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년경, 노스요크셔주 힙스웰 ~ 1384년)는 영국의 기독교 신학자이며 종교개혁가이다.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374년 교황이 납세 문제로 영국왕 에드워드 3세를 불러들였을 때 위클리프도 사절단으로 따라갔다.
그 후 교구장이 되어 로마 교황청의 부패를 탄핵하기 시작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로부터 이단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계속해서 교황의 권력과 교황중심의 서방교회 교리에 공격을 가하였다. 후에 종교 개혁 운동의 여러 원리는 모두 그의 교설 가운데서 싹텄다고 여겨지기도 하며 위클리프의 교설은 롤라드 즉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각지에 퍼졌다. 민중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라틴어로 된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마침내 1382년에 완성하였다. 순교자 윌리암 틴데일이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성경을 최초의 영어 성경으로 번역하는 일을 하도록 큰 영향을 주었다. 화체설을 반대하고(transubstantiation), 수도원제도를 비판하고 교황의 권위를 반대하였다. 얀 후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위클리프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불릴만한데 100여년후 개신교 종교개혁가들의 주장인 성서중시, 전통주의 반대, 성인 성유물 성상 숭배 반대, 죽은 자에 대한 미사 폐지 등 주장이 비슷하기도 하지만, 중세 교회개혁 운동이 신비주의건 수도회주의건 간에 기존질서를 인정하며 도덕성회복에 치중한 반면 위클리프와 그의 뒤를 이은 얀 후스와 마르틴 루터는 중세 신학이 잘못되었고 잘못된 신학이 교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다고 주장함으로 종교개혁 운동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위클리프는 일찍이 옥스퍼드에서 공부할 무렵 '근대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의 대표적 학자 잉글랜드 켄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브래드워딘(Thomas Bradwardine, c. 1290–1349)의 영향을 받아 아우구스티누스주의 학문을 위주로 공부했는데, 당시 유럽에 만연했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학문과는 다른 길이었다. 일찍부터 잉글랜드는 둔스 스코투스, 오컴의 윌리엄같은 학자들은 파리 대학교의 스콜라주의, 즉 아퀴나스의 신학에 강한 비판자였는데 토머스 브래드워딘은 스코투스, 오컴의 윌리엄의 방식인 방법론(via moderna)을 받아들였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 칭의론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으며 중세 신학이 펠라기우스주의에 물들었다며 신학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주의를 주장했다.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 모두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에 영향을 받아 중세신학과 교회를 비판했고 종교개혁의 모토가 스콜라 철학에 오염된 신학을 바로 세운다는 취지였는걸 감안하면 절대로 우연한 일은 아니다.
위클리프는 보헤미아의 개혁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잉글랜드 국왕은 리처드 2세의 왕비가 보헤미아 출신 안나[8]였는데 왕비를 따라 잉글랜드에 건너온 보헤미아인들이 위클리프의 학문과 신학을 열성적으로 받아들였고 이는 얀 후스에게도 이어진다.
1374년 4월 7일 에드워드 3세로부터 러저셸 대신 루터워스의 주임사제로 임명받았고, 이무렵부터 신학자로서 정치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왕의 명령으로 성직들에 대한 교황의 각종 세금과 임명권 같은, 잉글랜드와 로마 사이의 중요한 이견들을 논의하기 위해 대표단을 이끌고 브뤼헤로 갔다. 이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존 위클리프는 애국자이자 왕의 신복임을 과시했다.
존 위클리프는 교회와 국가의 통치에 관한 정치적 논문들인 〈하느님의 주권에 관한 3권의 책 De dominio divino libri tres〉·〈세속적 주권에 관한 논문 Tractatus de civili dominio〉 등을 써서 그 활동을 보충했다.
존 위클리프는 이 논문들에서 사람들은 하느님에게서 직접 '주권'(이 단어는 소유와 권위를 가리키는 데 쓰임)을 받아 행사한다고 하면서, 만일 그들이 치명적인 죄를 지은 상태에 있다면 그들의 주권은 오직 외형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설사 의로운 사람들이 주권을 주장할 만큼 자유롭지 못하다 하더라도 오직 그들만이 주권을 정당하게 소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죄를 지은 상태에 있으므로
그리고 교회재산의 몰수는 국가, 특히 왕이 집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정교하게 고안되고 턱없이 많은 분량으로 기록된 이 정치 교회 이론은 현실 세계에서 무엇이 실현가능한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론가의 작품이라고 비판받을 만하다. 이처럼 순진하고 세상에 대한 지혜가 없는 존 위클리프는 랭커스터의 공작이자 에드워드 3세의 젊은 아들인 유약자(柔弱者) 존(1340~99)의 도구가 되었다. 존도 성직자들이 부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그 동기는 위클리프처럼 정직한 것이 아니었다.
