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아이들은 새로 이사를 간 집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그건 나의 실수였다. 할 말이 별로 없던 내가 성학이에게 무심코 물었던 것이다. 집이 넓다며? 방과 화장실이 몇 개고 거실과 주방이 어떻다는 등. 그러면서 새로 장만한 텔레비전이 얼마나 큰가를. 서재에 책이 늘고 책상이 하나 더 늘었다는 걸. 귀에 그것들이 건성으로 들려왔으나 관심 있게 들어주는 척하는 인내를 발휘해야 했다.
꼬마는 여자가 잘라준 고기를 야무지게도 먹었다. 그 여자는 말이 없었다. 여자는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처녀의 몸으로 유부남을 사랑하여 관계를 맺고 원하는 쾌락을 추구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애까지 낳아 기른다는 건 어지간한 용기가 아니고선 흔한 일은 아니다. 그 용기가 저렇게 예쁘고 가식 하나 없을 것 같은, 전혀 악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에서 나올 수 있다니 경이로웠다. 여자에 비해 내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내가 먹고 있는 것이 고긴지 밥인지, 맛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나는 마냥 씹고 있었다. 그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을까.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이란 느낌으로, 가슴 설레는 느낌으로 대해본 적이 없었다. 남남이 된 요즘에 와서야 그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사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그를 너무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미혼모라는 달갑지 않은 타이틀도 감수하며 애를 낳아 키웠을 것이다. 그가 어떤 미끼를 던졌든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여자는 나보다 한 발 앞서 반란을 혁명으로 만들고 그 혁명을 일상으로, 자기가 그리던 생활로 만든 것이다.
남편이었던 남자의 여자가 경이롭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 먼저 일어났다. 내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으려 애쓰면서 아이들에겐 이해할 수 있는 핑계를 대고.
“요즘 엄마 공부 열심히 하는 줄 알지?”
“맞아. 엄마 요즘 책 무진장하게 읽더라.”
예린이 나를 거들었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얼마 전부터 다니기 시작한 헬스클럽을 성학이는 안다. 그런 아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그와 여자에게 의연하게 작별을 고했다.
“보기 좋아요.”
인생유전(人生流轉)이라고. 그녀가 옛날엔 그의 정부(情婦)였는데 이제 내가 그의 정부가 되었나? 그래, 나는 성녀가 결코 아니다. 좋은 느낌일 수는 없었다. 주차장을 어떻게 찾았는지 모른다. 운전석에 앉아 열쇠를 꽂는 순간 나는 내 정신의 공황을 보았다. 그의 의도는 과연 무엇인가. 그렇게 젊고 아리따운 여자와 똘똘한 아이를 내게 보여준 의도. 알 수 없었다. 애써 수수께끼라고 생각했다. 그가 그만큼 잔인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종가에서 그는 나에게 눈물겹도록 섬세하게 굴었다. 그와 살면서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말, 사랑한다고도 했다. 나도 그에게 하지 않았던 말, 사랑한다고 했다. 함께 사는 동안에 느끼지 못했던 봄날을 헤어지고 나서 만끽한 아이러니가 싫지 않았다. 그런데 왜? 어째서? 이런 만남을 가졌는가. 나와 그 여자. 서른아홉과 서른셋의 차이는 너무나 분명했다. 그런 여자를 두고 그는 왜 이제 와서 내 육체를 탐하는가. 이렇게라도 당신을 가끔 만날 수 있기를…. 이제 그 여자가 요조숙녀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내가 요조숙녀였을 때 그는 온몸과 온 마음으로 그 여자를 사로잡았을 것이다. 아내와 정부가 주는 어감의 차이만큼 그는 그녀에게 흠뻑 빠졌을 것이다. 그래서 나와의 섹스는 무시해도 될 만큼 온갖 쾌감을 만끽했을 것이다. 나는 그 쾌감을 그리워하고. 그 그리움이 갈증이 되고 열망이 되어 아무도 모르는 비밀하나 만들려고 여행을 떠났었다. 결국 그 여행이 그 여자가 아내가 되고 나는 정부가 되고 말았던 계기였다. 결론을 내렸다. 그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최 이사는 아직도 나를 학대하고 있는 거라고. 기도원이나 정신병원에 감금했던 거완 차원이 다른 학대를 즐기고 있는 거라고. 그는 나의 비명을 즐기는 새디스트라고. 그렇다면 답은 명확했다.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것. 나는 나대로, 그는 그대로 사랑 법이 틀리니까.
