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 작정을 이루는 세가지 맹세>의 줄거리:
'십자가 작정'이라니 의아하십니까? 아덴 전도의 뼈아픈 경험에서 나오게 된 사도바울의 작정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런 십자가 작정 안에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어도 세 가지 맹세가 함께 포함됩니다. 이 맹세 없이는 십자가 작정도 없습니다.
십자가 작정을 이루는 세 가지 맹세
(사도행전 18:18~23)
18.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19.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20.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21. 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22.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23.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 작정을 이루는 세 가지 맹세>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 작정을 이루는 세 가지 맹세’
제목은 세 가지 맹세를 지켜나가지 않으면 십자가 작정을 이룰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십자가 작정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의 전도활동을 끝으로 2차 전도여행을 마치게 됩니다. 강릉에 주문진이라는 항구가 있듯이 고린도에는 겐그레아라는 항구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00km 정도 떨어져 있는 지중해 연안의 가이사랴로 향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전도여행의 보고를 한 후에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갈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겐그레아에서 출발한 배가 가이사랴로 가는 도중에 에베소에 들리게 되었고 바울은 이곳에서 전도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 후에야 본래 계획하였던 가이사랴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2차 전도여행의 보고를 한 뒤에 안디옥 수리아로 와서 쉬다가 3차 전도여행에 나서게 됩니다.
한편 본문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다면 18절입니다.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고 하였습니다. 서원은 맹세입니다. 바울은 일찍이 어떤 맹세를 하였고 그 기간이 끝나고 나서 머리를 깎았다는 내용입니다. 바울의 맹세는 전통적으로 유대 율법이 정하고 있는 나실인의 규정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동안에 나실인으로 살겠다는 서약을 하였고 그것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이 끝난 뒤에 머리를 깎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으면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 기간 동안 고리타분하게 느낄 수도 있는 구약의 율법이 정하고 있는 나실인의 규정을 수행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먼저 나실인의 규정이 어떻게 준행되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나실인은 구별되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민수기 6장을 보면 나실인은 몸을 여호와께 드리기 위하여 거룩하게 구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몸을 드리기 위해서는 세 가지 맹세를 지켜야 했습니다. 세 가지 맹세 중에 첫 번째는 포도주나 독주 혹은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어떠한 소산도 입에 댈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머리를 깎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시체와 가까이해서는 안 되었는데 설령 부모나 형제가 죽어서 장례를 지낼 때도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떤 취지로 이렇게 나실인의 서약을 하고 세 가지 맹세를 지키게 되었을까요? 먼저 포주나 독주나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않겠다는 맹세는 몸 자체가 느끼는 기쁨을 억제하고 포기하고 중단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든지, 추운 겨울에 따끈한 욕조에 들어간다든지, 남녀관계를 한다든지 이외에도 육체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나실인 규정의 첫 번째는 몸을 여호와께 드리기 위하여 그 기쁨을 포기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머리를 깍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직접 언급한 내용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4절을 보면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부끄러움이란 당시의 사회적 관계에서 남자가 머리를 깍지 않는 것은 사람들에게 보일 수 없는 모습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몸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기 위하여 사회적 기쁨을 포기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기쁨은 곧 인간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입니다. 친구들을 만나거나, 애인을 만나거나, 가족과의 관계에서 위로를 받는 등에서 오는 기쁨을 근본적으로 포기하겠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로 시체를 절대로 가까이할 수 없었습니다. 시체는 피조세계 안에서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이 없는 대상입니다. 하루살이 같은 미물이라도 날아다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임하고 있습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에도 하나님의 뜻은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새든 사람이든 죽어서 시체가 되었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와 뜻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시체에 손을 대면 부정하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이 없는 일에 대해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은퇴자금으로 사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하나님 안에서는 뜻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시체에 손을 대는 것과 똑같이 부정한 일입니다. 오늘은 어디를 가야겠다는 결심을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준비된 일이 아니라면 시체에 손을 대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시체를 만지면 안 된다는 규정은 스스로 뜻을 세우고 의지를 발동해서 소원을 가질 때에 생기는 기쁨을 포기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세 가지 맹세가 뜻하는 바를 정리해봅니다. 첫 번째 규정은 몸 자체가 느끼는 기쁨을 포기하겠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인간관계로부터 얻을 수 있는 기쁨을 포기하겠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이 세상에서의 소원성취를 통해 얻는 기쁨을 포기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몸이 있음으로써 몸 자체의 기쁨이든 인간관계에서 얻는 기쁨이든 몸을 움직여서 소원을 성취하는 기쁨이든 몸을 통해 생기는 기쁨을 다 포기할 때에 몸은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것이 나실인 규정에 담긴 취지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십자가 복음을 알고 있던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전파 중에 새삼스럽게 나실인 규정의 서약을 하게 되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문에서는 그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 않지만 나실인 규정의 내용으로부터 그 이유를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알고 있던 사도 바울의 나실인 서약은 앞서 말씀드린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는 십자가 작정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작정과 나실인 서원이 사도 바울 안에서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작정과 나실인 서원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십자가 작정은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의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먼저 의식한다고 해서 진심으로 실제가 되는 것은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7장 24절을 보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몸으로 살고 있는 동안에 십자가 작정을 수행해 나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몸으로 살고 있기에 몸은 세상과 작용하게 됩니다. 몸 자체가 얻을 수 있는 기쁨을 추구하고자 하고, 인간관계에서 기쁨을 얻고자 하고,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일들에 대해 소원을 가지고 이룸으로써 기뻐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십자가 작정을 굳게 했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죽음으로써 생기는 일의 구체적인 내용을 모른다면 십자가 작정은 작정일 뿐 실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못 박혀 죽으신 것을 의식하고, 그 죽음을 실제 삶에서 이루어 나간다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의식으로 십자가 작정을 했다면 삶에서는 나실인 규정이 지켜져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깨달았기에 나실인 규정의 서약을 했던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포도주를 먹지 말라는 것은 몸 자체가 느끼는 기쁨에 경각심을 가지고 배제하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과 동전의 앞뒷면처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몸 자체가 느끼는 기쁨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통해 얻는 기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로울 때면 친구에게 전화라도 하고 싶고 만나고 싶어집니다. 이러한 인간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 또한 십자가에서 못 박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또 이 세상에 대해 소원성취를 통해 얻으려는 기쁨도 십자가에서 못 박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럼으로써 의식에서 이루어진 십자가 작정은 실제로 수행되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본래 나실인 규정의 취지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몸이 온전히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려지게 됩니다.
