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깨달아라.
주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큰 복을 받는다.
[시편 34:8]
시편 34편은 각 절의 첫 글자를 히브리어 알파벳 22개의 순서대로 배열하여 쓴 것이다. 이 시는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척 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다윗의 시'라는 부연설명이 붙어있다.
이 이야기는 사무엘기상 21장에 기록되어 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망다닐 때에 블레셋 족속에게 망명을 하여 가드 왕 아비멜렉 아기스에게 간 적이 있다. 그러자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에 대해서 '사울은 수 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는 노래의 주인공 다윗이라고 고한다. 그러자 그곳에서도 안전할 수 없다고 생각한 다윗은 미친 사람처럼 행동을 한다. 성문 문짝 위에 아무렇게나 문자를 긁적거리기도 하고,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기도 한다. 그러자 아기스가 저런 미치광이가 왜 내 왕궁에 들어와 있어야 하느냐고 호통을 친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미친짓까지 할 정도의 고난의 삶을 살았지만, 그때에 주님을 간절히 찾음으로 하나님께서 건져주시는 삶을 맛보았던 것이다.
새번역성경에는 8절의 말씀이 '너희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깨달아라'로 되어 있지만, 개역성경에는 '나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로 되어 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에도 '너희 입을 벌려 맛보고, 너희 눈을 활짝 떠서 보아라'로 번역되었다. 오경웅의 시편 사색에서도 '내 진실로 바라는 바 있으니 믿는 이들 야훼를 맛보아 아는 것! 그 맛은 정녕 끝이 없으니 직접 그 맛을 보아야 진짜 좋은 줄 아네!'로 번역한다.
디윗은 주님의 구원을 맛보았다.
여전히 사울을 피해다니는 상황이지만, 이미 주님의 도우심을 맛보았으므로 더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이미 맛보았으므로 그런 이들의 미래도 어떻게 펼져질 줄을 안다.
'의인이 부르짖으면,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고(17), 마음이 상한 사람과 낙심한 이들을 구원해 주시고(18), 목숨을 건져주실 것(22)'이다. 다윗은 이미 이런 하나님을 경험했기에 "나와 함께 주님을 높이자. 모두 함께 그 이름을 기리자"고 하는 것이다.
진리는 이미 다 말하여졌고 이미 다 행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리를 모르는 이유는
듣지 못하고, 보지 못했거나,
듣고 보았어도 제 욕심에 따라 진리를 왜곡했거나
진리의 그림자만 보고 그것을 진리라 착각했기 때문이다.
야훼를 맛보아 아는 것은 곧 주님의신실하심을 깨닫는 일이다.
그 신실하심을 깨닫는 이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피난처 되시는 주님이 계심을 알기에 절망하지 않는다. 그 신실하심을 믿고 '악한 일을 피하고, 선한 이리만 하고자 하며,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는 것(14)'이다. 이런 삶을 살아간은 이들이 의로운 이들이며, 주님은 의로운 이들은 모든 고난에서 건져주실 것이니 인생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12).
야훼를 맛보아 아는 일,
진리를 맛보아 아는 일, 그 일은 참으로 즐겁고 기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온갖 화학조미료가 범벅이 된 야훼를 맛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자기도 맛보지 못한 가짜 야훼를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묵상을 이어간 생각들입니다.
새벽에 묵상한 시편34편의 말씀, 그 중에서 8절의 말씀을 계속 묵상하게 된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는 말씀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무엇을 먹고, 어떤 말을 하는가?
그게 당신이다.
우리는 어떤 먹을거리를 먹고 있는가?
공장식 축산을 통해 나온 먹거리들과 화학조미료 범벅이 된 맵고 짜고 단 인스턴트 음식들에 길들여져 있다. 문제는 육의 음식만 이런 음식에 길들여진 것이 아니라, 영의 음식 역시도 그러하며, 영의 양식을 차려내는 설교자들 중에는 '야훼의 맛'을 보지도 못한 이들이 넘쳐나고, 많은 교인들은 인스턴드 야훼만을 원한다는 것이다.
오염된 육의 음식이 인간의 몸을 망치듯, 오염된 영의 양식은 인간의 영을 망친다.
몸에 좋은 음식은 거칠고, 심심하고, 촌스럽고, 단아하다.
야훼의 맛도 거칠고, 심심하고, 촌스럽고, 단아하여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그러나 그 맛을 아는 자, 음식다운 음식을 먹은 이들이 사랑하는 이들과 음식을 나누듯, 야훼가 어떤 분이신지 맛본 자는 그 맛을 독식하지 않고 나눈다. 많이 먹어도 더부룩하지 않고, 질리지 않고, 과식하고 싶은 욕심이 들지 않게 하는 음식은 우리 몸에 보약이 된다. 야훼의 말씀도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서 야훼의 맛을 보았다는 이들에 의해 왜곡되는 야훼의 모습을 곳곳에서 목도한다.
사실 그들이 맛보았다는 야훼는, 야훼의 모습을 한 마몬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물질적인 복고가 세속적인 복, 눈에 보이는 것에 그렇게 열심을 내지 않을 것이다.
나는 큰 식당에서 비싼 돈 들이고 먹는 밥보다, 소박하고 단아한 어머니의 밥상을 마주하고 싶다.
요즘 나름 잘 나가는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미사여구가 넘쳐나고, 온갖 신학사상으로 잘 버무려져 있다.
너무 미끈하다. 이 미끈함이야말로 피로사회의 자본의 법칙의 정점을 찍는 것 아니니가? 그러니까 그들은 비싼 값에 잘 팔린다. 그것이 목회의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저마나 겸손함이라는 외투 속에 탐욕을 품고 있다.
자기의 가장 간절한 소망을 이뤄주는 방이 있었단다.
한 사람이 그 방에 들어가면서 죽어가는 형이 살아나길 간절히 원했다. 그런데 그 방에 들어갔다 나와보니 그는 벼락부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의 간절한 소망은 사실, 형이 살아나길 간절히 원하는 것보다 더 간절한 것은 부를 성취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이런 것 아닌가?
소위, 청빈을 말하는 설교자들조차도.
왜 그럴까?
야훼를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사실, 내가 맛본 야훼는 제대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