불현듯 박호진이 그리웠다. 오늘은 토요일. 만난 지 3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를 만나지 못하면 못 살 것 같았다. 아홉시도 되지 않았다. 그의 오피스텔로 차를 몰았다.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당연히 강의 준비를 하고 있겠지. 아니면 토요일이라고 동료문인들과 어울리든지. 그가 만약에 없으면 기다리리라. 얼큰하게 술에 취해 들어오는 그를 맞이하는 것도, 뜻밖의 나를 보고 놀라는 그를 보는 것도 괜찮으리라. 이 시간이면 밥은 먹었을 것이고, 아니 내가 도착할 때쯤이면 촐촐할지도 몰라. 박호진을 만나게 되면 내 정신의 공황도 스르르 사라질 것이라 믿는다. 미리 전화를 하지 않은 데는 나의 뜻밖의 방문이 그에겐 더 큰 기쁨이 되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가 사는 오피스텔 주차장에 차를 넣고 주변에 있는 편의점에서 맥주와 먹을거릴 샀다. 지금은 그가 없었으면 좋겠다. 내가 들어가 술상을 준비하고 난 다음에 한 십 분쯤 있다가 술에 잔뜩 취해 돌아왔으면 좋겠다. 흐트러진 모습의 그를 보는 것도 새로운 즐거움이 되리라. 엘리베이터 속에서 나는 이미 레스토랑에서의 어색함과 가식에서 벗어나 그를 만날 기쁨에 취해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출입문 앞에 섰다. 벨을 누를까 하다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들어가기로 맘을 먹었다. 그렇게 해서 그가 만약 안에 있다면 귀신이라도 된 양 놀려 주리라. 그러면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척 하며 나를 덥석 안아줄 것이리라.
열쇠를 밀어 넣고 돌렸다. 소리 나지 않게, 슬그머니. 문을 열었다. 넓은 공간에 미등만 켜있었다. 나의 눈이 주방을 지나, 소파를 지나, 책상을 지나 침대에 꽂히자마자 내 가슴이 무너졌다. 아, 저것은! 두 남녀가 벌거벗은 채 서서 열락에 빠져있었다. 내가 그리워 한 몸뚱어리와 풍만한 젖가슴과 빵빵한 엉덩이의 굴곡이 뚜렷한 여자. 출입구는 어두웠기에 내 모습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으리라. 더군다나 저들은 서로에게 열중한 나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으리라. 내가 그와 그랬던 것처럼.
나는 돌아섰다. 나는 오늘 여기에 오지 않았다. 들어올 때만큼이나 조용히 문을 열고 닫았다. 그리고 열쇠를 돌려 잠갔다. 나는 오늘 여기에 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가슴을 졸이며 한 계단을 바삐 내려와 탔을 정도였다. 박호진에게 돌아와야 할 아내가 나 말고 한 명 더 있었다. 아니 나보다도 더 빨리 온 여자인지도 모르고 더 있을지도 모른다. 그 때마다 그는 시, ‘당신이 다시 와야겠어’를 읽어주는가.
불쌍한 내 정신의 공황은 아까보다 더 심해졌다. 나는 성자가 아니다. 박호진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이 나를 참담하게 만들었다. 최 이사와 오늘의 만남도 사실 참담한 내 모습의 발견이었다. 내 정신이 공황상태에 이른 것은 그게 가장 큰 원인이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냉정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박호진만의 내가 아니듯이 그도 나만의 박호진이 아니잖은가. 오늘 그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관장을 만났었고 최 이사를 만났으며 강준호를 그리워했잖은가 말이다. 배신이라니?