마음이 곧 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모셔 들이고 관계할 수 있는 기관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바로 이 영인 마음에서 느껴지는 것입니다. 포도주를 먹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포도주만 먹지 말라는 기계적 행동에 대한 요구가 아닙니다. 포도주를 먹을 때에 몸이 느끼는 좋음으로부터 마음의 기쁨을 경계하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포도주가 기쁨을 상징하는 소재로 단골처럼 사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 또한 궁극적으로는 마음의 기쁨을 위해 존재합니다. 세상에 대한 모든 소원과 바람도 궁극적으로는 마음의 기쁨이 주어지는 자리로 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기쁨을 위해서 몸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내 몸을 도둑질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몸을 통하여 얻으려고 하는 세 방면의 기쁨을 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야 될 이유가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으로 몸이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습니다. 몸의 기쁨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이면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십자가만을 의식한다는 것은 몸 자체가 느끼는 기쁨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이고,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기쁨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이고, 이 세상을 향하여 갖는 소원에서 얻어지는 기쁨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몸을 통해 얻는 기쁨을 십자가에서 죽일 수 없다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는 십자가 작정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얻어지는 기쁨을 죽일 때만 십자가를 의식할 수 있다고 하니 우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몸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기쁨을 십자가에서 죽일 때 비로소 얻어지는 참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작정이 이루어질 때 우리의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마주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몸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세 방면의 기쁨을 십자가에서 죽이면, 기쁨을 느끼는 마음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즉 이 순간에도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마주하고 계시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과 마주하게 됩니다.
나실인의 규정과 사도 바울의 십자가 작정에서 드러나는 진정한 기쁨은 바로 하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간에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 아버지와 마주하며 기쁨을 느껴야 합니다. 참 기쁨은 이 땅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몸을 중심으로 이 땅에서 기쁨을 얻게 하려는 것이 사탄의 계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계략에 완전히 빠져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았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한 기쁨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몸 자체가 느낄 수 있는 기쁨, 인간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기쁨, 이 세상에서 소원성취를 통해 주어지는 기쁨은 모두 악마적인 기쁨입니다. 사탄에 속아서 느끼는 기쁨입니다. 기쁨이란 본래 창조 전부터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샘솟는 특징입니다. 이전 설교에서 기쁨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특산물이라고 표현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기쁨을 위해서 존재할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이 기쁨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특산물이기 때문에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할 때에만 얻을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십자가 작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식하기 위해서는 몸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여겨지는 세 방면의 기쁨에 대해 죽음이 동반되어야만 합니다. 몸 자체를 통해 주어지는 기쁨, 인간관계를 통해 주어지는 기쁨, 소원성취를 통해 주어지는 기쁨의 욕구는 시시각각으로 생겨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욕구가 생길 때마다 십자가로 그 욕구를 죽일 수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을 알기로 작정한 십자가 작정은 수행될 수 없습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사도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이 시작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3차 전도여행에서도 십자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도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강조된 것은 1차 2차 전도여행을 통해 이미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인 제자들을 굳건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러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 아버지를 마주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자리까지 따라가야 할 제자들을 굳건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던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몸이 처한 상황을 의식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먼저 의식하는 것이 굳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작정은 우리에게도 꼭 필요합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였을지라도 건강 문제에 의식을 뺏기고, 돈 문제에 의식을 뺏기고, 가족 문제에 의식을 뺏기는 상태에서는 믿음이 굳건할 수 없습니다. 몸을 통해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동안에는 십자가 작정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돈 문제의 해결을 통해 기쁨을 얻으려 하고, 건강해져서 기쁨을 얻으려 하고, 가족관계를 원활하게 해서 기쁨을 얻으려고 하는 동안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먼저 의식하겠다는 십자가 작정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기대하고 바라고 있는 모든 방면의 기쁨은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의식하는 십자가 작정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염두에 두고 제자들을 굳건하게 한 뒤에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하게 됩니다.
본문을 통하여 사도 바울의 마음을 배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또한 십자가 작정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그 십자가 작정이 실제로 삶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해서 항상 경각심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몸이 있기 때문에 기대되는 기쁨을 십자가에서 죽일 때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 아버지를 마주하고 계시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천국의 현실 속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마주하여 기쁨을 얻을 때 우리의 마음은 물론이고 몸도 하나님 아버지께 드려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십자가 작정을 하고 이를 이루기 위하여 이 땅에서 기대되는 세 방면의 기쁨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굳건한 제자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의 인격은 작정하고 맹세할 수 있는 기능이 있습니다. 이 인격을 유일하게 적용하여 십자가 작정을 하게 하시며, 나실인 규정의 취지를 살려서 십자가 작정을 실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에서 기대하는 모든 기쁨에 경각심을 갖고 십자가에서 죽이는 삶을 살면서 참 기쁨을 얻게 하시고, 이 땅에 있는 몸은 하나님의 수단으로 온전히 드려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