사로 비의하였으니, 세상에서 처음 보는 일이었다. 이윽고 교리(校理) 겸 보덕(輔德)에 제배(除拜)되고 추천으로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ㆍ사인(舍人)에 임명되었다가, 부응교(副應敎)ㆍ사간(司諫)ㆍ보덕(輔德)ㆍ집의(執義)를 거치면서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를 겸임하여 자문(咨文)과 게첩(揭帖) 등의 문서를 맡아 지었다.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 8월에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에서 동부승지(同副承旨)에 특진하여 좌부승지(左副承旨)에까지 올랐는데, 이때 왜적(倭賊)이 충청도와 경기에 바짝 다가와서 명(明)나라 제독(提督) 마귀(麻貴)가 임금을 맞이하여 말을 나란히 해서 한강을 건너며 지략 있는 재신(宰臣) 한 사람을 보내어 마초(馬草)와 양식을 준비시킬 것을 요청하자, 임금이 즉시 공을 명하여 보내었다. 왜적이 패전하고 나서 곧 돌아와 우승지(右承旨)에 올랐는데, 명나라 조정의 제도에 따라 파발(擺撥)을 설치하여 변방의 서신을 빨리 전달하도록 할 것을 건의한바, 받아들여져서 지금까지 편리한 제도로 일컫는다. 겨울에 경기 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무술년(戊戌年, 1598년 선조 31년)에 사직하고 들어와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제배(除拜)되었다.
기해년(己亥年, 1599년 선조 32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을 적에는 홍여순(洪汝淳) 등이 이미 유 정승(유성룡)을 탄핵하고 나서 공까지 연루시키고 싶어도 적발할 것이 없었는데, 공이 경상도 관찰사로 나가는 데 미쳐서 평소 정인홍(鄭仁弘)의 사람됨을 미워하여 그의 문밖을 지나면서도 들르지 않고 부탁이 있어도 들어주지 않자, 정인홍이 큰 감정을 품고 그의 무리 문홍도(文弘道)를 사주하여 허구로 논박하여 파직시켰다.
경자년(庚子年, 1600년 선조 33년)에 병조 참판(兵曹參判)과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에 제배되고 이듬해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년)에 4도의 도체찰부사(都體察副使)를 겸임하였다. 임인년(壬寅年, 1602년 선조 35년)에 다시 병조 참판이 되었다가 전라도 관찰사로 나가고 이듬해 계묘년(癸卯年, 1603년 선조 36년)에 사직하고 돌아와서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제수받았다. 이때 국경에 침입이 많아서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원수(元帥)를 상의하였는데, 정승 이덕형(李德馨)이 아뢰기를, ‘한 아무개가 관질(官秩)은 비록 낮으나 인망과 실력이 모두 넉넉하여 이 사람을 뛰어넘을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드디어 4도 도원수(四道都元帥)로 임명하였으니, 가선 대부(嘉善大夫)로서 도원수가 된 일은 조선조에서 한 사람뿐이라 한다. 이어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제배되었다.
갑진년(甲辰年, 1604년 선조 37년)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옮기었다가 다시 부제학, 공조 참판을 거쳐 겨울에 다시 이조 참판에 제배되어 세자시강원 우빈객(世子侍講院右賓客)을 겸임하였다. 이듬해 을사년(乙巳年, 1605년 선조 38년)에 호남과 영남의 군사 시찰을 나가는데, 떠날 적에 이조 참판의 관직을 해면(解免)하여 줄 것을 빌었으나 윤허하지 않고 교지를 내려서 불러들여서 내구마(內廐馬) 한 필을 하사하였다.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한 끝에 체직(遞職)되어 대사성(大司成)에 제배되고 이어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특진하였다. 병오년(丙午年, 1606년 선조 39년) 명나라에서 조사(詔使)가 나왔을 때에 계획을 잘 세워서 접응(接應)을 여유 있게 하였고, 이어 대사헌을 거쳐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하였다가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
무신년(戊申年, 1608년 선조 41년)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고 삼년상을 마친 뒤 한성 판윤(漢城判尹), 대사헌을 거쳐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는데, 부임한 처음에 풍속의 순화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나이 많은 사람을 예우하고 품행이 남다른 사람을 표창하고, 선비[士子]들을 유액(誘掖)하여 정식(程式)을 설치하여 학문을 권장하는 한편, ≪가례(家禮)≫와 ≪소학(小學)≫을 간행하여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제도를 공부시키고 책을 여항(閭巷)에 널리 반포하여 백성들에게 외도록 하여, 국경 근처의 외지고 거친 한 지역에 문교(文敎)가 큰 변화를 이루었다.
