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유학시절
*풍족하게도 가난하게도 살 줄 아는 사람
선종완 신부의 이런 체험은 성모영보수녀회 정신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성모영보수녀회 수녀들은 지금도 수녀원을 찾아오는 모든 손님을 환대하고 극진히 대접하는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다.
공부에 몰입하던 선종완 신부는 종종 심한 두통을 앓았다. 함께 유학생활을 하던 동료들이 지켜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고통스러워했다. 로마 기숙사 원장 신부는 평소 성실 근면한 그가 두통을 앓을 때면 공부에 대한 규정을 깨고 좀 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뿐 아니라 당시에는 기숙사 학생들이 개인적으로 라디오를 소유할 수 없었는데 선종완 신부는 기숙사 원장 신부에게 이탈리아어를 공부하기 위해 라디오를 개인적으로 가지고 싶다고 청했다.
신언회 소속의 독일인 원장 신부는 관례를 깨고 기꺼이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이것은 선종완 신부에 대한 편애가 아니라 평소 진중하고 성실한 선종완의 삶을 보아 온 원장신부의 결정이었다. 당시 이 광경을 지켜본 광주대교구 윤공희 대주교도 로제바움 원장 신부가 선종완의 진실함과 성실함을 인정하고 크게 신뢰했다고 전한다.
그에게 학업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수덕의 길이었기에 진정 중요한 것은 실력이었을 것이다. 선종완 신부는 경제적 어려움과 학업의 어러움을 잘 견뎌내고 1949년 6월 28일 우르바노 대학을 졸업하고, 1950년 6월에는 안젤리쿰 대학교 신학연구과를 수료했다. 그 후 로마 성서대학 연구과에서 수학하여 1951년 6월 20일 로마에서의 모든 공부를 마쳤다.
생각 같아서는 전쟁의 도탄에 빠진 조국에 무언가 보탬이 되기 위해 그리고 홀로 남은 어머니를 위해 귀국하고 싶은 마음 간절했겠지만 선종완 신부는 자신의 소명을 수행하기 위해 흔들리지 않았다.
로마에서 공부해야 하는 모든 과정을 마친 그는 1951년 예루살렘 성서연구소 L'Ecole Biblique et Arche'ologique Francaise de Jerusalem에서 다시 성서 연구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