相臣 南智 碑銘[南九萬]
維我南自得姓來, 遠有代序, 具載領議政、宜寧府院君、忠景公諱在之碑。 忠景公有二男, 長諱景文, 兵曹議郞, 蚤卒不究用, 贈領議政府事, 配曰淑寧宅主溫陽方氏, 參議恂之女。 有三男, 公其長也。 諱智, 生年及表德無考。 公聰明絶人, 風儀端重, 剛果有膽志, 爲一時所推服。 勝冠, 仕爲司憲府監察, 時忠景公尙無恙。 公之自公退, 必問其所事。 一日歸白曰: “今日有下吏入藏, 潛懷錦段而出, 使之還入藏。 如是者再三, 吏方識其意, 置錦段而出矣。” 忠景曰: “汝以童子備官, 是以每有問, 欲知其得失, 自今吾可以無問。” 世宗元年己亥, 忠景公捐館舍, 上親臨弔賜祭。 公以嗣孫主喪, 伏道左迎, 祭時承命奠爵, 駕旋伏道左哭。 上俯而過以禮之。 七年乙巳, 以軍器寺副正, 出佐嶺南幕, 爲經歷。 時敬齋河文孝公演按道, 聞公來, 憂之曰: “此年少閥閱子, 必不事事。 吾其奈何?” 公初入謁, 文孝公乃抄難判公事卷宗付之曰: “剖判此來。” 及退使人察之, 方與客轟飮於帳中。 明日酒醒起, 披卷宗一過, 以爪甲畫標而進曰: “某字誤當改, 某事錯當辨。” 文孝公大驚服器重。 自此咨詢公務之外, 時雜以善謔, 許與款密, 如故交執友, 不以年位自高也。 還拜司憲府持平, 時都承旨趙瑞老有帷薄之誚, 人無敢先發。 公赴朝參, 率所由二十餘人待趙入, 令所由盡縛其丘史, 卽於朝房鞫問正法, 擧朝肅然。 陞掌令, 出長湍府使、開城府留後, 襲封宜城君。 十七年乙卯, 奉使中朝, 奏請書籍。 二十一年己未, 拜大司憲, 遷戶曹參判, 出慶尙道觀察黜陟使。 秩滿, 擢拜刑曹判書, 移戶曹判書。 感遇明時, 夙夜匪懈, 主眷朝望無出右者。 二十八年丙寅, 昭憲后昇遐, 守陵官難其人。 時公甫闋私喪, 而伏闕下自請, 大爲時議所多。 三十一年己巳, 以判院事拜右議政, 時文孝公方爲左相。 公出謝日, 首造其宅。 文孝公延入戶, 顧謂曰: “首領官、老監司蹉一足, 不可說也。” 蓋喜其以舊時幕佐同升公而武相接也。 三十二年庚午, 世宗禮陟, 文宗卽阼, 二年壬申又棄臣民。 公以左相與領議政皇甫仁、右議政金宗瑞同受顧命。 時大喪相仍, 中外危疑, 而匡維鎭伏, 有大臣之道, 上下倚之。 其年十月, 以風瘖病甚解相職, 移拜領中樞院事。 未幾捐館舍, 年則無考, 葬于鎭川縣南楊泉山梨峙負壬之原。 夫人全義李氏, 副正文幹之女, 生卒年月日亦無考, 葬在公墓後二十餘武負辛之原。 生五男三女: 男長觀察使倫, 次副正偁, 次郡守俅, 次別坐休, 次參判儀。 女長適臨瀛大君璆, 次適宜春君友直, 次適趙武英。 側室一男仝。 孫曾以下, 奕世蟬聯, 至于今推爲盛族。 其在端宗元年癸酉, 有瑢之難, 友直卽瑢之子也。 父子竝以罪死, 而公以姻家無及者, 以病不省朝政也。 然公卒後, 猶以友直故闕贈典。 歷三朝, 至成宗二十年己酉, 公之孫承旨忻上請于朝。 命議大臣, 賜諡忠簡。 公初從門庇, 弱齡登朝, 由卑至鉅, 聲績日茂。 自結明主, 遂贊辨章, 有始有終, 爲世名臣, 身後哀榮亦已備矣。 然今二百有餘載, 尙無神道之刻, 豈不有慊於後孫之心耶? 今者宗孫磐慨然於斯, 與諸宗人議將斲石載辭, 以爲後觀, 以九萬亦列爲裔孫, 俾序而銘之。 九萬於此, 雖不敢當, 亦何敢辭? 然自公下世, 公私旣多故, 年代且漸遠, 朝家文獻足徵者尟, 家藏舊乘蕩軼於兵燹, 史籍秘文又不可以私窺。 今欲紀公之德, 將何所据也? 然失今不圖, 則今之僅有聞者, 又將愈至於沈沒, 是用爲懼。 謹稽宗人譜牒、官府掌故及世之所傳瑣錄叢話, 去疑取信, 稍次其先後如右。 然公於平日陳謨於廟堂、垂訓於子孫, 可以爲國典、可以爲家法者, 則俱無得以書焉, 其疎略亦甚矣。 然公之流風遺範, 可以想見其彷彿者, 猶幸有先輩之緖言。 蓋聞公之觀察嶺南也, 玩易齋姜碩德作詩送之曰: “惟公長豸冠, 抗疏明光宮。 