계축년(癸丑年, 1613년 광해군 5년)에 사형수 박응서(朴應犀)가 이이첨(李爾瞻)과 모의하여 옥중에서 상변(上變)하여 옥사(獄事)를 뒤집어서 역모를 꾸며 드디어 국구(國舅)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을 살해하고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강화(江華)에 가두니, 사건이 사대부에까지 연루되었다. 처음에 선조의 병세가 악화되어 광해군이 골육(骨肉)을 보존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이에 손수 유교(遺敎)를 썼으니, 그 대략에 “죽고 사는 것은 명(命)에 달린 것인데, 다시 말하여 무엇하겠는가마는, 다만 대군(大君)이 어려서 아직 장성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마음에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죽은 뒤에는 인심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만약 사특한 말이 나온다면 제공(諸公)들이 대군을 애호하여 붙잡아 주기를 바라며 감히 이것으로 부탁한다.” 하였고, 겉봉에는 공 등 일곱 사람의 이름(유영경ㆍ한응인ㆍ박동량ㆍ서성ㆍ신흠ㆍ허성ㆍ한준겸임)을 써서 밀봉하여 궁중에 두었는데, 이때에 와서 이이첨이 이 유교(遺敎)를 위작이라고 하고 헌납(獻納) 유활(柳活) 등이 먼저 일곱 신하가 즉시 변명하지 않은 것을 논죄(論罪)하므로, 공 역시 사판(仕版)에 이름이 지워졌다. 이윽고 정협(鄭浹)이라는 자가 흉도(凶徒)의 사주를 받고 저명한 공경(公卿)들을 많이 끌어들여 사방으로 체포를 하므로, 공이 또 체포당하여 수감되었는데, 광해군이 그 실상을 친히 국문하고는 곧바로 석방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었다.
공이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과는 본래 사이가 좋지 않아서 사건이 있을 때 증거를 삼을 만하여 친국 당시 친척들이 공에게 사실대로 공술할 것을 권하였으나, 공이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린 것인데, 급난(急難)한 때에 남을 팔아 모면하려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다.” 하고, 석방되던 날에 즉시 호남의 고장으로 가서 백씨(伯氏) 참의공(參議公, 한백겸(韓百謙))과 산을 사이에 두고 살며 지팡이를 짚고 오가며 경사(經史)를 뒤적이고 시주(詩酒)로 낙을 삼았다. 뒤에 흉도가 방문하려고 하여도 피하고 만나주지 않았으며 안부를 물어도 답하지 않았으니, 소인(小人)을 대하는 엄격한 태도가 이와 같았다. 이이첨 무리가 드디어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고자 연흥 부원군의 시신을 참형(斬刑)하여 저잣거리에 진열하였다.
정사년(丁巳年, 1617년 광해군 9년)에 다시 일곱 신하의 귀양을 논의하여 충주(忠州)에 부처(付處)하니, 두어 칸의 오두막에서 5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 문밖을 나오지 않았다. 신유년(辛酉年, 1621년 광해군 13년)에 여주(驪州)로 양이(量移)되었는데, 노적(奴賊)이 요광(遼廣)을 함락하고 동쪽을 쳐들어온다고 큰소리치므로, 중외(中外)가 술렁이어 원수(元帥)를 선출하여야 하나, 적당한 사람을 구하기 어려워서 비변사에서 회의를 거친바 한 아무개가 아니면 아니 된다고 하였다. 드디어 귀양지에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겸 5도 도원수(五道都元帥)를 제수받았는데, 화란(禍亂)이 누적된 끝에 억지로 부름을 받고 나아갔으나 시사(時事)가 어떻게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공이 소(疏)를 올려 면직을 비니, 광해군이 “큰 추위가 닥친 뒤에 갖옷을 찾는 것은 (늦은 일인 것처럼 인신에게 명을 내리는 것도 적절한 시기가 있다.)”는 것으로 비답을 하였다. 