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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3화 <요지경 산문> 우리 엄마 2장 지혜
지식은 없고 기록도 할 수 없다. 이제는 지혜만이 살길이다. 읽고 쓸 수 없으니 모든 것을 이해하고 기억해야만 한다. 지식이 많으면 좋을 수는 있지만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상식이 필요하고 모르거나 못하는 것은 모방, 따라 하기를 하면 된다.
그래도 시계를 볼 줄 알고 돈을 계산 할 수 있으니 그것을 최대한 활용했다. 숫자 1 2 3 --- 12까지는 알 수 있다. 1원 5원 10원 50원 100원 등등도 보고 익히면 된다. 단위에 따라 10진법을 익힌다. 1원이 10개면 10원이요. 10원이 또 10개면 100원이다. 그런 식이다. 그러나 시계의 숫자는 변하지 않았지만 화폐는 변했다. 모양이 달라지지만 그때마다 익히면 어렵지 않다. 그렇게 적응하면서 사셨다.
엄마에게는 든든한 지원군 아버지가 있었다. 새로 나온 화폐는 물론 모든 상식을 아버지로부터 배울 수 있었다.
동그라미 둘
어머닌 이름조차 쓰실 줄 몰랐지만
왕십리 행 전차는 백발백중 맞히셨지
‘왕’자엔 동그라미 둘 그림으로 아셨다지
전차가 다니던 시절이다. 어머니는 왕십리 시댁으로 가려면 ‘왕십리’행 차를 타야한다. 전차는 버스와 달리 길 한가운데로 다닌다. 그래서 정차 시에 전차로 다가가 차장에게 왕십리행인지를 물어야한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전차로 다가가지 않고 차장에게 묻지도 않는다. 혹 다른 승객이 왕십리행을 묻고는 되돌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엄마도 왕십리 가니 같이 타고 가잔다.
글을 모르는 우리 엄마가 어떻게 왕십리를 읽을까 궁금해서 내가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는 ‘동그라미 두 개’인 글자가 오면 왕십리행이라고 하신다. 맞다. ‘왕’자엔 동그라미가 둘이 있다. 을지로행이나 동대문행에는 동그라미 둘이 없다. 지식이 없으니 지혜를 발휘해야한다. 아니 궁리를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을 해 내셨다. 그것을 나는 엄마만의 생각, 창의라고 생각했다.
우리 엄마는 참 잘 다니셨다. 분가한 아들네 딸네 생일이 되면 가고 또 손자 손녀 생일도 잘 기억을 하셨다가 간다. 그때는 전부 음력을 사용했다. 물론 양력 글자 밑에 음력도 써 있다. 그래도 양력과 달리 음력은 매년 날짜가 달라지니 우리들에게 물어서 대답을 하면 두 번 다시 묻지 않으셨다. 날짜만 알아도 되지 않는 것이 버스를 타고 가려면 버스 번호를 외워야하고 승하차 지점도 알아야한다. 하지만 한 번 간곳은 틀림없이 찾아다니셨다. 내가 따라 갈 때도 있었지만 그냥 따라가면 한 번의 실수도 없이 곧장 찾아가셨다. 혼자서도 잘 다니셨던 것이다.
엄마가 쉰 살이 넘어 폐경기도 지나니 다리는 가늘어지고 허리는 굵어지는 것이다. 특별히 운동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건강이 나빠질까봐 걱정을 하는 편이 되었다. 작은형이 간경화로 마흔아홉에 죽었으니 건강이 걱정이 될 때에 간장약이라고 ‘메치오닌’ 약을 사다드리니 좋아하셨다. 그 약을 꽤 오랫동안 드셨다.
중곡동에서 엄마를 모시고 몇 년 살았다. 더운 여름에는 집에서 목욕을 하고 싶었지만 찬물에 목욕하기에는 물이 너무 찼다. 그래서 한다면 데워서 했는데 엄마는 그냥 찬물에 하신다. 데워달라고 하시기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엄마는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으셨다. 혹시나 학교에서 돌아와 무슨 쪽지라도 찾으면 글씨가 써진 것은 버리지 않고 보관했다가 주시곤 했다. 엄마는 우리에게 공부하라고 한 번도 말씀하시지 않았다. 우리에게만 아니고 형과 누나에게도 그런 말씀은 안하셨단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공부란 스스로 알아서 해야지 엄마 아빠가 하라고 닦달하고 재촉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던 것일까.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신 것인가.
고등학교 1학년과 2학년 때에는 거의 매주 일요일마다 도봉산으로 암벽등반을 다녔고 그때마다 주먹밥을 해주셨다. 밥을 무슨 그릇에 담으면 암벽등반에 지장이 있으니까 그냥 밥에 깨소금을 넣고 동그랗게 주먹만 하게 만들어서 간장이나 된장 등에 박아서 만든 오이나 무장아찌를 넣어주셨다. 감지덕지 맛있게 먹고 다녔다.