至尊開天顔, 骨鯁嘉精忠。 豺狼敢縱橫? 膺隼當秋空。 古柏更亭亭, 嚴霜帶烈風。 正宜與明道, 懸河辯不窮。 又杖嶺南節, 旌麾指祝融。 撤此廊廟材, 本欲起疲癃。 行行樹佳政, 功業期盛隆。” 宣廟朝李文成公珥上疏曰: “世宗大王是東方聖主也。 用人由己, 惟賢惟才。 南智出自門蔭, 而以黑頭拜三公。 金宗瑞顯被物議, 而以獨見開六鎭。 位稱其才, 則終身不改, 一朝陞擢, 則不限階級, 此眞古昔聖主明王任賢使能之一揆也。” 公之玄孫彦紀有文, 而求志不仕, 其讚公之言曰: “公生而神異, 不肯示人以能。 讀書七行俱下, 過目不忘。 不屑科業, 未嘗入場屋, 而自少人皆以公輔期之。 蒙遇世宗, 超擢不次, 倚任甚重。 文宗大漸, 受顧命輔幼主, 多所建白, 適移疾家居而卒。 其功烈德業, 今雖未詳, 而名臣之多用捨之當, 莫盛於世、文之際, 當此時位百僚之上, 受六尺之託, 則其人可知也。” 念公遺事, 其亡者旣多, 其存者益可貴。 是以 今於玆三引者, 文雖繁而不殺, 以致其長言之而不足之意云爾。 銘曰:國有世臣, 是謂古國。 主少國疑, 惟相之屬。 任斯重者, 匪公其孰? 繼世作輔, 若賢與陟。 受遺擁幼, 如朝及奭。 二宗之明, 不失其擇。 公之忠藎, 亦不負職。 曁公告病, 難始有作。 若廈將傾, 高棟先仄。 天方有興, 豈容人力? 送往事居, 公則無恧。 公之子孫, 象公之德。 及于雲仍, 旣蕃且碩。 咸荷餘休, 世有祿食。 獨念遺墟, 牲繫無石。 行路猶嗟, 矧我同族? 是度是詢, 疇有不勖? 齊心竝事, 克蕆顯刻。 其詩孔好, 可誦可讀。 永懷風聲, 於焉如覿。
국역문 장달수 첨록
8대 조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 감춘추관사 세자부 의성군(宜城君) 증시 충간공(忠簡公) 부군 신도비명
우리 남씨(南氏)는 성씨를 얻은 이래로 멀리 대를 이어 왔는바, 영의정 의령부원군 충경공(忠景公) 휘 재(在)의 비석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충경공은 2남을 두었는데, 장자 휘 경문(景文)은 병조 의랑으로 일찍 별세하여 끝내 세상에 쓰이지 못하였는바 영의정 부사(領議政府事)에 추증되었으며, 배위는 숙녕택주(淑寧宅主) 온양 방씨(溫陽方氏)이니 참의 방순(方恂)의 따님이다. 3남을 두었는데 공이 바로 장남으로 휘가 지(智)이며 생년과 자(字)는 상고할 수 없다. 공은 총명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풍채와 의표가 단정하고 후중하며,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고 담력과 지조가 있어 당시에 추앙과 신임을 받았다. 약관 시절에 벼슬하여 사헌부 감찰이 되었는데, 이때 충경공이 여전히 건강하였다. 공이 공청(公廳)에서 물러 나오면 충경공은 반드시 일한 것을 묻곤 하였는데, 하루는 돌아와 아뢰기를, “오늘 하리 한 사람이 창고에 들어가서 몰래 비단을 훔쳐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다시 창고로 들어가게 하여 이와 같이 하기를 두세 번 하였더니, 하리가 비로소 그렇게 한 뜻을 알아차리고는 비단을 놓아두고 나왔습니다.” 하니, 충경공은 말하기를, “나는 네가 어린 나이에 관원이 되었기 때문에 매번 공청에서 한 일을 물어 잘잘못을 알고자 한 것이었는데 지금부터는 내가 묻지 않아도 되겠다.” 하였다. 세종 원년(1419) 기해에 충경공이 별세하니, 상은 친히 왕림하여 조문하고 치제하였다. 