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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하는 양식
본문<요6:22~27>
지난주에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고 자신을 왕 삼으려 하던 무리들과 격리해서 제자들은 배를 태워 호수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예수님 당신은 산으로 피해 도망 가셨지요. 그런데 제자들이 배타고 가는 중에 풍랑이 일자 밤 사경까지 고초를 겪는 것을 보시고 주님이 물 위를 걸어오셔서 위기에서 구해주시고 평안히 목적지까지 당도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갈릴리 강은 폭이 넓은 곳은 12키로 되지만, 어부 출신들인 제자들이 가기에는 불과 30분 정도면 건너편으로 거뜬히 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거센 풍랑을 만나서 사투를 벌리다보니 초저녁에 출발한 배가 깊은 밤 사경(우리 시간으로 새벽 3시)까지 사경을 헤메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 때 주님이 모든 걸 아시고 찾아오셔서 배에 오르자 풍랑이 잠잠해 지고 배는 가버나움에 도착하게 됩니다.
16~17절, 20~21절을 다시 읽어 봅시다(갈릴리 바다? 호수? 1절도 바다~ 이게 성경의 의도성 비밀). ->목적지가 가버나움입니다. 또 다른 복음서에는 벳세다라고도 합니다.
그럼 성경이 서로 틀린 거냐? 아닙니다. 같은 말입니다. 벳세다는 지역이름이고 가버나움은 그 안의 작은 마을 이름이라고 생각하면 맞습니다(장안구 안의 조원동..). 일종의 이중 계시이지요. 주님이 탄생한 지역도 베들레헴 에브랏 땅이라고 합니다. 베들레헴(떡집, 말씀의 처소), 에브랏(곡물지역)- 같은 개념을 가진 단어를 이중으로 표현한 강조법이지요. IX는 떡집인 진리의 곳간에서 출생한다는 의미를 강하게 시사하는 말을 베들레헴 에브랏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과 제자들이 거센 풍랑을 뚫고 당도한 곳을 가버나움, 벳세다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ㅎ님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가려던 땅은 문자적으로는 가버나움이요, 벳세다입니다만, 지금 ㅎ님이 의도하는 것은,
-‘너희들이 궁극적으로 가려한 곳인 가버나움(즉 천국)은 나 예수와 함께 가는 곳이지 너희들 스스로 아무리 애쓰고 힘쓴다고 갈수 있는 게 아니란다.’를 주지시키시는 겁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마을의 이름이 ‘가버나움’인 것이지요. 가버나움은 ‘위로의 마을’이라는 의미 값을 가집니다. 위로의 마을? 즉 우리 성도가 궁극적으로 당도할 천국을 상징합니다. 계21장에서 언급하듯이 새하늘과 새 땅은 다시는 눈물도 없고 애통도 없고 곡하는 것이 없는 영원한 행복과 안식이 있는 곳입니다.
벳세다도 같은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어부의 집’이라는 의미 값을 가집니다. 죄와 심판과 사망을 상징하는 바다(세상)에서 구원된 물고기들이 성도들 아닙니까? 그래서 마13장에 보면 천국은 마치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그물과 같은데, 좋은 고기는 그릇에 담고 못된 고기는 다시 버리운다 말씀하시지요? 아니, 좋은 물고기도 있고 못된 물고기도 있나요? 다 비유지요.
좋은 고기란 자기 자랑, 자기 의가 전혀 없는 죄인들이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 얻는 것은 빗댄 말이고, 못된 고기란 바리새인처럼 자기 의가 가득한 자들이 율법 행함이나 반듯한 삶을 토대로 구원을 받겠다고 ㅎ님을 찾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마지막 심판 날에 다 버리움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이 때 ㅎ님은 물고기를 그물로 바다에서 건져 올리시는 어부 입니다.
