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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상숙 시집 [겨울밤 미스터리] 서평
시인의 품격만큼 과거와 현재를 사유하는 빛나는 여정
광명한 등을 켜야 할 것이어서
송병호 시인/평론가
시인은 모든 사물을(하찮은 것은 없다) 감각하고 그 감각을 시언어로 드러낸다고 했다. 따라서 사물은 움직임이고 변화(진화)하면서 일탈하고 이반하므로 때에 따라 시인이 감각하는 감각과 정황에 따라 경험하고 사유한 그 무엇을 언어라는 사이에서 간극이 발생한다 하겠다. 더불어 그 간극을 기록하는 시인의 언어가 자기 시를 정의한 논리, 즉 시는 시편이지 시론(서평)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는 서평(시론)과는 달리 시인의 사상이며 자유이다. 이러한 시인의 사상과 내외적 상상의 세계를 한 줄 서평으로 대신한다는 것은 어쩌면 시인에 대한 무례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시인이 드러내고자 하는, 내보이고자 하는 시편의 대상을 통해 이미지화된 화자의 실체적 발현과 미학적 가치창출의 조화를 요만한 식견으로 촌평하는데 그칠뿐이다. 따라서 한권 분량의 작품을 만나고 그중 몇 편의 시가 품은 기이한 황홀감에 빠져드는 극히 편파적이고 단편적인 촌극의 객석에서 몇 편의 시편을 서평의 여백으로 매우고자 한다. 그리고 나머지 또 다른 시편은 빈칸으로 남겨둔다. 독자의 칸이라고 하자.
지난 2월말 늦은 오후, 심상숙 시인으로부터 직접 원고와 함께 서평을 의뢰받는다. 너무 뜻밖이어서 생각할 여지도 없이 원고봉투를 받아드는 오판을 하고 만다. 다음 날 “어쩌랴”하는 체념으로 원고를 열어 몇 편의 시편을 넘기다 그만 덮고 만다. 차라리 전혀 모르는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시편들이 마음에 와 닿으면(설령 닿지 않을지라도) 나름 내 주관에 맞추어 판을 재구성하기도 하고 뭔가 그림을 그려볼 텐데, 그리고 시적 조각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이른바 시인의 페르소나persona를 상상해보고 뭔가 발설하지 못한 숨겨진 비밀을 캐내보자, 그렇게라도 해볼 텐데, 도무지 그것도 아니고 도리어 내 감춰놓은 그런 것들이 단번에 들킬 것 같아 솔직히 몸을 사리기도 했다.
시인과의 만남은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별한 인연은 지역 제일의 문학단체 이너써클로 참여한 인연과 19집을 낸 동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필자에게 시인은 ‘겸손이 생활처럼 배어있는 온화한 성품의 큰누님 같은, 그러나 사리에는 빈틈이 없는 그런 시인’으로 각인되어 있다. 시인은 세월의 연륜과 무관하리만치 신춘문예와 전국공모 문학상을 여럿 수상한 것처럼 시인은 과거와 현재를, 시始와 종終을 아우르며 일상의 사물로 하여금 시적대상의 본질을 끄집어내 그때그때에 따라 문체를 배석시키는 특출한 수단을 활용한다. 또한 시인은 소개될 아래 시편에서 보듯이 조심스럽게, 단호하게 겹눈의 시선으로 우리가 살아온 역사적 풍상을 질긴 돌배나무 간지簡紙를 빌어 목간木簡에 새긴다.
돌배나무 잎사귀 사이
해마다 자전과 공전 중인 열매가 맺혀 있다
잎맥의 무늬들,
계절을 새겨온 목간木簡이다
壬辰年(임진년), 稻(도, 벼) 한 섬, 大豆(대두, 콩) 두 말 석 되,
느티나무골 묻혔다가 발굴된 나무 조각이
이제야 이 오후에 드러난 거라고
사람이 나고 죽고, 나무들이 스러지고 돋는 동안
숨들이 묻히고 숨결이 트이는 동안
돌배나무는 수천 년 햇살의 요철로
한 자 한 자를 제 안에 들였을 것이다
달의 앞면만 볼 수밖에 없듯
돌배나무 열매도 무성한 잎 속에서
칠흑의 뒷면을 가졌으리라
우주인이 달의 앞면을 탐사할 때
사령선 타고 뒷면에 머물렀던 마이클 콜린스처럼
오직 신과 혼자인
열매의 궤도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지금도 지구는 사막으로 더 넓게
에둘러 부서지고 있는 중이다
가뭄, 테러, 바이러스로 짓물러진 이 한낮
돌배나무 간지簡紙 잘 다듬어
고택후원 속살로 묻었다가
다시 발굴되길 기다려야 하는지
돋아난 잎사귀그늘에서 나지막한 언덕이 넘실거리고 있다
돌배나무가 제 과실을 떨구는 건
어록을 내게 내어주는 일이다
그리하여 서로 염려하고 사랑했다, 라고
나는 지구의 시간 속
오늘의 간지干支로 묻혀가고 있는 것이다
-「돌배나무가 건넨 목간木簡」 전문
하얀 봄, 꽃은 우산살처럼 화서花序로 피고 열매는 금빛으로 익는 돌배나무, 자기보다 대행의 삶을 사는 대목(접목)으로 더 많이 쓰이는 돌배나무에 이처럼 간결한 시언어를 버무려 역사적 고전 한 페이지를 현대적 감각에 접목시킨 윤회적 순환을 생각하게 하는 시인의 시편은 과거의 기록이 아닌 현재를 풀어가는 깊은 사고를 지닌다. 그와 같은 역사적 연장선상으로 “청년 외부부가 위안스카이(원세개袁世凱) 앞에 가는 길에는/ 등짐장수로 변장했다죠/ 상해정부 고개 넘다 부러진 산삼뿌리 속/ 고종의 청병조서를 품는 채”(「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御人」)처럼, 이러하듯 참으로 가슴 아린 고증은 차라리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어 비상한다. 