이때 공은 사손(嗣孫)으로 상주가 되어서 길 왼쪽에 엎드려 맞이하였으며, 제사를 올릴 때에 명을 받들어 술잔을 올렸다. 대가가 돌아갈 때에 길 왼쪽에 엎드려 곡하니, 상은 몸을 굽히고 그 앞을 지나가 예우하였다. 7년(1425) 을사에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으로 있다가 영남의 막료로 나가 경력(經歷 도사(都事) )이 되었다. 이때 경재(敬齋)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이 이 도의 관찰사가 되었는데, 공이 온다는 말을 듣고 걱정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양반집 자제로 나이가 젊으니, 반드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것이다. 내 어찌한단 말인가.” 하였다. 공이 처음 들어와 뵙자, 문효공은 마침내 판별하기 어려운 공사(公事)의 서류철을 뽑아서 맡기며 말하기를, “이것을 판별해서 가지고 오라.” 하였다. 공이 물러가자 문효공은 사람을 시켜 살펴보게 하였는데, 공은 한창 손님들과 장막 안에서 술을 많이 마시고 있었다. 공은 다음 날 술이 깨어 일어나서 서류철을 한 번 펴보고는 손톱으로 그어서 표시를 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아무 글자는 오자이니 고쳐야 하고, 아무 일은 잘못되었으니 분별해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문효공은 크게 놀라고 탄복하여 소중히 여겼다. 이로부터 공무를 자문하는 이외에 때때로 농담을 주고받았으며, 허여하고 친밀하게 대해서 예로부터 사귄 친한 벗처럼 여기고 나이와 지위를 가지고 스스로 높은 체하지 않았다. 돌아와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도승지 조서로(趙瑞老)에게 유박(帷薄)의 비난거리가 있었으나 사람들이 감히 먼저 말하지 못하였다. 공은 조참(朝參)에 나가서 소유(所由 사헌부의 이속(吏屬) ) 20여 명을 거느리고 조서로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소유들로 하여금 그 구사(丘史)들을 모두 포박하게 하고 즉시 조방(朝房)에서 국문하여 법을 바로잡으니, 온 조정이 숙연하였다. 장령으로 승진하고 장단 부사(長湍府使)와 개성부 유후(開城府留後)로 나갔으며 의성군(宜城君)에 습봉되었다. 17년(1435) 을묘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중국에 갔는데, 이때 서적을 내려 줄 것을 주청하였다. 21년(1439) 기미에 대사헌에 제수되고 호조 참판으로 옮겼으며, 경상도 관찰출척사(慶尙道觀察黜陟使)로 나갔다가 임기가 차자 형조 판서로 발탁되고 호조 판서로 옮겼다. 공은 태평한 세상에 군주의 신임을 받는 것에 감격하여 밤낮으로 봉직하고 게을리 하지 않으니, 군주의 신임과 조정의 명망이 공보다 더한 자가 없었다. 28년(1446) 병인에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승하하니, 수릉관(守陵官)에 적임자를 얻기가 어려웠다. 