그렇게 2년을 다니고 고 3이 되어 입시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역시나 시간은 너무 멀리 가버렸던 것이다. 죽자 살자 공부를 해야 할 때였지만 나만 몰랐구나 하는 자책과 후회가 많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일체 등산 활동을 중단한 것이다. 한 번은 형에게 왜 나보고 공부하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형이 하는 말 “나도 몰랐다”였다.
아버지께서 교회에 나가셨지만 얼마 후에는 다니지 않으셨단다. 이유는 말씀 하시지 않아 모르겠다. 물론 엄마도 교회에는 나가신 적이 없다. 하지만 엄마 주변에는 점을 보러 다니는 분이 많았다. 그래서 우리엄마도 점을 보러 다니셨다. 갔다 오셔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특히 초여름에 다녀오셔서는 여름에 우리들에게 수영가지 말라고 자주 이야기 하셨다, 손재수(損財數)가 있다고. 재물을 잃을 수라는 것인데 학생인 우리들에게 무슨 잃을 재물이 있다고 그러는지 모른다는 식으로 무시하고 수영을 다녔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않았다. 위의 형을 잃은 기억이 되살아나서 우리를 아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어느 날 길에서 남자들이 신문지에 싼 돈을 실제로 줍는단다. 그리고 엄마가 보았으니 같이 나누어 갖자면서 엄마 손에 낀 반지를 빼서 주면 어쩌구 하면서 반지를 빼면 갖고 도망을 가버렸단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굉장히 속상해 하셨다. 또 그런 일을 더 당하지는 않으셨지만 어머니도 세상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사건이었다.
엄마가 평생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노래를 어디에서 배우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라디오를 듣고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흥얼거릴 수도 있는데 그런 일이 없었다. 요사이는 학력이 낮으면 군에서 받아주지도 않지만 한국전쟁 중에도 글을 모르면 군대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그만큼 문맹률이 높았다. 옛날에는 글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지만 배우고자 하면 입으로 불러주고 따라하는 식으로 창을 배우고 가르치기도 했다. 지난주에 끝난 KBS 아침 인간 극장 「엄옥분의 봄날」에도 71세의 여주인공이 글을 몰라 들어 외우며 연극 주인공을 했다.
그러니 100년 전 조선의 문맹률은 말해서 무엇 하랴!
또 달력이 있다. 최소한 31일까지 있다. 그 숫자를 응용해 다른 숫자를 익히신 것으로 생각된다. 더 나아가서 양력 숫자 다음에 쓴 음력 숫자를 읽었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 않고는 어떻게 생일을 챙기고 찾아갔을 것인가. 막내딸이 김포에 살면 그곳으로 손주 생일날 맞춰 가기도 하신다.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지만 엄마만의 무슨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내가 모를 뿐이다. 궁하면 통한다기보다는 어떻게 해야 찾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한 끝에 무슨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다. 좋게 말해서 엄마만의 창의력을 발휘한 것이리라.
<엄마의 단어>
① ‘지노귀(새남)’은 나도 모르는 단어였다. 우선 처음 들었을 때에는 진옥이를 발음 나는 대로 ‘지노기’라고 하는 줄 알았다. 아니다. ‘지노귀새남(죽은 사람의 넋이 극락으로 가도록 베푸는 굿)’이라는 단어가 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동네에서 굿을 하는 집이 많이 있었다. 왕십리 우리 큰집 바로 앞집이 유명한 굿 집이다. 그 집 바로 뒤에 절간 같은 작은 사당이 있을 정도이었다. 그 집은 어찌나 잘 맞추는지 동네에서는 ‘족집게 방’이라는 칭호가 붙을 정도이었다. 그래서 그 집은 엄청난 부잣집이 되었다. 그 집 아들이 그 당시 펜싱을 배우고 선수까지 하는 정도이었다. 정말 부잣집만이 할 수 있는 운동이었다고나 할까.
미래를 알 수 없으니 엄마는 아이들이 죽지 않고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남에게 의존하고 그의 지시에 따라 예방을 하거나 처방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사한 형의 사진을 절에 갖다놓고 일주일에 한 번씩 일곱 번 재를 지내려갔다. 그것이 사십구일재이다.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었을 것이다. 또 아버지도 작은 형도 모두 절에 모신다고 영정을 가져가서는 모두 49재를 지냈다. 사십구재는 ‘불교에서 사람이 죽고 나서 다음 생을 얻을 때까지의 날 수’라고 한다.