겨울에 적(賊)이 임반(林畔)에 이르자, 공이 옛 부오(部伍)를 수습하여 빠르게 달리어 관서쪽으로 개부(開府) 중화(中和)로 갔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에 우리 성상(聖上)께서 거의(擧義)를 하여 반정(反正)을 하고 중궁 전하(中宮殿下, 인열 왕후(仁烈王后)임)가 왕후의 정위(正位)에 오르면서 공을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승진시키고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하니, 조정의 의논이 ‘국구(國舅)로 예우하는 이상, 외지에 두어서는 아니 된다’며 공을 불러들여야 된다고 하였다. 공이 명을 받들고 불안하여 침식(寢食)을 제대로 못 하였는데, 거기다 또 유도 도체찰사(留都都體察使)를 겸임시키자, 공이 외척[椒親]으로서 군국(軍國)의 일에 참여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며 누차 사직을 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갑자년(甲子年, 1624년 인조 2년)에 역적 이괄(李适)이 군사를 일으키자, 공이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괄이 잡혀 죽고 나서 어가를 호위하여 돌아와서 지춘추(知春秋)를 겸임하여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를 같이 수찬하라고 하자, 극력 사양하여 받지 않고 또 도체찰사와 도총관(都摠管)도 사양하여 체직(遞職)되었다.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 노적(奴賊)의 변란(정묘호란)에 공이 배위 대장(陪衛大將)으로서 왕세자의 분조(分朝)를 따라 남하하였는데, 전주(全州)에 이르러서 무군사 당상(撫軍司堂上)이 되어 군민(軍民)을 조호(調護)하고 시설을 보완하니 군민이 크게 기뻐하였다. 적이 물러가자 분조를 받들고 행재소(行在所)에 모이고 서울로 돌아와서 병세가 심하여 자제들을 불러 장계(狀啓)를 초잡게 하는데, 장차 유표(遺表)를 남길 것처럼 하다가 그만 말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리를 바르게 하고 대청으로 옮기게 한 다음, 드디어 졸(卒)하니, 정묘년 7월 17일이고, 춘추가 71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임금이 매우 슬퍼하며 사흘 동안 철조(輟朝)를 하고 중사(中使, 궁중에서 왕명을 전하는 내시)를 시켜 상사(喪事)를 돕게 하였으며, 왕세자도 그날 당장 거애(擧哀)를 하고 장례에 조문을 왔다. 경사(卿士) 이하 금려(禁旅)와 시민(市民) 및 서리(胥吏)와 복례(僕隷)에 이르기까지 모두 달려와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이 “착한 사람이 죽었으니 나라가 어떻게 될까?” 하였고, 조문을 온 사람들은 모두 몹시 슬퍼하였으며, 장지(葬地)에 모인 사람도 3백여 인이나 되었다. 그해 9월 19일(임오)에 원주(原州) 음지촌(陰枝村) 경향(庚向)의 터에 안장하였다. 태상시(太常寺)에서 이름을 바꾸는 법전[易名之典]을 논의하여 문익(文翼)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부인(夫人) 황씨(黃氏)는 창원(昌原)의 망족(望族)으로서 대마다 벼슬이 있었고, 그의 아버지 황성(黃珹)은 예조 좌랑(禮曹佐郞) 증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서 고원 군수(高原郡守) 이고(李皐)공에게 장가들어 부인을 낳았다. 부인은 신유년(辛酉年, 1561년 명종 16년)에 14세의 나이로 공에게 시집왔는데, 단정하고 착하고 영리하여 시부모가 사랑하였으며, 치가(治家)와 주궤(主饋)에 모두 법식이 있었다. 공의 집이 본래 가난하여 아침저녁의 양식을 꾸어다 먹으면서도 제사와 손님 대접에 있어 궁색한 표정을 보인 적이 없었다. 34세의 나이로 원주의 관아에서 세상을 마치었는데, 뒤에 정부인(貞夫人)이 추증되고 회산 부부인(檜山府夫人)에 봉해졌다.