이때 공은 겨우 사사로운 상(喪)을 마쳤는데, 대궐 아래에 엎드려서 수릉관이 될 것을 자청하니, 당시 공론이 대단히 훌륭하게 여겼다. 31년(1449) 기사에 판원사(判院事)로 우의정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문효공이 막 좌의정이 되었다. 공이 나와서 사은하던 날에 첫 번째로 문효공의 집을 찾아가자, 문효공은 공을 맞이하여 문에 들어오게 하고 돌아보며 말하기를, “수령관(首領官)과 늙은 감사가 한 발짝만 어긋났으면 말을 나눌 수 없을 뻔하였네.” 하였으니, 이는 옛날 막료로서 함께 의정부에 올라 벼슬해서 발자취가 서로 이어짐을 기뻐한 것이었다. 32년(1450) 경오에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文宗)이 즉위하였는데, 2년(1452) 임신에 또다시 문종이 신하와 백성들을 버리니, 공은 좌상으로 있으면서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우의정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고명(顧命)을 받았다. 이때 국상(國喪)이 서로 이어지니, 중외의 사람들이 위태롭게 여기고 의심하였으나 공이 바로잡고 진정시켜 대신의 도리가 있었으니,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공에게 의지하였다. 이해 10월에 중풍에 걸려 말을 못 하고 병환이 심하므로 정승의 직책을 해임하고 영중추원사에 옮겨 제수되었는데 얼마 안 있어 별세하였으니, 나이는 상고할 수가 없다. 진천현(鎭川縣) 남쪽 양천산(楊泉山) 이치(梨峙) 임좌(壬坐)의 산에 장례하였다.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부정(副正) 이문간(李文幹)의 따님인데, 출생 연도와 별세한 연월을 또한 상고할 수 없으며, 장지는 공의 묘소 뒤쪽 20여 보쯤 되는 신좌(辛坐)의 산에 있다. 5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관찰사 윤(倫)이고 차남은 부정(副正) 칭(偁)이며 다음은 군수 구(俅), 별좌(別坐) 휴(休), 참판 의(儀)이며, 장녀는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의춘군(宜春君) 이우직(李友直)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조무영(趙武英)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에게서 1남 동(仝)을 낳았다. 손자와 증손 이하는 대대로 높은 관직에 올라 지금까지도 명문거족으로 일컬어진다. 단종(端宗) 원년(1453) 계유에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난이 있었는데, 사위인 이우직은 바로 이용의 아들이었다. 부자가 모두 죄로 죽었으나 공은 인척의 집안으로서 화가 미치지 않았으니, 이는 병을 앓아 조정의 정사에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은 별세한 뒤에도 오히려 이우직 때문에 추증하는 은전을 받지 못하다가 세 조정을 지나 성종(成宗) 20년(1489) 기유에 이르러 공의 손자인 승지 흔(忻)이 조정에 올려 청하니,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여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공은 처음에 문음(門蔭)으로 어린 나이에 조정에 올라 벼슬하였고, 낮은 벼슬로부터 높은 벼슬에 이르러서 명성과 공적이 날로 성하였다. 