시인은 그 아름다움의 절정에서 생과 자연에서의 생물과 사람들로 극히 일부의 정황을 장엄한 현장스케치로 무뎌진 인식을 일깨우고자 하는 역력한 고뇌가 곁들여 “한자 한자를 제 안에 들인”,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시인에게 습작은 극지의 정황을 극복하는 외로운 작업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처럼 시라는 것은 ‘의외성’과 ‘예외성’으로부터 탄생하는 이야기가 현실 앞에 놓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유형의 현실은 목적이라는 길목에서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픽션이냐’, ‘논픽션이냐’ 하는 「라쇼몽, 그날의 외계인1」이나 부제를 단 「베르딩전투 세계1차대전」의 양립 속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정답은 없다. 역설적이지만 시인은 역사가는 아니다. 그러나 시인이 가진 상상을 수습하여 정돈하는, 생각의 폭을 넓혀갈 수 있도록 그 다음 이야기가 더 궁금하고 재미있을 “우주인이 달의 앞면을 탐사할 때/ 사령선 타고 뒷면에 머물렀던 마이클 콜린스처럼” 시인의 표현대로 정작 달 앞면의 닐 암스트롱이 주인공이 아닌 것은 결국 살아서 표착의 순간을 사실로 정립할 사람은 마이클 콜린스라는 것에 더 크고 깊은 관성에 주목한다. 수백 년 혹은 그 이상까지도 “간지”簡紙의 간지干支로 묻혀 있다가 언제인가 운 좋은 날, 시를 대하는 운 좋은 독자에 의해 “칠흑의 뒷면을” 밝게 밝힐 것이기 때문이다. 운 좋은 날의 맞이하는 충만은 그냥 ‘비움과 내려놓음’의 ‘틈’에서부터 제막될 것이다. 이런 중에 “용산행” 전철은 그 시간을 예비하는 민방위훈련 중이다.
용산행 전철이 눈앞에서 간발의 차이로 쓸려 나갔다
이촌역 화장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너,
곧 내릴 거야 했는데 환승도 못했고 요의는 바빴다
나의 즈음은 여전히 승강상태
그림자 몇이 질금거렸고 역사는 광택에 절었다
도쿄 어느 유원지 화장실 줄에 끼어든 것처럼
호텔 조식 야채접시 비운 물이 하의에 쏟아지려는 것처럼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것이 왜 이리 길고 뜨거운지
대학원 졸업식장 객석의 분위기에서도 버텼는데
꾹 참고 하이힐로 뛰어 정시에 출근도 했었는데
자명한 것은 이쯤 가지고 죽거나 병날 일은 아니라는 것
아 그래 이촌역 화장실로, 그래 거기
그것만 생각하고 있을 때
바람을 갈기며 전철이 다가왔다
용산 이촌 사이를 쇄쇄 달리는 차창 밖
슬레이트 기와지붕들 줄느런히 그늘을 괴고 있다
향방도 없이 참고 버티는 건 지루한 출구
폭탄을 이리저리 돌리듯 안절부절 다리를 꼬았다
처음 내린 이촌역 화장실은 바로 눈 앞,
박물관 쪽 레일 위로 몸을 얹고 숨소리 삼키는 즈음
이제야 그를 찾아야겠다는 즈음
맞은편 레일 위로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그,
나와 엇갈리고 있었다
어어, 하는 사이
친구의 이름이 시원스레 뉘어졌다
-「즈음과 요의 사이」 전문
사이는 틈이 있고 틈은 사이 곁에 머물다 사라지고 만다. 그곳은 공간 같으나 실상은 진한 압박과의 전투가 있다. 실제로 문학작품에서, 작가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형식이나 구성의 특질이나 특성은 무한하다는, 그 사이에 우주가 있다. 따라서 시언어는 가장 높은 상위에 위치한다. 낮은 해가, 밤은 별이, 그 중간에 달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오는 길과 스쳐 가는 길과 머무는 길이 있다. 그 장소는 그냥 사유일 뿐이다. “용산행 전철이 눈앞에서 간발의 차이로 쓸려나갔다.”는 그 간발의 차이를 비운 틈, 시인은 이런 공간까지도 이미 다 채워간다.
“무념, 무취, 무상의 행간/ 돌개바람 사이렌 소리가 이역의 근량이다/ 달리는 차선이 기우뚱” 흔들리는(「버킷 리스트」). 실제로 현대의 일상이라는 것들이 각각의 독립된 삶의 집합체라는 것으로 일반적이다. 자유스럽다. 하지만 보이지 않게 시간에 쫓기고 돈에 쫓긴다. 당연한 것들이 거추장스럽게 여겨지고 오히려 신경을 써야 한다. 누구만이 겪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왠지 서러움이 감지된다.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것이 왜 이리 길고 뜨거운지” 그 허전함. “처음 내린 이촌역 화장실은 바로 눈 앞”인데 “맞은편 레일 위로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그” 그 열차는 “나와 엇갈리고 있었다/ 어어, 하는 사이/ 친구의 이름이 시원스레 뉘어졌다.” 그 충만함! 오래전 혈압 약을 복용하고 외출할 때마다 경험했던 어머니를 그립게 한다.
심상숙 시인은 시편에서 대부분 시를 쓴 계기를 암시적으로 드러내는 매체 대상을 맨 앞에 배치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맨 앞에 실린 연에서 전체를 읽을 수 있다. 아마 오랜 교직에서 얻은 시인만의 섬세한 애착이 아닐까? 첫 문장이 매우 돋보인다. 이런 유형은 시인이 시세계를 열고 확장해가는 시적모티브를 자신 있게 추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철저히 계산된 기교는 그래서 낯설다. 독자로 조울증을 앓는다. 남극에서 북극으로 가는 거기, 적도의 어느 무풍지대에서, 전철역에서의 익숙한 조명은 허탈과 충만한 빛과의 사름이 공존했을 것이다. “어어, 하는 사이” 그 비좁은 틈은 탈출을 도모하고, 그 비좁은 사이, 새것이 출산한다. 고통보다 아름다운 자유의 호흡이다.