존 위클리프는 런던에서 온건하게 교회재산 몰수를 지지하는 설교를 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으나, 존과 손을 잡았기 때문에 고위성직자들의 미움을 샀고, 1377년 2월 그들에게서 소환명령을 받았다(교황제). 재판이 열렸으나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중단되었고, 위클리프는 시달림을 받거나 유죄판결을 받지 않고 돌아왔다.
그해에 존 위클리프의 인기와 영향력은 절정에 달했다. 의회와 왕으로부터 왕국의 재산이 로마로 반출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합법적인지의 여부에 대해 문의를 받은 위클리프는 합법적이라고
대답했다. 그해 5월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위클리프에 대한 5가지 회칙을 발행하여 그의 정치 교회 이론의 오류를 단죄하고 그를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이 명령에 반응을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옥스퍼드대학교도 그곳의 저명한 학자를 단죄하기를 거부했다.
존 위클리프가 마지막으로 정치 무대에 등장한 것은 1378년 가을이었다. 존의 심복들이 자기들의 말을 잘 듣지 않던 지방귀족을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은신처까지 들어가 죽인 사건이 발생하자, 위클리프는 왕의 편에 서서 의회에 성소의 특권(Right of Sanctuary)을 없애달라고 호소했다. 위클리프는 왕의 신하들이 범죄자들에게 법을 집행하기 위해 성소를 합법적으로 침입할 수 있다는 근거에서 그 행위를 변호했다.
위클리프야말로 종교개혁의 선구자라 할만하네요. 그가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면서 성경을 누구보다도 속속들이 잘 알았고,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은 교수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그를 개혁의 선구자로 만들어준 것 같습니다. 성경을 직접 읽고 공부한 사람으로서 진리를 일반 민중들도 알게 해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얼마나 불탔을까요? 성경을 암송시켜서라도 전국으로 퍼져서 진리를 들려주고픈 그와 롤라드파의 진실한 열정을 느낄 수가 있네요. 영상과 댓글의 소개 글로 위클리프를 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존 위클리프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년경, 노스요크셔주 힙스웰 ~ 1384년)는 영국의 기독교 신학자이며 종교개혁가이다.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374년 교황이 납세 문제로 영국왕 에드워드 3세를 불러들였을 때 위클리프도 사절단으로 따라갔다.
그 후 교구장이 되어 로마 교황청의 부패를 탄핵하기 시작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로부터 이단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계속해서 교황의 권력과 교황중심의 서방교회 교리에 공격을 가하였다. 후에 종교 개혁 운동의 여러 원리는 모두 그의 교설 가운데서 싹텄다고 여겨지기도 하며 위클리프의 교설은 롤라드 즉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각지에 퍼졌다. 민중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라틴어로 된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마침내 1382년에 완성하였다. 순교자 윌리암 틴데일이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성경을 최초의 영어 성경으로 번역하는 일을 하도록 큰 영향을 주었다. 화체설을 반대하고(transubstantiation), 수도원제도를 비판하고 교황의 권위를 반대하였다. 얀 후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A1%B4_%EC%9C%84%E
얀 후스에게 끼친 선구자 개혁자이시군요. 알겠습니다.
(전략) 평가
위클리프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불릴만한데 100여년후 개신교 종교개혁가들의 주장인 성서중시, 전통주의 반대, 성인 성유물 성상 숭배 반대, 죽은 자에 대한 미사 폐지 등 주장이 비슷하기도 하지만, 중세 교회개혁 운동이 신비주의건 수도회주의건 간에 기존질서를 인정하며 도덕성회복에 치중한 반면 위클리프와 그의 뒤를 이은 얀 후스와 마르틴 루터는 중세 신학이 잘못되었고 잘못된 신학이 교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다고 주장함으로 종교개혁 운동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위클리프는 일찍이 옥스퍼드에서 공부할 무렵 '근대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의 대표적 학자 잉글랜드 켄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브래드워딘(Thomas Bradwardine, c. 1290–1349)의 영향을 받아 아우구스티누스주의 학문을 위주로 공부했는데, 당시 유럽에 만연했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학문과는 다른 길이었다. 일찍부터 잉글랜드는 둔스 스코투스, 오컴의 윌리엄같은 학자들은 파리 대학교의 스콜라주의, 즉 아퀴나스의 신학에 강한 비판자였는데 토머스 브래드워딘은 스코투스, 오컴의 윌리엄의 방식인 방법론(via moderna)을 받아들였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 칭의론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으며 중세 신학이 펠라기우스주의에 물들었다며 신학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주의를 주장했다.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 모두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에 영향을 받아 중세신학과 교회를 비판했고 종교개혁의 모토가 스콜라 철학에 오염된 신학을 바로 세운다는 취지였는걸 감안하면 절대로 우연한 일은 아니다.
