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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늘과 땅에서 예수님과 똑같아지기>의 줄거리: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예수님 이름만 부르세요. 예수님 이름 부르는 것만 내일로 삼고 살면 됩니다. 물론 예수님 이름 부르기가 무슨 주술의 주문을 외우는 것으로 둔갑하면 곤란합니다. 예수님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상황 안에 내가 들어 있어야 하지요. 그렇게만 하면 내 삶은 성령님이 알아서 다 살아가십니다.
하늘과 땅에서 예수님과 똑같아지기
(요한복음 14:12~18)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늘과 땅에서 예수님과 똑같아지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늘과 땅에서 예수님과 똑같아지기”
12절 말씀을 주목해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게 되면 공생애 때 예수님의 상태와 똑같아 진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유는 12절 후반부에 이어집니다.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천국에서 예수님과 똑같아지기 때문에 땅에서도 공생애 때 예수님과 똑같아진다는 뜻입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를 믿는 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는 예수님을 믿는 자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하늘에서 예수님과 똑같아집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가지시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똑같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도 예수님과 똑같아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성령님에 대해 가지시는 관계를 나도 똑같이 가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마음을 십자가 예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의식을 갖게 되면 예수님의 길 되심과 진리 되심과 생명 되심이 적용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셨습니다. 그렇기에 아버지께로 가신 예수님 안에 마음이 머물면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늘에서 아버지와 갖고계신 관계를 똑같이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과 똑같이 아버지와 관계를 갖게 되었다는 증거는 이 땅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간격이 극복되는 길 되심이 적용되고, 이름과 실재가 연결되는 진리가 적용되고, 생명이 적용되면 생명현상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생명현상의 지속됨은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예수님께서 아버지에 대해 갖고 계신 관계를 똑같이 갖게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생명현상의 지속됨은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하나님의 있음을 의식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교리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수긍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제가 말씀을 전하는 중에 집사람이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그 상황을 의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함에도 이러한 현실감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집사람을 의식할 때에는 이론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눈앞에 나타남을 실제로 보면서 의식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나의 의식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이 1등인 상태를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을 때 일어나는 일이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에 대해 갖고 계신 관계를 똑같이 갖게 되었다는 증거로서의 생명현상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오랫동안 병을 앓던 분이 증세가 악화되면 유족들은 죽음을 준비하게 됩니다. 그런데 죽음을 준비할 수 없이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일입니다만 어느 가정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딸이 엄마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흔들며 깨우듯이 “엄마 이게 뭐야!”라고 재촉합니다. 아침까지만 해도 직장에 나가는 바람에 엄마와 잠깐 헤어졌을 뿐입니다. 그런데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딸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엄마를 깨우려고 흔들어댑니다. 그러나 엄마는 이미 죽었기에 귀한 딸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엄마 이게 뭐야!”라는 재촉에는 나를 의식해 달라는 요청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둥켜안고 흔들면서 깨워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죽음입니다. 이것이 죽음의 특징입니다.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75억 인구의 심장 박동과 호흡을 주장하고 계십니다. 침 삼킬 동안도 잊지 않으시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오장육부와 세포 하나하나까지 관장하고 주관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각 사람 인생의 모든 일을 다 주장해가십니다. 돈 문제가 생겼다면 나의 삶을 부둥켜안고 계신 하나님께서 돈 문제가 생기도록 흔들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엄마를 흔들어대는 딸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존재감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처럼 하나님의 존재감을 1등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죽음의 상태를 죽이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좋음도 느끼지 못합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이 좋다고 하는데 그 하나님의 좋음이 대체 무엇이냐? 나는 아무런 느낌이 없다.”라고 하십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하나님을 의식해보신 적은 있으신가요?”라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느끼려면 하나님의 있음을 1등으로 의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장님을 먼저 의식하고, 배우자를 먼저 의식하고, 아픈 몸을 먼저 의식하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의식할 수 없습니다. 몸이 아프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배우자가 앞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지금 내 앞에 배우자를 있게 하시는구나.” 사장님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내 앞에 사장님이 있게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이 좋다는 이야기에 아무 느낌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의식해야 하나님의 좋음도 느낄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이 아버지께로 가신 예수님을 믿으면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아버지를 대하시는 것과 똑같은 관계를 갖게 됩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나타나게 됩니다. 계속해서 아버지의 존재감을 1등으로 의식하게 되고 이러한 상태가 유지될 때 반드시 아버지의 좋음이 느껴집니다. 마치 돈이 통장에 쌓이듯이 아버지의 좋음이 마음에 쌓여가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마음 안에 아버지의 좋음이 쌓이면 그 증거로 확인되는 일이 있습니다.