그래서 ㅎ님 자신을 일컬어 어부의 집이라는 표현으로 벳세다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을 대충 읽으면 절대로 진리를 이해 할 수가 없는 7인으로 인봉된 책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설교가 다 설교가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신앙생활을 해야 곁길로 빠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주님의 물 위를 걸으시는 사건으로 가봅시다) 주님이 풍랑이 이는 배에 가까이 오실 때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사건이 있었지요? 요한복음에는 안 나오지만 마태복음에는 베드로가 주님께 말하지요. ‘주님 저도 물 위를 걷게 해주세요.’ 그러자 주님이 ‘와 보라~’ /(베드로)조금 걷다가 바람이 무서워 빠지게 되고, 그러자 소리치며 ‘주여 나를 구원 하소서’ 합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아주 많습니다만, 한가지로 요약하자면, 육적인 신자들이 IX를 믿는 이유에 대해 폭로 하시는 것입니다. ㅎ님의 힘을 빌려 세상에서 성공 출세하려는 모든 욕망이 바로 풍랑에 빠지는 것이고, 그게 저주요 심판거리요 사망의 일들이라는 고발을 하시는 것입니다. 매 시대의 육적인 사람들이 ㅎ님을 부르고 섬기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자기 소원 이루고 자기 성취 이루고자 함이 아닙니까?
이것을 이미 창6장 노아의 홍수 심판으로 계시한 바 있습니다. ㅎ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사랑하여 자기가 좋은대로 아내를 삼습니다. 거기서 네피림이라는 용사요 유명한 자들을 낳게 되지요. ㅎ님의 아들은 ㅎ님 말씀을 가진 자들을 빗댄 말입니다. 그러면 하늘을 지향하여 위에 것을 찾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방인처럼 세상과 세상의 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사람의 딸들을 사랑하여 아내 삼았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라구요? 네피림, 용사와 유명한 자를 출산하게 된다구요. 가령 ㅎ님의 이름을 빌려서 세상 축복과 성공출세를 강조하여 세계 제일의 대형교회를 세운 목사가 있지요?(여의도에..지금은 작고 하셨지만, 조아무개 목사). 그 분이 대표적인 네피림(용사요 유명한 자)의 상징이지요. 한마디로 ㅎ님 말씀을 육의 것으로 풀어서 세상의 주목을 받는 유명인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가 뭔가요? 홍수 심판으로 전부가 ‘물에 빠져 죽었다’입니다.
(다시 말씀) 그래서 설교가 다 설교가 아니고 교회가 다 교회가 아니고 목사가 다 목사가 아닌 겁니다. 거짓 목사는 여기저기 즐비한데 그런 자를 만나면 온 평생 그 자의 하수인이 되어 거짓목사의 비즈니스인 교회 부흥을 위해 종노릇하다가 종국에는 지옥으로 간다면 이 보다 억울하고 분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생을 송두리 채 사기 당했으니 오죽하겠어요. 그래서 심판 날에 헛된 종교 생활에 속아서 지옥 간 자들이 슬피 울며 이를 간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을 사29장에서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지요. <사29:9~14절> 읽으면서~
‘9절~ㅎ님의 계시가 없이 읽는 성경은 검은 건(글자), 하얀 건(백지) -ㅎ님의 의도를 모르면서 내는 열심은 마치 술취한 것 같은 비틀거림이라는 것임(문자 풀이는 죽이는 짓)
‘10~백성의 눈과 머리 역할을 하는 선지자와 선견자(종교 지도자들이) 다 소경이라는 말
‘11~유식한 자(율법 선생들, 종교지도자들)- 말씀의 참 뜻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
‘12~무식한 자(일반 백성들 역시 소경들임), 그래서 소경을 소경이 인도하여 둘 다 지옥행.
‘13~입으로는 ㅎ님 사랑, ㅎ님 경외함을 떠들지만 마음은 콩밭에..(자기 욕망 성취가 목적임)
-사람의 계명(인간의 상식과 이성으로 ㅎ님을 섬김- ㅎ님은 사람의 정성과 열심을 기쁘게 받아 주실 거야라는 생각으로 신앙하는 것이 죄악임(우상 섬김)
‘14~가장 기이한 일(종교 지도자들이 가장 어리석은 자의 자리에 앉아 행세를 함: 이게 저주)
<사42:18~19/22> 읽고
정말 등잔 밑이 어두운 꼴../제사장들이 소경이라서 이스라엘이 망함(가르침이 곧 생명이냐 사망이냐로 직결), 그래서 말라기서가 누구에게 쓰신 글?(수신자가 제사장)
-구약의 마지막 선지서, 말라기서는 제사장을 질타하시는 ㅎ님의 음성을 담고 있는 책임.
(말1:6절)~내 이름을 멸시하는 이 제사장들아! 세상에서도 아들은 아비를 공경하고, 종은 주인을 공경하거든 너희에게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고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냐? 하니까.