위클리프는 보헤미아의 개혁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잉글랜드 국왕은 리처드 2세의 왕비가 보헤미아 출신 안나[8]였는데 왕비를 따라 잉글랜드에 건너온 보헤미아인들이 위클리프의 학문과 신학을 열성적으로 받아들였고 이는 얀 후스에게도 이어진다.
https://namu.wiki/w/%EC%A1%B4%20%EC%9C%84%ED%81%B4%EB%A6%AC%ED%94%84
(전략) 정치활동과 이론
1374년 4월 7일 에드워드 3세로부터 러저셸 대신 루터워스의 주임사제로 임명받았고, 이무렵부터 신학자로서 정치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왕의 명령으로 성직들에 대한 교황의 각종 세금과 임명권 같은, 잉글랜드와 로마 사이의 중요한 이견들을 논의하기 위해 대표단을 이끌고 브뤼헤로 갔다. 이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존 위클리프는 애국자이자 왕의 신복임을 과시했다.
존 위클리프는 교회와 국가의 통치에 관한 정치적 논문들인 〈하느님의 주권에 관한 3권의 책 De dominio divino libri tres〉·〈세속적 주권에 관한 논문 Tractatus de civili dominio〉 등을 써서 그 활동을 보충했다.
존 위클리프는 이 논문들에서 사람들은 하느님에게서 직접 '주권'(이 단어는 소유와 권위를 가리키는 데 쓰임)을 받아 행사한다고 하면서, 만일 그들이 치명적인 죄를 지은 상태에 있다면 그들의 주권은 오직 외형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설사 의로운 사람들이 주권을 주장할 만큼 자유롭지 못하다 하더라도 오직 그들만이 주권을 정당하게 소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죄를 지은 상태에 있으므로
소유를 포기하고 복음의 정신에 따라 가난한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교회재산의 몰수는 국가, 특히 왕이 집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정교하게 고안되고 턱없이 많은 분량으로 기록된 이 정치 교회 이론은 현실 세계에서 무엇이 실현가능한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론가의 작품이라고 비판받을 만하다. 이처럼 순진하고 세상에 대한 지혜가 없는 존 위클리프는 랭커스터의 공작이자 에드워드 3세의 젊은 아들인 유약자(柔弱者) 존(1340~99)의 도구가 되었다. 존도 성직자들이 부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그 동기는 위클리프처럼 정직한 것이 아니었다.
존 위클리프는 런던에서 온건하게 교회재산 몰수를 지지하는 설교를 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으나, 존과 손을 잡았기 때문에 고위성직자들의 미움을 샀고, 1377년 2월 그들에게서 소환명령을 받았다(교황제). 재판이 열렸으나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중단되었고, 위클리프는 시달림을 받거나 유죄판결을 받지 않고 돌아왔다.
그해에 존 위클리프의 인기와 영향력은 절정에 달했다. 의회와 왕으로부터 왕국의 재산이 로마로 반출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합법적인지의 여부에 대해 문의를 받은 위클리프는 합법적이라고
대답했다. 그해 5월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위클리프에 대한 5가지 회칙을 발행하여 그의 정치 교회 이론의 오류를 단죄하고 그를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이 명령에 반응을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옥스퍼드대학교도 그곳의 저명한 학자를 단죄하기를 거부했다.
존 위클리프가 마지막으로 정치 무대에 등장한 것은 1378년 가을이었다. 존의 심복들이 자기들의 말을 잘 듣지 않던 지방귀족을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은신처까지 들어가 죽인 사건이 발생하자, 위클리프는 왕의 편에 서서 의회에 성소의 특권(Right of Sanctuary)을 없애달라고 호소했다. 위클리프는 왕의 신하들이 범죄자들에게 법을 집행하기 위해 성소를 합법적으로 침입할 수 있다는 근거에서 그 행위를 변호했다.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7a0892b
@노베 교회의 회개를 역설하신 건데요. 훌륭한 개혁자이십니다.
위클리프야말로 종교개혁의 선구자라 할만하네요. 그가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면서 성경을 누구보다도 속속들이 잘 알았고,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은 교수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그를 개혁의 선구자로 만들어준 것 같습니다.
성경을 직접 읽고 공부한 사람으로서 진리를 일반 민중들도 알게 해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얼마나 불탔을까요? 성경을 암송시켜서라도 전국으로 퍼져서 진리를 들려주고픈 그와 롤라드파의 진실한 열정을 느낄 수가 있네요.
영상과 댓글의 소개 글로 위클리프를 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