<행화杏花장례 삼일장, 조문 가능,
예술로 목욕하며 마지막 순간의 때를 밀던 분들과 함께 기억합니다>
공간이 추모되면 사람도 그 공간에 깃든다
구석자리 기대어 둔 간판을 다시 세우고
-삼가 행화탕湯의 명복을 빕니다
만장처럼 상여처럼 전기 수도 미터기가 구성지게 매겨진다
이날의 상차림은 ‘반신욕 라테’
목욕대야에 받쳐 나오는 때수건 컵받침,
슬픔도 핫 플레이스에서는 후후 불어 마셔야 한다
여탕에서 들려오는 올 댓 재즈, 세신사의 노래 소리에
벽 너머 남탕에서 박수가 나왔다는
작은 굴뚝 사이로 벗은 몸의 청중들
빛바랜 행화杏花 타일조각 하나
몰랑대는 기억을 상영하고 있다
-「행화부고杏花訃告」 부분
19세기 프랑스 바르비종파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로 그는 가난하고 빈곤한 농민의 일상을 숭고한 터치와 단아한 해석으로 표현해냈다. 그 이름만으로도 유명한 프랑수와 밀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불행하게도 일생동안 전원 밖을 살펴보지 못했으므로 내가 본 것을 솔직하게 능숙하게 표현하려 할 뿐입니다.”라고 자기 그림에 대하여 자평했다고 한다. 전해지는 말에 그가 욕심내지 않고 소박하게 살았다는 것이 가난의 이유였다고 하니 그런 이유만으로 궁핍한 삶에 시달렸다는 말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심상숙 시인의 시편을 읽으면서 요만한 내 지식으로 밀레를 생각하게 한 것은 시인의 작품이 밀레와 같이 매우 사실적이고 소박한 일상과 삶의 진솔함이 시인의 평소 온화하고 겸손한 성정과 맞물려 고집스럽게 전달되고 있다는 점이다. 시언어를 치장하지 않는 것 같아도 사물의 위치에서 끊임없이 관조하고 새언어의 생산을 도모한다는 점도 모든 시편에서 시인의 남다르고 색다른 결이 “붉게 피었다 져 내린 꽃자리의 색체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강가에 정자가 있었다」). 소개한 「행화부고杏花訃告」처럼 하루하루 같은 일상이지만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 어제보다 나은 내일이거나 아니면 더 먼 미래를 바라보는 중간여백은 오늘 하루의 가치야말로 기막힌 한편의 드라마처럼 다음을 궁금하게 하는 호기심을 유도한다.
그토록 궁금한 상상너머를 살짝 엿보자. “여탕에서 들려오는 올 댓 재즈, 세신사의 노래 소리에/ 벽 너머 남탕에서 박수가 나왔다는/ 작은 굴뚝 사이로 벗은 몸의 청중들// 빛바랜 행화杏花 타일조각 하나/ 몰랑대는 기억을 상영하고 있다.” 너무 사실적이어서 너무 아름답다. 부제「서울 아현동 63-11번지」의 시끌벅적한 풍경은 매 순간 공들여 살아가고 있음에 소중하다. 평범한 가치가 곧 자신을 개발하는 최고의 가치로 전환된다는 것을 아는 일이므로, 모세의 지팡이에서 꽃이 핀 것처럼 타일의 행화가 죽은 “부고”가 아니라 살구나무에 싹이 트는 “부활”일 것이다. “난산의 자리에/ 어린 손 밀어 넣어 아우를 끄집어낸” 것처럼(「해산하는 여자들」). 인생은 마른 나무가 꽃피우기까지 순환선에 탑승한 세 뼘의 유랑일 뿐이다. 역설의 더듬이를 활용하여 다음 시편의 진짜 드라마를 감상해보자.
방문을 열자 페이드인fade in되는 조연들
자수刺繡놓인 손부채와 항라주머니가 이마의 미열을 짚는다
땟국 절은 태극기 두 장, 재봉질된 목공단 국기집,
애국지사 친정부친 묘소 앞에서 어머니 엉엉 우시다 영영 못 일어설 듯 휘청이던, 실크 카네이션과 엽서, 갈라선 어머니의 큰며느리 손 편지, 훈과 음을 상형해둔 노트, 신약을 옮겨 적은 두꺼운 공책, 오래전 금목걸이 한줄, 절단 난 시계, 오만이천 백 이십 원 새마을통장, 손지갑에 접어둔 현금 삼만 원, 비닐주머니 마스크 팩 몇 장
병 수발로 치워드리지 못한 거무스레한 내간內簡
무명실 칭칭 봉숭아꽃물 붉은 새끼손톱 허물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스물일곱 치잣물 모시치마적삼도, 화랑담배 은박지 백합도 없다
유치원생 내게 번자네 하숙생아저씨는 종이 꽃 한 송이씩을 전해달라고 했지
빈 방은 차갑다, 칠흑의 타클라마칸 사막처럼
차디찬 속살 보여주지 않는 아틀란티스 섬처럼
창밖 만월滿月은 캐러멜 껍질처럼 한 꺼풀씩 달빛을 벗겨내는데
불 꺼진 방안은 고대도시 유물 탐사이듯 손끝에 검은 재 분분하다
산소통과 오줌주머니 매어달은 요양병원 수액걸이처럼
창가 화분에 노란 카라가 밤을 끌어가고 있다
어머니 백년 드라마는 방영 중이다
-「백년 드라마」 전문
“자수 놓은 손부채와 항라주머니”가 “이마에 미열”이 담긴 여인들이 내간內簡은 아내의 외로움일까? 아낙의 충정일까? 아니면 애국의 발문일까? 숭고하다. 장렬하다. 이러한 시적발상은 누구에게나 나눌 수 있는 보편적 질문이 아니다. 시인은 대상의 본질을 시언어의 의미론적 자질이 지닌 미묘한 차이로부터 치환換喩과 압축隱喩의 사유를 통해 어둠을 열고 한칸 한칸 길어내 밝히 채워 펼쳐 보인다fade in. 사물을 비유하는 사이 시인에게는 상상력의 소재가 되듯이 수척한 “자수刺繡놓인 손부채와 항라주머니가 이마의 미열을 짚”듯이 “산소통과 오줌주머니 매어달은 요양병원 수액걸이”가 삶을 지탱하는 고통까지도 “불 꺼진 방안은 고대도시 유물탐사이듯” 많은 시간과 여러 구간을 허비하지 않는, 마음의 평정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통의 산고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그것이 기쁨이든 통증이든 일상 속의 무미건조한 자신을 흔들어 깨우고 있으므로 “선지 끓인다고 쇠기름 얻어”오고 “고등어 냄새 뒤집을수록 화사”한 만찬이 차림이 되는(「고등어구이」) 자신의 존재성을 드라마 속 거장의 피아니스트의 음계와 같이 화려한 터치로 빛나고 있다.