2남 4녀를 두었다. 맏아들 한회일(韓會一)은 남양 부사(南陽府使)로서, 판서 이성중(李誠中)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한이성(韓以成)ㆍ한이평(韓以平)이고, 딸은 사인(士人) 신익륭(申翊隆), 정하(鄭何)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둘째아들 한소일(韓昭一)은 준수하나 일찍 죽었는데,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한 딸을 두었으나 역시 일찍 죽었다. 맏딸은 종부시 정(宗簿寺正) 이유연(李幼淵)에게 시집가서 한 딸을 낳았는데, 별좌(別坐) 안헌규(安獻規)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 여이징(呂爾徵)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대사간(大司諫) 정백창(鄭百昌)에게 시집가서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정선흥(鄭善興)이고, 딸은 어리다. 그 다음은 곧 우리 중궁 전하로, 원량(元良)을 탄생하여 세자로 책봉되었고, 다음은 봉림 대군(鳳林大君)이며, 이요(李
)ㆍ이곤(李滾)은 아직 출합(出閤)하지 않았다. 측실(側室)에서 두 딸을 두어 허통(許通)을 하였으니, 이환(李煥)과 진원 부수(珍原副守) 이세완(李世完)이 그 사위이다. 한이성은 전적(典籍) 안홍량(安弘量)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1남을 두었다. 신익륭은 2남 1녀를, 정하는 2남을, 안헌규는 3남 1녀를, 이환은 1녀를, 이세완은 1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공은 어려서 용모가 준수하고 기질이 완강하였고, 자질이 후덕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성품이 너그러우면서도 엄중하고 의지가 독실하면서도 우아하여 바라만 보아도 대덕 군자(大德君子)임을 알 수 있었다. 평소에 빠른 말이나 서두르는 표정이 없고 태도가 의젓하여 마치 무엇인가를 구상하고 있는 것 같았으며, 사물을 대함에 있어서도 온통 한 덩어리의 화기(和氣)뿐이었다. 남의 잘못을 들으면 그만 기분이 나쁘고 비록 화가 날 만한 일이더라도 말이나 표정에 드러내지 않고 남이 더러 부추기어도 역시 웃어 넘기고 성을 내지 않았다. 북쪽에서 체포되어 올 적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적신(賊臣)의 지시를 받아 온갖 고통과 모욕을 다 주었지만 공은 그럴수록 더 깍듯이 대우하고 자제들에게 신칙(申飭)하여 감히 원망스러워하는 말을 못하도록 하였고, 뒤에 그 자의 이름을 묻는 자가 있어도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유돈(儒敦)의 글을 즐겨 읽고 더욱이 예학(禮學)을 좋아하였으며, 박문 강기(博聞强記)를 하여 책을 볼 적에 한눈에 두어 줄씩 읽어 내려가도 한번 눈에 거치면 평생토록 잊지 않았다. 또 국가의 고사(故事)를 밝게 익혀서 문헌(文獻) 전장(典章)과 손익 연혁(沿革)을 꿰뚫어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이 때문에 조정에 무슨 일이 있을 때면 반드시 공에게 질정을 받았다.
효우(孝友)와 돈목(敦睦)은 지성(至性)에서 나와 일찍이 백씨(伯氏) 참의공(參議公, 한백겸)과 함께 가정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온 집안에 항상 사우(師友)가 학문을 강마(講磨)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어머니를 섬김에 있어서는 온갖 효양(孝養)을 다하여 비록 환란과 빈곤에 처하여 있을 적이라도 반드시 성의를 다하여 좋은 음식으로 공봉(供奉)하였다. 공이 큰 고을의 수령을 여러 곳 역임하고 참의공이 연이어 큰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번갈아 가며 판여(板輿)로 모셔다 극진히 봉양하여 영광의 낙을 한껏 누렸다. 생일 잔치마다 어머니가 뭇 음악의 연주를 저지하고 감군은(感君恩)을 연주하게 하므로, 공이 그 가사를 연역하여 속곡(續曲)을 지어서 올리기도 하였으며, 조정 사대부(士大夫)들과 수친계(壽親契)를 결성하여 계절에 따라 헌수(獻壽)를 하니, 선조가 특별히 술과 음악을 하사하여 빛내주었고, 어머니를 뵈러 올 적에는 반드시 약물(藥物)을 하사하였다.
공이 매번 중씨(仲氏, 한중겸(韓重謙))가 일찍 죽고 자매가 많이 죽은 것을 슬퍼하여 외로운 여러 조카들을 친자식보다 더 보살펴 주었고, 백씨 참의공과는 반 세대 동안 동거를 하며 형제간에 누리는 즐거움이 늙을 때까지 하루 같았다. 또 연락(然諾)을 중시하고 보시(布施)를 좋아하여 궁핍한 친척과 친구들을 모두 만족스럽게 하여 주었으며, 동종회(同宗會)를 설치하여 소목(昭穆)의 질서를 밝혔다. 청주(淸州)에 태위공(太尉公, 한난(韓蘭))의 옛 마을이 있는데, 백씨가 청주 목사로 재임할 적에 공이 백씨에게 논의하여 제단을 쌓아서 제사를 올리고 비석을 세워 기록하였다.
일찍이 선산(先山) 밑에 작은 집을 짓고 ‘귀래(歸來)’라고 이름을 붙이었으니, 이는 평소의 뜻이다. 문장을 씀에는 평이하면서도 범위가 넓고 화려하게 꾸미지를 않았으며, 시 역시 초연한 정취가 있고 표현을 과장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때문에 수록(收錄)한 것이 많지 않으니, 이것이 아쉽다.