공은 스스로 성명(聖明)한 군주의 신임을 받아 마침내 정승의 지위에 올랐으며, 시작도 있고 끝마침도 있어 세상의 유명한 신하가 되었고, 별세한 뒤에 애도하고 영화롭게 함이 또한 이미 갖추어졌다. 그러나 지금 200여 년이 넘도록 아직 신도비에 새긴 비문이 없으니, 어찌 후손들의 마음에 서운함이 없겠는가. 이제 종손 반(磐)이 이것을 서글퍼하여 여러 종인들과 함께 의논하고 돌을 깎아 비문을 새겨서 후손들이 보게 하려 할 적에 구만에게 또한 후손이 된다 하여 서문을 쓰고 명문(銘文)을 짓게 하였다. 구만은 이에 대하여 비록 감당할 수 없으나 또한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그러나 공이 별세한 뒤로 공사 간에 이미 연고가 많았으며, 연대가 또 점점 멀어져서 조정의 문헌도 증빙할 만한 것이 적고 집에 보관된 옛 가승(家乘)도 병란에 모두 없어졌으며, 사적(史籍)의 비문(秘文)은 또 사사로이 볼 수가 없다. 이제 공의 덕을 기록하고자 한들 장차 무엇을 근거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기회를 놓치고 도모하지 않으면 이제 겨우 들어서 알고 있는 것마저 장차 더욱 매몰됨에 이를 것이다. 이것을 두려워하여 종인들의 보첩(譜牒)과 관부(官府)의 장고(掌故) 및 세상에 전해 오는 자질구레한 기록과 여러 이야기들을 상고해서 의심스러운 것을 빼고 믿을 만한 것을 취하여 그 선후를 차례로 엮기를 위와 같이 하였다. 그러나 공이 평소 조정에서 좋은 계책을 아뢰고 자손들에게 훌륭한 교훈을 남겨서 국가의 법이 되고 집안의 모범이 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기록하지는 못하였으니, 그 소략함이 또한 심하다. 그러나 공이 남기신 유풍과 법도로 생시를 방불케 하는 모습이나마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으로는 다행히 선배들의 말이 남아 있다. 내가 들으니, 공이 영남 관찰사가 되었을 적에 완역재(玩易齋) 강석덕(姜碩德)이 시를 지어 보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공은 치관의 장관이 되어 / 惟公長豸冠 명광궁에서 상소를 올리니 / 抗疏明光宮 지존께서는 온화한 얼굴을 펴시고 / 至尊開天顔 강직한 신하의 충성 가상히 여기셨네 / 骨鯁嘉精忠 승냥이와 이리 감히 멋대로 날뛰겠는가 / 豺狼敢縱橫 송골매가 가을 하늘 높이 날고 있다오 / 鷹隼當秋空 오래된 측백나무 더욱 우뚝하니 / 古柏更亭亭 차가운 서릿발 세찬 바람을 띠고 있네 / 嚴霜帶烈風 의리를 바루고 도를 밝히니 / 正誼與明道 현하와 같은 언변 끊임이 없었다오 / 懸河辯不窮 또다시 영남의 절월(節鉞)을 잡아 / 又杖嶺南節 깃발이 남방을 가리키니 / 旌麾指祝融 이 조정의 재목을 거두어감은 / 撤此廊廟材 본래 곤궁한 백성 일으키려고 해서이네 / 本欲起疲癃 굳세고 강직하여 훌륭한 정사 이룩해서 / 行行樹佳政 융숭한 공업 기약하노라 / 功業期盛隆 하였다.