심상숙 시인의 이번 시집도 여러 편의 시가 그러한 통증에서 오는 역설적 산고의 기쁨을 작용하고 가장 충성스러운 원근법에 맞추어져 있다. 사실 신에 대한 이성을 빌리지 않아도 인간은 당당하나 왜소하다. 안타깝지만 인간의 직립은 어느 때부터 짐승의 자세로 몰락해가고 있다. 사유는 사유의 몰락으로 사상도 신이주신 자원도, 바이러스 앞에 문맹도 마찬가지다. 그런 이유에서 상징주의의 시인 보들레르의 말처럼 시라는 것이 사물을 전달하는 매개적 작용을 의미하듯이 ‘삶은 상징의 숲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것처럼 “투명한 저녁은 정물인데” “발이 삐끗, 허둥거”림을 꿋꿋이 딛고 “우화”로 더 좋을 고통의 “고지서”의 아픔을 기꺼이 감래한다(「거미와 진동」). 그런가 하면 시인의 언어는 비록 “응모”가 “음모”라고 그야말로 지독한 오독으로 읽히는 “음모가 싹트는 잔인”한 상흔에 감춰진 사유의 이성을 밝히려는데 여전히 종영이 예정되지 않은, 예상되지 못할 현재진행 형이다(「알래스카 어린왕자」). 서정의 음역을 형성하고 있는, 그래서 새로운 풍경과 소리를 쓰다듬고 있는, 시인의 품과 격이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다음 소개될 시편은 연緣으로 얽긴 인생이 슬프도록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다.
허리 굽혀 들여다보던 시금초 덤불
회양목 가지를 타고 노랗게 번졌다
시금초 꽃 한 송이 반딧불로 피어날 때
다리 위로 한해살이 태양이 스치고,
시금초 꽃 한 송이 지는 사이
아이가 풍선 끈을 놓치고 만다
새애기는 아기를 가졌고
어머니는 영영 눈을 감으셨다
-「풀밭」 전문
항간에 시가 길면 독자로부터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 은연중에 떠도는 말이다. 유명세를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어떤 원로시인의 세미나에서 “요즘 시가 너무 길고 문장이 암호문 짝짓기 같아서 도무지 읽고 낭송할 만한 시가 없다”고 서슴없이 성토한다. 필자 역시 시인의 원고를 처음 대하고 “대체로 길다”는 인상을 받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발문을 준비하고자 한차례 훑어보고, 그리고 다시 한번 정독을 거치면서(사실은 여러 번 읽고도) 어떤 시가 길고 어떤 시가 짧은지 편을 가를 수 없다는 것에 이른다. 어떤 것이고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그럴듯한 음미란 있을까”라는 질문은 어쩌면 우문에 가깝다. 어리석은 자만일 뿐이다(「모서리에 피는 꽃」). 또한 세대를 연대하고 아우르듯 “연을 관통해 가는 촉의 근원은 사랑”이라는 끈이기 때문이다(「북향의 유예」).
위의 시는 다른 시편에 비해 매우 짧은 시편이나 속이 매우 깊다. 깊음의 아름다움은 소리 없이 말을 걸어온다. 말이 침묵에 의해 깊어지듯이 소리는 보이지 않음을 통해 아늑함과 아득함을 함께 내준다. 바람과 물과 햇볕은 하얀 풀밭 안에 묻히고 잠시 머물렀다가 물과 햇볕으로 돌아간다. 바람과 물과 햇볕이 머무는 풀밭이 여름철 눅눅한 민박집보다 보잘것없다면 얼마나 덧없을지, 햇볕이 풀밭에 머무는 사이 “새애기는 아기를 가졌고/ 어머니는 영영 눈을 감으셨다.” 풀밭 숲은 명치와 배꼽 그 중간의 사이다. 사면이 동그란 적도赤道의 중용처럼 지극히 당연한 이치임에도 그 풀밭을 사람들은 앉은뱅이 꽃이라고 이름 지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일상의 무게, 특별한 것은 없는데 특별한 부름으로 다가오는 것이 있는 것처럼 때때로 마주하는 ‘한계’가 그렇다. 시인은 그 한계를 날마다 경험한다. 존재의 의식을 끊임없이 방해하는 기대와 좌절, 그리고 대치와 대체라는 파동 앞에 “나도 잠시 그 즈음에 머문다”(「보르헤스의 우산 속」). 혹은 “꽃 한 송이 지는 사이 아이가 풍선 끈을 놓치고” 마는(시인의 말), 그런 슬프고 서러운 일은 생기지 말아야 하겠지만 모순적 계기를 통해 단단해지고 의식이라는 차원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쯤에서 사과를 깎는 잉여의 시간을 가져보자.