아! 공은 문장과 품행으로 선조의 지우(知遇)하는 바가 되어 한때 국가를 경영할 인재로 기대를 받았다. 조정에 들어가서는 경악(經幄, 경연(經筵))에서 논사(論思)하고 지방에 나가서는 사방에 능력을 발휘하여 풍유(風猷)를 높이 드러내고 공적을 크게 남겼으니, 여기에서 공의 업적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차례 화망(禍網)을 만났어도 위축되지 않았고 귀양지에서 돌아와 장수에 임명되었어도 대단하게 여기지 않으며, 끝까지 평소나 다름없이 담담하게 받아들였다가 갑자기 입적(入寂)을 하듯이 발길을 거두어들였으니, 진퇴(進退)와 영욕(榮辱)에서도 공의 심천(深淺)을 엿볼 수 있다. 몸이 궁중에 오래 머물러 있고 벼슬이 여러 관료들보다 높았음에도 집을 한 칸도 넓히지 않고 노비를 한 명도 늘리지 않았으니, 겸손하고 검소한 신조는 늙을수록 더 독실하였다. 이상은 공의 잗다란 행적이다. 부귀의 영화를 초연히 벗어나서 시사(時事)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걸지 않으며, 사류(士類)를 일으켜 세우고 간행(姦倖)을 막아 근절하여 군자는 믿을 곳이 있고 소인은 감히 사심을 갖지 못하도록 하므로, 국가가 화평하여지는 복을 부르게 하였으니, 여기에서 공의 대체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공과는 시문(詩文)과 음주(飮酒)로 종유(從游)한 지가 40여 년이지만 자신을 포기하거나 태만히 하는 기색을 한번도 보지 못하였고 남을 시기하거나 해치려는 말을 한번도 듣지 못하였으니, 공은 참으로 장자(長者)다운 사람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난 이듬해에 공의 아들 남양공(南陽公, 한회일(韓會一))이 대사간 정백창(鄭百昌)공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울며 나에게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평소에 임자를 중시하여서 어머니의 묘비를 실로 임자가 지은 것이므로, 이제 삼가 돌을 다듬어 놓고 임자를 기다리는 것이니, 이는 대개 아버지의 뜻이오. 임자의 유종의 은혜를 바라오.” 하는데, 무려 세네 번을 오가며 갈수록 더 집요하였다. 삼가 정공의 행장과 족보를 가지고 처음의 기반과 중년의 성황과 만년의 보시를 이처럼 간추려 보니, 공의 덕업(德業)은 선열(先烈)보다도 이처럼 더 빛나는 점이 있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옛날 화족(華族)의 주손(胄孫) 태위공이 사업을 일으켜, 이미 쌓고 나서는 널리 전파하였으니, 그것은 오직 덕망과 관작이네.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이어받다가 공에 이르러 더더욱 커졌네. 우리 공의 재간은 실로 하늘이 낸 것, 장차 크게 쓰일 것임은 포의(布衣) 적에 알 수 있었으니, 재상을 기약할 인망이라고 주졸(走卒)들까지도 모두 칭송하였네. 바다와 같은 기량에 봄날씨와 같은 화기이며 봉황과 같은 위의에 이미 완전한 덕을 부여받아 항상 중망(重望)을 견지하니, 복록(福祿)이 저절로 따랐네. 우리 선조를 보필하여 조정에 서기가 서리게 하고, 거대한 가업을 윤색하여 집안에 상서가 깃들게 하였네. 독실하게도 훌륭하신 왕비를 탄생시켜, 끝없는 아름다움을 계승시켰네. 오직 예(禮)만을 복종하고 오직 재주만을 아끼었네. 선(善)을 좋아하는 성심에 나라를 경영할 솜씨였건만, 잠시의 시험으로 길이 막히어 10년 동안 고통을 겪었네. 해와 달이 다시 밝아지며 바람과 우레가 진동하는데, 태산처럼 우뚝 서서 군직에서 벗어나 조정으로 돌아왔네. 장수였을 적이나 재상일 적이나 일만 사람이 에워쌌지만, 공은 그럴수록 움츠리고 물러서서 몸을 더럽힐세라 권세를 피하고 한빈한 선비처럼 담박하였네. 집에서부터 나라에까지 안방의 교화가 크게 행하여져 훌륭한 왕비에 훌륭한 왕손을 두었네. 아! 공의 업적이여, 어찌 전대에 빛나기만 하였으랴? 혜택이 우리 백성에게도 미치었네. 공은 하늘로 돌아갔어도 나의 시가 빗돌에 새겨지니, 그 정신 영원히 빛을 잃지 않으리.
[네이버 지식백과] 한준겸 [韓浚謙]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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