그리고 선조(宣祖) 때에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가 상소하기를, “세종대왕은 우리 동방의 성주(聖主)이신데, 인재를 등용하시되 자신으로 생각하여 오직 현자와 유능한 자를 발탁하셨습니다. 남지(南智)는 문음 출신이었으나 젊은 나이에 삼공(三公)에 임명되었으며, 김종서(金宗瑞)는 남들의 비난을 크게 받았으나 자신의 소견대로 육진(六鎭)을 개척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지위가 그 재주에 걸맞으면 종신토록 고치지 않았으며 하루아침에 발탁하면 계급에 제한하지 않았으니, 이는 참으로 옛날 성스러운 황제와 현명한 왕들이 현자에게 맡기고 유능한 자를 부린 것과 같은 법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공의 현손 언기(彦紀)는 문장을 잘하였으나 지조를 지켜 벼슬하지 않았는데, 공을 칭송하여 말하기를,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신기하고 특이하였으나 사람들에게 재능을 보여 주려고 하지 않았다. 책을 읽을 때에 일곱 줄을 한꺼번에 보았으며 눈으로 한 번만 보면 잊지 않았다. 과거 공부를 좋아하지 않아 한 번도 과장에 들어간 적이 없으나 어릴 때부터 사람들이 모두 공경(公卿)이 될 인물로 기대하였다. 세종의 인정을 받아 품계의 차례를 밟지 않고 특별히 발탁되니, 의지하고 맡기기를 매우 소중히 하였다. 문종의 병환이 심해지자 고명(顧命)을 받고 어린 군주를 보필하여 건의한 일이 많았는데, 마침 병으로 집에 있다가 별세했다.” 하였다. 공의 공렬과 덕업을 지금 비록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명신(名臣)의 많음과 인재 등용의 마땅함이 세종과 문종의 즈음보다 더 성대한 적이 없는데, 공은 이때를 당하여 백관의 위에 올라 어린 군주를 부탁받았으니, 그렇다면 그 인품을 알 수 있다. 공의 유사(遺事)를 생각해 보건대 없어진 것이 이미 많으니, 남아 있는 것이 더욱 소중하다. 이 때문에 지금 이 세 가지를 인용하면서 글이 번잡한데도 줄이지 아니하여 길게 늘어놓아 부족한 뜻을 다하는 바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나라에 세신이 있으면 / 國有世臣 이것을 오래된 나라라 이르네 / 是謂故國 군주가 어리고 나라가 의심스러울 때에는 / 主少國疑 오직 정승에게 달려 있으니 / 惟相之屬 이 중책을 맡을 자 / 任斯重者 공이 아니면 그 누구이겠는가 / 匪公其孰 대를 이어 정승이 되니 / 繼世作輔 무현(巫賢)과 이척(伊陟)과 같고 / 若賢與陟 유지(遺旨)를 받아 어린 군주 도우니 / 受遺擁幼 단(旦)과 석(奭)과 같았다오 / 如朝及奭 세종과 문종의 현명함으로 / 二宗之明 선택을 잘하였으며 / 不失其擇 공의 충성 / 公之忠藎 또한 직책을 저버리지 않았네 / 亦不負職 공이 병환으로 집에 계실 때에 / 臮公告病 난이 비로소 일어나니 / 難始有作 마치 집이 무너지려 함에 / 若廈將傾 높은 기둥이 먼저 기우는 것과 같았다오 / 高棟先仄 하늘이 막 딴 임금을 일으키려 하니 / 天方有興 어찌 인력으로 될 수 있겠는가 / 豈容人力 돌아가신 분을 전송하고 살아 계신 분을 섬김에 / 送往事居 공은 부끄러움이 없었네 / 公則無恧 공의 자손들은 / 公之子孫 공의 덕을 본받아 / 象公之德 후손에 이르러 / 及于雲仍 번성하고 또 훌륭하였네 / 旣蕃且碩 모두 남은 음덕을 입어 / 咸荷餘休 대대로 국록을 먹었네 / 世有祿食 홀로 생각건대 유허에 / 獨念遺墟 신도비가 없으니 / 牲繫無石 길 가는 사람들도 오히려 한탄하는데 / 行路猶嗟 하물며 우리 동족들이겠는가 / 矧我同族 이에 헤아리고 이에 물으니 / 是度是詢 그 누가 협조하지 않겠는가 / 疇有不勗 마음을 합하고 함께 일하여 / 齊心並事 큰 비석에 드러내어 새겼네 / 克蕆顯刻 그 시가 매우 아름다워 / 其詩孔好 외울 만하고 읽을 만하네 / 可誦可讀 풍성을 길이 생각하니 / 永懷風聲 이에 공의 모습 보는 듯하여라 / 於焉如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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