사과를 깎습니다
둘레를 깎습니다
붉은 껍질은 꽃이 흔들리며 망설였던 거리입니다
피울까 말까, 시간의 굴레가 영글었습니다
씨앗의 일가들이 칼날을 지나 흩어집니다
푸른 그림자 속으로 뿔뿔이 흩어집니다
사과를 깎습니다
우리의 둘레를 깎습니다
향기는 공감각적 두께로 앉은 벌레소리입니다
잎사귀 사이로 내린 별빛이 고스란히 부서집니다
대롱거리던 표정과 비바람에 사정없이 흔들린 시간이 잘립니다
사각사각 일가들은 잘도 헤어집니다
사과를 깎습니다
귀에 익은 발자국 하나가 멀어집니다
칼날이 스쳐간 자국, 그 아래로
멍의 둘레를 따라 나는 고요히 걸어 내려가 봅니다
아주 사소한 이파리 하나가 붉어가는 사과의 볼 위로 나볏이 스쳐 내린 길입니다
-「사과를 깎는 시간」 전문
시인은 사물을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익숙한 시간을 낯선 시간 안에 배정한다. 이렇듯 시인의 시는 사물이 속삭여주는 이야기를 섞고 버무려 진수의 성찬을 차려놓는다. 어느 단계적인 묘사나 장황한 서술보다 비유와 은유의 기법인 의인, 활유, 감정이입 등을 적절히 접목, 전체적인 비유로 집합된 시편마다 그래서 그 생소하나 간결한 울림이 심오한 경지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고사에 ‘미치지 않으면 이르지 못한다’(불광불급不狂不及)는 말이 있다. 훌륭한 작품은 부단한 노력과 무풍의 서정 안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어쩌면 스스로를 잊어버리는 환각과 같은 깊숙한 몰입에서 예술은 탄생한다. 시라는 본질은 사과 하나를 깎기까지도 “칼날이 지나간” 상처를 꿰매야 하고 흔적은 셈해야 한다. 겉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은 것 같아도 “사과의 볼 위로”, 몸가짐이 반듯한 “굴레”로 어엿한 예술의 일생은 세상에 새로운 작품으로 생산되어 대중 앞에 영혼의 맛으로 품평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심상숙 시인의 시편에서 “아주 사소한 이파리 하나가” 해를 가리고 별을 보게 되는 기이한 경험에 이르듯이, “검은 얼룩 큰 돌 사이 푸르게 자라는 이끼들”이라고 역설한다. “맑은 소주잔에 나사렛의 젊은이 월계관에 고인다”는(「돌담」), 시어처럼 번뜩이는 안목으로 베들레헴을 발견한다. “붉은 껍질은 꽃이 흔들리며 망설였던 거리입니다/ 피울까 말까, 시간의 굴레가 영글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느낌은 시인의 배후에 선연히 존재하는 질긴 연(緣)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뿌리는 끝내 줄기를 놓아주지 않는다”는 문장처럼(「동짓달 만수」), “어떤 낱장은 별스레 곱다”(「단면이 전송되고 있다」)는 서정이야말로 시인만이 간직한 다정한 정서일 것이다. 다음은 보통 때와는 달리 뭐가 그리 달라 보이는지를 짚어가는 참 고운 시편을 보자
햇살이 가지마다 고리를 걸쳐 온다
옷고름 매듯 잡아당겨야 얻는 자리가 나무에 있다
그 매듭하나 맺으려
꽃눈은 매양 고리를 받아내는 것이다
앞섶 여며 향기 하나 품으면 꽃받침도 단정해진다
고리를 건다는 건
한 끗 당길 것이 있다는 것
햇살을 걸어 매어야 꽃눈은 꽃봉 매듭으로 묶여 나온다
눈바람이 앞 산자락 홀칠 때
고요하게 돋아 오르는 매화 꽃가지를 보라!
가늘고 긴 끈을 던지고 던져
폭설이 매듭을 풀어가는 나무의 고결
하늘가 호박단추 낮달에 마고자 고리를 걸면
움츠린 등도 절로 세워진다
어떤 매듭이든 실마리 단초하나 풀어내면 전말이 보이는 법,
어긋나서 뒤틀린 맨 처음의 매듭부터
술술 피어나는 것이다
봄도 분분한 조약이다
-「매화나무에는 고리가 있다」 전문
문득 시를 쓰는 이유를 생각할 때가 있다. 시작詩作의 의미를 시종일관 매달려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시작이라는 것이 시대의 흐름이 반드시 발전이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미래를 도모하는 일이며 무엇보다 ‘살아남아야 강한 자’라는 말처럼 ‘오늘 우리가 함께 살아 있으므로 행복한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창조의 ‘한순간’의 의미는 질문에 대한 형식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시작의 준비는 이유와 의미에 따른 출발선에서의 언제라도 사면의 깊은 사유의 문을 열어 놓는 것이 중요하다. “햇살이 가지마다 고리를 걸쳐”오는 것처럼 “어떤 매듭이든 실마리 단초하나 풀어내면 전말이 보이는 법”이다. “봉숭아꽃물 찧는데 돋움볕으로 끼어드는 미친년,/ 열손가락 무명실 칭칭 감아 꽃봉 올려준다”는 그곳은 너무 아린 꽃바위였다.(「꽃바위」).