그들의 대답이 가관임(우리가 어떻게 언제 주의 이름을 멸시 하였나이까?)
-반문하고 오히려 역정을 내는 모습. 자신들은 당당하고 떳떳한데 ㅎ님, 지금 무슨 잠꼬대유?
너희가 더러운 떡을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언제)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을 경멸히 여기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니라(질타를 하심)
ㅎ님께 상을 차려드린다. 떡을 드린다는 말은 말씀을 잘 가르쳐서 백성들로 하여금 ㅎ님의 은혜에 감격과 감사가 터져 나오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데, 백성들은 억지로 제사를 지내고 복을 구하다보니 감사는 없고 불평불만이 가득한 상태(이게 더러운 떡, ㅎ님을 경멸히 여김임)
그렇지요. 제사장들은 율법의 본 뜻을 모르고 그냥 문자적으로 백성들을 독려해서 율법을 잘 지키고 종교적 열심을 내는 것이 ㅎ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가르쳐 왔었지요. 그래서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을 드리는 제사에 올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게 바로 제사에 담긴 ㅎ님의 뜻(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을 모르고, 제사와 제물을 많이 받치는 게 ㅎ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알고 가르쳐 온 결과였고, 이것이 ㅎ님의 진노를 사서 결국은 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제사의 참 뜻을 모르는 소경이다 보니, 문자대로 무조건 율법을 조항대로 지키고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 마다 철저히 제사를 드리는 게 좋은 신앙으로 알고 가르쳐 왔는데 그런 자기들을 나쁘다고 하니까, 언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고 주의 상을 더럽혔나이까 반문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제사장들은 ㅎ님의 뜻을 전혀 모르는 문외한이었지요.
그러면서 ㅎ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유가 자아성취, 자기발전, 자가확장을 꾀하고 ㅎ님의 능력을 빌어서 세상에서 복받고 박수갈채를 받는 것을 성경은 음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받은 은혜가 너무도 크고 귀해서 ㅎ님만을 순수하게 사랑해야 하는 아내된 자들이 남편이신 ㅎ님 외에 다른 남자인 세상신 마귀가 주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빠져 산다면 그것은 바람피우는 것과 같은 음녀라는 것입니다.(약4:4~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ㅎ님과 원수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질타하심..
이렇게 지난주에 주님은 물위를 걷고자 하는 베드로를 등용시켜서 자기 욕망을 위해 예수 믿는 자들의 실패하는 모습을 말씀하셨는데, 오늘 본문에서도 탐심을 가지고 예수 믿는 이것이 헛된 신앙행위인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라고 호통을 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부분을 먼저 흩어 보면 이렇습니다.
22~25절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기적으로 보고 놀라자빠진 무리들이 저 예수를 자신들의 임금 삼고자 끝까지 따라붙는 집요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오병이어 사건 후에, 주님은 무리들을 집으로 억지로 돌려보내며, 동시에 제자들도 강 건너편으로 보내고 당신은 산으로 피하셨다가 한 밤중에 사경을 헤메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함께 가버나움에 가셨지요.
그랬더니 무리들이 주님은 아직 오병이어 사건을 벌이신 광야에 계신 줄 알고 디베랴에서 배를 따고 어제 그곳으로 옵니다. 왜냐하면 어제 분명히 배는 한 척 뿐이었고, 거기에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강 건너편으로 갔으니까 당연히 예수님은 아직 오병이어 현장에 계실 것이라 여겼던 것이지요.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예수가 안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부랴부랴 가버나움까지 배를 몰고 좇아오게 되고 거기서 예수를 만납니다.
그러자 그들을 보신 주님이 아주 냉냉하게 말씀을 던지신 내용이 25~26절입니다(읽고..)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들은 오병이어 표적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를 임금 삼고자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표적은 어떤 메시지입니다. 표적을 통해 ㅎ님의 의도를 발견해야 하는데, 그냥 단순히 표적을 신비한 기적으로 여기니까 그런 능력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 소원을 들어주는 메시야로 생각하는 것이었지요. 오병이어는 자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살과 피를 흘려서 자기 백성들의 죄사함을 주는 복음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게 표적이 주는 메시지인데 단순히 기적으로 배를 채워주는 능력자로 보고 쫓아온 것이지요.