나의 정체는 분명해졌다. 나는 최 이사의 여자도 아니고 박호진의 여자도 아니다. 강준호의 여자도 아니고 앞으로 내가 더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남자들의 여자도 아니다. 순간순간 그들의 여자가 될 수는 있어도 언제나 나는 나다. 그들이 순간순간 나의 남자가 될 수는 있어도 그들은 나의 남자가 아니다. 그래도 나는 그들을 사랑할 것이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기에.
5월 강준호를 만나고부터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그리고 그 변신은 굴곡도 많았지만 만족스러웠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이 토요일 밤에 시험이 찾아왔다. 나는 앞으로 최 이사를 어떻게 대하고 박호진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내게 잘해주었던 관장은 가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관장도 끊임없이 제2의 정다솜이를 찾을 것이다. 속단하지 말자. 내일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오늘 설령 최 이사가 얄미울지라도, 박호진에게 가슴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더라도, 나도 얼마든지 그만큼 얄미울 수 있고 충격을 줄 수 있다. 용서치 않으리라 다짐했던 강준호도 사랑이 되었고 나를 벌레 보듯 하던 최 이사도 사랑의 감정이 되었다. 나는 오늘 결코 박호진에게 가지 않은 것이다. 그는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사랑법이 다르니까.
주차장에서 차를 끌고 밖으로 나와 보니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오후 들어 내리던 비가 박호진의 오피스텔에 올 때는 내리지 않더니 이젠 눈으로 변하여 탐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늙으나 젊으나 기다려지는 첫눈인 것이다. 차와 가로등과 상가의 불빛에 천군만마처럼 내리는 눈이 열락의 순간처럼 아득하고 숨 가쁘게 다가왔다. 언제였던가. 그 봄날, 전주역 광장에 피어난 라일락이 이 순간처럼 아득하고 숨 가쁘게 저릿한 향을 내뿜고 있었는데….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랬다. 내가 오늘 아침 유달리 신경을 써서 옷을 입었던 이유는 그를 만나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왜 이제야 생각이 났을까. 미움이 사그라지면 만날 수 있겠다는 사람. 강준호. 최 이사의 대타가 아니다. 박호진의 대타도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생각났던 사람. 꿈속의 꽃길에서 나를 한사코 좇았던 사람. 그를 만나려고 이 옷을 입었잖은가. 그가 보고 싶었다. 이제 그만 그를 만날 명분이 생겼다. 고목나무에서 싹이 틀 때까지라도 기다리겠다던 그 남자. 첫눈이다. 발가벗은 가로수에 하얀 싹이 새록새록 돋아나고 있었다. 내 불륜의 첫사랑. 그의 전화번호를 또박또박 눌렀다.
“다솜 씨?”
그의 목소리가 왜 이리 다정스럽게 들리는가.
“네. 저예요.”
“지금 어디요?”
그는 다급하게 물었다.
“집에 가는 길인데 오늘 뵐 수 있을까요?”
“이럴 때 당근이라고 하나요?”
그의 기쁨이 작은 전화기에서 차고 넘쳤다. 미치겠다. 왜 이렇게 좋아하는가?
“저희 집 근처에 오셔서 전화주시겠어요?”
“지금 당장 떠나죠.”
나도 한 사람쯤 내 집에 올 수 있는 남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생활에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아니, 좀 간섭을 하면 어때. 밖에서 만나지 않고 화장을 지운 맨 얼굴로도 그를 맞이하고 내 곁에서 잠을 재울 사람. 내가 아플 때 약을 사들고 달려와 줄 사람. 오늘 같이 눈이 내리는 날 불쑥 찾아와 군고구마나 군밤을 내밀 줄 아는 사람. 강준호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고 다닌다고 강짜나 부리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그 강짜가 그리운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난다면 강짜를 부리고 싶다. 그런다고 그가 하지 않을 리 없고 내가 하지 않을 리 없다. 그 생활도 지겨워지면 강짜를 부릴 일도 없겠지. 강짜도 사랑이라면 받아줄 용의가 생겼다, 오늘은, 앞으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