우리는 개인적으로 몸과 마음의 존재인 동시에 자연스레 확장하는 사건의 연속에 따라 사회와 시대에 더불어 구성원으로 “저 혼자가 아닌 몇 알이 함께 두근거리는” 동무가 된다(「동무」). 다만 불행하게도 과거가 아닌 현대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어긋나서 뒤틀린 맨 처음의 매듭부터/ 술술 피어나는 것이다// 봄도 분분한 조약이다.” 현대인으로 시의 감각도 계속해서 친숙한 발상으로 발전과 진화를 분주히 거들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눈바람이 앞 산자락 홀칠 때/ 고요하게 돋아 오르는 매화 꽃가지를 보라!.” 꽃의 정령은 풀리지 않도록 단단히 동여매어 둔 이성을 자극하는 “어긋나서 뒤틀린” 질문에 어떤 의미를 가질까? 침묵으로 일관된 인간과 신의 대한 구속사적 연결고리를 연상해 보자. 자연은 스스로의 존재를 계절이라는 체향으로 묶기도 하고 풀기도 한다. 시인은 ‘매화나무에는 고리가 있다’는,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을 불러내 “낮달에 마고자 고리를 걸”어 놓음으로 자연적 법칙의 시발점이 되는 현대적 관념을 차용한다. 따라서 시인의 자연에 대한 순응은 경이로움보다 한 차원 더 세밀한 관찰과 묘사를 통해 재해석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쯤에서 발상의 전환을 바꿀 참으로 정다운 시 한편에 주목한다. 주문이라면 이야기풍으로 소리 내어 읽어보자. 비 오는 날 마시는 달달한 믹스커피 맛이 난다.
이제 우리 차례, 너희 셋은 백조야
호수를 책보처럼 두르고 있으면 돼
마을의 깃발은 소낙구름 떼,
모두 숲이 되는 거야
경아야, 뻐꾹모자를 조금 더 돌려쓰렴
왈츠곡이 나올 거야 꼿꼿하게 서야 해
머리에 쓴 긴 부리 대롱을 조심,
발레치마에 걸려 넘어지면 다쳐
큰 대문 태희야,
팔을 번쩍 문을 활짝 열어젖혀야 한단다
너의 비유는 열려라 참깨
꿈맞이 동작이야
목젖 다 보이도록 대문 소리를 내렴
비, 찬규야 너는 물레방아에 튀는 물보라
시원하게 웃어야 한다
그러다 물방울로 속살거리렴
그래 잘하고 있는 거야
이제 나래를 접어야지 어서!
동규 대장간아,
황토 가마에 큰불이 있다는 거 알지?
도끼가 달구어질 때 망치를 내리치렴
그러면 숲이 걸어 나올 거야
그때 몸을 뒤로 힘껏 젖혀야 해
너희 다섯은 나뭇잎이야,
몰래 도시락 열어볼 때 새소리 기억하지
그때 흠칫 흔들려야 하니까
쉿! 아기코끼리 상우야, 넌 주인공이야
마룻장에 조심조심 발 옮겨야 해
긴 코는 너의 왼팔이지
사과를 쥘 때는 번쩍 들어 올리렴
거기까지만 하면 박수소리가 들릴 거야
그래, 우리는 숲속 대장간의 아이들이니까
백조, 뻐꾸기, 대문, 비, 나뭇잎, 코끼리
다 준비된 거 맞지!
이제 커튼 막이 열릴 거야
5.4.3.2.1!
-「동화」 부분
심상숙 시인의 시편에서 색다른 또 하나의 ‘무엇’을 발견한다. 그야말로 동화同和의 동화童話이다. 시인의 온유한 심성은 금싸락으로 반짝이는 벼이삭처럼 아름다운 풍경마다 눈시울 젖도록 “눈이 부시다” 참으로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낮달도 섬, 꽃잎 햇살 파도치는 백일홍 길”로 천년의 향기이다. 이처럼 내면에서 나오는 풍경의 소리는 인류가 가지는 역할이나 비중은 거의 절대적인 것으로 원초적 형상에 속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근원적 가치를 노래하는 쪽으로 수렴되고 발전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네모난 통창 달린 고지서 봉투, /나무 기둥에 안개 지붕 얹고 /레이스 커튼을 드리우면/ 굽이굽이 걸어오는 아빠”를 기다리는(「작은 유리창을 눈에 대고」) 아이처럼 어느 날 구름이 지나가는 오후 우두커니 혼자앉아 있듯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풍성한 개성인지도 모른다. “이 낡은 강당무대는 달의 기원보다 오래 되었지/ 금빛 액자 속 삐거덕거리는 사진 한 장”은 사랑이고 기억이고 어머니의 가슴이다.
우리는 길을 찾다가 길을 내다 버릴 때가 있다. 마음의 길을 헤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밤하늘 별 안에 검은 우주가 그러하듯이 마음 어디라도 사면이 막막하다. 어디로 가고 무엇을 위하여 바등대는지 도무지 알지 못한다. 실제로 마음을 측정할 산술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은 그 자체가 부피도 무게도 없다. 흘러가는, 머물다 가는, 바람 같은, 느끼고 바라는 마음은 마음밖에 없다. ‘머물고 이동하는’ 계절이라고 하자. 심상숙 시인은 그렇게 여러 갈래 계절로 존재한 시편을 사육하는 정원을 소유한 시인이다. 적어도 필자가 아는 범주에서의 시인은 우주로의 길트기의 시인이다. “둥글둥글 굴렁쇠야 굴러 굴러 어디로 가니”(「동그랗게, 날들이 지나고」). 그러한 곱디고운 여흥 뒤안에는 슬프디 슬픈 가락도 있다.