나뭇잎이 흔들리면 바람이 부는 것을 압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세상을 대하는 자세가 바뀜을 통해서 아버지의 좋음이 쌓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좋아하던 일들이 점점 좋지 않게 여겨집니다. 세상에서 꼭 필요하다고 여기던 일들이 전혀 필요하지 않게 여겨집니다. 세상 것을 의식에 담고 좋아하려는 나 자신이 역겹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좋음이 쌓이는 증거는 세상 것의 좋음이 소멸해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전에는 무슨 일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좋음이 쌓이자 그 일을 전혀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반드시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좋음이 쌓이자 전혀 가지지 않아도 부족함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좋음이 쌓이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좋음이 쌓이기 위해서는 마음을 아버지께로 가신 예수님께 드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하늘에서 아버지에 대해 가지시는 관계가 내 마음이 아버지에 대해 갖는 관계와 똑같아집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나타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 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는 모순이 느껴집니다. 의식과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 결과 의식으로는 아버지의 존재감만을 느끼고 마음으로는 아버지의 좋음만을 느낍니다. 그런 사람이 뒤늦게 이 세상 안에서 무엇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존재감이 1등이고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좋은 분이라면, 세상에서는 의식할만한 존재감의 대상도 없고 마음으로 끌어당기고자 하는 좋아할 대상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새삼스럽게 뭘 구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내 몸을 부둥켜안고 관장하고 주관하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는 대신에 세상의 존재감을 느낀다면 아버지에 대해 죽고 세상에 대해 살아있는 상태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바로 이러한 상태에 대한 죽음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아버지에 대해 살아나는 사건입니다. 이전에는 세상에 대해서 살아있었습니다. 세상 것들의 있음을 의식하는 동안에 아버지의 있음을 의식할 수 없었던 상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러한 세상에 대한 죽음이기에 반대로 아버지에 대해서는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를 관장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에 대해 죽어있었기에 하나님을 의식할 수 없었습니다. 딸이 죽은 엄마를 아무리 흔들어보아도 죽은 엄마가 딸을 의식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해서는 죽어있는 상태였고, 세상에 대해서는 살아있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러한 세상에 대한 죽음이기에,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면 아버지에 대해서 살아나게 됩니다.
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서 죽었기에 의식하는 것은 돈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세상을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돈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배우자 문제, 자녀 문제, 건강 문제 등도 의식할 수 없습니다. 이 상태에서 주님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이 말씀은 마치 주님께서 우리를 약 올리시는 것처럼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기껏 세상에 대해 죽으라고 말씀하시고는 이제 와서 세상에 대해 무엇인가를 구하라고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약 올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순서를 바꾸어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었으니 눈앞에 나타나는 일들의 존재감을 의식하지 못하고 마음의 기쁨을 위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소원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세상이 필요 없는 상태에서는 의식에 담을 존재감의 대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뿐입니다. 마음에 담을 좋음의 대상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뿐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구할 대상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 죽었으니 살아갈 수 있는 명분도 없고 이유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때 비로소 나타나는 일이 성령님을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나를 통해 이 땅에서 이루고 싶어 하시는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이 뜻과 계획이 내 안에 거하시는 보혜사 성령님께 복사됩니다. 성령님께서 나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 안으로 들어오시면서 나로 하여금 세상에 대해 무엇인가를 해야 되겠다는 욕구를 갖게 하십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의식과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 있습니다. 그럴 때 나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하나님의 의식과 마음입니다. 내 안으로 들어온 하나님의 의식과 마음이 바로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14절에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상황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는 그리스도 연쇄과정입니다. 이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에 나의 의식과 마음이 들어가 있는 것이 바로 예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는 자격입니다.
예수 이름은 결코 마술이나 주술에서 사용하는 주문이 아닙니다. 예수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상황 안으로 우리의 의식과 마음이 들어가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하나님과 성령님과 함께 삼위일체를 이루고 계십니다. 그 예수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상황 속에 의식과 마음이 들어간 상태에서는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안으로 하나님의 의식과 마음이신 성령께서 들어오시게 됩니다. 내가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구하시는 것이기에 다 이루어지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공생애 때 예수님과 똑같아지게 됩니다.
