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고의 노래 2
당신이라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든 찾아가서 울 밖에 서 있겠네
내밀한 그 마음이 궁금하여
키를 세우고 또 세우고
당신이라는 사람이 열하고도 여덟이나 아홉이 되었을 때
나는 인생을 다 살아버려
당신이라는 사람을 안을 수가 없었네
당신이라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든 찾아가서 마음에 둥지를 틀겠네
봄이 다 가기 전에 꿈이 사라질까
자고 자고 또 자고
당신이라는 사람이 스물하고도 또 스물을 더했을 때
나는 인생을 다 살아버려
날개 없는 나비가 되었네
당신이라는 사람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
그 오동나무와
그 누에고치는
속이 텅 비고
바람보다 가는 실이 되어
거문고가 되었네
만리 길의 첫걸음처럼 막막하여 낮게
하르르 허공을 가르며 떨어지는 꽃잎의 한숨처럼
당신이라는 사람을 만났을 때
건네고 싶은 노래는
아직 아무도 부르지 않은 노래
우수수 우우수 오동잎
쌓이는 소리
사각사각 뽕잎을 갉는
빗방울 내리는 소리
누구는 산이 울었다 하고
누구는 강이 흘러가다 걸음을 멈추었다 하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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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게 바침
당신은 나의 바닥이었습니다
내가 이카루스의 꿈을 꾸고 있던
평생 동안
당신은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온몸을 굳게 누이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고개를 숙이니
당신이 보입니다
바닥이 보입니다
보잘 것 없는 내 눈물이 바닥에 떨어질 때에도
당신은 안개꽃처럼 웃음 지었던 것을
없던 날개를 버리고 나니
당신이 보입니다
바닥의 힘으로 당신은
나를 살게 하였던 것을
쓰러지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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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있는 사내 2
쑥부쟁이 칡덩굴 얽히고설키며 철 따라 피고 지던 꽃들과 풀들의 흙을 덜어내어 논을 만들고 밭을 일구다가 꿈같은 속세의 끄트머리라고 당간을 세우고 금천을 넘게 하더니 어느날 불타고 무너져 내려 인의도덕을 서원하는 마당이 되더니 다시 부수고 그 자리에 고랑을 파고 씨를 뿌리는 전답이 되었으니 이 조화는 사람의 일인가 세월의 장난인가
큰길 오가던 사람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고 후세에 비석으로 한을 달랜들 금 가고 마음 모서리 떨어져 나간 채 서있는 저 사내의 삭은 가슴만 하겠는가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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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선재(善財)길
어디에 닿을지 뻔히 알면서도
길을 묻는다
어느 사람은 비로(毘盧)로 가는 중이라고 했고
어느 사람은 내세(來世)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혼자 걸으면 나에게 던지는 질문의 목소리를 벗할 수 있고
여럿이 걸으면 푸른 하늘이 팔랑거리는 빨랫줄처럼
출렁거리는 손길을 마주잡을 수 있다
무심하게 지나치는 전나무들
도저히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냇물이
이십 리 길인데
선지식(善知識)을 멀리 찾는 어리석음으로 이미 저녁이다
어느 사람은 오르는 길이 마땅하다 하고
어느 사람은 내려가는 길이 가볍다 하였다
아무렴 어때!
오대산 선재길은
내가 만든
내 마음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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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 한 필
모시 한 필 속에는
서해바다 들고 나는 바람이
금강을 타고 오르는 여름이 있다
키만큼 자란 모시풀을 베고
삼 개월을 지나는 동안
아홉 번의 끈질긴 손길을 주고받는
아낙네들의 거친 숨소리가
베틀에 얽히는 것을
슬그머니 두레의 따스한 마음도
따라 얹힌다
모시 한 필 속에는
서천의 나지막한
순한 하늘이 숨어 있고
우리네 어머니의 감춰진 눈물과 땀방울이
하얗게 물들어 있다
구름 한 조각보다 가볍고
바람 한 줄보다 팽팽한
세모시 한 필
어머니가 내게 남겨준
묵언의 편지
곱디고와
아직도 펼쳐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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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悲歌)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 한 번도 불러지지 않은 그 노래는
슬픔이 불길처럼 흘러간 후에
강물보다 더 우렁우렁 눈물 쏟아낸 다음에
끝내 불러보지 못한 이름이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길을 지우고 난 후에
사막 같은 악보를 드러낼 것이다
슬픈 사람은 노래하지 않는다
외로워서 슬픈가
슬퍼서 외로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어디쯤에서
날개짓 소리가 들리는 듯
슬픈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이
부르는 그 노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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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행방
소문이 한바탕 지나간 뒤에
벙어리의 입과
귀머거리의 귀를 버리고서
잘못 들으면 한 마리로 들리는
무한증식의 말을 갖고 싶었다
검고 긴 머리카락과
길들여지지 않은 그리움으로
오래 달려온 튼실한 허벅지를 가진
잘못 들으면 한 마디로 들리는
꽃을 가득 품은 시한폭탄이 되고 싶었다
길이 없어도
기어코 길이 아니어도
바람이 끝내 어떻게 한 문장을 남기는지
한 마디면 어떻고
한 마리면 또 어떨까
천리 밖에서 나를 바라보는
야생의 그 말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나호열, 문학의 전당(2017),
20~21, 24, 44, 56, 58~59, 77, 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