동백꽃 둘레 달무리보다 둥글다
감감의 후음厚音
수레車와 순유巡遊, 순라巡邏
달밤의 일성호가 한 곡조 강강술래 후미를 파고든다
동백꽃이 지는 것은 당신 때문이다
달 떠온다 달 떠온다 동해동천 달 떠온다
저야 달이 뉘 달인가, 방오방네 달이로세
방오방은 어데 가고 날 오는 줄 모르는가
강강술래 강강술래* 강강술래 강강술래
동백이 진다 동백이 진다 동백이 진다
풀자풀자 덕석을 풀자
풀자풀자 덕석을 풀자
받을 소리 바닥을 껴안는다
벽파정 앞 명랑에서
동백나무꽃이 지네
꿈쟁이 마을 강강술래 터
떡절네 할매들
태초의 돌팔매질 같은
망금산 감감수레 중머리 연淵 군대휘장 같은
동백꽃 송이송이 굽이굽이 휘돌아 에워싼다
임진壬辰의 적선들 줄행랑치거라
동백선혈대첩이다
울돌목의 간결한 대첩이다
* 진도강강술래 가사
-「동백강강술래」 부분
요즘 일본과 강제징용과 독도라는 이슈가 수영만 붉은 영혼을 퍼 올리고 있다. 심상숙 시인은 앞서 언급했듯이 다양한 사유를 가진 시인임에 틀림없다. 해박한 지식과 역사관은 어떤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지 그냥 글체로, 교훈으로, 시적 단면으로, 하지만 과거 일제 즈음 이른바 ‘저항시’라는 명제로 간접 항거했던 ‘침묵의 항변’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주 먼, 오래전 “임진壬辰의 적선들 줄행랑 치거라// 동백선혈 대첩이다/ 울돌목의 간결한 대첩이다.” 시인은 이렇듯 역사의 페이지를 열고 비어있는 또 다른 행간을 발취해가고 있는 중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패권주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보기 좋은 쪽으로 진화되지 않았다. 과학적 산업이 고도화 될수록 균등과 분배는 오히려 불평등이 고착되어가는 현실에서 시인의 역사적인 내면의식은 「만수 병영일기」라는 작품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내는데 무섭도록 예리한 직관을 가진 시인이다. “그래, 두오몽의 묘지와 납골당을 보아라”(「라쇼몽, 그날의 외계인 만수1」)도 이와 유사하다.
독일의 미학자 아도르노에 의하면 세계의 변혁과 모순을 해결하려는 리얼리즘은 구체적인 현실을 포함하지만 부정성의 개념에 얽매여서 사고의 경직을 초래하는 반면에 틀에 박힌 듯한 모너리즘은 불충분한 현실의 파편들이 형상화되어 단절과 부조화를 드러내지만 그것이 인식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했다. 또한 프랑스의 문학비평가 바슐나르는 상상이 이미지를 변형하는 능력이라 하였는데, 이러한 상상력은 지각에 의해서 제공된 이미지를 변형하는 능력으로서 최초의 이미지로부터 독자를 해방시키고 자유케 하는 특별한 능력에 해당된다고 보았다. 비추어볼 때 시인의 역사관은 사물과 대상에 대한(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깊은 사유와 역동적 상상력의 결합일 것이다. “민비가 살해된 을미사변 십년 후/ 을사늑약, 강화도조약으로 일본군 총칼에 외교권을 빼앗긴/ 동짓달 열여드레 추운 새벽”도(「1907년 정미왜란 그날」) 무관하지 않다고 역설한다. “감감의 후음厚音/ 수레車와 순유巡遊, 순라巡邏” “동백꽃 둘레 달무리보다 둥글다.”라고 설파한다. 격한 감정을 추슬러 맛깔 나는 시편을 보자.
나는 누군가 두고 간 우산일까요
우산이 우산을 두고 갈 일은 없지만
사람이 사람을 두고 간일은 많아서
꼭 쥐고 질퍽한 건널목 건너 돌담을 거닐며,
당신은 가슴 가장 가까운 곳에 나를 두었어요
나도 흠씬 적셔지고 싶은 날이 있어요
하지만 놓고 다녀야 홀가분할 때가 있어
당신은 물진 내가 귀찮겠죠
햇살 든 거리에서 놓친 건가요, 놓아준 건가요
나는 누군가 두고 간 우산일까요
늦은 밤 어느 카페, 셔터 내려지고 나서도
배터리 잔량으로 수없이 발신했던 마음
그 캄캄한 방치
다시, 비가 내리네요
가방이며 신문지며 뒤집어쓰고 뛰어가는 사람들,
어디쯤서 당신은 우산을 구걸하고 있을까요
나도 맡겨졌다가 꺼내 쓰는 감정일까요
더 넓어진 수신거리로 새롭게 출시된다면
우산장사가 뭘 먹고 살겠어요?
잠시, 잃어버려도 좋아요
다만 이번 생은 당신과 연동되었으니
마지막 지점에서 기다릴게요
살이 부러졌어도 뒤집혔어도 상관하지 않아요
-「절대 잃어버리지 않는 우산」 전문
시인은 「절대 잃어버리지 않는 우산」의 작품으로 김포문학상 본상을 수상한다. “우산과의 거리가 9m이상이면 스마트폰 경고음 울림, 손잡이 속 배터리로 한해는 거뜬, 뒤집힌 우산도 버튼만 누르면 제자리로, 오늘과 한주간 날씨를 알려주는 앱장치 됨”이라고 주(注)를 달았다. 심사를 맡은 나태주 시인은 비교적 짧지만 명료하게 심사평을 적었다. “절대 잃어버리지 않는 우산”은 작가의 (글)꼴이 잘 잡힌 작품으로 호소력이 좋았다. 그러나 언어의 운용이 약간 넘치는 구석이 보이나.” 실제로 시라는 문체는 “붉게 피었다 져 내린 꽃자리/ 빈집”일 때 만큼이나(「강가에 정자가 있었다」) 일상적인 언어로 쓰일 때 가장 소박하고 아름답다고 한다.