이렇게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있는 표적의 중심에는 자신들의 꿈과 소망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에게 표적은 자신들의 소원을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들의 육적 필요를 채워주는 맘씨 좋은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표적을 구하며 살았던 것이고 ㅎ님이 펼치시는 기적에 목말라 했던 것입니다.
과거 자신들의 조상들이 겪었던 표적들은 정말 엄청난 사건들도 가득찬 것들 이었으니까요.
죽음의 바다 홍해를 어떻게 마른 땅처럼 건넙니까? 시퍼런 물이 넘실대는 바다 속을 32키로나 걸어서 살아나온 역사는 그들의 민족적 자랑거리였고, 그런 ㅎ님을 언제나 기대하며 살아온 것이지요.
또한 신8장의 내용처럼 광야 40년을 2백만명 되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사막에서 먹고 마시고 입고 살았을까요? 2백만명은 직할시 정도 되는 인구입니다. 이들이 마시고 쓰는 물의 양은 강물이 흘러야 충당이 되지 우물 수십 개로는 턱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위에서 물이 터져서 강을 이루었다고 하는 겁니다. 게다가 40년간 신발은 닳지가 않는 겁니다. 이처럼 그 많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입고 산 것은 무엇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게 그래서 기적이 아니고 표적입니다.
광야 40년을 통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ㅎ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함이라는 것이지요. 너희들은 ㅎ님의 언약으로 사는 자들이지 너희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는 것이지요. 그 ㅎ님의 언약은 다른 말로 ㅎ님의 사랑이고 ㅎ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성취로 오신 분이 바로 IX이시구요.
이렇게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즉 표적들은 언약의 성취로 오신 자신을 가리키는 표지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옛언약에 갇혀 있던 유대인들은 새언약으로 오신 IX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가 모두 새언약의 실체이신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었지만, 정작 예수를 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는 어리석은 자들이 바로 유대인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자신들의 삶을 행복하게 해 줄 비밀이 가득한 판도라 상자로 생각합니다. 오늘 날도 이러한 기대를 갖고 성경을 읽으며 목사들의 설교를 듣습니다. 이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의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책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러한 것에 관심도 없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눈에 성경은 온갖 보화가 가득한 보물상자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예수 믿었으니 이제 죽으면 천국 가는 것은 따 놓은 당상이야 라고 생각하고, 남보다 더 많은 복을 받고자 교회생활에 열심을 냅니다. 2천 년 전에 이미 이러한 신앙방식이 예수님에 의해 정죄 받았다는 것을 이들은 알지 못합니다.
2천 년 전 오병이어 표적을 보고 예수를 임금 삼고자 했던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교회를 다니며 예수를 왕으로 찬양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지 않기는 매일반입니다. 유대인들도 성경을 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고 있다고 해서 온전한 신앙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표적을 보고 자기를 찾아온 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너희들은 표적을 본 게 아니야. 너희에겐 하나님의 표적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어”라는 말씀입니다. 영의 눈이 주어져 있지 않기에 주님의 모든 표적을 육신의 눈으로만 볼 뿐입니다. ㅎ님의 메시지를 모르니까 단순히 기적으로만 보이는 것이지요. 이것이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6: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를 찾아온 무리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양식이 등장합니다. ‘썩을 양식’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입니다.
썩을 양식이란 지금까지 베드로의 행위를 예를 들어 설명한 것들 모두를 말합니다. 단순히 육신의 배를 채워주는 것을 위한 헛된 신앙 뿐 아니라, ㅎ님의 이름을 팔아 세상에서 부자되고, 높은 자되고, 큰 자되고, 강한 자되자는 욕구와 탐심을 말합니다.
얼마 전까지 기독교 서점에서 베스트셀러가 였던 ‘긍정의 힘’이라든지, ‘목적이 이끄는 삶’ 등등이 모두 ㅎ님 이름을 팔아 성공 출세하자는 슬로건을 내건 책들입니다. 예수 믿어 복 받고 성공 출세하자. 이 얼마나 귀가 솔깃하고 달콤한 말 인가요? 그래서 이렇게 하고 저렇게 했더니 부자 되었고, 명예도 얻고 권세도 얻었다고 몇 가지 사례를 책에 싣는다면, 불티나게 팔리겠지요. 그래서 베스트셀러입니다.
