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라] 세계 정부로 가는 길 3-1: "은행가들에게 조국이 어디 있나?"(나폴레옹) 3-2: 로스차일드와 록펠러의 만남
[세비라] 세계 정부로 가는 길 3-1: "은행가들에게 조국이 어디 있나?"(나폴레옹)
자주인라디오 2021. 9. 10. [세상의 비밀을 들려주는 라디오]
영국 금융 엘리트들이 침투하여 미국 본토의 금융인들과 손을 잡고 국가의 경제 주권을 빼앗은 나라가 미국이다. 17세기 영국이 네덜란드 금융인에게, 15세기 네덜란드가 베니스와 터키의 금융인에게 빼앗겼듯이 동일한 역사가 20세기 반복된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이 영국을 이겼다."라는 순진무구한 판단이 미국을 영국과 뉴욕의 금융에게 갖다 바친 것이다. 런던이나 뉴욕의 금융 수뇌부에게 영국이나 미국 정부와 의회는 모두 장기판의 말일 뿐이었다.
순진한 사람들은 세계의 경제, 정치, 외교가 국가 단위로 굴러가는 줄 착각을 한다. 한 국가의 GDP, 브랜드, 산업 업무, 금융 업무, 정치 및 문화 교류, 특히 외교의 역사를 주권 국가가 당당하게 독립적으로 이끌었다는 망상에 젖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항상 "우리 한국이 이제...", "감히 미국을 건드린 실수...", "일본에 역공을 가한 러시아의 위력..." 등등 순진하기 이를데 없는 표현과 생각을 하는 것이다.
중세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구체제 시절에도 세상이 국가 단위로 움직인 적은 없었다. 국가의 이름을 팔아 먹으면서 특정 세력들이 일을 꾸미고 이끌었다. 국적과 아무 관계 없이 왕-귀족은 왕-귀족들끼리, 중상 업자들은 중상업자들끼리, 금융 부르주아는 금융 부르주아들끼리, 유통업자는 유통업자들끼리 편을 먹었다. 하물며 30년 신구 종교 전쟁 시절에도 개신교도들이 가톨릭과 짝을 이루어 같은 개신교도나 가톨릭을 공격한 적도 부지기수였다. 세계정부는 이런 역사의 산물이다.
국가에 기반하지 않고 그 국가의 이름만 상징적으로 사용하면서 실제로는 국경 넘어서 움직여 왔던 엘리트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아직도 미국을 하나의 국가 단위로 보면서 국제 정치를 논하는 철부지들이 대학과 연구소에 가득하다.
[세비라] 세계 정부로 가는 길 3-2: 로스차일드와 록펠러의 만남
자주인라디오 2021. 9. 20. [세상의 비밀을 들려주는 라디오]
1870년대부터 석유화학의 발전가능성을 알고 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었다. 1880년대 석유 산업과 무역보증 업무에 뛰어들었다. 로스차일드는 자신의 채굴장인 바툼 유전에서 고작 4만 톤의 원유를 뽑았지만 다른 회사들의 원유는 27만 톤을 실어 날랐다. 로스차일드는 러시아에서 나가는 수에즈운하의 유조선을 관리하고 있었고 당대와 미래의 수익을 보장하는 석유사업에서 물러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석유를 위한 전초기지로서 이스라엘, 아르메니아, 쿠르드 식민국 설립도 구상했다. 이 중 이스라엘만 성공했다. 1880년대 말, 로스차일드는 석유 유통망을 장악했다.
1888년 벤츠에 의해 석유엔진이 발명되어 자동차 산업이 시작되었다. 헨리 포드는 에탄올 자동차를 꿈꾸었고 당시의 차량의 30% 이상이 전기차였지만, 록펠러의 전방위적인 석유전략에 의해 끝없이 뒤로 밀렸다. 전기 자동차에 대한 가격경쟁도 시작했다. 에탄올에 대한 공격은 금주운동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이 금주운동은 석유에 에탄올을 섞는 연료기술로 이어졌다. 에탄올을 없애려는 물타기 작전이었다. 1880년대 록펠러의 석유는 총괄 석유화학 산업체제로 들어가고 있었다. 제 2차 산업혁명이라 불린 것이다.
1880년대 이래 제정 러시아는 로스차일드와 록펠러를 동시에 견제했다. 유럽 전역에 무기유통에 관여했고 혁명에 돈을 대 주던 로스차일드 카르텔, 석유독점을 원했던 록펠러를 러시아가 좋아할 리 없었다. 이들도 이런 러시아를 좋아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돈벌이는 돈벌이인지라, 로스차일드는 러시아에 융자를 해주고, 록펠러는 등유를 팔고 있었다. 프랑스, 벨기에 등 유럽에 돌아다니는 러시아 국채의 대다수를 로스차일드 파리 본점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나라 하나 뒤 흔드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1884-5년 로스차일드와 록펠러는 러시아 석유사 브라노벨을 인수하려 했으나 거절 당했다. 러시아 정부에 덧붙여 싫은 놈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1892년 록펠러는 로스차일드를 뉴욕 본사로 초청했다.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추후 벌어진 일을 살펴보면 러시아와 러시아의 바쿠유전과 브라노벨을 무력화한다는 협잡이었을 것이다. 결국 1917년 러시아와 브라노벨은 불과 피를 쏟으며 사라졌다.
한편, 1879년 J. P. 모건은 밴더빌트의 뉴욕센트럴 철도를 운영하면서 록펠러의 석유수송을 맡아주었다. 모건-록펠러의 우정이 깊어졌다. 1895년 미국의 각종 채권을 로스차일드를 통해 유럽에 팔면서 로스차일드와의 우정도 더욱 돈독하게 했다. 위기에 처한 뉴욕센트럴 철도 주식을 영국의 로스차일드가 사주는 대신 미국에서는 자신이 로스차일드의 대표 주주로 활동하기로 공조했다. 이것이 미국의 J. P. 모건과 유럽 로스차일드가 서로 채권자 및 브로커로서 만나는 상징적인 모습이다. 로스차일드, 록펠러, 모건 이 세 그룹이 한데 모인 곳이 1913년 미국중앙은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