셋째 형이 전사하고 3~4년 지나는 동안 어머니께서는 꾸준히 알아보셨나보다. 바로 ‘영혼결혼식’이다. 장가도 못 들고 죽은 아들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누가 부추겼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형 사진을 절에 맡기고 여러 번 행사를 하였는데 절에서 이야기를 했을 것이라는 추측뿐이다. 하여간 형 나이와 비슷하고 일찍 죽은 미혼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여자 쪽 집과 연결을 하고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이다. 얼마간의 비용을 내고 절에서 영혼결혼식을 올리기로 하여 참석을 하였다. 별다른 의식은 없었지만 일반 결혼식 비슷하게 행사를 치렀다. 엄마 표정은 많이 밝아지셨다. 엄마 생각에 아들을 결혼시켰으니 마음이 얼마나 기쁘셨을까. 요새 말로는 ‘가성비’가 좋은 행사이었다.
② ‘석비레’ 푸석돌이 많이 섞인 흙. 왕십리 우리 큰집의 근처가 돌도 아니면서 흙도 아니다. 나뭇잎이 쌓이고 쌓이면서 삭으면 검은 흙이 된다. 그런데 석비레는 딱딱하지도 않고 삽으로 긁으면 쉽게 깎이는 흙이다. 집을 지을 때에 석비레 땅에 지으면 배수도 잘되고 지반도 튼튼할 것으로 생각되어 좋은 집터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많이 쓰는 단어도 아니다. 이런 단어를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③ ‘빙초산(氷醋酸)’ 식초이다. 다만 상온에서도 얼음처럼 고체가 된다. 향신료 식품점에서 판다. 엄마가 사용하던 식초를 아내도 모르고 사용한 것이다. 내가 확인해보니 공업용이라고 쓰여 있다. 당장 갖다 버렸다. 파는 사람이 문제이지만 조금씩 먹어서 그런지 부작용 없이 넘어갔다.
④ ‘바리캉’ 아래로 세 형제가 자라면서 이발을 자주 다닐 수 없어 바리캉(bariquant 이발기)을 사다놓고 머리를 깎았다. 수동식이라 손으로 깎는다. 웃날과 아랫날 사이에 머리가 끼면 잘리지 않고 뽑힌다. 무척 아팠다. 그러면 다시 뒤로 물러나서 이발기를 빼고 사이에 낀 머리카락을 털어내고 다시 깎는다. 그러다가 고 2때 4.19혁명이 일어나고 2학기부터 삭발에서 조금씩 머리가 길어졌다. 그러면 다시 이발기의 날 밑바닥에 약간 높은 덧빗을 대고 조금 길게 깎고는 했다.
⑤ ‘싱싱이’ 하모니카
작은 형이 하모니카를 사다가 불었다. 엄마는 ‘하모니카’라고 하지 못하시고 ‘싱싱이’라고 하셨다. 한 글자 한 글자씩 말해주는 애가 없으니 다시 말해달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렇게 불렀다. 그렇게 부르도록 그냥 두는 것이 오히려 더 낫다고 생각했다.
⑥ ‘글리세린’ 겨울에 빨래를 하면 손등이 얼어 터진다. 그러면 글리세린을 사다놓고 바른다. 투명한 액체이다. 바르면 약간 통증이 온다. 심하지는 않다. 그것을 핥으면 약간 달다..
⑦ ‘아코디언’을 손풍금으로 ‘바이올린’을 깡깽이로 말하셨다. 아무래도 알파벳으로 된 단어를 말하기 불편했을 것이다
막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엄마가 얼마동안 따라다녔다. 학년 초에는 문자 교육보다는 율동 등을 하고 화장실 선생님 자리 등등 학교를 소개하는 학교 적응 기간이 있었다. 그리고 문자 교육에 들어갔을 때 엄마는 수업참관을 하면서 한글을 배울 기회가 있었지만 역시나 기회를 놓쳤고 그때 우리들이 엄마에게 다시 한글교육을 집에서 했지만 우리의 준비가 미흡했고 체계적이지 못해서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또 막내가 봄소풍 가을소풍을 가면 음식을 마련하고 큰 이모까지 불러서 같이 다니셨다. 학부모이기도 했지만 막내에게 관심이 많아 같이 다녔던 것이다.
집에는 가위가 2개가 있다. 하나는 크고 또 하나는 작다. 작은 가위로 손톱 발톱을 깎았다. 쇠로 만든 가정용품이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 집에서는 숫돌이 있다. 가위만 가는 것이 아니라 부엌에서 쓰는 칼도 집에서 갈아서 사용했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주로 하셨지만 우리가 크면서 우리가 갈았다. 지금 같이 녹이 슬지 않는 스테인리스 칼이 아니다. 전부 무쇠 칼이다. 칼이 무디어지면 엄마는 장독대에 있는 독에 대고 몇 번 문질러서 쓰고는 하셨다. 우리가 미처 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가 집에 계시면서 초겨울 김장할 때가 되면 약간의 돈을 내놓으시면서 김장을 하자고 하셨다. 돈이 넉넉지 못해 월급이나 받아야 하려고 하였지만 어머니가 선수를 친 것이다. 우리가 돈이 없어 못한다는 것을 아셨나보다. 어머니로서는 일 년에 한 번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기회가 온 것으로 생각하실 수도 있어 제안을 받아들여 김장을 하고는 했다.
