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
제14회 작품상
박종규
풀꽃의 운명은 바람이 정해준다고 노래한 시인이 있습니다. 바람이 데려다주는 곳에 뿌리를 내린 풀꽃은 다시 바람이 불어도 자리를 뜨지 못합니다. 당신이 그랬습니다. 바람처럼 왔다가 풀꽃처럼 저버린 사람 브라이언, 그대는 결국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스산한 바람이 이니, 이끼 낀 묘비명 앞에 낙엽이 뒹굽니다. 타국에서 생을 마친 선교사들의 행적이 낙엽을 따라 묘비에서 낱낱이 살아나고 있습니다. 가을 낙엽처럼 사라져간 그들이지만 선교사 묘역은 그 흔적을 오롯이 품어 풍상을 이겨냅니다. 당신도 저들처럼 선교사로 이 땅에 온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그대를 내 글에 가두어 온전히 되살릴 수 있을는지요. 당신 Brian A Barry의 흔적을.
옛 동료들과 함께 입원실을 찾았지요. 창가 침상에 네댓 개의 주삿바늘을 꼽은 환자가, 장대했던 기골이 쇠하고 백발 성근 미국 사람이 누워 있었습니다. 콧날이 높고, 눈자위가 움푹 들어간 70대 초반의 달라진 그대 모습이었습니다. 그제야 우리는 정겹던 브라이언이 영영 사라질 거라는 현실에 눈떴습니다. 의식이 오락가락 위중하니, 세상 뜨기 전에 얼굴이라도 볼 사람은 면회를 오라는 전갈을 받고 옛 동료들이 문병을 온 것입니다. 우리의 방문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신은 눈을 뜨더니 시선을 잠깐 주고는 이내 감아버렸습니다. 고통이 심한데 모르핀으로 견뎌내던 참이었고, 아프다는 말까지 유머러스하게 하셨다고요! 결혼도 안 했고, 이국땅 에서 혈육도 없는 그대가 십여 년 동안 사선을 넘나드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니요! 당신이 힘겹게 눈꺼풀을 올렸을 때, 영롱한 푸른 눈동자가 예전의 정겨웠던 시절을 데려왔습니다. 순간, 그대의 눈빛은 외로운 천사의 눈빛이었습니다. 바람의 인도에 따라 풀꽃처럼 이 땅에 와서 무소유의 땅 심을 일궜으니 이제껏 그토록 맑은 눈동자를 가질 수 있었겠지요.
당신은 전생이 한국인이었다고, 조선 시대에 전북 부안의 바닷가에서 어부로 전생을 살았다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안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어촌의 노부부를 양부모로 삼았습니다. 부안의 어머니가 정갈하게 목욕한 뒤 청정수 한 사발을 떠 놓고 자식들 위해 새벽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보고서 한국을 다시 생각했다고요. 한국문화에 익숙해지고, 한국을 좋아하게 되어 귀국을 서두르지 않았으며, 입에서는 부안 사투리 ‘거시기’가 거침없이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국 문화와 미국 문화를 잘 이해하는 카피라이터로 대기업에서 우리와 만난 당신은 대다수 한국인처럼 명절 때마다 선물 보따리를 들고 호남선 귀향 열차를 탔었지요. 설에는 한복으로 갈아입고 부안에 내려가 양부모께 세배를 드리고, 고향 사람들과 보내다 올라오곤 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1970년대 말입니다. 미국인 카피라이터로 입사하여 종합 무역상사의 해외용 광고를 제작할 때 역량을 보여주었습니다. 당당한 체구에 나이도 좀 위라서 ‘브라이언 형’으로 부르는 동료들이 많았지만, 당신은 타국의 자잘한 동료들과 잘 어울렸고 늘 선한 미소를 보여주던 착한 미국인이었습니다. 그렇게 흘러간 세월은 본국의 부모와 한국의 양부모까지 곁을 떠나가게 하였습니다.
회사의 사정으로 우리를 묶었던 부서가 해체되고 우리는 뿔뿔이 흩어 졌습니다. 그리고 어언 30년이 넘었습니다. 젊음을 함께 했던 동료들이 몇몇은 자주 만났으나 당신에 대한 안부는 대부분 모르고 지냈습니다. 그 사이 몹쓸 병에 걸렸고, 결혼도 안 한 사람이 12년 가까이 홀로 투병 중이었다니요! 오랜 고통의 세월을 어찌 살아냈을지, 동료였던 사람으로 그간의 무심했음에 고개를 들지 못하겠습니다.
바람의 인도로 이 나라에 와 이제는 한국 불교에 인연을 둔 당신은 결국 ‘거시기’하게 세상을 등졌습니다. 한국의 옛 동료들, 그대와 영혼의 소통을 함께 했던 불자들은 잠시 아쉬워할 것이고, 당신은 재가 되어 바람을 타고 한국의 산하에 뿌려지겠지요. 그대가 그려 남긴 탱화는 유일 한 유산이 될 것입니다. 한국에 정붙여 살다 간 그 긴 세월, 오롯이 당신께 돌려드립니다.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이 왔습니다. 불교계 인사들, 외국 사찰에서도 먼 문상을 왔고, 매스컴에서는 브라이언의 부음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49재는 성철스님의 계보를 잇는 큰 절에서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우리가 모르게 당신은 자신의 도포 자락은 넓게 펼쳤던 것이지요. 인간 세계를 떠나는 그대의 뒷모습이 외롭지 않았기에 보내는 우리도 조금은 위로를 받았답니다.
직장이 해체되고 난 어느 날, 내가 삼선동에 있는 형의 집을 방문했을때 당신은 찻길까지 배웅을 나왔었지요. 그 큰 손이 내 바지 주머니에 불쑥 들어왔습니다. 천 원짜리 두 장을 접어 쥐고 나왔다가 내 주머니에 찔러주면서 전라도 사투리로 내게 말했지요, ‘늦었응께 택시를 타고 가부러.’ 브라이언, 당신은 그때 이미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이 땅에 풀꽃으로 다시 피어날 브라이언이 벌써 그리워지는 것은 당신이 보여준 한국 사람의 정 때문입니다. 그대 가시는 길에 시 한 구절 깔아드립니다.
나는 늘 / 떠나면서 살지 / 굳이 /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좋아
바람이 날 데려가는 곳이라면 / 어디서나 새롭게 태어날 수 있어
― 이해인의 시 「풀꽃의 노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