심상숙 시인의 시편에서 우산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침묵 속에서 침묵을 지키는 9미터의 틈, “우산이 우산을 두고 갈 일은 없지만/ 사람이 사람을 두고 간일은 많”다는 것은 비가시적이다. 그러나 비가시적인 것은 침묵의 무게를 견디고서야 우리 앞에 도래한다. “늦은 밤 어느 카페, 셔터 내려지고 나서도/ 배터리 잔량으로 수없이 발신했던 마음/ 그 캄캄한 방치” 앞에 “갯장어 숯불구이”가 놓인(「괴강槐江2」) 사물에는 여러 침묵이 한순간 튀어오를 스프링의 탄력을 가누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잃어버려도 좋아요/ 다만 이번 생은 당신과 연동되었으니/ 마지막 지점에서 기다릴게요.” 이처럼 침묵은 타자의 그 모양 자체로 시인의 겸허한 성정과 같이 다가온다. 누구라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우리를 만지는 겹침의 공간을 만든다. 시인은 “이번 생은” 수완 좋은 “당신과의 연동”으로 살아낼 것이다. 그리고 절대 잃어버리지 않는 침묵의 손등 위에 놓인 마지막 수신 지점에서 세월의 무늬를 덧입히고 알 수 없는 먼 곳에 있을 공간을 통과해야 한다는 현실을 담담한 솜씨로 대변한다. “살이 부러졌어도 뒤집혔어도 상관하지 않아요.” 앞에서 소개한 ‘동화’만큼이나 아름답게 사실적 정서가 묘사된 시편을 보자.
아이들이 연을 쫓아 달립니다.
도랑을 건너뛰고 집들을 지나고 길을 빠져나갑니다
연은 들판으로 구불구불 내려앉거나
나뭇가지나 지붕 위로 떨어집니다.
아이는 동구 밖 창공으로 달려 나갑니다
아이가 연못가에 쪼그려 앉아 있습니다.
금붕어가 아가미로 동그라미를 열었다 닫습니다.
물속을 들여다보는 아이 등도 동그랗습니다.
손가락으로 휘저어보다가 일어서는 아이,
굴렁쇠를 굴려나갑니다
꽃이 피고 지고 아이가 청년이 되고 백발이 되도록
지구가 비뚤거리며 굴러갑니다.
어느 꿈이 한 바퀴 돌다 멈췄는지
걸쇠가 굴렁쇠를 걸어 올립니다
꽃잎 한 장 펴지는 기울기입니다
쩔그렁쩔그렁 굴렁쇠 소리 밟으면
회오리가 번지고 풀밭이 사라집니다
소년이 자욱하게 갇힙니다
-「동그랗게, 날들이 가고」 부분
시인은 시의 서문을 이렇게 연다. “아이들이 연을 쫓아 달립니다.” 그림처럼 그 정황이 눈에 아른거린다. 어디쯤에서는 쥐불 올린 동그란 “걸쇠가 굴렁쇠를 걸어 올린”, “굴렁쇠가 굴러” 간다. “풀풀, 풀을 가르고 풀풀 먼지 날리”며 하늘로 굴려 간다. 비록 “벗어놓은 신발코에 새가 발자국 하나 새기는 동안”일지라도(「그림자를 빚는 동안」). 동그란 날이 가고 나면 “새로 태어나는 물고기 나뭇잎에 착색되는 지느러미 먼지바람,/ 기상예보가 당분간 봄”을 기억해 낼 것이다(「색을 붓다」). 둥금은 선이 없어도 솜사탕처럼 달고 선명한 고전주의적 이성을 지니고 있다. “일곱 살 소년이 새로 그린 동그라미 속에서 일어섭니다/ 풀밭을 가르며 길을 푸르게 뚫어갑니다/ 새로사온 어항처럼 소년을 들여다봅니다/ 동그란 손뼉이 유영합니다.”
이처럼 모든 시에는 시인의 중심이 반듯한, 빈틈없이 틀을 짠 시적 자아는 결국 독자 안에서 그 힘을 발휘한다. 참된 언어의 조탁彫琢 이란 무의식적이고 선험적인 경험에서 보이지 않는 본질을 응시해야 하듯이 자연이라는 광대한 어떤 하나도 변하지 않는 세계는 우리의 삶 속에서 존재의 뒤틀림과 낯설게 하기로 시인의 시적 자아에서 ‘소리로 표시되는’ 시니피에signifie로 전환, ‘귀로 들을 수 있는’ 시니피앙signifiant으로 발화한다. 심상숙 시인은 이렇듯 선문답을 하듯, 이야기를 하듯, 때로는 근엄하게 단호하게 예측을 허물어간다. 여전히 우주에 가득한 시인의 숲에서 환원되지 않은 말들이 딱 그만큼 독자들의 마음 한켠에 각인되어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겨울밤 미스터리]의 시적 언어들이 침묵의 숲에서 세심하고 민감한 감수성을 입고 세상을 향한 “등을” 켠 것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무엇보다 시인의 진솔한 품격만큼 과거와 현재가 익어가는 그리움의 여정을 잠시나마 함께 동행한 것도 행운이었다. 이제 “새애기는 아기를 가”진 파릇한 풀밭에서 한발 물러선다. “귀에 익은 발자국 하나가 멀어”질지라도 혹여 잠시 쉼을 가질지언정 시인은 특정한 순간을 통해 새로 태어나게 될 또 다른 빈칸에서 독자를 만나는 시적 여정을 계속할 것으로 믿는다. 다시 한번 시집 [겨울밤 미스터리]의 상재를 축하하며 지금 여기에서뿐만 아니라 내일도 또 내일도 「광명한 붉은 등을 켜야 할 것이어서」 時代의 詩人이기를 축원한다. 말미에 시편 「미스터리, 당신」의 한 줄을 인용한다. 시인 심상숙 “당신은 고서古書 한질입니다.”♣
첫댓글 명 해설
박수를 보냅니다.
아이고 회장님 고맙습니다
명해설이라뇨 천만의 말씀입니다
말 그대로 작품을 옮겨 바라다본 서평이지요
다녀가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