아니 현충일 날 동작동에 갈 때에도 제물을 준비하라고 아내에게 조금씩 돈을 주시고는 했다.
구정이 가까워지면 엄마는 만두를 준비하셨다. 만두소를 만들고 밀가루 반죽을 해서 방안으로 밀어 넣으면 온 식구가 달라붙어서 만두를 만들었다. 밀가루 반죽을 가래떡처럼 길게 만들어 3cm 정도로 잘라서 다듬이 방망이로 밀어 납작하게 만두피를 만든다. 형한테서 배워 우리도 주름을 넣어 만들었다. 만든 만두는 약간 길게 만든 나무 상자에 담아 내어놓는다. 창고에 두면 천연 냉동이 된다. 원래 그 상자는 일본식 찹쌀떡(모찌, 일본어)을 만들어 보관하던 상자란다. 우리는 찹쌀떡보다는 만두를 했다. 빈대떡도 꼭 준비를 하신다. 그러면 집에서 녹두를 맷돌에 넣고 1차 갈아야한다. 그 부서진 녹두를 물에 불리면서 껍질을 조리로 걷어 버린다. 큰 그릇 위에 Y자형 나무를 얹고 또 그 위에 맷돌을 넣고 돌려 녹두를 가는 것이다. 전기용품이 흔하지 않은 시절이라 마당에서 번철을 놓고 돼지비계를 놓으면 열에 녹아 그 기름으로 빈대떡을 부친다. 바삭거리면서도 고소하다.
기본은 가래떡이다. 쌀을 불려서 방앗간으로 가서 가래떡을 만들어 오신다. 갓 만들어온 따뜻한 가래떡은 씹으면 씹을수록 달다. 겨울이라 하루쯤 광에 두면 얼어서 썰기에 좋다. 너무 얼거나 굳으면 썰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떡 썰기도 힘들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그래도 방학 중이라 나도 많이 했다.
내 몸에 흉터가 2개 있다. 하나는 엉덩이이다. 겨울이면 방안에 숯불을 피워놓은 화로가 있다. 기저귀도 차지 않은 상태에서 까불고 놀다가 화로에 주저앉아 숯덩이가 엉덩이에 붙어 화상을 입었다. 다행인 것은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이다. 또 한 군데는 머리 뒤통수이다. 집에 다듬잇돌과 다듬이 방망이가 있었다. 엄마가 다듬이질을 하고 치우지 않은 방망이를 발로 문지르며 놀다가 뒤로 자빠져서 뒤통수에 상처가 난 것이다. 상처가 크지는 않지만 그곳에는 후유증으로 머리카락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맨들맨들한 상처가 드러나 있다. 머리를 좀 길게 기르면 보이지는 않는다.
작은형이 중학동 집 2층에서 창문 밖으로 내어놓은 계단의 낭간을 엎드려서 타고 내려가다가 못에 걸려 불알이 찢어져 큰 상처가 났었다. 타지 못하게 박아놓은 못을 모르고 탔던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이 많아 이런 저런 일이 많이 생겼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이 맞는 말이다. 우리 집도 우리 엄마도 정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일이 생길 때마다 엄마는 지식이 아니면 무엇으로 대책을 세워야했을까. 그것은 지혜요 모방이고 창의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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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자를 몰라도 모양을 보고 버스를 탈 줄 알았으니 살아가면서 나름 터득한 지혜가 대단합니다. 옛날 어머니들은 다른건 몰라도 식구들 생일이나 집안 제삿날은 기가막히게 기억하고 있더군요. 심지어 친척집이나 이웃집 제삿날 까지도 기억하고 들먹이는걸 보면 놀랍기도 합니다. 배웠거나 안 배웠거나 어머니는 위대하고 자랑스럽고 또 보고싶습니다.
맞아요! 정성이 대단하셨죠! 보험이라든지 연금이 없던 시절이라 말년에 자식들에게 의존을 했으니까요. 특히나 장남에 대한 기대와 가문에 대한 책임 등등이 겹쳐서 정성이 더욱 컷지요. 여자로서 엄마로서 힘든 생활 다 참으시며 사셨습니다. 엄마 생각에 언제나 고개가 숙여집니다. 자랑스럽고 또 저도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