한마디로 미혹으로 가득찬 마귀의 궤계를 담은 책이지만 누가 알겠습니까? 목사들이 앞 다투어 읽고 선전선동 하고 있는데요. 이게 바로 창6장에서 경계한 ㅎ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 삼아 낳는 네피림 사상입니다. 심판 거리를 쌓고 있는 것이지요.
계13장, 두 짐승이 등장하지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입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란 바다의 사상 즉 세상의 영을 가진 짐승인데, 짐승이라는 말은 ㅎ님의 관점에서 이고, 세상 사람이 보는 관점으로는 내 소원을 들어주는 참 좋은신 예수님, 능력의 예수님, 은혜로우신 예수님인 거지요. 줄여서 짝퉁 예수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때는 이 복주는 예수가 그렇게도 멋지고 훌륭하게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모두가 그 짐승에게 경배하며 찬송하기를 ‘누가 이 집승과 같으뇨?(4) 칭송한다고 합니다. 반어법이며 역설적 표현이지요. 누가 우리 ㅎ님, 우리 예수님처럼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많으실까? 우리 예수님 따봉! 이라는 말을 해학적으로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라고 경배한다는 거지요. 자신의 온 인생을 사기치는 사기꾼 조희팔을 몰라보고 아이구 사장님, 돈 벌게 해주셔서 감사 합니다, 하고 절하는 꼴과 같은 격입니다.
13장 8절에 보면, 창세로부터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은 이 짐승에게 다 경배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복을 위해, 썩을 양식을 위해 신앙하는 자들은 택함 받지 못한 자라는 확증을 해 주고 있다는 거지요.
이어서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란 이 바다짐승을 섬기라고 부추기는 거짓 목사, 거짓 선지자를 말합니다. 그들이 666표를 주면서 이 표를 받지 않으면 아무런 매매를 못하게 한답니다. 666이 뭘까요? 6은 짐승의 수요, 사람의 수라고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 주지만 그들은 소경인지라 뭔 말인지 모르지요(7이 완전수, 아무리 힘써도 7로 못 넘어간다는 암호성 숫자 임)
즉 6은 짐승처럼 먹고 마시는 육신의 먹거리를 위해 사는 정신사조를 의미하고, 거기에 가치와 의미를 두고 신앙하는 자들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과 방불한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생존을 위하고 본능을 위해서 사는 존재로서, 즉 사람의 모습을 했지만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다 짐승이라고 고발하시는 무서운 말씀입니다.
<눅 12:15-21>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사람의 생명은 물질이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재물을 곡간에 쌓아둘 일이 급선무가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하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하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예수님의 피를 믿는 것뿐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믿음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을 믿는 것이 곧 영생의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좀 전에 읽은 27절에 보니까, 이 양식은 인자가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영생의 양식을 주신다는 것은 믿어지게 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믿어지게 해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시는 믿음을 받는 사람은, 오병이어가 육신의 떡을 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죄사함을 얻게 해주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보여주는 표적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죄사함 받았다는 것이 믿어지시면 이것처럼 기적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복받은 자입니다. 그러니 비록 떡이 없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감사하고 사십시다.
아니, 저절로 감사가 솟구쳐 나옵니다.
롬5장 1절 이하를 보면 우리가 IX로 말미암아 ㅎ님과 화평케 되었으니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한다고 노래합니다. 어떻게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이건 인간의 본성과 거스리는 일인데요, 그래서 누구든지 본능적으로 환난은 꺼려지고 피하고 싶잖아요?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바울과 실라처럼 어떻게 감옥에서도 찬양이 나올까요?
ㅎ님의 은혜로 얻어진 구원의 기쁨을 누구도 빼앗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일생에 매여 죽기를 두려워하지만, 성도는 그리스도의 피로 영생을 소유한 자이기 때문에 어떠한 환난과 고난도 구원의 기쁨과 평강을 해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재물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도 죄와 사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하루하루를 두려움과 근심걱정으로 산 어리석은 부자보다 행복한 것입니다.
눅16장을 보면, 부자는 썩어질 양식으로 자색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며 살았지만 죽어 음부에 떨어지고, 극심한 가난 속에 살던 나사로는 죽어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어디에 방점을 두고 살아야 할까요? 현세입니까? 내세입니까? 둘 다 일수는 없습니다.
불나방처럼 잠시잠깐의 일장춘몽의 길을 가는 자는 영생과는 무관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떡 보다 더 귀하다는 것이 믿어지는 우리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자요, 가장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이런 복을 주신 ㅎ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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