예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예수 이름이 가리키는 그리스도 연쇄과정에 의식과 마음이 들어간 상태임을 전제로 합니다. 땅에서 하늘까지 이어지고, 다시 하늘에서 땅으로 이어지는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에 나의 의식과 마음이 들어가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의식과 마음인 성령께서 오시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의식과 마음을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몸과 입을 통해서 나타나게 하시고 이루어가십니다.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의 영이기도 하시기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이 다소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14장 말씀의 구절구절을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이 말씀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전제로 할 때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오신 성령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받아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통해서 구하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통해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우리가 구하는 것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구함의 내용 또한 15절의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는 말씀으로 한정됩니다.
아버지께로 가신 예수님을 믿으면 의식과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갑니다. 나와 아버지의 관계는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와 똑같아집니다. 그럴 때 땅에서 나타나는 변화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루어지게 됩니다. 다만 우리 안에서 구하고 이루어 가시는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의식과 마음의 복사판이시기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는 말씀대로 구함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구하는 이유는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시중들기 위함이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다른 사람을 시중들고 도움을 주고 그를 위한 것을 하려고 할 때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나의 의식과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올라간 상태에서는 이 땅에서 나를 위해 구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땅에서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을 위하려는 방향으로만 구하게 됩니다. 그러한 구함이 생기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실 때 남자만 오천 명이고 여자와 아이까지 합하면 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이 사람들을 먹이고 싶습니다.”라고 구하셨고 하나님께서는 그 간구를 들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의 의식과 마음은 아버지만을 붙잡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구함은 아버지의 의식과 마음이 성령을 통하여 이 땅에 내려오신 결과였습니다. 아버지의 의식과 마음이신 성령께서 예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속에 들어가셔서 구하게 하시고 이루셨던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참 엄청난 내용입니다. 아버지께로 가신 예수님을 믿으면 나의 의식과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갑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 적용됨으로 언제 어디서든지 의식으로는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감을 1등으로 느끼고, 마음에는 하나님의 좋음이 쌓이게 됩니다. 이렇게 의식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상태에서는 삶을 살 수 있는 의식과 마음이 없어진 상태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식과 마음을 복사하신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 필요한 의식과 마음을 성령님이 대체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이 대체해 주실 때 일어나는 모든 역사는 반드시 예수 이름이 가리키는 그리스도 연쇄과정에 들어가 있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구하는 것마다 다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일은 우리에게 특별한 조건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16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保惠師)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로 “곁에”라는 파라와 “부르다”라는 클레오의 합성어입니다. 공생애 때 예수님은 제자들 곁에 보혜사로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 대신에 성령님을 보내주시겠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의식과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의식과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의식과 마음을 보내주셔서 곁에 있게 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이십니다.
첫 번째 보혜사이신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셨지만 제자들 안으로 들어가실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보혜사 성령님께서는 제자들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우리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성령님에 의해서 채워지게 됩니다. 성령님에 의해서 아버지가 하늘에서 갖고 계신 생각과 뜻과 계획이 우리의 지정의를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다른 점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령님께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무엇인가를 구하게 하십니다. 성령님이 구하시는 것이지만 나를 통해 구하게 하시므로 내가 구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나지 않기에 다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8절에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예수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식과 마음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영이기도 하시기에 예수님이 오시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나타내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하는 동안 우리의 의식과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아버지를 대면하시듯이 나도 아버지를 대면하게 됩니다. 그 증거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무슨 일이 있든 의식으로는 아버지의 존재감을 1등으로 붙잡고, 마음으로는 아버지의 좋음만을 느낌으로써 확인됩니다. 의식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상태이기에 더는 내게 이 세상을 살아갈 의식도 마음도 없습니다. 살아갈 이유도 없고 명분도 없으며 살아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내 안으로 하나님의 의식과 마음이시며 동시에 예수님의 의식과 마음이기도 하신 성령님을 보내주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나를 통해 소원하게 하시고 이루어가십니다. 세상에서 나를 위해서는 구할 것이 없기에 성령께서 구하게 하시는 것들은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말씀하신 본문의 내용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통해 여러분의 의식과 마음이 하늘에서도 예수님과 똑같아지고 땅에서도 공생애 때의 예수님과 똑같아질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땅에서 예수님과 똑같아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하늘에서 땅에서 주님과 똑같아질 수 있도록 오늘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켜봐 주시고 붙잡아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